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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이야기

몬테 카시노 전투 - 제 1 부 : 안지오 상륙 작전, 무능한 지휘관의 실패?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3.03.16|조회수2,180 목록 댓글 8

 

(안지오 해변에 상륙하는 미 제5군, 이태리 전선에서 연합군의 엄청난 희생을 댓가로

얻어낸 몬테 카시노 전투의 시작은 미 제6군의 안지오 상륙 작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프롤로그

 

1400년 전에 세워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왜 미군 폭격기의 엄청난 폭격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요?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AC 500년경에 세워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150km

높이의 돌산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제1방어선인 쿠스타브 라인에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는 이유로 1944년 2월 미공군 폭격기들은 무려 1,150톤의

폭탄들을 수도원 위로 쏟아 부었습니다. 위에 동영상은 바로 폭격 당일날 수도원이

참담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아무런 나레이션 없이 생으로 보여주는 실제 영상입니다.

영상이 시작되고 50초 지나면 폭격이 시작됩니다.)

 

 

(몬테 카시노 수도원 폭격에 투입되었던 미 공군 "날으는 요새" B-17 폭격기. 117대의 B-17, 47대의 B-25, 40대

의 B-26 폭격기들이 폭격을 하였습니다.)

 

 

(2차대전 격전의 상처를 말끔히 씻고 복원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현재 모습)

 

지난 번 글에서 설명 드렸듯이 1943년 7월~8월 사이에 연합군은 시실리 섬을 점령한 후에 9월에 이태리 본토 상륙을 본격적으로 감행합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의 시작

 

이태리 반도 남서부 해안에 상륙한 미 제5군(미군 장군이 지휘하지만 실제로는 영국군을 포함 다른 연합국 군대도 미군과 함께 편성되어있음.) 은 미육군 마크 크라크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횃불 작전부터 등장했던 조지 패튼 장군이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못지않게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시실리 섬 점령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야전병원 방문 중에 전투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던 병사가 장군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병사의 뺨을 때린 일이 언론에 보도되자 직위 해임되어 버리고 이태리 본토 상륙은 패튼보다 한참 모자라는 역량의 크라크 장군이 맡게 되었는데 따뜻한 태양을 기대했던 이태리의 날씨가 계속 비가 내리면서 악천후인데다가 오랜 전투 경험으로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독일군 방어 부대의 효과적인 공격으로 미 제5군는 애초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습니다.

 

 

(아이젠하워 사령관(좌측)과 마크 크라크 장군(우측), 아이젠하워는 육사 대선배 조지 패튼 장군의

기행과 거만한 태도로 다른 미군 고위층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패튼이

보여준 지휘관으로써의 뛰어난 능력만은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실리 섬 상륙 작전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패튼이 거의 같은 시기에 사병의 뺨을 때리는 상식 밖의 행동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자 전격적으로 패튼을 해임시킬 수 밖에 없었고 그 후임을 나약한 성격의 마크 크라크 장군을 임명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연합군의 이태리 침공은 뜻밖의 교착 상태로 들어서게 됩니다.) 

 

독일군은 8월에 시실리 섬을 점령 당하고 후퇴하면서 자신들이 갖고있던 대포들의 대부분을 무사히 본토로 옮긴 후에 연합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상륙 지점에 배치를 하게 되는데 상륙도 하기 전에 이태리 무솔리니 체포와 연합군에 대한 항복 소식을 해상에서 접한 미 제5군은 이미 긴장을 늦추고, 심지어 상륙 작전 전에 함포 사격조차 안하고 상륙을 시도했다가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태리 방어를 위해 판터 탱크 포탑을 땅에 파묻어 사용한 독일군 포대)

 

여기서 미 5군의 고전은 당시 쿠스타프 라인이라고 불리는 독일군의 제1방어선의 방어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벌어줬고, 연합군은 얼마 안있어서 그 댓가로써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쿠스타프 라인에서 독일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룹니다.

 

 

(지난 번 글을 안읽으시고 이글을 읽는 분들 위해 쿠스타프 라인 지도 다시 보여드립니다.)

 

오늘 "안지오 전투" 와 몬테 카시노 전투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일단 이곳 지도를 보면서 미리 알아두셔야 할 포인트들!

 

1.오른쪽에 화살 세개 몰려있는 곳을 보면 사이에 "CASINO"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도박장 카지노가 아니라 이태리 전선에서 최고의 격전지가 되었던 카시노를 말하는구나! 그럼 몬테 카시노라고 불리는 수도원도 카시노 옆에 있지 않겠어? 맞습니다. 여기서 이태리어 "몬테"란 우리말로 "山"을 의미합니다. -> 일단 쿠스타프 라인이 지나가는 곳이 카시노였구먼!

