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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이야기

SoulFlower님 작품 고증! - M3 그랜트 탱크, 아프리카 사막에 영웅!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3.12.29|조회수1,226 목록 댓글 13

 

 

 

(아카데미제 1/35 M3 그랜트 탱크, 정말 깔끔한 작품입니다. 제가 가조립해놓은 그랜트도 이런 식으로

도색해보고 싶네요.... SoulFlower님의 엄청난 공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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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제 그랜트 박스 아트)

 

유빈아빠님의 마틸다 II 탱크의 고증 리포트를 올린 김에 북아프리카 전역 이야기를 한가지 더 할 생각으로 오늘은 SoulFlower님의 작품이었던 M3 그랜트 탱크의 고증 리포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 롬멜 장군이 아프리카 군단의 지휘관으로 부임한 1941년 2월부터 드디어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게 되는 롬멜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마틸다 II는 롬멜이 부임하기 전인 1940년 허접한 이태리군이 겁도 없이 영국 주둔 이집트를 치고 들어왔을 때 콤파스 작전을 시작으로 일련의 성공적인 반격 작전에 주력 탱크로 활약하며 영국군이 주둔하였던 이집트를 침공했던 이태리군들을 이집트 밖으로 쫓아냄은 물론이고 이태리 주둔 시리아 영토 중심부에까지 밀고 들어와서 혼줄을 내주었던 시절에 선봉 탱크였습니다.

 

 

 

(1940년 콤파스 작전 기간 중에 시리아 국경을 넘어서 이태리군을 밀어붙히는 마틸다 II 탱크들)


하지만 이미 얘기했듯이 마틸다 II의 근본적인 약점인 터무니없는 느림보 속력과 화력의 한계로 인해서 1941년부터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천재적인 지휘관인 롬멜 장군이 지휘봉을 잡고나서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용도 변경을 하면서 두꺼운 장갑으로 왠만한 독일과 이태리 탱크 주포 포격에는 까딱없던 마틸다 II가 롬멜의 대전차포 공격에 번번이 파괴되어 버리게 됩니다.

 

 

 

 

(88mm Flak 36 대공포를 영국군 탱크들을 향해 발사하자 두꺼운 장갑으로

천하무적이었던 마틸다 II는 단 한방에 완파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롬멜과 운명의 라이벌인 몽고메리 장군이 이집트로 부임하자 상황은 또 다시 역전됩니다. 1941년말에 롬멜과 몽고메리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라고 불리는 결전에서 양쪽 모두 터무니없이 엄청난 희생자들이 발생하면서 혈전을 벌였고 그 결과는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참담한 댓가를 치루고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사실 영국과 영국 연방 국가들이 함께 참전하였지만 영국군으로 통칭하겠습니다.)

 

 

 

 

("사막의 여우" 롬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 아프리카 군단을 항복시킨

영국군의 고집불통 지휘관 몽고메리 장군, 이들의 악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몽고메리가 기자들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알려진 위의 사진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 M3 그랜트 탱크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의 이야기는 제가 이미 자세하게 글을 올렸으므로 그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바로 이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던 미국제 영국군 탱크 M3 그랜트 탱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M2 미디엄 탱크 - 시대에 뒤떨어진 시행착오

 

 

 

(M2 미디엄 탱크 - 미국의 초기 탱크 개발의 실패 역사)

 

M3 그랜트 탱크가 설계되기 전에 미국은 M2 미디엄 탱크의 시작품(T5)의 제작을 시작하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2차대전을 발발한 해) 6월까지 제작된 M2 미디엄 탱크의 시작품은 사이즈가 "미디엄"인데 M2 라이트 탱크의 디자인을 기초로 설계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미국이 초기에 얼마나 탱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M2 라이트 탱크 - 미국에서 개발한 "꼬마 탱크" M2는 미국이 아직 참전하기 전에

영국이 주문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였고, 미국은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사용하였습니다.)

