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오마하 해변 상륙 첫번째 씬입니다. 수륙양용정
문이 열리자 마자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 세례 속에서 쓰러지는 병사들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도를 보면, 붉은 원으로 표시한 해안이 바로 상륙 지점입니다.)
독일군의 방어 계획
1943년 말 프랑스 북서부 해안의 방어를 책임지게 된 에르빈 롬멜 장군은 앞으로 언젠가는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므로 효과적으로 상륙을 저지할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 해결책은 바로 대규모 지뢰 매성과 해안 장애물, 벙커, 포 진지 및 예상되는 연합군 공수부대의 강하와 글라이더 착륙을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불과 보름 전인 1944년 5월 20일까지 프랑스 해안에 파묻은 지뢰의 수는 무려 420만개였으며 이중 270만개는 롬멜의 지휘 하에 매설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공수부대를 대비하여 후방에도 매설했습니다.
해안 장애물의 설치는 연합군의 상륙정을 파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썰물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안 장애물은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만들어졌는데 모두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설치 작업을 진행한 독일 공병 부대가 연합군 상륙 당일까지 2개 구역만 설치를 끝낸 덕분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미쳐 공사를 끝마치지 못한 구역은 상륙부대보다 먼저 투입된 영국 코만도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독일군 기록에 따르면 5월 13일까지 모두 52만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31,000개의 수중 기뢰가 설치되었습니다.
또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륙할만 지점에 30미터 간격으로 높이 3미터의 말뚝을 세우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기선을 연결하였는데 실제로 D-Day에 상당수의 연합군 공수부대는 글라이더들을 사용하여 착륙을 감행합니다. 심지어 말뚝 위에 폭탄까지 설치해서 착륙 중에 말뚝을 건드리는 글라이더를 폭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작 상륙 당일날까지 이런 말뚝들이 충분히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부족하나마 세워놓은 장애물들이 제법 그 효과를 발휘하여 글라이더로 투입된 공수부대 병력은 상당수가 착륙 과정에서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특히 공수부대 지휘관 위치의 장교들 중에서 낙하산 대신 글라이더를 타고 부하들과 함께 적진에 투입된 결과 더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D-Day 새벽에 프랑스로 날아간 수백대의 연합군 글라이더들 중에 상당수는 독일군 대공포에 파괴되어 추락
하거나 독일군이 설치한 장애물들에 의해서 착륙 중에 파괴되어 위에 사진처럼 탑승했던 수많은 병사들과 심지어
다수의 지휘관들조차 글라이더 속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런 노력도 효과를 보았지만 롬멜이 야심차게 준비한 두번째 전략은 바로 그의 전공인 기갑부대의 운용이었습니다. 즉 해안에 연합군이 상륙하면 해안 안 쪽에서 대기하던 탱크들이 밀어붙혀서 상륙한 적들을 다시 바닷물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전략이 제대로 강구되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맺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이런 롬멜의 아이디어는 그의 상관인 아돌프 히틀러, 서부지역 총 사령관 게트르 폰 룬트슈테트 장군뿐만 아니라 서부 기갑전단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장군과 그 견해가 모두 제각각 틀렸습니다. 특히 기갑부대를 맡은 장본인인 슈베펜부르크 장군과 롬멜의 견해 차이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그 이유는 슈베펜부르크와 같은 정통파 참모 장교 그룹들은 롬멜을 경원시하고 있었고 그의 창의적인 기갑부대 배치 전략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게다가 롬멜의 휘하 부대였던 7군의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장군 역시 롬멜의 의견에 반대하였습니다. 이런 롬멜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독일군 내에 귀족 출신 장성들이 평민 출신 롬멜에 대한 싸늘한 시각이 그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록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축출되는 치욕을 겪었지만 여전히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의 롬멜의 명성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총애받는 장군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개월 후에 롬멜에 대한 히틀러의 애정은 배신감으로 바뀌어 자살을 명령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립니다.)
