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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이야기

벌지 대전투 - 겨울 지옥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4.01.30|조회수4,032 목록 댓글 14

 

(벌지 대전투는 1944년 12월 중순에서 1945년 1월말까지 한겨울에 살인적인

추위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연합군이 기적과 같은 승리를 쟁취한 사건입니다.

사진은 최악의 전쟁터였던 프랑스 바스통 전투에 투입된 미군 M4 셔먼 탱크)

 

 

(엉터리 고증으로 실망스러웠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였지만 "벌지 대전투"(1965년작). 영화 자체는 "사상최대의

작전"(1962년작)이나 "멀고 먼 다리"(1977년작)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엉성한 전쟁영화였지만 실제 벌지 전투는 

제3제국 멸망에 앞서서 "최후의 결전"이나 마찬가지인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

 

"벌지" 전투라는 사건을 2차대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벌지"(Bulge)라는 뜻은 "주머니"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몬테카시노 전투"라든가 "엘 알라메인 전투"처럼 "벌지"가 지명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오래 전에 의미를 알고나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 난데없이 "주머니"라는 단어가 여기서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인가?

 

실제 독일군이 전선의 일부를 진격해서 마치 그지역이 주머니처럼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당시 미군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양키 나름대로 재미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부전선의 최대규모의 전차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도 전선에서 툭 튀어나온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소련이나 독일 양쪽 모두 "주머니"라는 표현을 생각해내는 위트는 없는 인간들이었지요.^^)

 

 

 (벌지 전투의 지도 - 전선에서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을 보면

"주머니"의 의미가 이해가 갈겁니다.)

 

이번 글은 벌지 전투를 실제 전투 상황 지도를 보면서 전개를 함께 따라가보고져 합니다. 우리가 마치 연합군 또는 독일군 사령부의 상황실에서 숨막히는 전투 상황을 함께 보자는 얘기이지요. 중고등학교때 인문지리, 국토지리 배우면서 지도를 보면 울렁증이 있었던 분들도 이것은 우리의 "FUN"을 위한 지도 읽기 이므로 괜시리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벌지 전투 한복판으로 뛰어들어보겠습니다.

 

이번 글부터 아무리 긴 소재라도 단편의 글로 끝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글들이 여러개로 나뉘니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오늘 글의 목차를 간단히 만들어봤습니다.

 

I.히틀러 최후의 반격 계획을 세우다.

II.총공세 시작하다! (12/16~12/20)

III.바스통 결전 (101 공수부대의 전설)

IV.히틀러의 독선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I.히틀러 최후의 반격 계획을 세우다.

 

(일단 벌지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어디쯤인지 감을 잡고 갑시다. 지도에서 독일과 벨기에

국경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이 교착 상태(벌지 전투 시작 직전인 1944년 12월초)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이나 몽고메리 장군과 같은 연합군 수뇌부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는 베를린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마켓가든 작전이라는 2차대전 최악의 작전을 감행하게 되고 앞에 제글에서 설명했듯이 9월에 시작한 이작전은 엄청난 연합군 병사들의 희생을 댓가로 치루게 됩니다. 노르망디 상륙부터 불과 3개월 사이에 너무나 빨리 진격해온 연합군들에게 엄청나게 길어져 버린 보급 루트가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부각되자 성급해진 몽고메리가 앞장서서 계획한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전선을 교착상태로 바꿔버렸고 연합군은 일단 보급 문제부터 확고히 해결해놓고 그다음을 생각하기로 생각을 바꿉니다.

 

 

(1944년 9월 마켓가든 작전 중에 독일군의 공격에 항복한 영국 공수부대원들이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하고 투항하는 모습, 불과 3개월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으로 전세를 역전했던 연합군은 공명심에 가득찬 몽고메리와 이를 용인한

아이젠하워 사령관을 포함한 군 수뇌부들의 오판으로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여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

 

한편 동부전선에서도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폴란드 동부에서 끝난 후에 휴식을 취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이듬해 프랑스까지 2개월도 안되는 시간에 점령해버리고 거의 대부분의 유럽대륙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 당시에 독일 본토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점령지들을 동쪽에서는 소련에게 서쪽에서는 서방 연합군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안위조차 위험해진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런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들의 휴식 상태가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1940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재현하듯이  벨기에 아르덴 지방에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앤트워프까지 진격한 후에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치명타를 가한다는 것이 새로운 진격 작전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히틀러 휘하에 룬트슈테트 장군과 발터 모델 장군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은 이런 히틀러의 계획이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이미 광기에 휩쌓인 히틀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런 작전이 성공하여 서부전선이 장기 교착 상태로 들어가면 서방 연합군과의 강화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전력을 동부전선에 소련 붉은 군대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황당한 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너무 군사 작전에

깊이 관여하고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우수한 전술 지식과

판단력을 갖고 있었던 장군들이 그의 주위에 수두룩 했지만 그 우수한 인력들은

1차대전 하사관 출신의 미치광이 총통의 결저에 토를 달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의 반격 작전이 시작되는 시기는 벌지 전투의 무대가 될 아르덴 숲에 두껍게 눈이 쌓이고 혹독한 추위가 닥치는 겨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르덴 숲은 짙은 안개가 끼어서 공중 관측이 어려운 날씨가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위세는 꺾인지 오래였고 연합군쪽으로 제공권이 넘어온 상황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이 공중에서 연합군 정찰기에 의해 샅샅이 관측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개 덕분에 독일군은 이 반격작전을 위해서 투입할 정예 20개 사단 병력과 특히 이 시기에 전장에 투입되게 되는 킹 타이거 탱크가 연합군 공군기에 의한 공격의 위험이 크게 줄었던 것입니다.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는 1944년 여름에 16세~60세까지 아직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던 병력들과

해군과 공군에서 남아도는 병사들, 그리고 부상병들까지 긁어 모아서 조직하였던 나치의 마지막 발악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개인 화기는 타 부대보다 훨씬 자동화되어 전쟁 말기에 개발된 StG 44 돌격소총이

상당수 지급되었습니다. 당시 볼트 액션 방식의 소총(Kar98K) 아니면 기관단총(MP40)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스위치 작동만으로 한정의 총이 자동소총과 단발소총 기능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StG 44 돌격소총은 엄청난 총기의 혁명이었습니다.)