 

1940년 8월에 미국 정부는 새로 건설된 디트로이트에 크라이슬러 군수 탱크 공장에 1,000대의 M2 미디엄 탱크 발주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나치 독일 기갑 부대가 운용하는 신속한 기동성과 효율성을 갖춘 탱크들을 보게 되면서 미 육군은 M2 미디엄 탱크의 설계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1,000대 발주 물량은 대부분 그 당시 양산이 임박했던 M3 리 탱크로 변경되게 되고 이미 생산된 94대의 M2A1 탱크 (M2의 개선 버전 - 장갑 강화)는 미국 본토에서 훈련용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M2 미디엄 탱크의 설계 중에서 경사진 차체 전면과 같은 아이디어는 이어서 개발되는 M3 리/그랜트 탱크와 M4 셔먼의 차체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2년 10월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활약한

영국 8군 소속 M4 셔먼 탱크) 

 

어쨌든 적 탱크들에 비해서 뒤떨어진 디자인과 성능으로 인해서 M2 미디엄 탱크는 미국 본토를 떠나서 전투에 참가해볼 기회를 잃었고 오직 훈련용 탱크로 사용됩니다. 훗날 1941년~1943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M3 리/그랜트 탱크나 M3 스튜어트 라이트 탱크를 조종했던 기갑병들의 상당수가 바로 본토에서 훈련용으로 전용된 M2 미디엄 탱크들을 가지고 훈련하였습니다.

 

M3 리 탱크의 탄생 - M4 셔먼의 개발 차질로 서둘러 개발된 측면 주포 탱크

 

미국이 아직 2차대전에 뛰어들기 전인 1941년 상반기에 무기지원 미봉책의 주인공이었던 M3 리/그랜트 탱크는 물론 M4 셔먼 탱크와 같은 영광과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1938년 M2 미디엄 탱크가 생산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적 탱크들에 비해서 경쟁력이 없는 실패작으로 판명났다는 것입니다. 미육군은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여러 나라를 전격전 전술을 구사하며 파죽지세로 점령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예측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던 탱크는 고작 400대 뿐이었고 그중에 대부분은 나치 독일의 기갑 부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M2 라이트 탱크들이었습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전격전"에서 그 한축을 담당하는 강력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탱크들을 보면서 미육군은 탱크 설계와 군사적인 개념에 대한 기준을 송두리째 바꿔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1940년말에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 공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전쟁의 촛점은 독소전쟁이 벌어지는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역 두 곳에 집중되게 됩니다. 당장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영연방 군들은 나치 독일과 이태리 추축군들을 상대로 일진 일퇴의 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영국의 가장 큰 애로사항 중에 하나는 영국이 자력으로 북아프리카 전투에 필요한 탱크들을 충분히 신속하게 생산하고 공급해줄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전쟁에 개입은 안하려고 애써 발을 빼고 있던 미국 정부와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였지만 최소한 간접적으로 영국과 소련을 위해 무기를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무기지원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M3 리 탱크를 무기 지원의 주요 대상으로 선정합니다.

 

 

 

 

(그랜트 탱크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먼저 언급되어야 할 리 탱크)

 

M3 탱크들의 디자인은 1940년 7월에 시작합니다. 이당시 M4 셔먼 탱크는 상당 부분 개발이 진행되어 있어서 첫 생산 일정까지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 기술적인 이슈들 (예를 들어서 360도 회전의 포탑 설계의 문제점 노출)이 M4 셔먼 탱크의 양산 일정에 차질을 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M2 미디엄 탱크 자체는 이미 1939년에 실패작으로 접어버린 모델이었지만 M4의 차질에 다급해진 미육군은 M2 미디엄 탱크의 시작품 T5의 설계를 수정하여 M4 탱크의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만이라도 공백을 메워줄 탱크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이 당시 보유하던 M2 라이트 탱크와 같은 조그만 체구에 빈약한 장갑과 화력으로는 그 공백을 메울 수 없었고 당장 나치의 우수한 장갑과 화력을 갖춘 탱크들과 상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탱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1942년 6월 미국 본토 포트 녹스에서 훈련중인 M3 리 탱크)

 

영국은 당장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보다 많은 수의 탱크들이 필요하다고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틸다나 크루세이더와 같이 영국제 탱크들을 미국에서 생산하여 공급 지원해주는 방안은 1차 고려되었으나 기각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M3 리 탱크의 개발이 서둘러 진행되는데 개발 성격상 실패작 M2 설계를 과감하게 개선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다 두꺼워진 장갑, 75mm 주포를 차체 우측에 장착하는 독특한 디자인을 위해서 훨씬 높고 넓어진 차체의 디자인 등등 독창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시간을 가지고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였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다보니 탱크 외형은 왠지 만화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나치 독일의 4호전차 - 포장도로 조건에서 M3 탱크는 4호전차와 동일한 최대 시속 42km로 주행 가능합니다.

비포장도로의 조건의 경우 4호전차 (시속 16km)보다 빠른 시속 26km까지 주행할 수 있습니다.)

