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의 상황 전개 지도, 대부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전쟁쯤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실상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가 저질렀던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잔악한 행위가 숨겨진 끔찍한 비극의 역사
였습니다.)
제가 현대전 이야기 게시판의 첫 시작을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실 미 공군 F-15와 같은 늘씬한 전투기나 M1 애이브럼스 전차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고 골치 아픈 중동전쟁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대 전쟁사를 얘기해나감에 있어서 중동지역의 긴장 상태와 무기 개발 역사는 같은 흐름에서 전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중동전쟁이 실상은 중동에 두세 국가 간에 국익을 다투는 전쟁이 아니라 냉전 시대 이후에 더욱 복잡하고 모호해진 선악의 대결의 결정판이라는 점에서 좀 더 차근 차근 돌을 쌓아가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무려 4회에 걸쳐서 써내려갔던 제1차 중동전쟁에 이어서 오늘은 1956년에 발발했던 제2차 중동전쟁에 대해서 그런 맥락에서 얘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라고 해서 "수에즈 전쟁"이라고 부르거나 시나이 반도에서 벌어진 탓에 "시나이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에즈"나 "시나이"와 같이 간단한 지명을 붙혀서 부르기에는 이전쟁은 무척 복잡한 열강과 중동 국가들의 국익과 오랜 고대부터 쌓여왔던 민족과 종교의 대립으로 인한 원한 그리고 시오니즘에서 발전한 새로운 증오가 혼합된 배경에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수에즈 운하의 역사
(수에즈 운하가 해상 운송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가 보여주는 간단한 설명입니다.)
수에즈 운하의 의미
수에즈 지역에 운하를 파면 지중해와 홍해로 이어지는 해상 운송로가 엄청나게 단축될 것이라는 것은 기원전 18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이 제일 먼저 생각해냈습니다. 파라오 왕조 세누스레트 3세(재위 BC 1878~1839)때 이미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고자 착공했던 대공사는 이집트 내륙지방까지만 연결되었을 뿐이고 실제 홍해와는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하셉수트 여왕(BC 1479~1458)때도 다시 한번 홍해로 연결하기 위한 공사를 하였으나 결국 성공은 못했습니다. 이집트 왕조는 그후에도 수차례 운하의 추가 공사를 위한 계획이 세워졌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운하는 로시대와 아랍 지배 시기까지 유용하게 사용되게 됩니다. 하지만 AD767년 칼리프 알 만수르왕이 반란군을 막기 위해서 운하를 폐쇄하게 됩니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와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여 영국,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로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프랑스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에 운하에 대한 시도는 다시 시작되었으나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의 차이가 10m나 되고 운하 중간 중간에 거대한 바위들이 많다는 조사 보고를 받고는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보고는 훗날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후 19세 중엽에는 이집트의 정치 지도자들이 만약 운하가 개통되면 외세의 침략으로 자신들이 정권 유지가 힙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탓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제안한 운하 개통의 시도은 무산되곤 합니다. 하지만 1854년에 이르러 이집트를 다스리게 된 무하마드 사이드 파샤는 전에 집권자들과 달리 유럽 국가들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역사상 수에즈 운하를 언급할 때 함께 등장하는 프랑스의 페르디날 드 레셉스에게 운하 공사 특허권과 수에즈 지역 조차권(租借權)을 주게 됩니다.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이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이를 승인하여 1858년 레셉스는 수에즈 해양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운하 개통 후에 99년간 소유권을 이회사가 보유했다가 이후 이집트 정부에게 이양하는데 합의하게 됩니다.
(수에즈 운하의 1등공신 페르디날 드 레셉스(1805년~1894년))
1859년 기공식을 거행한 후에 시작된 공사는 영국의 항의로 순탄치 않게 되는데 이집트에서 수에즈 해양 운하 회사가 수만명의 이집트인들의 강제 노역과 6만 헥타르에 달하는 농경지 조차등이 이루어지자 정작 운하 공사에 대한 지분도 없던 영국은 운하 공사를 정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영국의 항의는 이집트에서의 공사 진척에 심각한 차질을 주었고 애초 계획 대비 경제적인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수에즈 회사는 영국 및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대립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공사비를 프랑스와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이집트의 재정은 파탄이 나고 결국 훼방을 놓아 공사를 차질나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영국에게 이집트측의 지분을 양도하는 어이없는 굴욕을 겪게 됩니다.)
