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평설」
정제된 시감(詩感) 뒤의 시적 감응(感應)
- 김영순 시인,『이슬꽃 잔상』과 영혼의 울림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문인협회 고문)
1. 존재의 시학과 창조적 의미망(網)
모름지기 우리가 직면한 삶의 현상은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극한 대립의 갈등 구도로 치닫고 있을지라도 창조적 영혼은 위대하고 아름답기에 ‘통 큰 용서와 통섭(通涉)’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일관되게 지켜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대통령의 역설처럼 ‘몸소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불가능 또한 가능한 현실로 전환할 수 없다.’ 까닭에 고뇌와 망설임 끝에 그 자신이 등단 직후부터 줄곧 써 모은 순수서정성이 짙게 묻어있는 첫 시집『이슬꽃 잔상』(성원인쇄문화사, 2026)을 출간한 김영순 시인은 평자와 남다른 연이 잇닿은 점도 그렇거니와 40여 년 이상 초등교육에 줄곧 땀 흘린 공과로「황조근정」훈장의 수혜자다. 한편 지난 2018년에 월간『문예사조』를 통해 시와 수필 부문의 신인상 당선자로서 탯줄 묻은 향리(鄕里)에 거처하며 지역의 문학에 깊은 애정을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이며 현재「한국생활문학회」의 이사이다.
특히 첫 시집 편집의 구도처리는 결(結) 고운 모직물처럼 자서(自序)인「꽃의 차별성과 합리적 해법」에 맞물린 치밀한 5단 구조로 ‘내면의 서사, 고독과 성찰, 겨울의 안식과 역경 극복으로 삶의 굴곡과 뼈아픈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며, 차분한 성찰과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제1부 : 침묵의 마디에 드는 햇볕(11편)」, 또 ‘신앙의 여정, 구원과 성령의 빛, 하느님의 손길로, 성지에서 얻은 깨달음과 끊임없는 묵주기도로 창조주의 손길에 순명하는 영혼의 고백’인「제2부 : 장미 묵주, 빚어지는 아가페(15편)」와 ‘강릉의 바다와 호수, 습지의 비경과 전설을 비롯한 화자(話者)의 삶의 처소와 '물과 바람'이 빚어낸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사색의 담론을 펼쳐 놓은’「제3부 : 경포 윤슬이 깨우는 서정(12편)」과 ‘대자연의 순리와 사계, 연어와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 또 금강산과 태백산의 웅장한 기운, 세월을 거스르는 연어의 투혼의 위대성을 결합한’ 개아의 차별성이 못내 돋보이는 정조(情調)다.
각론하고「제4부 : 삼라만상에 깃든 창조의 숨결(22편)」,「그리고 끝내 ‘비 갠 앞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나누던 유년의 추억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혈연의 매듭을 인생 최고의 은총으로 응축한’ 제5부 : 오작교 건너 그 평상 위로(12편)」 이같이 총 75편을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언어의 그물망을 결(結) 곱게 직조한 담백한 시격(詩格)은 끝내 신선한 충격이다. 까닭에 문제 외재화(外在化)의 합리성을 살려내기 위한 적절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 평자의 시집 평설인「정제된 시감 뒤의 시적 감응(感應) - 김영순 시인, 『이슬 꽃의 잔상』과 영혼의 울림」의 모두(冒頭)에서 그 자신의 시집 간행에 삼가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그렇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되 항시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삶의 잠언(箴言)을 그 자신의 심장에 깊이 간직할 일이다. 또 한편 불립문자인 구도 정진의 정황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꽃향내 피워내는 식물성 언어로 소통의 자유로움을 위한 지난(至難)한 몸짓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은 그 자신의 존재감 빛나는 건강한 서정성을 접할 수 있다. 그 같은 일면에서 ‘이 지상의 지극히 위대한 이름, 그 생명의 본원(本源)인 어머니’의 존재감은 ‘희망의 징표’이기에 “이웃에 대한 평화와 행복의 자세로/사랑하고 봉사하며 살라던 당부 말씀에/어머님의 빈자리 진실한 사랑의 매듭이다.(어머님의 빈자리)”라는 그 감회(感懷)로 비장감이 묻어난다.