(노르망디 해안의 방어를 위해 4호 전차 포탑을 그대로 지면에 고정시킨 이런 포 진지는
노르망디 전투 이전에 이태리 전선에서도 활용되어 연합군에게 타격을 주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된 1944년 6월이면 이미 독일 전차 개발의 결정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타이거 2 (일명 킹 타이거) 탱크가 배치된 후입니다. 이 탱크의 가공할 화력과 장갑
능력은 타이거 1 탱크를 능가하고 연합군의 어느 탱크와도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던 괴물 탱크였습니다. 문제는 전쟁 말기 독일의 능력으로는 이렇게 뛰어난
성능의 탱크를 충분히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실제 연합군
탱크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에 군사 전문가들은 롬멜의
아이디어 대로 부족하나마 타이거 2를 포함해서 타이거 1, 팬터 같은 탱크들로 구성된
독일 기갑 전력이 노르망디 해안에 집중되었다면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가장 무서운 위협의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롬멜은 안지오 상륙 작전의 예를 들어서 기갑 부대를 가능한 한 해안가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슈베펜부르크는 살레르노 전투의 예를 들어서 연합군의 공수부대, 공군력, 해군의 함포의 위력을 감안할 때 기갑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첨예한 대립에 대해서 롬멜의 상관인 히틀러와 룬투슈테트 사령관 모두 애매한 태도로 중재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현대의 군사 전문가들도 당시 두 사람의 주장 중에 어떤 쪽이 옳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누군가는 방향을 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룬트슈테트 사령관이 기갑병력 운용에 문외한이었던 탓에 제 역활을 할 수 없었고,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습니다.
(서부 지역 총사령관 룬투슈데트 사령관(좌)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까지 서부 해안
방어 준비를 위해 창의적인 기갑부대 운용 전략을 주장한 롬멜(우)이 기갑부대 지휘관들
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애매한 태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노르망디 전투가
북아프리카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던 천재 지휘관 롬멜의 명성을 독일 패망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널리 떨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와는 정반대의 비극으로 치달리게 됩니다. 몇개월 후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된 롬멜은 가족의 생명을 보존해준다는 조건 하에 히틀러의 자살 명령을 받아
들여서 음독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
또한 연합군의 꾸준한 기만 작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일군 수뇌부가 노르망디와 칼레 어느 쪽이 최종 상륙지인지를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병력 배치를 하게 되는 것도 계속된 상급 지휘관 간에 반목으로 인한 혼란과 더불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 요인이 되버립니다.
(프랑스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독일군이 설치했던 무려 구경 406mm 대형포, 하지만 D-Day에 연합군에게
가장 무서운 독일군의 화기는 해안에 설치된 진지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던 기관총이었지 이런 무식한
대포가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상륙 작전 개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예정 해변은 무려 80km 길이로 펼쳐진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을 연합군은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암호명을 붙혔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오마하" 해변도 그 중에 하나였고, 그외 "유타", 골드, 주노, 소드 이렇게 불렀습니다. 각 지역에 투입된 부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타 해안 : 미 7 군단에 4사단과 90사단, 그리고 영국 2군
-오마하 해안 : 미 5 군단에 1사단과 29사단
-골드 해안 : 영 30군 3사단과 캐나다 기갑여단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에 3사단과 2 기갑여단, 그리고 영국군 코만도 부대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2개 여단, 미 1군단에 3사단과 27 기갑여단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 싯점에 투입된 연합군 부대 배치를 보여주는 지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오마하 해변에서 미군들은 방어하는 독일군의 엄청난 공세에 고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오마하 해변 쪽에 방어를 담당한 독일군은 352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백전노장들이 다수 포함된 독일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런 탓에 그 지역에 상륙한 미육군은 다른 상륙 해안에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반면에 영국과 캐나다 부대가 상륙할 동쪽 주노와 소드 해안쪽은 독일 716 보병사단이 맡았는데 신체적으로 약한 병사들과 다른 나라에서 강제로 끌어온 병사, 심지어 소련군 포로들까지 포함한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를 바로 히틀러가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롬멜이 가장 기대했던 예비 기갑 부대를 상륙 작전 임박했을 때 히틀러 자신의 명령으로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했는데 상륙작전 당일 이미 상륙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을 못받았다는 이유로 예비 기갑 부대는 신속히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롬멜이 기대했던 방향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고 애초 기갑부대 지휘관과의 불협화음으로 충분한 기갑 병력이 사전에 배치되지 못한 상황에서 예비 병력 조차 투입이 늦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연합군 수송선들과 군함들을 독일 해군이 자랑하는 "바다의 늑대" U 보트들이 미리 발견하여 격침시켰다고 한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초기에 실패했을 것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여기서 1944년 6월에는 전쟁 초기에 U 보트 잠수함 부대들이 보여 준 공포의 위협은 이미 한풀 꺾었습니다. 연합군측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은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여 수중에 U 보트들을 사전에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일단 위치가 발각된 U 보트들은 연합군 군함들의 집요한 기뢰 공격으로 바다 속에서 파괴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사이에 도버 해협은 대서양과 같은 엄청난 넓이에 바다가 아니었으므로 그곳에 출몰할 U 보트 정도는 사전에 영국 해군이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D-Day 전날에 영국 해군이 확인한 결과는 상륙작전 병력을 수송한 선단의 경로를 위협한 U 보트는 한척도 없다는 결과였고 실제 노르망디 앞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U 보트의 공격은 없었습니다.
