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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이야기

패튼 전차군단의 등장과 시실리 섬 상륙작전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3.01.19|조회수2,553 목록 댓글 8

북아프리카와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 이태리 침공으로 넘어가는 것이 맞는 순서인데 노르망디로 빨리 가고 싶은 성급한 마음에 슬쩍 건너 뛰려고 하다가 레이님 지적을 받고 찔끔했었습니다. 차라리 시실리 상륙작전부터 차분하게 글을 이어나가니 저도 "떳떳하고" 마음 편하네요. 어쨌든 글 이어갑니다...........

 

1943년은 2차대전에서 히틀러의 제3제국의 망상이 파국으로 치달리게 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그 첫번째 전환점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의 항복 (1943년 5월) 

 

(영광을 떨치던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1943년 5월 롬멜이 독일로 떠난 후에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비참한 포로 신세가 됩니다.)

 

그 두번째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연이은 승전보로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1943년 7월)

 

 

(독소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 소련군에게 구타 당한 듯

얼굴에 상처 투성이입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서부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들보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와 가혹한 학대로 더욱 비참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횃불 작전과 미국의 유럽 전쟁 참전

 

그동안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미국은 왜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 이전에도 미국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영국군들에게 미제 전차와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보급 물자를 지원했고, 독소전쟁이 시작된 1941년 7월 이후에는 소련군에게도 영국과 함께 전차와 전투기를 공공연히 지원해왔습니다.

 

(소련군에게 미국이 공급한 셔먼 탱크)

 

1941년 12월 추축국 중에 하나인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미국은 공식적으로 추축국들과 교전 상태가 아니었고 추축국중에 어느 누구도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태리는 북아프리카 전역과 동부전선에서 영국군과 소련군들이 타고 나타난 미국제 탱크들(스튜어트, 리, 셔먼 전차)을 보면서 미국에 대하여 당시 연합국들 못지않은 증오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미국으로부터 공급 받은 셔먼 탱크를 사용하는

영국 기갑병들이 탱크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눈에 가시로 보고 있던 히틀러는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하자마자 즉각 선전 포고를 하였고, 미국도 그동안 자국내 반전 여론으로 당당하게 참전하지 못했던 와중에 국민들의 단합된 의견을 배경으로 1월에 추축국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이 마음 놓고 2차대전에 참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었고,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독일이 그때부터 얼마나

강한 상대를 그들의 전쟁으로 끌어들였는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은 진주만 공격시 침몰하고있는 미해군 군함 웨스트 버지니아)

 

하지만 1942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미국 입장에서 당장 자신의 영토인 하와이 진주만으로 쳐들어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힌 일본과의 전쟁이 우선이었고, 당장 직접적인 교전이 일어나지 않았던 독일과 이태리는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2년 6월, 즉 진주만 공격을 당한 후에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미국은 일본과 대규모 항공모함 대전인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게 됩니다. 일단 가장 큰 위협이 되었고, 큰 치욕을 안겨준 일본과의 전쟁에서 우세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자 비로서 영국의 주도하에 영연방 국가들(캐나다,호주,남아공...)이 합세하여 힘겹게 상대하고 있던 북아프리카 전역에 롬멜 군단부터 손을 보기 시작합니다.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에서 미군 폭격기들의 공격을 받는 일본 항모 "소류". 총 4척의 일본 항모가

격침된 반면 미국은 단 1척의 항모만 격침되어 무적 함대라 자칭하던 일본 태평양 함대에게 치명타를

주는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서는 언젠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1942년 11월에 시작된 "횃불 작전"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미국 지상군 부대는 영국 및 다수의 연합국들(캐나다,호주,남아공과 같은 영연방 국과 프랑스와 폴란드와 같은 망영 정부군들)에 합세하여 화려한 등장을 하려고 합니다.

 

★ 잠깐만!

 

여기서"횃불 작전"이란 무엇일까요?