 

(위에 총이 나치 독일의 혁신적인 돌격소총 "StG 44"입니다.

밑에 총은 소련에서 전후에 개발한 AG 47입니다. 비교해보면

대충 감이 잡히겠지만.... AG47의 개발자인 칼라쉬니코프는

자기가 이총을 개발할 때 StG 44에 대해서 몰랐다고 잡아

떼지만 나치 독일의 StG 44가 현대 개인화기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M-16과 소련의 AG47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척탄병"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18세기 프로이센 왕국 군대에는

전문적인 초기 형태의 수류탄을 던지는 병사들을 척탄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류탄을 멀리 던지려면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체격이 크고 힘이 있어야

했는데 이런 척탄병들은 좀 더 튀는 색깔과 디자인의 군복을 입었고 나름

엄청 자부심이 강한 조직이었습니다. 여기에 착안해서 히믈러가 조직한

예비군 부대의 이름을 척탄병이라 명명하였는데 특별히 수류탄 투척 전문

의 의미가 아니라 18세기 강력한 프로이센 제국의 환상을 국민들에게 주입

하자는 얄팍한 의도였습니다.)

 

다시 벌지 전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하지만 히틀러의 반격 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독일군 내부의 상황이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워낙 큰 타격을 입은 탓에 불과 1~2년전에 최정예 병력으로 구성되었던 나치 독일의 지상군은 엄청나게 약화되어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20개 사단이 투입되었지만 대부분의 부대들은 정원을 채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9개대대가 1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던 원칙이 극심한 병력 부족으로 이당시에 6개대대 1개 사단으로 편법 운영중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예비군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친위대 사령관으로 유명하고 유태인 학살에 주범이었던 바로 그 악마같은 인간) 휘하에 조직된 국민척탄병 사단까지 투입시키면서 시급히 병력을 채우게 됩니다. 게다가 무기와 식량의 부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특히 연료의 부족은 기갑부대에게 상대방 탱크보다 더 위협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작전 계획에서조차 연합군의 보급 기지를 점령하여 부족한 연료와 보급품을 해결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고 불과 몇개월 전에 연합군의 마켓가든 작전 못지않게 무모한 작전이었습니다.

 

연합군 수뇌부는 마켓가든 작전의 대실패 이후에 독일군이 반격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군사력에 대해서 과소평가를 하고 있어서 심각하게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르덴 지방의 울창한 삼림과 산악 지형은 아직까지 독일 지상군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기갑부대가 쉽게 진격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한겨울에 아르덴 숲의 모습.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과 겹겹이 쌓인 눈, 살인적인 추위는

이곳에서 독일군의 공격에 버티게 되는 연합군 병사들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로 연합군의 예봉을 꺾어버린 9월 중순에 히틀러와 군 수뇌부는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 강까지 도착한 후에 북서쪽에 앤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서 연합군이 예측했듯이 험란한 지형을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뮤즈강 도하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지형 조건이 훨씬 개선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연합군은 왜 방심하였는가?

 

위에 아르덴 숲의 사진을 보면 나치 독일의 탱크들이 이런 숲속을 통과하여 진격하려면 결국 숲속에 어느 정도 길이 다듬어진 도로를 따라 1렬로 진격할 수 밖에 없다고 연합군은 속단했습니다. 가령 200대 정도의 탱크들이 1렬로 이동하는 경우 그 거리는 약 15km까지 늘어서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맨앞에 탱크가 공습으로 치명타를 받고 멈춰버리면 그 긴 행렬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은 전폭기 조종사들이 양손을 묶어버린 상대를 마음 놓고 패듯이 "학살"이나 다름없는 공격을 하는 셈입니다. 피해 탱크의 숫자는 공격하는 전폭기들이 갖고있는 탄약과 폭탄의 숫자에 달려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과연 나치 독일이 기습적인 반격을 아르덴 숲속을 통과하면서 감행할 수 있겠는가??

 

 

 

(벌지 전투의 무대가 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에 걸쳐져있는 아르덴 지역의 지도, 위키백과에

나온 작전 지도에 설명을 한국어로 바꿔놨습니다, 즉 독일 총공세일(12/16일) 직전 전선이

불과 며칠 사이에 어떻게 바뀌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앞으로 이 지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겠습니다.)

 

이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적이 상상도 못하는 기습 공격으로 허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악천후로 적의 공군력이 공격은 물론이고 정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와 폭설이 내리는 조건에서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째,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스피드로 전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에 비교하여 병력과 보급 모두 열세였던 독일군의 반격은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경우에 연합군이 전열이 정비하여 반격을 개시하도록 허용한다면 참담한 패배는 불을 보듯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연합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고 속전속결로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전 수립의 리더였던 모델 장군은 작전 개시 후에 뮤즈 강에 도착할 때까지 4일을 넘으면 안된다고 못박았습니다. 

 

 

(나치 독일 육군 원수 발터 모델(1891년~1945년), 마켓 가든 작전을

연합군의 참패로 끝나게 만들었던 독일 육군 최고의 전술가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벌지 전투의 시발점이 되는 대규모 반격 작전이
무모한 발상임을 히틀러에게 충언하였지만 묵살되었고 도리어 이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히틀러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반격작전의 명칭을 "라인을 수호하라"(Wacht am Rhein)이라고 붙혔는데 이유는 마치 이작전이 반격 작전이 아니라 라인란트 지역의 방어 작전이라고 오해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작전의 투입 부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무장친위대(SS) 6기갑군(위에 지도 상에 "SIXTH PZ ARMY") : 이작전을 위해서 그해 10월말에 새롭게 편성되었는데 1 SS기갑사단 LSSAH(아래 사진과 설명 참조)와 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가 참가하였습니다. 이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인 북부 전선을 통과하여 목표는 앤트워프 점령이었습니다.