결국 사태 해결을 위해서 1864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중재를 나서서 간신히 해결되고 공사는 속계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869년 11월에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귀빈,명사들이 초대된 가운데 성대한 수에즈 운하 개통식을 갖게 됩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서 런던-싱가포르 해상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시 2만 4,500km였던 것이 운하를 사용하면 1만5,027km로 단축되었고, 런던-봄베이의 경우는 2만 1,400km에서 1만1,472km로 단축되었습니다. 운하의 단면은 수십 7.9m, 수면의 폭은 60~100m입니다.
1964년에 확장 공사로 수심은 14.5m, 수면의 폭은 160~200m까지 확정되었고 5만5천톤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는 규모입니다. 선단이 운하를 통과하는 평균 시간은 약 15시간이 소요됩니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는 항공모함. 미해군의 대표적인 순양함 미조리호가 4만5천톤급이고 일본의
야마토 전함이 6만5천톤급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5만5천돈급 선박이 운하를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가 얼마나 큰 선박이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대충 짐작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수에즈 운하의 기본 상식이라고 한다면....행간에 역사를 말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에즈 운하 공사비는 애초에 프랑스와 이집트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훼방이 공사 차질로 인해서 부담 금액이 커지게 되자 이집트 정부의 재정은 파탄이 나게 됩니다. 결국 이집트는 자기 영토 안에서 운하를 만들면서도 자신들의 지분을 영국에게 양도하게 됩니다. (나중에 영국은 사실상 이집트의 식민 통치 국가가 되었고 그런 탓에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이집트 주둔 영국군과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의 전투가 전개되는 이유입니다.)
일단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권리가 생기게 되자 북아프리카, 인도, 중동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며 식민지를 넓혀가던 대영제국에게 수에즈 운하는 그 3개 식민 지역을 영국과 연결해주는 교통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중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 군단과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도 수에즈 운하만은 악착같이 지켜냈던 영국입니다.
즉 요점은, 정작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에 위치한 운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모든 권한을 소유하고 이집트는 쭉정이 왕따가 되버린 한심한 신세였다는 것입니다....나세르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말이죠.....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양다리 외교 전략
1차 중동전쟁이 진행되던 1948년 그 당시만해도 이집트는 왕이 다스리는 왕정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1952년 군사 구테타가 일어나서 군부는 네귀브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다음 해에는 국왕을 강제 퇴위시켜 버린 후에 공화제로 바뀌게 됩니다. 네귀브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에 주둔 중인 영국군의 철수를 위한 협정을 요구하고 나섰고 미소 강대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비동맹주의를 주장하는가 하면 범아랍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6년 7월 다시 한번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이집트의 두번째 대통령 나세르는 한술 더 떠서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받아서 아스완 댐을 건설하면서 소련으로는 무기 협정을 맺어 소련의 위성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고 하는 양다리 외교전략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냉전 분위기로 첨예하게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영국,프랑스등 서방측은 이런 나세르의 외교 전략에 반대하여 아스완 댐 걸설 자급 지원을 거절했고 이에 나세르는 자신이 쥐고 있는 중요한 카드였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가말 압델 나세르(1918년~1970년), 이집트 2대 대통령이며
이집트 산업 개발에 크게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에서도 박대통령의 정치관의 형성에 있어서 516 구데타 불과
몇년 전에 이집트에서 중령 계급이었던 나세르가 일으킨 구데타와
이후 나세르의 산업개발 성과가 박대통령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소유로 통행료를 걷어오던 수에즈 운하를 나세르가 집어삼키고 게다가 눈에 가시와 같은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시작하자 분노하게 되었고 또 하나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 역시 그동안 자신들의 선박이 편리하게 사용해온 운하의 통과를 이집트가 금지하자 마찬가지로 격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군사 행동을 결정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봤을 때 이스라엘은 일단 옆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바로 이집트 국경으로 뛰어 들어가서 나세르 정권을 박살내줄 믿음직한 동맹국이자 "꼭두각시"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하나만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경우 이라크에서 값싸게 원유를 공급받고 있던 차에 나세르는 이런 관계를 훼방놓기 시작했는데 배경에는 나세르가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려 하였고 영국은 이런 나세르의 행동이 국익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판단하였습니다. 프랑스 역시 당시에 알제리에서 벌어지던 반 프랑스 게릴라들과의 전쟁에서 난데없이 나세르가 개입하여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프랑스 역시 이집트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지만 그보다 더 손쉬운 이집트 공격 방법은 이집트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이미 1차 중동전쟁 때 이집트에게 치명타를 가하였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최신 무기들을 지원받게 됩니다.