6월 6일 이른 아침 노르망디 앞 바다에 도착한 연합군 해군은 악천후로 차질이 발생한 공군 지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해안 진지들에 엄청난 함포 사격을 개시합니다. 특히 영국의 구형 전함과 포함, 순양함들은 미 해군의 군함들과 함께 포격을 가하였는데 독일의 소형 어뢰정들과 전투기들이 출동하여 반격을 한 결과 영국 구형 전함 한척이 작전 개시 3일째 침몰하고 일부 군함들은 침몰 또는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이미 이태리 반도 상륙 작전을 통해서 사전에 해군의 함포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던 결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의 지원은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악천후 날씨에 부족한 공군의 지원은 상륙 싯점에 대다수의 해안에 근접한 기관총 초소들을 무력화시키는데는 실패하여 오마하 해안의 경우 2,000명이 넘튼 미군 병사들이 독일군의 무차별 사격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륙작전의 목표는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우선 유럽 내륙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륙한 부대들은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 병력들을 무력화 시킨 후에
둘째, 본격적인 진격을 할 수 있는 도로와 교량들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D-Day 새벽에 먼저 해안 내륙 쪽에 투하된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의 목표는 해안을 상륙한 부대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해안 내륙 마을들과 교량, 도로를 사전에 확보하려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앞글에서 말했듯이 의외로 너무 넓은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낙하된 공수부대들은 새벽 야간 중에 독일군들과의 교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서로 만나서 서로 다른 부대들끼리라도 우선 임시 부대를 편성하고 그 모인 병력 중에서 가장 선임자가 장교가 되었든, 부사관이 되었든 간에 리더로 앞세워 또 다른 병력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분명히 지나치게 산개되어 애초 계획했던 지점에서 훨씬 넓게 퍼져 낙하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군들을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독일군 입장에서는 사방 천지에 떨어진 적군들을 수색하느라 일부 상륙 해안에는 제대로 방어병력을 충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부수적이긴 하지만 매우 중요한 연합군의 작전 승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D-Day 새벽에 공수부대원들을 수송한 C-47 수송기. 이날 전체 병력의 45%가 원래 낙하 예정 지점에서 터무니 없이 멀리
낙하된 이유는 이 수송기들에 장치된 야간 유도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대공 포화의 위협으로 수송기 조종사들이
서둘러 공수부대원들을 낙하시킨 이유도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까지 야간 공수 작전은 다시 하지 않은 것도 이런 무리한
작전의 결과 엄청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을 치른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작전 차질에도 불구하고 밤새 서둘러 구성된 임시 부대는 D-Day 후에 최초로 Sainte-Mere-Eglise라는 이름의 도시를 독일군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야간 공수 작전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반면 영국군과 캐나다 군 공수부대도 거의 같은 시간에 노르망디 해안 동쪽 지역 내륙에 낙하하게 되는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곳을 방어하는 독일군 716 보병사단이 원래 약체의 부대인 탓에 비교적 적은 희생을 치루고 해안에서 불과 7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요한 교량들을 점령하게 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에서 상륙정이 해변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는데 바로 정면에 언덕에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상륙정 속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앞줄에 병사들이 상륙정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벌집이 되어 바다 속으로 쳐박히는 끔찍한 장면이 나옵니다. 과연 진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대답은 "Yes" 였습니다. 실제 오마하 해변에서 상륙하려던 50,000명의 병사들 중에서 3,000명의 병사들이 전사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실제로 애초 예정 지점보다 훨씬 동쪽으로 밀려가서 상륙한 상륙정들 앞에는 강력한 기관총 초소 바로 앞이었던 것입니다. 최초에 도착한 상륙정들안에 장교들과 부사관들,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전멸했습니다. 그나마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모래톱으로 기어 올라온 병사들 역시 제대로 엄폐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만약에 독일군 자신들이 세운 장애물들이 아니었으면 연합군 병사들을 엄폐해줄 물건이 하나도 없는 모래 사장 위에서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해군의 함포가 분명히 노르망디 해안 전체에 걸쳐서 독일군의 방어 능력을 저하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오마하의 경우 특히 잘 건설되있는 방어 진지들은 함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쉽게 파괴되지 않았고 다른 해안에 비해서 2배나 많이 배치된 독일군 방어 병력들이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상륙 지역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옥과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마하 해변은 영화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위대한 보도사진기자인 로버트 카파(1913년~1954년)가 촬영한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의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런 희생을 치른 후에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뒤이어 상륙한 병력에 의해서 1,2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기관총 진지들을 파괴한 후에 상륙에 성공합니다.