 

2.맨위에서 "안지오 전투" 얘기를 잠깐 하던데 지도를 보니 서쪽에 "ANZIO"라고 있네? 안지오로 연합군이 상륙하면, 쿠스타프 라인에서 연합군과 전투 중인 독일군이 위 아래로 협공을 당하는 꼴이니 난감해지겠는걸?....(뭐 이렇게 지도를 보시면서 느끼고 넘어가는 것이 있어야 따분해질 수 있는 전쟁 역사도 재밌어집니다.)

 

3.지도 북서쪽에 "로마"가 있네? 로마가 점령되면 이태리 점령되는 것 아닌가? 쿠스타프 라인 무너지면 로마가 점령되는 것은 시간 문제구먼! 그러니 "몬테 카시노 전투"가 중요할 수 밖에!!!

 

한편 남동부 해안에 상륙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은 크라크 장군의 5군이 고전을 하는 것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상륙을 했고 전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의 윈스톤 처칠 수상은 이태리 상륙 후에 불과 한달이면 쿠스타프 라인에서 얼마 멀지 않은 로마를 점령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으며, 이런 예측은 연합군 수뇌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지 패튼 못지않게 거만하고, 고집불통이었던 몽고메리 장군은 하지만 패튼처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괴퍅한 성질은 아니었기에 시실리 점령 이후 이태리 본토 상륙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이태리 동남부 해안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게 됩니다.)

 

 

 

 (알베르트 케슬링 사령관(좌측), 그는 원래 독일 공군 지휘관이었으나 연합군의 이태리 침공이 시작되자

독일 방어군 전체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공군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이태리 전선을 교착 상태로 빠뜨리며 선전을 하였습니다. 2차대전 직후 전범 재판에서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이태리 빨치산들을 학살한 협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52년에 병(후두암)으로 가석방되어 1960년 사망하였습니다.) 

 

살레르노 해안에 상륙한 마크 크라크 장군의 제5군은 초반에 해군 함포 지원도 없이 상륙을 시도하다가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함포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독일군 방어를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독일군은 쿠스타프 라인으로 후퇴를 결정하였고 1월 16일 영국 제8군과 살레르노에서 호되게 당했던 상륙부대 미 제5군은 합류하게 됩니다.

 

이제 바야흐로 연합군과 독일군이 쿠스타프 라인의 급소 "몬테 카시노"에서 대격전을 앞두게 되었는데 독일군은 카시노 산 주변에 진지를 파고, 카시노 마을 입구에 지뢰를 매설하였으며 마을 동쪽을 흐르는 라피도 강변의 야지를 침수시켜서 연합군의 접근을 막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연합군은 초기에 상당히 "입체적인" 그럴 듯한 작전을 계획하여 신속히 로마를 점령하려 하였는데

 

1단계 : 1월 17일에 연합군이 몬테 카시노에서 첫 공격을 시작한다.

 

2단계 : 1월 22일에 쿠스타프 라인 후방에 위치한 안지오 해안에 미국 제6군단이 상륙한다.

 

-> 예상되는 독일군의 반응:

 

시나리오 1)

쿠스타프 라인에 독일군들은 자신들의 후방 해안에 갑자기 상륙한 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일부 병력이 안지오로 투입될 것이고, 그러면 쿠스타프 라인을 공격하는 독일군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연합군의 공격은 성공을 거둘 것이고 쿠스타프 라인을 돌파할 것이다. 

 

시나리오2)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는 독일군들이 안지오 해안 쪽으로 병력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안지오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은 주욱 밀고 올라가서 바로 위에 로마를 점령해버린다.

 

안지오 상륙 작전 (1월 22일~29일) 상황

 

 

(1944년 1월 23일 안지오 상륙 작전 직후에 몇 주 전에 살레르노 해안에 상륙하면서 엉성한 준비로 곤욕을 치뤘던

5군 사령관 마크 크라크 장군이 안지오 해안을 방문하여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크라크 장군은 물론이고 상륙 부대

사령관이었던 존 루카스 장군조차 앞으로 상륙부대에게 얼마나 끔직한 고난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합군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게 됩니다.

 

시나리오1)의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안지오로 방어 병력을 보내고 난 후에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던 독일군 제14군이 연합군 제5군(마크 크라크 장군이 이끌고 상륙한 부대)과 영국 제8군 (몽고메리 장군이 남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끌고 온 부대)의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냈던 것입니다.