 

 

(무장 친위대에서 2명밖에 없는 대장 계급까지 올라간 요제프 디트리히(좌)는

1934년 히틀러 집권의 결정적인 사건인 "장검의 밤 사건"(나치 반대파 숙청 작업)

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여 히틀러의 신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직후 연합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무장친위대 6 기갑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곧바로 벌지 전투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친위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Leibstandarte SS Adolf Hitler)라는 이름의 무장친위대

최정예부대는 줄여서 LSSAH라고 불렀습니다. 히틀러에 대해서 가장 충성심이 강한 부대

였던 동시에 가장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던 전범들의 집단이었습니다. 동서부 전선을 막론

하고 피점령지역에서 민간인과 포로들의 학살의 현장에는 LSSAH의 골수 친위대원들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조세프 디트리히가 LSSAH 기계화부대원들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모습)

 

 

2.한스 폰 만토이펠의 5기갑군(위에 지도 상에 "FIFTH PZ ARMY")은 중앙공격을 담당해서 브뤼셀 점령이 목표였습니다.

 

 

(1944년 7월에 등장하여 고작 492대가 생산된 타이거 II (킹 타이거)

탱크는 적은 숫자였지만 연합군 기갑부대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준

무적의 상징이었습니다. 88mm 주포와 엄청난 장갑 두께를 가졌으면서도

타이거 I 탱크의 속도에 뒤지지 않는 기동성으로 연합군의 탱크 15대 정도는

킹 타이거 1대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공포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 전폭기들이 이동 중인 킹 타이거를 발견

하고 폭격을 가해 상당수가 파괴되었습니다,)

 

3.에리히 브란덴베르그의 7군("SEVENTH ARMY")은 즉면지원과 남부 전선 통과가 목표였습니다.

 

4.15군(지도 맨 위쪽에 "FIFTEENTH ARMY")은 재편성되어 최북부에 배치되었는데 이 지역에 미군을 고립시켜서 전체 전선 돌파시 북쪽에서 측면 공격을 봉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아무리 연합군이 방심했다고 해도, 그리고 공중 관측이 어렵다고 해도 독일군의 이동은 민간인들에게 목격될 것이고 레지스탕스와 같은 저항 세력과 연결하여 미리 감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의문입니다. 맞습니다. 프랑스를 해방시키던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연합군은 현지 레지스탕스의 도움으로 사전에 독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연합군은 독일 본토에 들어와있었고 더 이상 레지스탕스의 정보 수집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탱크들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가 루프트바페의

슈투카였듯이 서부전선에서 독일 기갑부대의 가장 무서운 적은 연합군

탱크가 아니라 P-47 썬더볼트와 같은 전폭기의 공습이었습니다.)

 

(미국 전폭기의 공습을 받고 배를 드러내고 뒤집어져버린 나치 최강 탱크

킹 타이거의 모습. 분명히 킹 타이터는 추축국뿐만 아니라 연합국 어느 탱크

보다도 강력한 화력과 장갑을 갖춘  "괴물"이었지만 하늘 위에서 로켓탄과

기관포를 쏟아붓는 전폭기의 공습에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정보 부족으로 인한 연합군 수뇌부의 방심은 가장 중요한 지역인 아르덴 숲속에 배치된 미군 병력의 구성을 봐도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노르망디 상륙이후 역전의 미군 2 보병사단이 배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단은 그동안 끊임없는 전투로 병력 손실이 컸던 탓에 재정비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또한 함께 배치된 99보병 사단과 106 보병사단 모두 미국 본토에서 훈련이 끝나자 마자 방금 도착한 신참 병력들이었습니다.

 

(벌지 전투 초기에 진격 중인 독일 무장친위대 사단 병사들, 불타고 있는 셔먼탱크가 보입니다.)

 

(놀랍게도 독일의 아르덴 총공세 하루 전에 독일 출신 할리우드 스타 마를린느

디트리히가 아르덴 지역에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 분명히

벌지 전투 직전에 아르덴 지역 연합군은 나치 독일이 선공을 가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II.총공세 시작하다! (12/16~12/20)

 

대공세 시작되다!

 

1944년 12월 16일 오전 5시 30분에 위에서 열거한 나치 독일의 4개 주력부대 총 25만 병력은 일제히 아르덴 숲 속을 뚫고 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숲속은 하얗게 눈이 쌓인데다가 짙은 안개까지 덮혀서 시계가 매우 흐렸고 그런 탓에 나무들을 뭉게면서 진격해오는 신형 킹 타이거를 비롯하여 타이거와 판터 탱크들의 공포스러운 소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병사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안겨주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미국 본토에서 갓 훈련을 마치고 유럽에 도착한 신병들로 구성된 99사단과 106사단의 병사들은 전투의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나치 최강의 기갑부대와 보병들을 맞닥뜨리고 이미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의 전술은 간단했습니다. 기갑부대들이 빽빽하게 나무들로 들어찬 아르덴 숲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붙히면서 전진하면 그 뒤를 쫓아 수류탄과 개인 화기로 무장한 보병들이 뒤따르면서 참호 속에서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연합군 병사들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하면서 진격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1893년~1981년)은 절친한 친구이자

육사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처럼 뛰어난 리더쉽을 가진 인물도

못되었고, 조지 패튼처럼 부하들을 매료시키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공무원"과 같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인물이 벌지 전투에서 연합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써

중요한 역활을 맡게 되는 운명에 처합니다.)

 

그런데 공세 당일 아르덴 지역에 연합군들의 사령관인 오마 브래들리 장군(제12집단군 사령관)은 프랑스 파리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진급을 축하하는 파티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육사 동기이면서 절친이고 또한 직속 상관이기도 한 아이젠하워 장군과 브래들리 장군을 비롯한 다수의 연합군 최고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을 때 아르덴 지역에서의 급박한 상황 보고를 받게 되었는데 브래들리 장군은 그동안 종종 있어온 독일의 소규모 공격이라 판단하고 공세 개시 다음 날인 12월 17일 오후가 되어서야 아르덴 지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서 몇개 지역의 이름은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전선 북부에 말메디(Malmedy)라 불리는 마을 이름입니다. 전선 북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공세 첫날 이미 점령되었던 지역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초기 공세에 포로로 잡힌 150명의 미군 포로들 중에 무려 84명이 무장친위대에 의해 기관총 사격으로 학살된 끔찍한 비극의 현장입니다.