반면에 미군의 또 다른 상륙 지점이었던 유타 해안은 오마하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상륙하려던 지점보다 훨신 동쪽에 상륙하였는데 그런 실수로 독일군 기관총 진지 코 앞에서 총알 세례를 받으며 상륙해야 했던 오마하와는 반대로 실수로 상륙하게 된 지점이 의외로 독일군의 방어가 매우 허술한 지점이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인 197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수월하게 상륙에 성공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연이었지만 내륙에 낙하했던 101 공수 사단의 2개 연대와 쉽게 연결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됩니다. 101 공수 사단의 본진과 만나게 되면서 쾌속 전진을 하게 된 상륙군은 다른 지역들에 부대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깊숙히 내륙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소드 해안의 경우 상륙한 영국군은 유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비교적 약한 공격을 받으면서 상륙 첫날 무려 8km 내륙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몽고메리 원수가 강력하게 명령했던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캉(Caen)을 점령하는 것을 실패합니다. 이지역에 독일군은 D-Day로부터 무려 한달하고 2주를 넘긴 7월 20일에야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됩니다. 특히 이곳에서의 전투가 언론에 주목을 끈 것은 영국군이 상륙했을 때 빌 밀린이란 병사가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인 백 파이프를 연주하면서 상륙을 선도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소드 해안에 상륙하는 영국군들의 모습에서 백 파이퍼 연주자 빌 밀린의 모습이 촬영되었습니다.
맨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뒷모습이 바로 빌 밀린입니다.)
주노 해안의 상륙을 맡은 캐나다군은 오마하에 미군 다음으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2개의 155mm 대포 진지들과 무려 9곳의 75mm 대포 진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마하 해안보다 두배나 높은 방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상륙 선두 부대들은 50%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하지만 캐나다 군은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국 독일군 방어 병력들에게 타격을 주면서 진지들을 하나, 둘씩 점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보병들과 함께 상륙에 성공한 탱크들이었습니다.
애초 중요 목표 중에 하나였던 Douvre 레이다 기지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당일 함락시키지 못하고 3일째 되어서야 영국 코만도 특수부대들이 투입되어 함락하게 됩니다. D-Day 당일 약 3,000명의 캐나다 군이 상륙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한 직후 영국 공수부대와
코만도 특수 부대)
캐나다 군은 방어를 위해서 추가로 투입된 히틀러 무장 친위대(SS)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합니다.
끝으로 골드 해안은 영국군이 상륙을 시도하였는데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공격으로 고전을 하면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애초에 보병 상륙과 함께 지원을 위해 상륙 예정이었던 셔먼 전차들의 상륙이 늦어져서 뜻밖에 큰 피해를 입게 되지만 전차 상륙 후에 마을을 통째로 방어 진지로 만들어 놓고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강하게 밀어붙혀서 함락에 성공하고 진격을 이어갑니다.
(일단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으로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옮겨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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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4.22 정말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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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레이(정호경) 작성시간 13.04.22 로버트카파의 사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네요.....저 생지옥에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할 수 있는 용기......정말 위대한 사진가답습니다. 항상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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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4.2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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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hkimrad (김진형) 작성시간 13.04.27 아.. 정말 잘보고 갑니다. 풍부한 사진과 함께 전문가적인 분석.. 정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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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4.28 감사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