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당신
깊은 물
사 연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저무는 꽃잎
목백일홍
칸나꽃밭
보리수 나무
접시꽃 꽃씨를 묻으며
가죽나무
여린 가지
꽃잎 인연
우산
폐허 이후
흔들리며 피는 꽃
당신이 떠난 뒤로는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흔들리며 사랑하며
틈
우기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봉숭아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설레임
어떤 편지
부드러운 직선
섬
꽃씨를 거두며
종이배 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라지고 없는 그
둣자리
오늘 하루
끊긴 전화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스승의 기도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가을비
홀로있는 밤에
가을사랑
희망
꿈꾸지 않았던 길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벗 하나 있었으면
귀가
가을잎
아름다운 추억
가을 평야
여기 있는 까닭
각혈
이 세상이 쓸쓸하여
그대 잘 가라
사랑을 잃은 그대에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눈 내리는 길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상처를 안고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떠나는 날
가을밤
산 너머에서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나리소
마음의 열매
여백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내 당신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움이 오면
이 저녁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사랑의 길
꺼버린 불
쓸쓸한 풍경
쓸쓸한 세상
우체통
무심천
겨울 금강
낙동강
우리는 우리끼리 울었어
겨울로 가는 나무 한 그루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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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소개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 시대>에 '고두미 마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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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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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들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의 여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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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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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작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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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아냅니다
수없이 많은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
오늘도 이 거리에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구름처럼 다가오고 흩어지는 세월 속으로
우리도 함께 밀려왔단 흩어져갑니다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먼 곳에 서 있는 당신의 미소를 찾아냅니다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먼 길 속에서 당신은 먼발치에 있고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작게 있지만
거리를 가득가득 메운 거센 목소리와 우렁찬 손짓 속으로
우리도 솟아올랐단 꺼지고 사그러졌다간 일어서면서
결국은 오늘도 악수 한번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지만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수없이 많은 눈빛 속에서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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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꽃잎
가장 화려하게 피었을 때
그리하여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하지 않게 지는 일을
준비하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
화려한 빛깔과 향기를
다만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두기 위해
조바심이 나서
머리채를 흔드는 꽃들도 많지만
아름다움 조금씩 저무는 날들이
생에 있어서는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아름다운 날에 대한 욕심 접는 만큼
꽃맺이 한치씩 커오른다는 걸
아는 꽃들의 자태는
세월 앞에 오히려 담백하다
떨어진 꽃잎 하나
가만히 볼에 대어보는
봄날 오후
詩.도종환
시집<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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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백일홍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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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꽃밭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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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나무
보리수나무잎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당신도 말씀이 없으셔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뒷산 숲도 맞배지붕 위에 내려와
턱을 고이곤 먼 데 하늘을 바라볼 뿐
보리수나무잎만 가끔씩 지고 있었습니다
범종소리 사라진 쪽 바라보며
말이 없으신 당신을 쳐다보다
보리수 그늘 돌아나오는 저녁
쯧쯧, 번뇌의 속옷은 그냥 둔 채
겉옷만 갈아입고 싶어하다니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수 열매가 짧게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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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꽃씨를 묻으며
모든 것이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들판에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이 꽃씨를 묻습니다
이 들녘 곱디고운 흙을 손으로 파서
그 속에 꽃씨 하나를 묻는 일이
허공에 구름을 심는 일처럼 덧없을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은가락지같이 동그란 이 꽃씨를 풀어 묻으며
내가 당신의 순하던 손에 끼워주었고
그것을 몰래 빼서 학비를 삼아주던
당신의 말없는 마음처럼
당신에게로 다시 돌려주는 내 마음의 전부입니다
늦은 우리의 사랑처럼 저문 들판에
접시꽃 꽃씨를 묻으며
잊혀지는 세월 지워지는 추억 속에서도
꼭 하나 이 땅에 남아 있을 꽃 한 송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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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럿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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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가지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어두운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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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인연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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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걷는 길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속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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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히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혀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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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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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난 뒤로는