 

둘째, 말메디 남동쪽에 위치한 "St. Vith"(생 비트) 이곳은 위에 나치 주력 부대 두번째로 설명한 한스 폰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과 미군 보병 및 기갑부대가 격전을 치룬 곳입니다. 여기서 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독일군의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아래에서 세부 설명)

 

세째, 바스통("바스토뉴"라고도 발음하는데 제가 불어 전공이 아닌 탓에 그냥 "바스통"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밴드 오브 브러더스" 드라마에서도 벌지 전투 기간 중에 101 공수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문자 그대로 "겨울 지옥" 속에서 격전을 벌이는 바로 그 장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래에서 좀 더 설명하겠지만 일단 지도 상에 위치는 한번 눈여겨 봐두시길.......

 

 

슈퇴서 작전 (Operation Stösser)

 

12월 17일 히틀러가 자랑하는 공수부대(팔시름예거- Fallschirmjager: Fallschirm(낙하산) + Jager(경보병))를 투입하여 연합군 방어지역의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슈퇴서 작전이라 명명된 이작전은 말메디(Malmedy)에서 11km 북쪽에 바라크 미하일 십자로가 목표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테아 하이트 대령과 부하들은 그 지점을 확보하고 제 12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가 도착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연합군의 증원과 보급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트 폰 테아 하이트(1907년~1994년) 독일 공수부대의

우수한 지휘관으로 2차대전 내내 눈부신 전공을 세웠지만 결국

벌지 전투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됩니다.) 

 

 

(사족 : 하이트 대령의 사촌은 1944년7월 20일에 폭탄을

사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입니다. 하이트도 反히틀러 음모에 연루

되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진은 "7월 20일 음모"를

영화화했던 2008년작 "발키리"에서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을

연기한 톰 크루즈의 출연 장면)

 

12월 17일 자정이 막 지난 시각에 112대의 융커스 Ju 52 수송기에 약 1,300명의 공수부대원들이 탑승하고 이륙하여 목표 지점으로 출발합니다. 여기서 독일군 공세의 가장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던 악천후가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재앙으로 닥쳤습니다. 시계가 워낙 안좋다보니 상당수의 공수부대원들은 예정된 코스를 벗어나 엉뚱한 곳에 낙하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몇달 전에 마켓가든 작전에 투입된 연합군 공수부대원들도 목표로 했던 교량에서 너무 멀리 강하하여 작전의 큰 차질을 빚었습니다만 역사는 이렇게 반복됩니다.) 그날 정오가 되어서야 약 300명 정도만 목표 지점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체 투입 병력의 30%도 안되는 이병력으로는 연합군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군대 중에서도 독특한 조직 문화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대전 초기부터 침략 전쟁의 선봉에 섰던 공수부대, 특히 강하시에 편의를

위해서 일반적인 독일군 철모에서 차양 부분의 디자인을 축소한 독특한

모양의 철모를 착용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공수부대가 루프트바페에

소속되었던 탓에 헤르만 괴링이 각별히 애정을 갖고 지원을 하였고 심지어

공수부대 전용 자동소총인 FG42(아래 사진 참조)까지 개발되어 소량이지만

공급되었습니다.) 

 

결국 하이트 대령은 십자로 거점 확보의 본래 임무 대신에 그 부근에서 게릴라 전술로 연합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애초의 계획과는 틀리지만 고작 300명의 게릴라 전술은 초기에 연합군 사령부에서 자기들의 마켓가든 작전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공수작전인 것으로 오인하고 큰 혼란이 발생하여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병력을 확보하느라 정작 전방으로 증원 배치하는 결정이 늦어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독일 공수부대 작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독일군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충분히 증원이 되지 않은 최전방의 미군 부대들은 치명타를 입고 궤멸됩니다. 하이트 대령과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탄약과 보급이 단절된 상황에서 미육군 보병 1사단과 기갑 3사단을 맞아 저항하였지만 결국 작전 개시 일주일만인 12월 23일 포로가 되어 영국 본토에 포로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리핀 작전

 

제가 이태리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최후를 소개했던 글에 등장했던 무장친위대 출신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까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마치 007 제임스 본드처럼 히틀러가 명령한 아주 특수한 임무를 거뜬하게 완수하곤 하는 불가사의한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칼을 가지고 결투를 하다가 얼굴에 깊은 칼자국 흉터가 생겨서 외모에서도 섬뜻한 이미지였는데 그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3년 9월 이태리로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날아가 연금중인 무솔리니를 구출해내는 임무를 성공하여 독일의 영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943년 9월 무솔리니 구출작전은 아예 사진사와 영화 촬영기사까지 데리고 가서 스코르체니와

그의 부하들이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장면을 기념 사진도 찍고 심지어 기록 영화 촬영까지 하면서

진행합니다. 독일의 친위대 중령인 스코르체니에게 구출되어 기념 촬영까지 해야했던 무솔리니의

초라한 모습이 안스럽기까지 합니다. 무솔리니 왼쪽이 스코르체니 중령)

 

바로 이 스코르체니가 또다시 2차대전의 중요한 결전의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는데 바로 친위대 제 150 기갑여단의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미군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면서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을 사용하여 연합군 점령지역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습니다. 실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독일 이민 2세의 병사들은 불과 20명 정도였지만 이런 부대의 활동은 연합군측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군병사의 군복을 착용한 독일병사의 존재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조지 패튼장군도 이 소문을 듣고 놀라, 12월 17일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라우츠들이 여러 곳에서 출몰하여 전화선을 절단하거나, 도로표식을 바꿔 아군의 방어거점에 도착할 수 없게 혼란을 주고 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오토 스코르체니(1908년~1975년) 나치 골수 친위대 장교이며

동시에 신출귀몰한 특수 임무를 수행하여 연합군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전범으로 수감되었지만

1948년 탈옥하여 스페인으로 간 후에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부와

이집트 나세르 정부를 위한 군사고문 역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모사드에 고용되어 비밀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불가사의한 일생은 나치 독일의

긴 그림자로 드리워지게 됩니다. )

 

