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구빈씨 유래

세계빈씨(世界賓氏)기원(起源)과 대한민국 대구빈씨(大邱賓氏) 유래

작성자빈철성 (賓 哲晟)|작성시간19.11.06|조회수792 목록 댓글 0


세계빈씨(世界賓氏)와 대한민국 대구빈씨(大邱賓氏)의 기원(起源)


 


빈씨정주고려서문(賓氏定居高序文)


 


빈씨(賓氏)는 중화의 오래된 성씨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재에 따르면 상조무정시(商朝武丁時) 기원전 1250년 지금부터 3270년 전 빈씨는 황실(皇室)에서 천문(天門)을 관장하는 중요한 사관(史官)으로 황실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유구(悠久)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이 있는 賓氏 가문이다.


 


빈씨의 발상지(發祥地)는 현재 중국 산동성 제남시 장청구 마산진 최남 빈곡하 일명 남대사하 빈계천(中國 山東省 濟南市 長淸區 馬山鎭 最南 賓谷河 一名 南大沙河 賓溪川)이라고 불렀다.


 


빈씨 조상은 황제를 보필하였으며, 황실의 중요한 요직에 있었다. ()나라 황실은 賓氏를 皇族賓氏로 하명(下命)하고 빈씨를 귀족가문(貴族家門)으로 봉하였다.


빈씨 역사의 기재에 제일 명인으로는 기원전 723~641년 제()나라 대부 빈수무(賓須無)이다.『중국 고사에 제왕(齊王) 환공(桓公) 때였다고 한다. 오랑캐 영지왕(令支王)과 고죽왕(孤竹王)이 각각10만 대군을 이끌고 합세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빈수무(賓須無)장군과 고계(高溪)대장 관추(管秋)장수가 3만명의 군사가 교묘한 계책으로 오랑캐 20만 대군을 모조리 목을 베어죽이고 賓須無장군은 그야말로 전사상(戰史上) 보기드문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전사(戰史)기록에 적고 있다.


중국 광서성 계림시 전주현 대벽두 국제온천관광리조트 지역내에 봉안된 세게빈씨 시조 빈수무 공의 시조 사당


(齊國大夫 賓須無는 賓氏姓 始祖 中華桂林 祠堂 奉安)


 


빈활, 빈기(賓滑, 賓起) 부자는 周나라 경왕(景王)의 중신(重臣) 이었으며 이들은 빈비취(賓卑聚) 빈미인(賓媚人) 빈모가(賓牟賈)등은 모두다 춘추 전국 시기(春秋戰國時期)의 명승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賓牟賈와 孔子는 같은 시대 사람이었으며 孔子(B.C551~B.C479)와는 사제이자 또한 벗이었다고하며 공자는 빈모가와 음악에 관하여 서로 연구하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빈씨는 상주시기 때 국성(國姓 : 성과 본이 임금과 같다)인 대족이었고 전국시기전 많은 재사(才士)가 방출되었었는데 전국시기 후 점차 없어졌다고 한다. 원인은 빈씨가 국성(國姓)이고 또한 왕조(王朝)가 빈번히 교체되는 춘추 전국 시기에 처한 상태라 모두 황실국왕(皇室國王)에 충성하는 賓氏는 멸족(滅族)의 재난을 피할수 없었다.


 


춘추 전국 시기(春秋戰國時期) 왕실에 정변(政變)이 빈번하여 연좌죄(緣坐罪) 혹은 멸족은 흔히있는 일이었다. 賓氏는 이 시기에 참혹한 큰 변화로 걸출(傑出)한 인물은 모두 살해당하여 남은 부녀자와 어린이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게 되었다. 그 후 宋,元 시기 賓氏 황화유역의 산동하남(山東河南) 산서에서 차츰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元 世祖(쿠빌라이칸)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元宗24)과 동맹(同盟) 관계를 맺고 원종 아들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기위해 世祖 6년 빈은후(賓殷厚)공을 고려나라 사절(使節)로 世祖의 딸 미실공주(迷失公主)를 고려 왕실 태자 심()에 혼례하게 하여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고 그후 고려에 정주(定住)하여 고려의 문화사업을 위한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그의 손자 빈서기(賓瑞奇)는 충렬왕조(忠烈王朝) 상장군(上將軍)으로 합단침입(哈丹侵入)을 격파(擊破)하여 특사(特賜)로 수성군(壽城君)에 봉()해졌다.


 


配 長水郡夫人 黃氏 / 父 均庇 / 子 宇光 宇先 宇奎


 


宇光公은 수성현(壽城縣)에서 출생하여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었다.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를 거쳐 동료2명과 함께 元에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회시(會試)를 통과 정시(庭試)에 합격元의 관직(官職)에 나가 한림학사 부제학 대사성 직제학(翰林學士 副提學 大司成 直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의 뜻을 접고 元(송비각 소장 서적)4000여 책을 보내 가져왔다.(1314)


賓宇光 시조(始祖) ; 대구시 동구 도동 산153번지


 


이 책이 유교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 고려 충숙왕(高麗 忠肅王)은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수성군(壽城君)에 봉하고 식읍(食邑)을 내리셨다. 그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조 한림공(始祖 翰林公)은 산림에 은거 현실세계에서 이익(利益)과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에서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生涯)를 마쳤다. 그의 필법용학체(筆法龍鶴體)는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配 진성군 부인 진보이씨 판도판서 실(眞城郡夫人 眞寶李氏 版圖判書 實)의 따님이시다.


 


() 3


 


(장남) ; 應珪 (빈응규)전법정랑 정랑공파(典法正郞 正郞公派)


 


(차남); 應瑞(빈응서) 호 만목당 문하시중 시중공파 (晩穆堂 門下侍中 侍中公派)


 


3 ; 應璂 (빈응기) 생원 송산공파(生員 松山公派)


 


자손이 번창(繁昌)해서 저명한 인사(人士)와 효자 효부 항일투사등 높은 벼슬이 보첩에 늘 이어져 왔다. 이것이 모두 그의 음덕(隱德)이며 유훈(遺訓)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땀샘은 근원(根源)이 있고 신령(神靈)한 지조(志操)는 뿌리가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비유(比喩)한 말일 것이다.


 


유서깊은 유구한 빈씨 성(由緖깊은 悠久한 賓氏姓) 선계고증(先繼考證)으로 근원(根源)을 확립(確立) 명백한 계통 세세상전(明白한 系統 世世相傳) 종친(宗親)은 자부 충효(慈父 忠孝)와 돈목우애(敦睦友愛)를 도모(圖謀)하여 뢰급만방(賴及萬邦)의 대성(大盛)을 기원(祈願)합니다.


 


서기 2019 己亥年 孟夏之節


靜空 日萬 謹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