당신이 떠난 뒤로는
빗줄기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내리고
밤별도 당신으로 인해 머리 위를 떠 흐르고
풀벌레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와 울었다
당신 때문에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지고
당신 때문에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눕고
당신 때문에 가을 빗발이 눈자위에 젖고
당신 때문에 눈발이 치고 겨울이 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자의 편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 속살대지만
나 하나는 당신 편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이 세상 많은 이를 남기고 당신 홀로 떠난 뒤론
새 한 마리 내게는 예사로이 날지 않고
구름 한 덩이 예사로이 하늘 질러 가지 않고
바람 한 줄기 내게는 그냥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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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함께 잡은 손으로 따스하게 번져오는
온기를 주고 받으며
겉옷을 벗어 그대에게 가는 찬바람 막아주고
얼어붙은 내 볼을 그대의 볼로 감싸며
겨울을 이겨내는
그렇게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겨울 숲 같은 우리 삶의 벌판에
언제나 새순으로 돋는 그대
이 세상 모든 길이
겨울강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
그 밑을 흐르는 물소리 되어
내게 오곤 하던 그대여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무엇을 하기에도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할 때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조그맣게 속삭여오는 그대
그대와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너무 큰 것은 아니고
그저 소박한 나날의 삶을 함께하며
땀흘려 일하는 기쁨의 사이사이에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이것이 비록 고통일지라도
그래서 다시 보람임을 믿을 수 있는
맑은 웃음소리로 여러 밤의
눈물을 잊을 수 있게 하는 그대여 희망이여
그대와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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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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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사랑하며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딛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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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서재의 불을 끄고 응접실 스위치도 내리고
빠알간 점 하나 홀로 조용히 뜨겁던 전축의 불도 눌러 끄고
첼로의 낮은 음도 함께 끄고 돌아와 안방 장지문을 닫는다
닫고 끄고 여미고 습관처럼 그 안에 자신을 가두고
안녕 안녕히 지켜온 조심스런 하루
장지문을 닫다가 길게 금이 간 문종이를 본다
창틀 아래에서 끝까지 늘 팽팽히 당겨져 있던 문종이가
날카롭게 찢어져 있다 손이나 무슨 물건으로 찢은 흔적 아니라
문을 닫던 충격이나 그 충격을 타고 달려가던
소리가 갈라놓은 것 같다
시간 시간 긴장하며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반듯한 삶이
그 팽팽함으로 인해 찢어지는 경우도 있구나
조심조심 닫고 차단하고 경계하던 삶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구나
틈이 없는 삶에 빈틈을 열어놓고 바람도 불러놓고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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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
새 한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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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이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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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베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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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움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흐르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아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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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아냅니다
수없이 많은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
오늘도 이 거리에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구름처럼 다가오고 흩어지는 세월 속으로
우리도 함께 밀려왔단 흩어져갑니다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먼 곳에 서 있는 당신의 미소를 찾아냅니다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먼 길 속에서 당신은 먼발치에 있고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작게 있지만
거리를 가득가득 메운 거센 목소리와 우렁찬 손짓 속으로
우리도 솟아올랐단 꺼지고 사그러졌다간 일어서면서
결국은 오늘도 악수 한번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지만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수없이 많은 눈빛 속에서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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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
들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다가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 몇 송이를 골라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다가 그 음악의 가장 가슴 저미는 부분을 모아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강처럼 아름다운 강가에 갔다가 푸른 산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맑은 물과 한 폭의
한국화 같은 풍경 속에 꼭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마음이 푸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이런 시를 읽다 말고 시집을 덮으며 편지지에 옮겨
적게 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판대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물건 하나를 만지작 거리며
몇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하고 솔직한, 그래서 한편으론 통속적이기도 한 유행가의 노랫말 몇 구절이 자신도
모르게 며칠씩 입에서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비록 혼자사랑일지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때처럼 아름다운 때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빗발과 나뭇가지처럼 서로 스미지 못하고 바람과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자기 생에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만큼
아름다운 시절은 없습니다. 그 시절 만큼 마음이 순수해지고 맑아지는 때는 없습니다.
사랑하고 있는 동안처럼 순수하게 설레고 가슴 조이는 시간은 없습니다.
생에 있어서 그렇게 설레는 때가 많이 오는 게 아닙니다. 설레임을 잊은 지 오래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문 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전화벨 소리, 낮은 숨소리 하나까지
온몸의 솜털이 모조리 일어서곤 하던 그 기대와 기쁨과 환희와 좌절과 실망을. 사랑의
기쁨이 왜 고통이고 사랑의 아픔이 왜 행복인지를.