차제에 응당 인류가 감사하고 존경해야 할 프랑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그 역설을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祖國)이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현상’에서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DMZ 그 현장을 지켜보면 처연(悽然)한 심사로 이 같은 공감대를 절감하기에 결코 거부감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립던 가족의 뼈아픈 상흔(傷痕) 아물지 않은 채/철조망으로 묶인 무시무시한 지뢰밭 DMZ,/평화로이 조국의 따뜻한 품에
포근히 안겨 잠드소서./영혼의 아픔도 초인적 자세로 이젠 잊으소서.//
어김없이 찾아드는 변함없는 사계절/가슴 속 깊이 겹겹이 그리움만 남겨둔 채/천상에서 영광스런 면류관 쓰시고 누리소서/
DMZ엔 오늘도 묵언수행(默言修行)이다.//
-「 DMZ 그곳엔 오늘도 묵언수행(默言修行)」에서
위에 인용한 따뜻한 감성의 시적 정감도 그렇거니와 그 자신이 ‘소용돌이쳤던 마음들을 잠재워주었던 너. 겨울 바다여, 너는 알고 있었는가?’라는 반문 앞에서 끝내 “이젠 어찌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잊어야만 할 아픔의 상처들을 어찌하리요.(겨울 바다여, 너는 알고 있었는가?)”의 보기나 “호기심에 가득한 등반객의 따뜻한 휴식처다./얼어붙은 아름다운 소통 역할 장소/오가며 들리는 응당 정(情)다운 처소다. (눈 덮인 겨울 산장)”라는 그 확신은 ‘아득한 옛 기억 눈에 삼삼해 잊지 못해 다시 찾는 눈 덮인 겨울 산장의 그 적막감’은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는 다정다감한 관심사다.
2. 의미론적 순환과 존재의 미학
모름지기 그 자신의 시편에서 지속적인 감응(感應)은, 일상의 삶에서 접하는 자잘한 현상이 때로는 파괴적이고 동물적이나 경계의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그의 고뇌(苦惱)가 시적 인식의 깊이에 잇닿은 점은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묵언으로 응시할 일이다. 차제에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존엄한 존재로서 생명력 있는 언어로 죽어가는 대상도 사랑해야 하고 생명적인 형상으로 빚어내는 그 소임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의 생태주의 사상가인 머리 북친(Murray Bookchin)의 지적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무너트려야 한다.
까닭에 시집의 목차「제2부 : 장미 묵주, 빚어지는 아가페」에 수록된 시편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화자(persona)가 시적으로 형상화한 성모발현(聖母發現)은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마리아는 전형적인 멕시코 원주민의 형상이다. 까닭에 ‘은총의 한순간 성모님의 그 가르침에 빛나리라.’라는 찬사로 “한 생애 가장 잘 선택받은 하느님의 자녀로/순전(純全)한 파티마 성모님 파이팅이다./끊임없이 쎌 기도의 리더로 구원을 받는 날까지,(파티마(Fatima) 성모님)”의 일면 뒤 “오감(五感) 통해 들려주는/놀랍고도 찬란한 광채로/끊임없는 주님의 말씀이다.(성령의 빛)”에 맞물린 시편은 끝내 엘로힘(Elohim)에게 드려지는 영혼의 기탄잘리(Gitanjali)다.
특히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 허락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진실로 신비한 ‘로사리오 기도’ 또한 “성모님이 모은 사랑의 손에서/구원의 밝은 빛을 보는/신비하고 오묘한 천사들의 기도다.(로사리오 기도)”도 응당 그렇거니와 맑은 영성(靈性)으로 천상에 올려지는 “격랑(激浪)의 세월 속에서/흔들리던 삶의 갈등 속에서/확고하게 길 밝혀준 신앙의 힘!(신앙의 버팀목)”은 그 자신의 집념에 의한 담백한 간증(干證)이다. 그 같은 일면에서 영국의 시인 스펜더(Harold Spender)가「시작의 과정(a make of poem)」에서 “주의집중, 기억력, 영감, 신념, 음악성”에 관하여 논의하였듯, 순수서정시의 극대화가 가뜩이나 어려운 시간대에 ‘따뜻한 감성과 매혹적 형상’으로 시적 상상력을 응축시켜 형사(形似)한 그 자신이 감동의 회복을 위한 고뇌는 눈물겨운 정신작업으로 새삼 충직한 독자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일 따름이다.
차제에 세계적 시성(詩聖)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사랑의 헛수고』(4막 3장)에서 “사랑이 말을 할 땐 천상의 모든 신이 소리를 맞춰 합창하며 온 하늘 전체가 황홀해진다.”라고 기술하였듯 비교적 시문학의 지형도를 펼쳐 보이는 그 자신의 시편은 끝내 철저한 종교성의 반영으로 “얼어붙은 응어리진 마음의 십자가 되어/생명 나무의 상징, 눈물로 절감(切感)하는가? (부활의 삶을 꿈꾸며)”라는 보기에서나 “모진 고통도 삼키며 굳게 믿었어요./꿈틀거리는 심장의 역순환도 극복하며/초원의 저 너머로 예언되었던 약속된 사랑. (은총의 눈물로 말끔히)”도 그렇거니와 “오직 그분의 말씀 따라/‘하느님의 위대하심’(이사 40:12-26)/신앙의 중심에 삶의 축을 주축으로/선혈의 뜻을 되새기며/증거자의 그 삶으로 살리라.(순교자 신앙의 복음)”에서 믿음의 결단과 확증은 못내 이채롭다.