독일병사는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다가 체포되면 대부분 그 장소에서 스파이로 간주하여 총살당했습니다. 제네바 조약 아래에서 군복착용에 관련된 항목과 전시포로에 대한 취급이 모순이 되었지만 총살은 이 시점에서 일반적인 처벌이었습니다. 후방지역에서의 방해공작 중 몇 명의 병사가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는 경우 이미 죽을 각오를 한 그들은 최후까지 거짓 자백을 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임무에 관련해서 취조받을 때, 당시 파리에 있던 아이젠하워의 유괴와 살해가 목적이라고 답해 아이젠하워의 호위는 대폭 증가하고 그는 사령부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반면 그들은 정직하게 “부대의 지휘관은 스코르체니이다.”라고 자백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파리에 침입하여 아이젠하워가 있는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 무리인 작전이었지만, 지금까지 믿지 못할 작전을 성공시킨 스코르체니의 명성은 연합군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있었던 터라 그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자백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벌지 전투 초기에 미군 군복을 입고 투입되었던 나치 제 150 기갑사단 병사들이

미군에게 포로가 되어 총살이 집행되는 장면)

 

그 결과 후방지역의 여러 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정체되었습니다. 야전헌병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질문(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 유명한 야구시합의 스코어, 일리노이주의 주도 등)을 모든 병사들에게 엄격하게 질문했습니다. 헌병의 질문을 받은 오마 브레들리 장군은 일리노이주의 주도을 스프링필드라고 정확하게 답했으나, 헌병은 주도를 시카고로 생각했기 때문에 벌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되는 브레들리 장군이  짧은 시간 억류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일리노이주 최대의 도시는 확실히 시카고였기에 결국 많은 미국인이 오해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군 군복을 입은 친위대 병사들이 연합군 진행로의 도로 표지판 방향을 바꿔서 대규모 병력 이동에 큰 차질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첫날 달성하려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부대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작전을 고집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코르체니는 작전을 중지시키고, 제 150기갑사단의 병사들을 통상의 군복으로 바꿔 입히고, 보통의 기갑여단으로서 전투에 투입시켰습니다.

 

말메디 학살 사건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들과 전쟁을 했던 소련군의 경우 포로가 되면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장친위대에 의해서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방 연합군의 경우 미군이나 영국군이나 자신들이 상대하는 나치 독일이 항복을 한 전쟁 포로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습니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도 묘사되 듯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에 미군들 역시 포로를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탓에 일부 독일 포로들을 학살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미군들은 이런 사건을 단순히 소문 정도로만 받아들였고 정작 적들도 감히 이런 무자비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나치 군대는 193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프랑스와 소련까지 자신들이 점령한 국가에 포로들과 민간인들에 대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 학살을 서슴치 않았고, 그때까지는 놀라우리만치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있던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연합군 수뇌부조차 믿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말메디 미군 포로 학살 현장 - 현장을 발견한 미군들은 눈 밑에 파묻혀버린

시신들을 파헤치고 번호표를 붙혀서 사망자 숫자를 확인했습니다.) 

 

(살인은 살인을 부른다....이 희귀한 사진은 1944년 12월에 발생한 미군 포로

학살(말메디) 이후 이번에는 1945년 1월에 말메디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슈노뉴라는 작은 마을에서 미군이 약 60명의 독일군 포로를 학살

하는 장면입니다. 말메디 학살과 같은 방법으로 벽에 세워놓고 기관총

으로 처형하였는데 하지만 전후에 이 살인행위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말메디 학살에 대한 보복행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히 공세가 시작되자 선봉 주력 SS 6기갑군의 4,800명의 보병들과 요하임 파이퍼 SS 중령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탄은 벨기에 서부를 단번에 뚫어버립니다. 12월 17일 아침 7시에 뷰리겐의 미군 연료보급기지를 점령하여 일단 가장 큰 걱정거리 중에 하나였던 탱크와 차량들의 연료 문제부터 해결했고, 서둘러 연료 보급을 완료한 후에 12시 30분에 말메디와 리누빌 사이에 고지에서 미군 285 관측포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길지 않은 교전을 치루고 미군은 항복하게 되는데 그 숫자가 무려 150명이나 되었습니다. 한시가 바쁜 무장친위대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포로들의 학살은 이미 동부전선에서부터 익숙해진 일이었으므로 전혀 주저하지 않고 무장해제된 포로 전원을 들판에 8열 횡대로 세운 후에 기관총 사격으로 사살해버립니다. 이 사격으로 최소한 84명이 사살되었는데 전후에 이 학살에 참여했던 파이퍼 중령을 포함한 43명이 사형선고를 받지만 56년까지 단 한명도 사형 집행이 되지않고 특사로 모두 석방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사형이 감형된 이유는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과 증거 불충분입니다.) 

 

(무장친위대 중에서도 골수 LSSAH 소속인 요하임 파이퍼 중령

(후에 대령으로 승진).  그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 지휘관으로써의 명성보다 벌지 전투

참전 중에 그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 확인된 미군 및 벨기에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전후 전범재판에서 그와 그의 부하들 모두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소련군이 심한 고문을 가했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전원 사형은 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파이퍼의 경우 무려 12년에 가까운 기간을

독방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난 후에 특사로 석방이 됩니다. 그후 가명으로 프랑스에서

아내와 함께 은거하던 중에 신분이 노출되어 1976년 62세의 노인이 된 그의 집에 침입한

괴한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신체가 훼손되어 사망한 후에 화염병 방화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범인들은 체포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영화 "벌지 전투"에서 SS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프리카드 대령(로버트 쇼)은 비록 영화 속에서는 전투 중에

전사하지만 작가가 요하임 파이퍼의 이미지로 만든 가상

인물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냉혈인간의 전형적인 군인의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파이퍼가 이끄는 선봉 친위대 기갑부대는 킹 타이거 탱크를 몰고 공격 개시 이틀째인 12월 18일에는 스타벨롯이란 마을에 도달합니다. 다른 공격 부대들에 비해서 훨씬 빠른 스피드로 진격하다보니 주력 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한편 상황 파악이 끝난 미군은 방어부대를 투입하여 격전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미군이 발빠르게 진입로의 주요 교량들을 폭파한 탓에 파이퍼의 부대는 진격로가 봉쇄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미군들도 숲속에서 참호를 파고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됩니다. 파이퍼의 기갑부대는 결국 이틀만에 주력부대와 단절되어 연료 보급까지 끊긴 상황에서 라 그레즈로 후퇴해 구원 부대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구원 부대는 바스통 전투쪽으로 보급이 집중된 탓에 파이퍼 부대로는 보급이 끊어지게 됩니다. 결국 약 5km 정도 운행할 연료밖에 남지 않게 되자 결국은 귀중한 킹 타이거 탱크와 차량등 모든 장비를 전쟁터에서 버리고 도보로 탈출하게 됩니다. (참고로 라 그리즈는 말메디와 바스통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해있습니다. 결국 첫날 엄청나게 치고 나갔던 거리에서 엉뚱하게 남동쪽으로 한참을 후퇴하면서 내려온 셈입니다.)