천지에 꽃은 가득가득 피는데 설레임도 두근거림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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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읍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읍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읍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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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잇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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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그대 떠나고 난 뒤 눈발이 길어서
그 겨울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가 곁에 있던 가을 햇볕 속에서도
나는 내내 외로웠다
그대가 그대 몫의 파도를 따라
파도 속 작은 물방울로
수평선 너머 사라져간 뒤에도
하늘 올려다보며 눈물 감추었지만
그대가 내 발목을 감으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무렬이었을 때도
실은 돌아서서 몰래 아파하곤 했다
그대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도 어쩌지 못한
다만 내 외로움
내 외로움 때문에 나는 슬펐다
그대 떠나고 난 뒤
가을 겨울 봄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 곁에 있던 날들도
내 속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외로움으로
나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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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
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
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
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
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
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
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
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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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을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낮선 섬의
감탕받에 묶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 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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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 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 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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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없는 그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른다
그의 얼굴을 소리없이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떨려오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라한다
고통받는 우리 삶의 원인이 버리지 못하는
희망에 있다고 그런 우리 사랑의
비현실성에 있다고 말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를 아직도 사랑하는 까닭에
결국은 우리를 배반하고야 말 희망의
또다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불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그를 찾아 거친 길을 나선다
그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설레고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나는 첫사랑을 만날 때처럼 다시 소년이 되곤 한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되고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안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우리에 대한 기쁨을 버리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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둣자리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
맨 나중까지는 남을 수 있어요
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했고
몇 마디 말로 대주을 휘어잡는 능력 또한 없지만
한 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요
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 없이 섞여 있지만
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꽃 지던 그 봄에 이 길에 발디뎌
그 꽃 다시 살려내고 데려가던 바람이
어느새 앞머리 하얗게 표백해버렸는데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이들이
참을성 없이 말을 갈아타고
옷 바꿔 입는 것 여러번 보았지요
따라갈 수 없는 거장 가파른 목소리
내는 사람들 이젠 믿지 않아요
아직도 맨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못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 세월 속에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가지에요
맨 나중까지 남을 수 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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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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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전화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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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 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리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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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뿌리고 땀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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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기도
날려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뜨거운 가슴으로 믿고 따르며
당신께서 저희에게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개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 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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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마다 노래가 되는 때가 있다
이 세상 많은 시인들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을 흔드는 시를 만나는 때가 있다
뜨겁게 흐르는 것들이 서늘히 이마를 씻어주는 시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 달씩 두 달씩 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의 많은 시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더 바쁘게 읽고 쓰곤 하였지만
시를 만나는 날이 멀어지는 때가 있다
조금은 풀죽은 모습으로 웃어넘기곤 하였지만
시를 버리고라도 더 중요한 것을 찾아
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슨 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제 가슴의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먼저 시를 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먼저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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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읍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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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있는 밤에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 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
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
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
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없이 잠겨 가는데
빗방울 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겨우 몇날 몇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리기만 하면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고독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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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 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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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그대 때문에 사는데
그대를 떠나라 한다
별이 별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내게 오는 그대를
꽃이꽃에 닿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돌아섰듯이
알맞은 시기에 그대를 떠나라 한다
그대가 있어서
소리없는 기쁨이 어둠속 촛불처럼
수십개의 눈을 뜨고 손 흔드는데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아직도 내가 그대 곁을 맴도는 것은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 사는 동네와 그 두터운 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모든 아궁이가 스스로 불씨를 꺼버린 방에 앉아
재마저 식은 질화로를 끌어안고
따뜻한 온돌을 추억하는 일이라 한다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를
생애 오직 한번만 만나도 만나는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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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않았던 길
꼭 함께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 아닌
전혀 생각지 않았던 사람과
지금 이 모래밭에 함께 있구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꼭 하고 싶었던 그 말
가슴속 깊은 우물에 넣어두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말들만
빈 두레박에 담아 건네는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한번은 만나리라 믿으며
못다한 그 말 꼭 해야 한다 생각하버
꼭 걷기로 마음멱였던 그 길이 아닌
전혀 꿈꾸지 않았던 길 걸어온지
어느새 이리 오래 되었구나
생각하는 저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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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나뭇잎 몇개가 떠서 지켜보는 그날의 하늘도
오늘처럼 이렇게 푸르렀을 겁니다
푸르른 가슴으로 그들도 젊음에대하여 생각하고
과일처럼 자라오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보장된 미래와 영예롭게 빛나는
자신의 이름 하나를 가꾸기 위해
제복 속에서 꿈꾸고 행복하였을 겁니다
적어도 식민지에 대하여 눈뜨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내 이웃의 삶과 빼앗긴 땅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사랑하면서부터
이땅에는 피흘리며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알면서부터
그들은 사랑보다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남보다 먼저 깨어 피흘리며 살았습니다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빗장을 걸어잠그고 문을 닫은 채 창 안에서 흘리는
소리없는 비웃음도 받았습니다
물살이 거세면 물살만을 탓하고
불길이 세차면 불길만을 두려워하며
사랑에 대하여 평등에 대하여 정의엥 대하여
한 발짝도 걸어나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등돌리고 서서 질타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모두를 짓밟아온 이민족의 충대 밑에서
아직도 다만 기다려야 한다고만 하는
사람들과도 섞여 살았습니다
용기에 대하여 민족에 대하여
지나치다고만 탓하는 근엄한 꾸지람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땅을 지켜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니다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의 총칼 앞 그 가장 가파른 선봉에 서서
쓰러지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과 야합하여 동족의 등을 밟고 선 사람들의 주먹을 향하여
가장 먼저 팔 걷고 나서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렇게 살아 오랏줄에 꽁꽁 묶여 차디찬 감옥으로
가장 많이 끌리어가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분단된 이 나라 눈물의 이 나라
철조망을 걷어내는 일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함께 걸음을 딛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태극기의 그 절반의 붉은 피를 목에 걸고
목메어 목메어 통일의 그날을 향해 가는 이는
지금 또 누구입니까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그들도 이땅의 많은 이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기대어
투정할 줄 아는 젊은 가슴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장례행령이 끊이지 않는 죽음의 이 시대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버리고 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땅은 진정 누가 피흘리며 지켜오는 나라입니까
이토록 푸르른 가을하늘 밑에
끊임없이 붉은 피 흐르는 이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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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
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은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둠 숲에 버려져 있
었습니다
마음이 닳아 얼굴이 따라 닮는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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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
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
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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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별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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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잎
가을가고 찬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 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주지 않
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
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끝 저리게 하는 기다림을
시선집<다시 피는 꽃>.현대문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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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이 세상에 나 혼자 뿐
엉망인 외톨이라고 생각했을 때,
너는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우정이라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친구야!