(1956년 이스라엘이 프랑스에게 공급받은 미스테르 전투기, 총 110대를
공급받아서 2차 중동전쟁에서 운용합니다.)
(2차 중동전쟁 발발 시기에 이스라엘이 프랑스에서 구입한 AMX-13 탱크)
이스라엘 역시 나세르의 강력한 범아랍주의는 단순히 수에즈 운하의 자국 선박 사용 금지에 더해서 언제 갑자기 나세르가 이집트군을 이스라엘로 진격하게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이집트가 아카바 만과 홍해를 연결하는 티란 해엽을 무력으로 봉쇄해서 이스라엘의 무역 운송에 큰 차질을 주었고 이는 결국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차중동전쟁의 결과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아랍인들을 몰아낸 것이 아닌 탓에 전쟁 후에 9년 동안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아랍 게릴라들과의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고 나세르가 바로 반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점 역시 이스라엘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게릴라 "페다이"에 의해서 키부츠(이스라엘 농경 집단 구역)에 한 지도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모셰 다얀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서 팔레스타인과의 투쟁의 정당성과 함께 유태인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함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 장군 (1915년~1981년), 그의 애꾸눈은
1941년 이스라엘 무장조직 지도자로써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과 함께
나치의 괴뢰정부인 프랑스 비시 정부의 식민지였던 레바논을 침공하는
작전 중에 지붕위에서 쌍안경을 보고 있었는데 적의 저격수의 사격으로
그가 들고 있던 쌍안경이 부서지면서 왼쪽 눈으로 유리 파편이 들어가
실명하게 된 것입니다.)
3개국의 야심찬 전쟁 시나리오 - 일장춘몽
기가 막히게 각자의 국익에 따라서 죽이 맞게 된 3개국, 영국,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외무부 장관들은 프랑스 셸부르에서 모여 3자 회담을 갖고 이집트 공격을 결정하게 됩니다.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이 세나라가 함께 계획한 전쟁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단계,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해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군을 축출하면,
2단계,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해서 마치 중재를 나서는 듯한 태도로 등장해서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 넘겨준 다음에 수에즈 운하는 양쪽의 일종의 중립지역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앞으로도 마르고 닳도록 소유하고 권리를 보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자신의 영토를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에 거대한 시나이 반도 내륙까지 넓히는 엄청난 영토 확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고 이 계획 대로라면 이집트는 완전히 쪼그라들어 버리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나세르 정권은 뿌리 뽑혀서 망명을 나서는 운명이 되었을 것이구요.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머리 속에서 그리는대로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공 개시
어쨌든 1956년 10월 먼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치고 들어가면서 공세가 시작되었고 11월 5일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시나이 반도 최남단까지 모두 점령해버려서 이집트의 완패로 속전속결 끝나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침공 개시 1일 후에 도착한 영국 공수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는 이미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이집트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완전 철군과 정전을 요구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평화유지군"처럼 행세했습니다.
(1956년 11월 시나이 반도에 침공해 들어간 이스라엘군에게 포로가 된 이집트군 병사들)
하지만 낫세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전요구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중이던 선박들을 모두 침몰시키고 폐쇄시켜서 아예 운하를 막아버리고 강경한 실력 행사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1956년 2차 중동전쟁 기간 중에 시나이 반도 해안에 상륙하는 프랑스 보병 부대)
(1956년 11월 수에즈 운하 서안 포트 세드를 점령한 영국 공수부대)
뜻밖에 나세르의 강수에 당황한 영국과 프랑스군은 11월 5일 지중해 함대를 동원하여 북쪽에서 시나이 반도로 침공을 시작했고 특히 영국의 공수부대는 수에즈 운하 서안의 주둔 중인 이집트 군에 기습을 가했습니다.