 

75mm 측면 장착 주포 이외에 포탑에 장착된 37mm 포는 의외로 실전에서 효과적인 공격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결과적으로 탱크 한대에 다음과 같은 화력을 보유한 막강한 탱크가 된 셈입니다.

 

1.75mm 주포 : 46발 포격 가능 / 최대 사정거리 2700미터

2.37mm 副포 : 178발 포격 가능 / 최대 사정거리 1400미터

3,포탑 위에 큐폴라에 장착된 기관총(브로우닝 M1919 공냉식) : 9200발

 

이렇게 당시로써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다하게 화력을 갖춘 탱크였지만 한편으로는 2개의 대포와 1개의 기관총을 차곡 차곡 쌓아놓은 모양이다보니 당연히 차체의 높이가 엄청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리 탱크 기준해서 차체 높이는 무려 3.12미터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비슷한 전력의 상대라고 할 수 있는 나치 독일의 4호전차의 경우 차체 높이가 2.68미터로써 무려 40센치 이상 차체가 높았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 기갑병들은 일단 사격 범위에 들어오면 다른 영국 탱크들에 비해서 키가 큰 탓에 조준이 용이했고 그 덕분에 리와 그랜트 탱크를 가리켜 "훌륭한 목표물"(Splendid Target)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영국 기갑병들도 자신들이 조종하는 탱크를 가리켜서 "강철 성당"(Iron Cathedral)이라고 부를 정도 그 높은 키는 골치거리가 됩니다.

 

M3 탱크가 개발이 완료되기도 전인 1940년에 당장 이 탱크가 필요했던 영국군 지휘부에 미국 개발팀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업(Mock Up) 상태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합니다. 영국 육군측의 참석자들은 꽤 많은 우려의 의견을 쏟아놓았는데 그중 가장 심각하게 우려했던 점들은 당시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임시 방편의 아이디어로 보였던 측면 주포 방식, 철판 모서리 부분에 수없이 박혀있는 강철 리벳들에 대한 우려, 좀 더 두꺼웠으면 하는 장갑 두께, 차체 상부에 부착된 무전기와 안테나  (보통 영국이나 독일 탱크들의 경우 포탑에 부착된 안테나가 미국 초기 탱크들인 M3 스튜어트 라이트 탱크나 M3 리 미디엄 탱크처럼 포탑 뒤쪽 차체에 부착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등등 이었습니다. 영국 공급 모델인 그랜트 탱크의 경우 위의 의견들 중에 일부(장갑 두께, 무전기)는 적용되었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은 적용이 어려웠습니다.

 

 

 

 

(타미야 1/35 M3 그랜트 탱크 박스 아트)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1940년이면 그 전해에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그해 초여름에 프랑스가 함락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전선은 아직 롬멜이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주둔 영국군과 시리아에 이태리군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되는 와중이었습니다. (제글들을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이제 입체적인 시각으로 당시 전개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위에 영국군측 의견들을 상당부분 적용하려면 차라리 M3 개발을 전면 취소해버리고 M4 셔먼의 생산 일정을 앞당기는데 온 힘을 쏟는 것이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M4 셔먼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불가피하게 현재의 아이디어를 거의 손 대지 않고 M3 리 탱크를 개발하는 것만이 최선의 대안이었던 것입니다. (단 몇개월이 몇주가 아쉽고 다급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1250대의 M3 탱크가 영국에 의해서 발주되었고 미국내 3곳의 회사들(프레스트 스틸 카, 풀맨, 볼드윈)이  영국 공급 모델(그랜트 탱크) 생산을 맡게 됩니다.  미육군 공급 모델(리 탱크)의 경우 지금도 유명한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 산하의 탱크 제조 회사와 아메리칸 로코모티브 (ALCO)가 맡아서 생산하게 됩니다.

 

 

 

 

(1942년 크라이슬러 공장에서 생산 중인 M3 리 탱크)

 

 

 

 

(M3 탱크의 이름은 남북전쟁의 두 영웅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좌측 로버트 E. 리 남군 총사령관, 우측 북군 장군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 

 

 

영국향 그랜트 탱크의 시작품은 1941년 3월에 완성되었는데 무전기를 포탑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포탑의 크기가 리 탱크에 비해서 훨씬 커졌습니다. 포탑의 장갑은 리에 비해서 더 두껍게 만들어졌고 큐폴라에 장착된 기관총은 아예 제거해버렸습니다. (탱크에 있어서 포격으로 원거리에 적 탱크를 파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체로 접근하는 적 보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기관총의 보유는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어쨌든 영국은 기관총을 제거합니다.)