그땐 부모보다도 네가 더 고마웠지.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고
하나 하나 새롭게 시작해주었다.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그 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떨까?
자꾸만 자꾸만 달아나고만 싶던 그 날
나와 함께 한없이 걸어주며
내 가슴에 우정을 따뜻하게 수 놓았지
그 날 너는 나의 가슴에 날아온 천사였다.
나의 친구야!
아름다운 추억의 주인공은 바로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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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평야
흔들리면서 가을은 온다.
칼을 보여다오, 친구여
그대 칼의 눈부심을 보여다오.
그대가 벤 것을 보여다오.
무너지면서 가을은 온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쓰러뜨린 것들 앞에 서서 돌아보던
풀 하나 흔들리지 않는
벌판을 보여다오.
무너뜨리기 위하여 가을은 온다.
가을에는
내 살 네 살 베이는 것 아니면
만나지 말자, 가을에는
벌판이 아니면 만나지 말자.
무너지지 않는 한 가을은 가지 않는다
이 가을 한 자루 칼이 되어
네가 오너라,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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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까닭
내 몸이 때묻어 그대 곁에 못가네
내 마음이 망가져 그대 곁에 못가네
그댄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으련만
그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내 마음이 무너져 그대 곁을 떠나네
내 몸이 부끄러워 그대 곁을 떠나네
그댄 아직도 내가 오리라 믿으며 있으련만
이렇게 누추해진 목숨을 들고 어이 그댈 만나리
내 삶이 부끄러워 그대 곁에 못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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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혈
다시는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약속처럼 그대를 받아들일 때
채 가시지 않았던 상한 피 남아
이 신새벽 아내여, 당신이 내 대신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구나.
삶의 그 깊은 어딘가가 이렇게 헐어서
당신의 높던 꿈들을 내리 흔들고
아득히 가라앉는 창 밖의 하늘은
강아지풀처럼 나부끼며 나부끼며 낮아져
맥박 속을 흐느끼며 깊어가는구나
굳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당신의 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목숨을 따라
내가 한없이 들어가고 있구나.
그러나 아침 물빛 그대 이마에 손을 얹고
건너야 할 저 숱한 강줄기를 바라보며
아내여, 우리는 절망일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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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쓸쓸하여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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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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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그대에게
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했고
곁에 있었습니다
저녁노을의 그 끝으로
낙엽이 지는 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당신의 그림자 곁에 서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바람같은 것임을
저는 생각합니다
웃옷을 벗어 어깨 위에 걸치듯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을
벗어 바람 속에 걸치고
어두워오는 들 끝을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저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그대여
당신 곁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신 곁에 없어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별빛 하나쯤은
늘 사랑하는 이의
머리 위에 떠있듯
늦게까지 저도 당신의
어디쯤엔가 떠 있습니다
더 늦게까지 당신을 사랑하면서
비로소 나도 당신으로 인해
깊어져감을 느낍니다
모든 이들이 떠난 뒤에도
저는 당신을 조용히 사랑합니다
가장 늦게까지 곁에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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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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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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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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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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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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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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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차리 5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잡아야 할
그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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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 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로 불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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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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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을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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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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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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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편지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 깊은 침묵이 있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있는 그곳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밀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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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가지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 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 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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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홀로 있는 밤에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
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
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
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없이 잠겨가는데
빗방울 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겨우 몇 날 몇 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리기만 하면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고독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
겨 울 나 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
길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 면이 시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고 반 발짝이라도
~~~~~~~~~~~~~~~~~~~~~~~~~~~~
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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