 

 

(안지오 상륙 작전 중인 영국군 보병들) 

 

게다가 안지오 해안에 상륙한 존 루카스 장군 휘하 제6군(주로 미군 레인저 3개 대대와 영국 코만도 부대들이 앞장 선 상당히 강력한 전력의 부대였습니다.)은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한 후에 신속히 이동하기 보다는 애초 시나리오 대로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던 독일군 병력들이 쇄도하여 공격할 것을 대비해서 해안에 교두보를 단단히 확보한다는 의도에서 같은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는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이유는 불과 몇 주 전에 살레르노 해안에서 엉성하게 상륙하였던 마크 크라크 장군의 5군이 상륙 직후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탓에 크라크 장군은 안지오 상륙을 지휘하는 루카스 장군에게 상륙 직후 해안 교두보를 확고하게 마련하고 보급을 충분히 완료한 후에 움직이라는 충고를 하였는데 루카스 장군은 이 충고를 지나치게 "충실하게" 따른 탓에 적의 후방에 상륙하여 허를 찌르는 입장이었으면서도 도리어 쿠스타프 라인에서 보낸 독일군이 공격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충분히 보충된 병력으로 연합군 상륙 부대를 포위할 수 있게 됩니다.

 

 

(안지오 상륙 작전으로 인해서 "무능한 지휘관"으로써 오명을 남기게 된 존 루카스 장군,

그는 2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4년밖에 안된 1949년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게 됩니다. 본인도

안지오 전투의 결과로 인해서 무척 괴로워 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상륙 후 얼마 안되어 1월 29일 안지오 해안에 북쪽에 위치한 시스테르나 마을에서 미육군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레인저" 2개 대대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거의 전멸을 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벌이졌습니다. 애초에 시스테르나 마을은 미군 3 보병 사단이 점령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그 후에 레인저 3개 대대가 투입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4호 전차를 앞세워 레인저 부대들보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격을 했고 761명 중에 751명이 전사하여 2개 대대는 사실상 전멸을 한 셈입니다.

 

 

(이태리에 배치된 독일 4호 전차, 탱크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미군 레인저 대대는

4호 전차의 집중 포화 속에서 전멸했습니다.)

 

뒤늦게 미군 전차 부대가 지원을 나섰지만 마을 어귀에 파묻어 놓은 독일군의 지뢰들로 인해서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6군에 편성되었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은 개전 첫날 100대의 전차를 잃었습니다. 대부분 셔먼 탱크였는데 지뢰로 인한 파괴 뿐만 아니라 백전노장이었던 독일 기갑병들이 몰고 나온 4호 전차와 소수의 팬저 전차들의 신속한 공격에 경험이 부족한 미국 기갑병들은 셔먼 탱크와 함께 숯덩이가 되곤 하였습니다.

 

 

(안지오 전투에 투입된 미육군 특수부대 레인저의 모습, 그들은 상륙 후 얼마 안되어

전멸되는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인저는 안지오 전투에서 비록 참담한 패배를 겪었지만 미육군 툭수부대에 하나로써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 파견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진은 현대전에서 미육군 75 레인저 부대의

모습)

 

결국 안지오 해안에 상륙한 6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애초에 기대했던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는 독일군의 병력 약화에 별로 기여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44km 떨어진 로마로 신속하게 진군하지도 못하고 제 자리에서 수주일에 걸쳐서 교착 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안지오 상륙에 투입된 연합군 6군과 독일 14군은 1월 22일 상륙일부터 5월 23일 연합군 반격에 이르는 4개월간에 걸쳐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5월 22일까지 6군의 사상자는 3만명으로 4400명 전사, 18000명 부상으로 집계되었고 미군에 한해서는 2800명 사망, 11000명 부상을 포함, 17000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독일군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 2400명을 포함 68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독일 14군은 5500명 사망, 17500명 부상으로 약 3만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연합군은 독일군 포로 4500명을 잡았다고 기록했습니다. 1월 상륙 초기에 독일군이 보여줬던 강력한 전투력은 시간이 가면서 사상자들이 발생하면서 교체된 신병들로 인해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어쨌든 안지오 상륙 작전은 계획 단계에서 이후 한국 전쟁 중에 인천 상륙 작전 만큼이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략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막상 상륙 당일부터 연합군 측 지휘관이었던 존 루카스 장군의 지나치게 신중했던 움직임으로 인해서 백전노장의 독일군들이 초반에 상륙 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안지오 상륙 작전의 실패는 결국 쿠스타프 라인을 돌파하기 위해서 미 5군과 영국 8군이 자력으로 뚫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런 작전의 차질은 결국 이태리 전선에서 교착 상태를 장기화 시키게 됩니다.

 

다음 글은 드디어 몬테 카시노 전투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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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17 네.....식당 주인이 자기 시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네요........ 흑흑
  • 작성자JLPicard(정갑수) | 작성시간 13.03.21 요새 바빠서 댓글도 제대로 못 달았네요~
    주말에 동영상 차분히 봐야겠습니다.
    바쁜신 중에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21 감사합니다. 지금 다음 글 틈틈이 쓰는 중입니다.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3.04.17 761명 중에 751명이라니... 후~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4.17 거의 다 죽었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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