 

생 비트(St. Vith) 전투

 

 

(위에 지도에 검은색 화살표를 보면  생 비트(St. Vith)에서 미군 방어부대가 얼마나

선전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신병으로 구성되었던 106 보병사단(106ID)가

무참히 뚫려버린 후에 생 비트에 있던 제7기갑사단을 포함한 4개 사단 병력들이 합쳐서

만든 방어부대는 북쪽에 말메디 방면과 남쪽 전선 모두 독일군에게 밀려버렸지만 끝까지

현위치를 방어해낸 결과 독일군 총공세에 큰 차질을 일으키게 됩니다.)

 

생 비트의 중심부는 중요한 도로의 교차지점이어서 폰 만토이펠과 디트리히 부대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방어부대는 미군 제 7기갑사단에 제 106보병사단과 제 9기갑사단, 제 28보병사단의 일부가 합쳐져 있었습니다. 브루스 C 클라크 장군 지휘하의 이 부대는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하여 진격을 최대한 늦추었습니다. 독일군은 12월 21일이 되어서 겨우 생 비트를 확보했으나, 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기에 참호로 퇴각했습니다. 12월 23일까지 독일군은 그들의 측면을 분쇄하고, 미군은 세므강의 서쪽으로 퇴각했습니다. 독일측이 계획은 12월 17일 오후 6시까지 생 비트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계획의 지연으로 작전 진행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III.바스통 결전 (101 공수부대의 전설)

 

벌지 전투의 클라이맥스

 

어쨌든 12월 17일까지 독일군이 전선을 길게 밀어붙힌 모습이 미국인들이 봤을 때는 주머니처럼 보인다고 "벌지"라는 이름을 붙히게 됩니다. 선봉에 나선 나치 기갑부대들의 거침없는 공격과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신병들 중심의 미국 보병사단들이 무력하게 무너진 결과입니다만 겉잡을 수 없는 전선의 붕괴는 현지 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이 자력으로는 어떻게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2차대전 기록사진 중에서 꽤 알려진 벌지 전투

중에 독일군 기관총 사수의 사진입니다. 2차

대전 TV다큐멘터리에 곧잘 나오는 사진입니다.)

 

브래들리가 당황하고 있을 때 그의 상관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현지 사령관보다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D-데이에 가장 뛰어난 전공을 세운 101공수사단("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주인공 이지 중대가 소속된 바로 그 부대)과 82공수사단을 아르덴 지역으로 급파합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101공수는 벌지 전투 최대의 격전지인 바스통으로 가게 되었고 82 공수 역시 매우 중요한 방어 거점인 생 비트(St. Vith) 방면으로 투입됩니다. 공세 첫날 신병 위주로 구성된 2개 사단을 손쉽게 "학살"했던 독일군에게는 드디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급히 투입된 탓에 이 두개 공수부대 병사들은 제대로 동계 장비를 지급받지도 못하고 엄청나게 추운 아르덴 숲속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들은 공수부대였지만 악천후 상황에서 낙하산 강하는 불가능하였으므로 트럭에 나뉘어 타고 무려 200km의 거리를 육로로 이동하여 생 비트와 바스통에 도착하게 됩니다.

 

 

(1944년 12월 바스통 전투 당시에 지도. 도대체 독일과 연합군 모두 왜 바스통을 빼앗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일까요? 지도를 보면 그 답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스통은 위에 볼 수 있듯이

사방 팔방에 도로들이 바스통을 모두 통과하고 있습니다. 아르덴 지역의 울참한 삼림에서 독일군이

진격하려면 기갑부대와 대규모 보병 병력들은 이미 포장된 도로를 통해 진격해야 많은 숫자가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탓에 모든 포장 도로가 통과하는 바스통은 반드시 독일군이

손에 넣어야 할 중요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이곳을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막아낸다면 독일군의 대규모 병력은 바로 이지점에서 발이 묶여버리는 것입니다.)

 

한편 브래들리 장군의 너무나 늦은 상황 파악과 안일한 대처에 대해서 그의 절친이었지만 동시에 직속 상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그의 친구인 브래들리가 패튼이나 몽고메리가 보여줬던 리더쉽과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애시당초 안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한 브래들리 장군은 패튼이나 몽고메리가 갖지 않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 밑에서 그동안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젠하워에 대한 절대 복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지 전투와 같이 아이젠하워 자신이 미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브래들리와 같은 지휘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말썽을 피울 때도 있지만 전투만은 확실하게 해내는 패튼과 같은 지휘관이 이럴 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작 브래들리 장군의 본부 위치도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 생 비트와 바스통

보다 한참 남쪽에 위치한 룩셈부르그였습니다. 결국 브래들리는 전투 현장에

있는 부하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던 것입니다.

브래들리에 대한 실망과 함께 이런 그의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서 아이젠하워는

전선 북쪽에서 방어하는 병력은 근처에 있던 몽고메리 장군에게 넘겼고, 남쪽

바스통에 101공수부대의 구출은 패튼 장군에게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브래들리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궤멸당하자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패튼 장군은 드디어 브래들리의 코를 납짝하게 해주고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주머니" 모양으로 형성된 전선의 기이한 형상을 상하에서 협공을 해오는 경우에 속수무책으로 보급선이 끊기고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라 이미 예측하고 그의 제3군(지도 상에"THIRD ARMY")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명령합니다.