소련과 미국의 등장
하지만 나세르의 친소 외교전략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서 소련이 개입하는 뜻밖의 상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소련은 핵무기까지 언급하며 만약 이집트의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면 핵무기 사용을 불사하겠다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게 되자 몇개의 나라들끼리의 전쟁에서 자칫하면 제3차대전이자 역사상 최초의 핵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어 갔습니다. 미국 역시 자기와는 상의도 안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멋대로 전쟁을 벌려서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는데 가장 무서운 상대인 소련이 "핵무기"를 운운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과 같은 목소리로 영-프-이스라엘 3국에 전면적인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1956년 당시 소련 최고 권력자 니키타 후르시초프 서기장(1894년~197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민주화 봉기의 영향
(1956년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는 소련의 무장 진압으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침 전쟁 시작 6일 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고 소련이 이를 무자비하게 무력 진압을 시작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맹비난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불과 며칠 후에 "제국주의 침략"의 색깔이 아주 짙은 수에즈 침공이 발발하자 공산진영에 소련과 위성국가들은 일제히 미국과 민주주의 진영을 향해서 맹렬하게 비난을 시작하였습니다.
감히 미국에게 반항을 할 수 있는가?
(노르망디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나치 독일 항복을 받아낸 2차대전
최고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년~1969년)은 1956년 미국 대통령
으로써 영-프-이스라엘 3개국의 수에즈 및 시나이 반도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존재는 비로 대서양 건너 넓은 대륙을 가진 강대국이긴 하지만 그 못지 않은 식민지를 소유한 "대영 제국"이나 나름 넓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보다 훨씬 우세한 위치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2차대전 연합군의 승리는 거의 미국의 군사력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도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고 유럽 대륙이 철저히 파괴되는 동안 진주만을 제외하고 적의 폭격 한번 받아보지 않은 미합중국은 2차대전이야말로 최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탓에 미국(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 집권)의 철군 요구에 대해서 처음에는 영-프 2개국이 대립하는 모습을 잠시 보였지만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때맞침 국제연합이 나서서 중재를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2차 중동전쟁, 영-프-이스라엘 3국의 "겁없는 행동"이 초래한 전쟁 후에 여러 결과들
1.미국이 민주진영의 맹주임을 재확인
위에서 얘기했듯이 미국이 영-프-이스라엘에 가한 압박은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불과 며칠 만에 완전히 장악했던 이들이 고스란히 철수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입김을 가졌음을 전세계에 보여준 반면, 이미 퇴락한 과거의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의 초라한 모습 역시 전세계에 그들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증명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영-프 두나라를 믿고 전쟁에 뛰어들어 야심을 불태웠던 이스라엘은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유태인답지 않는 믿지는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2.핵전쟁에 대한 공포심 고조됨
(냉전 기간 중에 어느 수십번 지구를 거듭해서 멸망시킬 수
있는 엄청난 핵폭탄들을 소유한 미소 양진영에게 핵전쟁의
위협은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위협이었습니다.)
사실 소련은 헝가리 문제가 더 심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걱정했던 것처럼 소련이 이집트를 구원하기 위해서 핵무기까지 동원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사력을 사용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으름짱을 놓자마자 영-프에게 소련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입김을 불어 넣으면서 시나이 반도에서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그만큼 핵전쟁에 대한 공포는 민주진영이나 공산진영 모두 그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운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불과 몇년 후에 쿠바 위기로 인해서 미국과 소련은 또 다시 핵전쟁 발발 가능성을 초 읽기에 들어가는 숨막히는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3.이스라엘 군의 군사력 증강의 호기
이미 9년전 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용감 무쌍"한 군사력은 좁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중동 지역에서 최강의 "짱"으로 위치를 굳히게 됩니다. 그후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군사력 증강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이스라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유린하고 그 넓은 지역에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사실 영-프는 물론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전세계 열강들도 이런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3차 중동전쟁과 4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를 더하면서 중동지역에 가장 두려운 존재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군의 군사력 증강에는 미국의 지원과 전세계 유태인들의 아낌없는 경제력 지원이 큰 공헌을 하였지만 프랑스의 경우 최신예 전투기와 탱크를 최우선적으로 공급하여 이스라엘의 국방력 자립에 큰 기여를 해주었고 불과 몇년 후에 이스라엘은 자국의 자연 환경과 전투 조건에 맞는 독자 탱크 개발 라인업을 가질 정도로 독립적인 군사 강국으로 거듭 나게 됩니다.