 

M3 탱크에 탑승하는 기갑병들의 숫자는 다른 탱크들에 비해서 월등히 많습니다. 리 탱크의 경우, 운전수(Driver), 전차장(Commander), 주포 사수(Gunner), 부포 사수, 장전수(Loader), 기관총 사수, 무전병 이렇게 총 7인이 탑승하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그랜트 탱크의 경우는 기관총이 제거되었고 무전병을 따로 탑승시키지 않으므로 5인으로 줄었습니다. 리 탱크를 운용한 미군의 경우도 무전병을 탑승시키지 않고 6인으로 줄였고 1942년에는 5인으로 줄이게 됩니다. (무전병을 따로 두지 않은 경우 사수가 무전병을 겸하였습니다.)

 

 

 

 

(M3A1 리 탱크는 모서리가 곡면으로 되어있는데 거의 한덩어리 주형으로 차체 상부를 뽑아내다보니

이런 모양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주형의 방법은 동일한 탱크를 만들면서도 철이 덜 사용되고

생산 시간도 줄일 수 있지만 반면에 엄청난 생산 원가의 상승을 초래하였습니다. 결국 철판들을

각각 주조로 뽑아낸 후에 용접과 리벳을 사용하는 모서리 접합 방식의 각진 형태로 변경됩니다. )


M3 탱크는 겨우 1년 반 동안 생산이 진행되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던 측면 주포와 유난히 높은 차체의 디자인으로 M4 셔먼이 생산을 시작하고 충분한 물량이 공급되기 시작하자 최전방에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M4 셔먼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름 자신의 역량의 150%를 발휘하면서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의 승리를 위해 공헌을 하게 됩니다. 특히 1942년말 롬멜과 몽고메리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결전이었던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M3 탱크의 활약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총 2855대의 리/그랜트 탱크가 영국에 판매되었고 동부전선에서도 소련에게 1396대가 판매되었습니다. 미국 탱크들의 일반적인 특성이었던 안정적인 성능은 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 해줬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M3 탱크의 활약

 

영국에 공급된 M3 그랜트 (일부 리 탱크도 공급됨.) 탱크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최초의 교전은 1942년 5월 참혹했던 가잘라 전투에서 였습니다. M3 탱크가 도착하기 전까지 영국이 보유했던 크루세이더나 얼마 남지 않았던 마틸다 II 와 같은 탱크들은 롬멜이 보유한 3호전차,4호전차에 비교해서 성능이 열세였던 탓에 M3 그랜트의 등장은 영국군에게는 엄청나게 전력의 보탬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생산 차질로 지연되었던 M4 셔먼 탱크가 생산이 시작되어 이집트에 영국군에게 첫 300대가

1942년 9월에 도착하였습니다.)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에 공급된 아프리카 군단의 3호전차들은 이미 50mm 주포로 무장되어있었던 반면 영국군의 크루세이더는 37mm 주포로 무장되어 있어서 그랜트나 리 탱크가 비록 측면 주포 형태지만 75mm 포로 무장되어있다는 것은 최소한 화력에 있어서 적 탱크들에게 밀리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에 드디어 영국군에게 공급된 300대의 셔먼 탱크와 함께 그랜트/리 탱크는 같은 해 10월 시작된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 참가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뤘지만 어쨌든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힙니다.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이미 올린 글에서 자세하게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비록 M3 그랜트 탱크가 영국군의 요구사항을 적용한 영국 공급 모델이지만 실제로 리 탱크도 영국에 공급되었습니다.)

 

1943년 5월 튜니지 작전을 끝으로 롬멜이 독일로 떠나버린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과 미국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쯤 되면 그랜트/리 탱크들은 서서히 셔먼 탱크들로 교체되어버립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1943년부터 주포가 개조된 나치의 3호전차,4호전차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75mm 주포를 가졌지만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포격을 가하기에는 아무래도 굼뜬 그랜트/리 탱크들이 불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포탑만 회전하면 조준할 수 있는 적 탱크에 비해서 차체가 움직여야 제대로 조준이 가능한 측면 주포는 아무래도 민첩하고 정확한 포격에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튜니지에 미군이 상륙하고 충분한 숫자의 M4 셔먼이 영국군에게 공급되자 그동안 갖고있는 약 1700대의 그랜트/리 탱크들은 전량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인 영국 연방에 호주군과 인도군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비록 나치의 탱크들과는 전력의 열세였지만 일본군의 허접한 기갑 병력을 상대로 그랜트/리 탱크들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까지 태평양 전역에서 그랜트/리 탱크들은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며 영광을 이어가게 됩니다.