 

 

(조지 패튼 장군(1885년~1945년), 그는 인간적으로는 정말

결함이 많은 문제아였습니다. 오만하고, 안하무인의 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에서만은 정말 뛰어난 지휘관

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독일군이 가장 두려워한 연합군

야전 지휘관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패튼 장군! 1943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군단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 지중해를 건너 시실리 섬 상륙까지 눈분신 전공을 휘날리던 그는 야전병원 위문 방문 중에 전쟁의 트라우마로 울고있는 부상병의 뺨을 때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질러서 본국 언론에 두둘겨맞고 그의 육사 후배이자 상관인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명령으로 직위 해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다시 전쟁터에 투입되지만 그의 상관은 역시 육사 후배인 오마 브래들리 사령관이 되어있었습니다. 브래들리 장군은 패튼 장군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반면 패튼 장군은 오만하고, 행동이 앞서는, 다혈질의 성격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전쟁 영화중에 "지상최대의 작전" 못지않게 명작으로 꼽히는 "패튼 대전차 군단"에서 패튼과 브래들리는 매우 친한 관계로 연출되었지만 실상은 서로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어쨌든.................

 

 

(오마 브래들리 장군(좌)은 조지 패튼 장군(우)보다 육사

후배였지만 전쟁에서 그의 상관이었고, 성격도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브래들리와 개인적으로 더 친밀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젠하워도 인간적으로는 패튼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이젠하워에게 패튼은

브래들리보다 훨씬 더 전쟁을 잘 하는 장군

이었습니다. 이런 세사람의 미묘한 관계는 벌지

전투에서 극명하게 보여집니다. )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1970년)에서 묘사되는 두 장군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패튼

(조지 C 스코트)과 브래들리(칼 말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장면)

 

 

아이젠하워 장군은 12월 19일 (공세 개신 이틀 후)에 파리 근교의 베르뎅 요새에서 가진 최고 지휘관 회의에서 패튼 장군에게 그의 제3군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하여 브래들리 장군의 부대를 지원하고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얼마나 걸리겠냐고 물어봤습니다. 이미 준비를 시켜놓은 상황이었으므로 패튼은 단 48시간내에 가능하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즉시 명령하였고 패튼의 3군은 벌지 전투의 격전지가 될 바스통을 향해 출발합니다. (12월 20일 바스통으로 출발한 패튼은 진격로에서 만난 독일 부대의 공격으로 아이젠하워에게 약속한 "48시간"은 지키지 못하지만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바스통에 도착하여 위기에 쳐했던 101 공수부대를 구출하게 됩니다.)

 

 

(벌지 전투 기간 중에 눈구덩이에 쳐박힌 셔먼 탱크가 공회전을 하면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12월 21일 독일군 주력부대 코콧 장군이 지휘하는 제 26 국민척탄병사단이 바스통까지 진격하자 곧바로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 도착해있던 미육군 제101 공수사단 부대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르덴 삼림지대와 바스통 시를 포위해버립니다.

 

 

(노르망디 상륙 이틀 후에 나치 깃발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한 미육군 101 공수부대원,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주인공들인 이지 중대는 101 공수 중에서도 최강의 부대였습니다.)

 

켭켭이 쌓인 눈 속에 참호를 파고 들어가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24시간 제대로 눈을 붙혀보지도 못하고 방어를 하는 병사들에게는 독일군의 공격에 앞서서 그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제3의 적과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참호족"이라고 하는 참혹한 병이었습니다. 이병의 사전적 의미만 보면....

 

 

(1차대전 참호 속에 고인 물에 오랜 시간 발을 담구고

있어야 했던 병사들은 참호족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참호족(塹壕足, 영어: Trench Foot)은 발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축축하고, 비위생적이며 차가운 상태에 노출함으로써 일어나는 질병이다.

 

이상과 같습니다. 하지만 바스통에 미군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참호족은 1차세계대전 당시 참호 속에서 병사들이 겪었던 그 참담한 상황 못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군 군화가 독일군 군화에 비해서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 수의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군화가 눈 속에 쳐박혀 있다 보면 군화 속으로 스며들어간 물기가 제대로 씻지 못한 발에 참호족을 발생시키게 되고 오랜 시간 방치된 경우 병사가 군화를 벗을 때 발가락은 군화속에 박혀서 떨어져나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D-데이부터 용감무쌍한 전공을 쌓아온 101 공수 부대원들이지만 상당수는 참호족으로 인해서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눈밭 속에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자던 병사들 중에는 밤사이에 동사해버리는 경우도 속출하게 됩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포위된 시간이 길어지자 미군측은 식량과 의약품은 물론 점점 탄약까지 떨어져가게 됩니다. 심지어 보유하고 있는 포탄들이 바닥을 드러내게 되자 박격포 사격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을 견디면서 아르덴 숲속에서 전투 중인 미군 병사)

 

(벌지 전투 기간 중에 눈 속에서 살인적인 추위와 참호족을 견뎌내야 했던 미군 병사들)

 

포위하고 있던 독일군은 이런 상황에서 더이상 방어 부대가 저항을 할 기력조차 상실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12월 22일에 항복 권고를 보내게 되는데 101 공수의 사단장 대리 안소니 맥컬리프 준장은 이 통보를 받고는 "NUTS!"(미국식 욕으로 "미친 놈들" 정도가 될겁니다.)라는 짧은 회신을 보냈습니다.

 

 

 (바스통 전투에서 독일군의 항복 권고에 "NUTS!"라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보냈던 안소니 맥컬리프 준장(1898년~

1975년)은 전쟁 후에 육군 대장까지 진급한 후에 퇴역

하였습니다. 그의 짧은 답변을 받은 독일측 지휘관 루트

비츠 장군은 참모에게 그 뜻이 좀 더 "쉬운" 영어 표현으로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는데 참모는 "쉽게 말해서 "GO TO

HELL"이라는 의미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 중에서 아르덴 숲속에서 독일군 탱크들과 보병들의 공세에

맞서 싸우는 101 공수부대의 처절한 전투 장면 - 전쟁은 "폼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육일 뿐임을 5분도 안돼는 시간 동안 극명하게 보여준 명장면입니다.)