4.완전히 스타일 구긴 영국에는 무능한 수상 앤소니 이든
(윈스턴 처칠에 비해서 훨씬 준수한 외모에 영국 신사 앤소니 이든 수상은
제2차 중동전쟁에서 치욕스런 결과로 인해서 결국 수상직을 사임하게 됩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 최고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전쟁 승리 후에 실권을 하고 그를 이어서 보수당의 앤소니 이든 수상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수상 재임 기간 중에 유난히 몸이 병약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올바른 결정을 못내리고 실책을 거듭했던 그는 제2차 중동전쟁의 결과가 미소 양국의 압박과 이집트 나세르의 강경한 대응으로 결국 꼴 사나운 모습으로 퇴각하는 모습이 되어버리자 영국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런 실책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됩니다.
5.이집트 나세르 - 전투에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한 전쟁
영-프-이스라엘 군을 쫓아낸 배경에는 미소 양국의 압박이 가장 주효했지만 배짱 두둑한 나세르의 강경 대응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하자 마자 순식간에 시나이 반도를 빼앗겼던 무력한 이집트군이었지만 어쨌든 전쟁의 결과는 수에즈 운하에서 완전히 영-프 2개국을 축출하였으므로 이집트 국민들과 주변 아랍 열국들이 보았을 때는 나세르와 이집트의 위상은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2차 중동전쟁 이후에 나세르 정권은 안정을 찾고 이후 중동에 맹주로써 쎈 입김을 갖게 됩니다.
6.이집트 군의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
2차 중동전쟁 중에 1956년 11월 가자지구에 칸 유니스와 라파 두 마을에서 총 400명 가까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에 의해서 무참히 학살 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물론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와 전투 행위와는 별도로 전쟁 기간 중에 이스라엘군에 의해서 자행된 학살은 국제연합에 보고되어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불과 15년 전에 바로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었는데 그 짧은 세월이 지난 후에 바로 그 유태인 군인들에 의해서 나치 독일의 죄악 못지않은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학살 사건을 보면서 1차 종동전쟁이 끝난 1949년에 이미 이스라엘은 더이상 우월한 아랍 열국들에 대항하여 돌팔매를 쥐고 있던 불쌍한 다윗 소년이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한 강병을 보유한 중동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골리앗"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고 피에 굶주린 골리앗은 2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눈에 가시였던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주저함 없이 수백명씩 학살을 했고, 불과 한두달만에 시나이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무서운 군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쟁의 피해 - 이스라엘만의 전쟁이었나?
(전사자와 부상자 숫자만 보더라도 이집트군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쟁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영-프 2개국의 희생은 비교
자체가 안되는 수준이고 이스라엘의 경우 200명이 좀 넘는 전사자들에
비해 이집트군의 피해는 그 10배가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1,000명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민간인 살해 결과까지 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살육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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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2.11 하하하 의외로 여러분들이 중동전쟁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과연 관심이 있을까....걱정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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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작성시간 13.12.12 시나이, 티란... 이런 용어들이 나오니 더 흥미롭습니다. 이 전쟁도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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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2.15 4차 중동전쟁까지 끝내면 이스라엘.무기들 본격적으로 심층분석.들어갈.예정입니다.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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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LPicard(정갑수) 작성시간 13.12.14 당시 상황은,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 군사력을 키울만한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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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2.15 이집트 한나라만이라도 정신 차렸으면 이스라엘의.독주 결코 쉽지 않았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