 

 

("횃불 작전" - 1943년 11월 알제리 해안에 상륙 중인 연합군들)

 

미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최초로 유럽 및 북아프리카 전쟁에 지상군을 투입한 작전입니다.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 동쪽에서 이집트, 엘 알라메인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이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격파한 직후에 그 서쪽에 알제리와 모로코 해안에 연합군(미국,영국,캐나다, 프랑스 망명 정부군, 네덜란드 망명 정부군)이 상륙하여 추축군을 동쪽과 서쪽에서 압박하는 모양이 되어 1943년 5월 아프리카 군단은 항복을 하게 됩니다.  

 

 

(1942년 11월 상황, 동쪽에서 몽고메리의 영국군에게 쫓기고, 난데없어 서쪽에서 연합군이 상륙해들어오자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꼼짝없이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심각한 병세 악화와 원수 계급의

장성이 적군에게 포로과 될 수 없다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롬멜은 항복 전에 독일로 소환됩니다. 

1943년 5월 롬멜이 떠나버린 아프리카 군단은 연합군에게 항복합니다. )

 

1943년 5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승리의 드라마는 단연 엘 알라메인 2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 제8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의 원맨 쇼 였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평가였습니다. 비록 "횃불 작전"으로 상륙한 동쪽에 연합군들이 없었다면 추축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만 어쨌든 몽고메리와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주인공이었고 나머지는 조연에 불과 했습니다.

 

(당시 미국 "TIME"지에 커버 모델로 등장한 북아프리카의 영웅 몽고메리 원수,

그는 연합국들이 공포에 떨면서도 존경했던 "사막의 여우" 롬멜을 굴복시켰기에

더 더욱 명성이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승리의 소식이 절실했던

"정치가" 처칠 수상에게 몽고메리는 귀중한 최초의 "제대로 된 승전보"를

안겨준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횃불 작전"은 어찌 되었든 간에 미국의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유럽의 추축군들을 상대로 참전한 최초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횃불 작전" 직후에 미군이 보여준 모양새는 이태리 상륙과 그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베를린 함락까지 이어지는 이후 스토리 라인에서 보여주었던 미군의 위풍당당하고 존재감 넘치는 모습과는 무척 거리가 먼 한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이드 프리든덜 장군, 그는 2차대전에서 미군의 첫번째

전투였던 1943년 2월 캐서린 패스 전투에서 패배의 책임을

지고 즉시 해임됩니다.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제2군

사령관 자리를 조지 패튼 장군으로 교체한 후에

이 무능한 장군을 불과 4개월만에 전역시키고

고향으로 보내버립니다.) 

 

1943년 2월, 이미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의 패배로 후퇴를 거듭하던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튀니지(위에 지도를 보시면 리비아와 알제리 사이에 조그만 해안 국가가 튀니지입니다.)에서 미육군 제2군단과 영국군의 연합부대와 이루어진 캐서린 패스 전투에서 당시 지휘관이었던 미군 로이드 프리든덜 장군의 무능한 지휘와 아직까지 충분히 전투 경험이 없는 미군들의 문제로 큰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전투가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를 한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이것이 2차대전 사상 최초의 미군 지상군과 추축군의 첫 전투였다는 점에서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그결과에 매우 실망스러웠고, 격노하게 됩니다. 일련의 튀니지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에서 롬멜 군단은 2,000명의 사상자와 34대의 전차를 잃은 것에 비하면 연합군 측은 10,000명(그중 미군만 6,5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83대의 전차를 잃는 손실을 입습니다. 당시 롬멜 군단은 이미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그들이 아니었으며 몽고메리의 제8군으로부터 처참한 패배를 당한 후 턱없이 부족한 보급 물자로 사실상 방금 상륙하여 올라온 연합군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세의 병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말도 안되는 패배였던 것입니다.

 

 

(패튼 장군은 군모나 군복을 자기 멋대로 개조하여 과시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런 독특한 취향과 돈키호테 식의 행동은 그와

비교되는 롬멜이나 몽고메리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즉시 프리든덜 장군은 조지 패튼 장군으로 교체됩니다. 전쟁 전에는 그의 괴팍한 행동으로 후배인 아이젠하워나 오마 브레들리 장군에게 승진이 밀릴 정도로 미군 내에서 골치 덩어리였던 패튼이지만 전쟁 중에는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비록 한풀 꺾인 롬멜이지만 여전히 "사막의 여우"라는 명성이 바래지 않았던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적격자였습니다. 일단 미국 제2군 사령관을 맡은 후에 패튼은 그의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롬멜 군단을 격파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5월 아프리카 군단의 항복까지 패튼의 제2군은 거침없는 돌진과 효과적인 공격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곤 하였습니다.