 

초인적으로 버티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자신들의 지휘관이 독일군에게 보낸 패기있는 답변이 알려지자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는데 독일군들의 반복되는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방어해내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아르덴 숲에 촘촘하게 들어선 수목들은 정작 공격하는 입장에서 숫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방어하는 적을 일순간에 밀어버리기에 쉽지 않은 조건이었고 반면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포위망을 단번에 뚫을 만한 조건은 못되었지만 참호 속에 숨어서 다가오는 적들을 공격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분명히 포위된 적이지만 독일군은 반복되는 공격 중에 방어하는 적들보다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에 가졌던 숫적 우세는 점점 약해지게 됩니다.

 

 

(바스통 전투 중에 아르덴 숲속에 101 공수부대 바주카 사수들)

 

12월 23일 독일군은 바스통과 아르덴 숲을 보유하고 있던 킹 타이거와 타이거 탱크들을 앞세워서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기로 작정하고 작전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총공세 개시 이후 무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악천후와 짙은 안개는 점점 겉혀지고 연합군이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바스통에 대한 공중 보급과 독일 기갑부대와 보병들에 대한 공중 폭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P-47 썬더볼트 전폭기들은 지상에 훤하게 드러나버린 독일 최정예 기갑부대들을 로켓탄과 기관포 사격으로 파괴해버렸고 바스통을 탱크로 짓밟아버리겠다는 독일측의 최후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제 바스통은 더이상 독일군에게 포위된 풍전등화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스통 마을 폐허 속에 빽빽히 들어찬 부상병들을 위해서 공중 투하된 의약품들 뿐만 아니라 글라이더에 타고 도착한 긴급 의료팀까지 지원되어 불과 하루 전까지 끔찍한 얼음 속에 지옥이었던 이 마을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IV.히틀러의 독선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독일군 총공세의 총사령관인 모델 장군은 생 비트의 점령을 실패한데 이어서 바스통의 점령도 물 건너가게 되자 이번 작전은 수정하거나 아니면 취소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에게 작전 취소 대신 주력 부대를 둘로 나누어 남과 북으로 우회하여 뮤즈강 동부에 도착한 후에 아르덴 지역에 연합군 전체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작전으로 수정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미 광기에 가득 찬 히틀러는 일언지하에 묵살해버리고 "무조건 바스통을 점령하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게 됩니다.

 

결국 모델 장군은 실패할 공격임을 뻔히 알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바스통을 공격하였으나 12월 26일 바스통에 마침내 도착한 패튼의 주력 부대까지 반격에 가담하여 이제는 독일군이 패퇴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군이 비록 패퇴하더라도 얼마나 무서운 군대인가는 퇴각하는 독일군이 추격하는 연합군에게 퍼부운 공격으로 연합군 병력은 공격을 받던 기간 동안에 발생했던 사상자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피해를 입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비록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 퇴각하는 독일군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투력이 상실된 것이 아니고 다만 보급과 숫적 열세로 인한 퇴각이었던 탓에 공격력은 여전히 예리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연합군측 보고에 따르면 신형 킹 타이거 탱크의 가공할 위력은 추격군이라고 생각했던 패튼 휘하의 셔먼 탱크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킹 타이거 못지않은 위력을 여전히 보유했던 타이거 탱크는 물론이고 이제는 독일 기갑 전력에 주력으로써 위치를 잡게 되었던 판터 탱크의 위력도 연합군측에서 내세울 상대로는 셔먼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수많은 셔먼 탱크들을 아르덴 숲속과 벌판에서 희생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탱크들의 연료 부족과 보급의 단절은 아무리 뛰어난 성능이라도 연합군 기갑부대와의 대결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정확히 독일의 총공세가 시작한지 딱 1달하고 하루가 지난 1945년 1월 16일 전선은 총공세 이전으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하루 속히 베를린을 점령하여 히틀러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이 최선의 전략임을 인식하고 총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비록 승리는 할 수 없었어도 몇개월은 더 버틸 수 있었을 전력을 벌지 전투에서 한순간에 무모한 전략을 세워서 쏟아 붓는 바람에 그에게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무장 친위대 기갑부대 병력을 포함해서 무려 25만명의 전력의 1/3에  가까운 8만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최악의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비록 벌지 전투에 승리자는 연합군측이었지만 아래 위키백과에 나와있듯이 사상자 규모는 연합군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1월 23일에 독일 최고 사령부는 작전 취소를 결정하였고 1월 27일 벌지 전투는 사실상 중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투의 중지는 겉잡을 수 없는 독일군의 패퇴를 의미했고 연합군의 총공세는 더 이상 독일군이 공격다운 공격을 취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벌지 전투는 조지 패튼 장군을 다시 한번 2차대전 최고의 영웅으로 명예 회복을 시켜준 전투였습니다. 그와 함께 비록 전투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에게 지울 수 없는 실망을 안겨준 전투였습니다. 아무리 승리하였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브래들리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비록 48시간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바스통에 고립된 101 공수부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패튼의 제3군 소속 최정예 기갑부대들과 셔먼 탱크의 전공은 제3제국의 패망을 앞당긴 결전의 영웅으로써 기록되게 됩니다.

 

한편 이번 독일의 총공세를 진두 지휘했던 나치 독일의 명장 모델 장군은 뼈아픈 패전을 겪고 3개월 후인 1945년 4월 말에 "독일의 원수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945년 쿠벨바켄을 타고 후퇴 중인 발터 모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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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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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2.01 고생은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여러분들 도움 된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 작성자JLPicard(정갑수) | 작성시간 14.02.02 저도 여태 '벌지'의 뜻을 지명으로 알고있었네요. ^^'
    '밴드오브 브러더스'의 '바스톤' 에피소드 좀 다시 챙겨 봐야겠습니다.
    전투기가 P-47 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어느덧 전쟁이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네요.
    이건 뭐 전쟁사의 집대성이라서 빼놓을 내용이 하나도 없이 모두 탐독해야 할 내용이네요.
    이번에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수고 많으신 준만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번창하세요 *^^*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2.02 저도 밴드 오브 브러더스 왕팬입니다. 한 열번 봤을겁니다.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4.02.04 bob에서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에요. 드라마에서도 참 끔찍하게 힘든 상황으로 보였는데 글을 읽으니 훨씬 더 열악했군요. 후~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2.05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정말 명작 중에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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