 

 

 

 

 

(M3 리 탱크의 경우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 소속

으로 M4 셔먼과 함께 일본군 탱크들과

보병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전투를 이어가게 됩니다. 위에 사진은 버마 전투에 투입된 리 탱크)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 공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1942년에 독소전쟁으로 나치 독일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소련군에게도 1396대의 M3 탱크가 공급되어 스탈린 그라드와 레닌 그라드 근방에 전투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 탱크가 자신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유는 당시 소련에게는 2차대전을 통털어 가장 우수한 탱크들 중에 하나로 평가받는 T-34가 이미 활약을 하고 있었고, KV-1과 같이 비록 덩치는 크지만 엄청난 화력으로 나치 기갑부대에게 공포를 안겨준 괴물 탱크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탱크들을 갖고 있는 소련군이 보았을 때 미국이 보내준 M3 탱크들이 못미더울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피탄시 쉽게 화재가 발생하는 문제 (동일한 문제가 M4 셔먼에도 발생하였지만)와 아프리카 전역에 비해서 보다 강력한 탱크들이 배치된 동부전선에서 마주치게 된 타이거 I이나 판터에게는 너무나 쉬운 표적이었기 때문에 불과 1년 만에 거의 대부분의 M3 탱크들은 파괴되거나 버려지게 됩니다. 심지어 소련 기갑병들은 "여섯명의 집단 묘지"라고 별명을 붙힐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었습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중에 이동 중인 소련군 M3 리 탱크 모습)

 

비록 소련군에게 공급된 M3 탱크들의 운명은 불명예로 끝을 맺지만 어찌 되었든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고군분투 중이던 영국군에게 공급된 M3 탱크들은 분명히 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공헌한 1등 공신 반열에 올라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짧은 전성기에 지옥과 같은 아프리카 사막을 달리면서 나치 독일의 야망을 분쇄했던 M3 탱크릉 소개해드렸습니다.

 

이제 SoulFlower님의 M3 그랜트 탱크 고증 들어갑니닷!

 

 

 

 

 

차체 번호 T24344 M3 그랜트 탱크는 1942년 5월 갈라 전투에 투입될 때는 영국군 제 1 왕실 기갑여단 휘하에 제22 기갑연대 소속으로 가잘라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1942년 5월~6월 사이에 시리아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항구였던 토부룩 근방에 가잘라에서 벌어진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몽고메리가 부임하기 직전에 오킨렉 장군이 이끄는 영국 8군과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실제로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서 부족한 물자에 허덕이던 아프리카 군단이었지만 이전투에서 롬멜은 그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거둔 최고의 승리를 거둡니다. 영국군은 30,0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무려 1,188대의 탱크들이 파괴된 반면 롬멜 군단은 거의 대부분이 이태리군인 3,300명의 사상자와 400대 이하의 탱크 손실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영국 제 7 기갑 사단의 마크)

 

결국 1942년말에 오킨렉 장군이 물러나고 몽고메리 장군이 부임하면서 가잘라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영국군 기갑부대는 재편성을 하게 됩니다. 위에 T24344 그랜트 탱크가 소속된 제 22 기갑연대는 제 7 기갑사단 소속으로 들어가서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모두 알다시피 1942년 11월 양쪽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결국 몽고메리의 영국 8군이 승리함으로써 끝을 맺게 됩니다. 참고로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영국과 아프리카 군단 양쪽 모두 약 500대의 탱크들을 잃었습니다. 과연 위에 그랜트 탱크가 가잘라 전투와 엘 알라메인 2차 전투를 거치면서 무사히 살아남았을지는 의문입니다만......

 

 

 

 

(1942년 10월 엘 알라에인 2차 전투에 투입된 M3 그랜트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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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2.30 "몬티"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던 몽고메리 장군의 전용 탱크였지요. 저도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은 박물관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요^^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3.12.30 두번째로 고베에 와 있는데, 이번엔 지긋이 앉아서 읽을 시간이 없네요. 나중에 공항가서 읽어야겠습니다. 완전 기대!!!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2.30 해외 출장 중에도 각별히 관심 가져주시는 도사님 같은 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볼 생각입니다.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3.12.30 고베에서 오사카 들어가는 쾌속정에서 다 읽었습니다. 준만님의 글과 연계한 카페 프로젝트도 생각해볼 만 하겠습니다. 한번 같이 기획해보죠!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2.3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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