 

 

.(전임자인 프리든덜의 답답하고 무능력함에 불만이었던 알렉산더 장군은

직설적이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임 2군 사령관 패튼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작전 협의 중인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과 패튼 장군)

 

특히 영국군과의 공조에 있어서 그의 직속 상관 위치였던 영국군측 앤더슨 장군을 무시하고 북아프리카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다음의 위치인 영국군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이집트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으로써 몽고메리의 직속 상관이었음)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정 짓곤 하였고, 부하들에 대한 강력한 리더쉽은 5월 롬멜 군단의 항복 후에 이태리 상륙 싯점에 이미 그의 제2군단을 강력한 부대로 탈바꿈해놓았습니다.

 

(조지 패튼 장군(우)과 그의 상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좌), 두사람은 너무나 다른 스타일로

물과 기름처럼 함께 섞여질 수 없는 듯 보였지만 아이젠하워는 패튼을 300% 활용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합니다. 중간에 서있는 인물은 벌지 전투(1944)에서 "명목상" 승리의 주인공으로 기록된

오마 브레들리 장군입니다. 여기서 "명목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후에 유명한 벌지 전투를

소개하면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육사 동기이면서 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그들의 육사 선배이면서도 승진이 늦어져서

아이젠하워에게 명령을 받던 패튼과 이들 두사람의 기묘한 인연은 2차대전 전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시실리 섬 상륙 작전

 

1943년 5월 북아프리카는 더 이상 추축국과의 전쟁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그 북쪽에 남부 유럽을 사이에 둔 지중해는 바야흐로 서부 연합군들의 수영장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더 이상 이태리나 독일 해군들은 위협의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밀리기만 했던 추축군들을 어떻게 격파할 것인가에 대해서 작전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영국은 이태리로 상륙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남부 프랑스 해안으로 상륙하자고 이견을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영국이 주장한 이태리 상륙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미국은 이 작전이 북아프리카 작전의 연장선 개념이라는 조건에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조건인데 바로 북아프리카 연합군 총사령관은 미국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었고 이 작전이 북아프리카 작전의 연장선이라면 결국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 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영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대신 그 머리는 미국의 장군으로 하겠다는 셈인데, 이 결정은 미국의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에 결코 만만치 않았던 처칠 수상까지 참여하게 될 정도로 향후 서부 연합군의 군의 주도권 싸움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巨人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합중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이데올로기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자부심의 영국과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자원을 바탕으로 단시간내에 성장한 신흥 강국 미국과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아무리 유럽 대륙에서 유일하게 점령되지 않은 추축국의 적이었지만 (스페인은 추축국의 전쟁 상대가 아니었음.) 한정된 자원에서 미국에게 전투기,전차는 물론 온갖 물자를 지원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집트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이 아이젠하워 사령관에 이어서 2인자 자리에 앉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지도와 친숙해져야 합니다. 부츠 모양의 반도 이태리가 걷어차는 듯한

위치에 있는 시실리 섬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진하는 연합군과 추축군의 치열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시실리 섬은 이태리 점령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두보인 동시에 지중해를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의 항복을 받아낸 연합군은 본격적인 이태리 침공을 위해서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 휘하에 제15집단군을 만들고  튀니지 전역에서 재편성된 미육군의 제7군 (조지 패튼)과 영국 제8군 (버나드 몽고메리)가 편성됩니다. 드디어 카리스마라면 절대 상대에게 밀리지 않을 패튼과 몽고메리가 한지붕 밑에서 추축군과의 결전을 위해서 북아프리카를 떠나 이태리로 향하게 됩니다. 게다가 지상군의 지원을 위해 어서 테터 영국 공군 원수가 지휘하는 연합군 공군 부대와 커닝엄 제독 휘하의 해군이 동원되었습니다. 연합군측 작전명 "허스키"인 시실리 섬 상륙 작전은 1943년 7월 10일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의 항복을 받아낸지 약 2개월 후)로 결정되었습니다.

 

 

(시실리 상륙 작전 당일 사진, 멀리 커다란 폭발은 미국 수송선 로버트 로완 호가 독일 공군의

융커스 88 폭격기의 폭격으로 폭발하는 모습입니다.)

 

 

(융커스 社 생산 Ju 88 쌍발 폭격기)

 

연합군은 초기 16만명의 병력과 600대의 전차, 1,800문의 대포를 동원하였고, 추축군은 이태리군 23만명,독일군 6만명에 전차 260대, 항공기 1,400대로 방어 작전을 시작합니다. (실제 연합군은 46만명까지 투입 병력 규모가 늘어나고, 1,600대 항공기의 지원을 받게됩니다.)

 

여기서 추축군측이 23만명의 이태리군으로 인해서 연합군과 비교해 우세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 이태리는 이미 무솔리니로부터 민심은 완전히 떠나서 이태리 군 내에서도 이 비호감 독재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병력은 별로 없었습니다. 실제 독일군 6만명이 전투 의지가 있는 병력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결국 방어하는 입장에서 턱없이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한 눈으로 보는 시실리 섬 상륙 작전 지도, 아래 설명 속에 주요 지명들이 다 표시되어 있으므로

지도와 함께 설명을 읽으시면 여러분들이 모두 연합군 사령부 브리핑 룸에 앉아계신 느낌일 것입니다.)

 

상륙작전에 앞서 7월 9일 자정에 섬 남서 해안에 위치한 갤라와 남동 해안에 위치한 씨러큐즈에 미군과 영국군 공수부대는 마침 불어온 시속 40마일의 강풍으로 넓게 분산되었습니다. (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마찬가지지만 상륙작전은 해안 상륙 병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전에 해안 내륙 쪽으로 투하되는 공수부대의 임무입니다.)

 

 

(시실리 섬 낙하 직전에 미육군 공수부대)

 

하지만 이런 차질에도 불구하고 7월 10일 예정대로 상륙작전은 섬 남부 해안에 넓은 지역에서 일제히 시작되었고, 남서쪽 해안에 상륙한 패튼의 미육군 제7군과 남동쪽 해안에 상륙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은  당일 해안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특히 미군은 상륙 후 불과 5일만에 독일과 이태리 방어군들의 공격 대기선까지 진격하여 적을 격파하고 안전한 거점을 확보하는 활약을 합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섬의 북단인 시실리 최대의 도시 팔레르모까지 점령한 후에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북부 해안을 흝으며 진격을 거듭하였고,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 제8군은 북동해안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섬 중앙에 위치한 에트나 화산까지 진격합니다. 추축군으로 투입되었던 독일군들은 연합군의 두 명장인 패튼과 몽고메리가 이끄는 강력한 군단들이 섬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압박해오자 결국 8월 11일까지 이태리 본토로 퇴각을 하게 됩니다.

 

 

(시실리 섬 작전 중 패튼 장군)

38일 간의 시실리 섬 점령 작전은 성공하지만, 독일군은 지형적 장애물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쳐 주력부대 6만 명 이상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데 성공하고 반대편 이탈리아 반도에 해안포 수백 문을 설치하여 향후 이어질 연합군의 이태리 본토 상륙에 대비하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정된 패배를 시간만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이것을 추축국측에서 얻은 실익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잠깐!

 

이제 유럽대륙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이태리 반도에서 서부 연합군의 전투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쪽의 전투의 승리가 다른 한쪽에 전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함께 입체적으로 보는 것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라고 하겠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불타는 독일 전차들)

 

시실리 섬 정렴 임무가 성공적으로 완수된 1943년 8월은 동부전선에서는 7월 독일의 성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쿠르스크 지역에서 인류 최악의 지상전이 막바지로 치달리던 바로 그 시점과 일치합니다. 앞글에서 설명드렸듯이 시실리 섬의 함락과 이태리 본토의 연합군 상륙이 임박하자 가뜩이나 숫적 열세로 패전을 거듭하던 동부전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히틀러는 주력 기갑부대를 후퇴시켜서 이태리 본토로 투입하고 소련군은 훨씬 용이하게 잔여 독일 병력들을 격파하면서 베를린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젊은 병사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조지 패튼 장군(1885~1945) 역전의 노장

으로 2차대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그였지만 그의 죽음은 전쟁 직후

어이없는 교통사고였습니다.)

 

조지 S. 패튼 장군 그는 과연 누구인가?

 

패튼은 전후 미육군 전차들에도 명명될 정도로 미군 기갑부대 지휘관으로써 전설이 된 인물입니다.

 

 

(1차대전 미육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었던 조지 패튼 대위) 

 

이태리 침공으로 넘어가기 전에 과연 패튼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롬멜이나 몽고메리보다 어쩌면 더 독특하고, 기이한 성격으로 2차대전 말기 유럽 전쟁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몽고메리와의 라이벌 戰뿐만 아니라 벌지 전투에서 무능했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넋을 놓고 있던 사이에 불세출의 두 명장들이 일구어낸 결정적인 승리의 이야기는 영화 이상으로 흥미롭고, 그런 두 사람을 기가 막히게 기용하였던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의 안목과 리더쉽은 과연 그가 전쟁 후에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해줍니다.

 

각설하고, 패튼 장군은 1885년 미국 남부에 명문 군인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20년이 지난 싯점에 태어났지만 그의 할아버지 "조지 S. 패튼 씨니어" (패튼 장군과 이름이 똑같습니다. 마치 부시 대통령 부자처럼 말이죠.)이 남군으로 참전하여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사를 하였고, 부모는 이런 조부의 죽음을 영광으로 패튼에게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조부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을 포함한 많은 남군들의 전공을 들으며 군인의 꿈을 키워 갔습니다.

 

그는 그꿈을 실현하고져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졸업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사실은 2차대전이 시작되어 그의 상관이 되었던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그보다 무려 6년이나 후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새까만" 후배였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마 브래들리는 아이젠하워와 동기였습니다.

 

패튼은 소위 임관 후에 미육군 기갑부대 창설의 주인공인 존 퍼싱 장군을 만나게 되는데 1916년 멕시코 내전에 토벌군 사령관인 퍼싱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하게 됩니다. 퍼싱 장군은 미육군 M26 전차에 그의 이름이 명명된 인물로 1차대전에 미군이 참전하게 되자 미군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추천으로 패튼은 미육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됩니다.  패튼과 전차와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존 퍼싱 장군(1860~1948), 조지 패튼 장군뿐만 아니라 아이젠하워, 조지 마샬,

오마 브래들리 등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이 멘토로 삼을 정도로 20세기 미육군

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 그의 든든한 배경이나 마찬가지였던 퍼싱 장군이 퇴역을 하자 그의 오만한 태도와 사치스러운 취미(그는 미국 대공황 시절에 승마와 요트를 즐기면서 상관이나 부하들로부터 비난을 듣곤 했습니다.)로 "왕따"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승진에서도 밀릴 정도로 외톨이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패튼은 자신의 단점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평화시기에 눈치없고, 비호감인 패튼은 이대로 사라져갈 신세로 보이는 듯 했습니다.

 

 

(승마용 바지를 군복 바지 대신 입고, 긴 부츠를 신은 패튼 장군이 지휘봉 대신 승마용 채찍으로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규정외 복장으로 부하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 앞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미육군의 첫번째 전투가 2군단 사령관 프리든덜 장군의 무능력으로 대패하고 엄청난 병력을 잃고나자 같은 편이 영국군조차 미군을 가리켜 "연합군의 이태리군"(매번 영국군의 호구 노릇을 하던 무능한 이태리군을 빗댄 말)이라고 놀리기까지 하였으며, 아이젠하워 장군은 분노를 터뜨리며 당장 프리든덜 장군을 해임한 후에 비록 비호감이고 인간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골치덩어리 인물이지만 전투에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용맹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하고있는 "대선배" 패튼을 중장 진급을 시켜서 후임으로 임명합니다. 6년 후배인 아이젠하워의 기대를 어기지 않고 패튼은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투에서부터 이태리로 이어진 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에 베를린 함락까지 미육군 최고의 명장으로 영국의 몽고메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유럽 전선에서 셔먼 전차 앞을 걸어가는 조지 패튼 장군. 그의 "패튼 전차군단"의 전설은 비록 독일

타이거 전차보다는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나머지 독일 전차들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셔먼 전차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때로는 승마복 바지를 군복 바지 대신 입고, 승마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멋을 내는 독특한 스타일과 일반 장군들이 소지하던 콜트 45구경 권총 대신 상아로 치장을 한 스미스 & 웨슨 리볼버 권총을 마치 카우보이처럼 두 정을 차고 다닌 그의 기행들은 1970년 그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패튼 대전차군단"("Patton")에서 보여집니다.

 

 

(패튼 장군이 애용한 스미스 & 웨슨 27 권총)

 

영화 속에서 부상병이 전쟁의 충격으로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뺨을 때린 에피소드는 실제 있었던 일로써 이로 인해서 패튼은 인사적으로 처벌을 당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진군 중에 길을 막는 민간인 나귀 두마리를 자신의 권총으로 쏴버린다든가, 사병들과 장교들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서슴치 않고, 부하들도 그에게 존경과 경멸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모습등은 사실에 근거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자신을 고대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의 환생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던 패튼은 유능한 지휘관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큰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1970년 개봉된 "패튼 대전차군단"("Patton")은 주연 배우였던 조지 C 스콧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을 수상하게 됐지만 수상 거부를 하는 해프닝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1971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 총 5개 부문을 수상한 명화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실 조지 C 스콧의 명연기도 영화의 성공에

공헌했지만 패튼의 이야기 자체가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또 잠깐만!

 

위에 예고편을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북아프리카 독일군 전차랍시고  "미육군 M-48 패튼 전차"를 촬영에 쓰고있습니다. 요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러더스"를 보면 하다 못해 구소련에서 쓰던 고물 T-34라도 뜯어고쳐서 타이거 전차 흉내라도 내는 성의를 보이는데 당시에는 너무나 뻔뻔하게 고증을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금만 지식이 있는 모델러들이 이영화를 보면서 이런 부분이 영화에 몰입을 방해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후에 탐 크르즈가 출연한 "탑건"에서도 적의 미그 전투기라고 우기면서 정작 "F-5 프리덤 파이터"가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안타까운 부분이지요. 뭐 다 지난 일이지만 말이죠......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의 한장면, 영화 속에서 패튼(조지 스콧 분)이 오마 브래들리 장군(칼 말덴 분)

에게 선배 대접을 받으면서 매우 친밀한 관계로 그려지지만 사실 브래들리는 6년 선배이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인정을 받았던 비호감 선배 패튼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후 그의 이야기는 "이태리 침공과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의 최후"으로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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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9 여러분들 관심과 응원 감사합니다!
  • 작성자jhkimrad (김진형) | 작성시간 13.01.21 역시..재미있는 이야기 넘 잘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22 감사합니다!
  • 작성자SuperSonic(양승욱) | 작성시간 13.01.21 역시나 잘 읽었습니다.
    미해군 처럼 초기엔 지역 이름으로 그러다가..대통령 출신인 아이젠하워 장군은 항모에 이름을 남기고..
    육군 장성인 패튼,브래들리는 전차에 이름을 남겨서인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네요.
    한국 해군함도 얼마 전부터 역사적 영웅에 이름을 넣고 있는것과 유사한것 같습니다.(세종대왕함,광개토대왕함,이순신함,장보고함,손원일함 등....)
    한국 육군은 명장이 없나봐요?........역대 육사 출신 대통령 이름 넣기도 거시기 하고~( *정희,*두환,*태우~?!)
    현재는 그저 케이원 전차, 흑표 전차라는 이름이 좋을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22 글쎄말입니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이름을 딴 전차뿐만 아니라 M1 애이브럼스 전차도 베트남 전의 영웅 크레이톤 애이브럼스 장군의 이름을 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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