또 한편「경포 윤슬이 깨우는 서정」에서 ‘누구의 마음이 ‘이슬 꽃’ 되어 맺혀있을까? 알알이 모아 깨끗한 줄에 꿰고 싶다.’라는 그 자신의 신선한 충동감은, 칠레의 시인 비센떼 우이도부로(Vicente Huidobro)가 시학의 근본원리를 ‘현실의 해체와 변형’으로 의식하면서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것이 ‘감성적 시학이며 예술임’을 지적하였듯 김영순 시인은 진정한 시인은 창조자로서 ‘작은 신’이 되는 체험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그 같은 시적 작위(作爲)로 삶의 현상을 해체하는 힘의 연계 층위로 표제 시격(詩格)에 담아냄을 충직한 독자라면 세심히 심사숙고할 일이다.
삶의 참 의미와 깨달음 주고/잠자던 무딘 마음도 깨우쳐 주면서/사유(思惟)에 잠기게 하는 ‘이슬 꽃 잔상’//
때로는 폭염(暴炎)의 태양 아래서/그 목마름에 또 애태우면서도,/거침없는 아름다움자랑하던/경이로운 크리스탈의 향연(饗宴),/
흐르는 시간의 무게 속에/어디론가 사라진 ‘이슬 꽃 잔상’/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을까?/창조자의 위대함에 경탄(驚歎)할밖에.//
-「이슬꽃 잔상」에서
이처럼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풀벌레 소리 멈춘 늦가을 들녘 농부의 발걸음 바쁜 하루’일지라도 그 자신의 특이한 시적 양상은 전위(前衛)나 실험시의 극단성을 지양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에서 묻어나온 감미로운 정감(情感), 그리고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위대한 창조적 영혼은 직물 대상을 결합하는 매개적 정신 능력에 맞물려 있다.
그 같은 일면에서 동시대의 문인 중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각별한 연유로, 관광명소나 유서 깊은 자연풍광은 하나같이 예외일 수 없기에 “또 걸어도 지칠 줄 모르는 용기로/영혼의 아픔까지도 치유되는 방패/‘강릉 바다부채길’, 신선한 감동이다. (강릉 바다부채길)”에서 다시금 확증되듯 “오늘도 내일도 그 순결한 영혼이 한데 모여/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사랑으로/『홍장암』에 서린 전설 영원히 꽃피리라.(『홍장암』에 서린 전설)”에서 그 동기부여는 각별하다. 까닭에 다소 호흡이 단조로우나 서정성이 섬섬(閃閃)한 ‘밝은 햇살 가득 품고서 어우러지는 멋진 교향악 오케스트라의 향연(饗宴)’에 맞물린 시적 형상화로 “잊을 수 없이 펼쳐지는 경이로운 장관들./햇빛, 달빛에 더욱 빛나는 자연의 울림(波動)/우리 가슴 곳곳 환히 밝혀주는 빛의 예술이다.(황홀한 윤슬의 여름 축제)”의 보기에서나 “아득한 그 옛날 추억의 장으로/아낌없이 베풀고 있는 여유로움!/기적적으로 놀랍게도 소생된/강릉 경포습지 가시연꽃 군락지다. (가시연의 소생)”에서 그 자신의 의연한 집념의 차별화로 ‘경포 늪지 지킴이로 식물역사의 고증 켜켜이 이어가리라.’라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시민의식은 평생을 이 땅의 초등교육을 올곧게 지켜낸 그 자신의 삶처럼 못내 미더울 따름이다.
각론하고 그 자신의 시적 정황에서 “시적 형상화의 쌓기와 허물기”의 반복 작업은 신표현주의를 표방한 화가 안셀롬 파커(Anselm Kiefer)의 “현실적인 모든 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그 이론과 차별성을 지닌 시적 해법과도 무관치 아니하다. 까닭에 따뜻한 감성의 시편으로 ‘오감의 환성(歡聲), 울려 깨우는 성령의 부르심 따라 꽃 피우리라.’ 그 자신의 기대감은 “생의 마지막 그날까지/찬미의 노래 부르며 행복한 미래로/영원한 천년 생명의 양식으로/끊임없이 또 그렇게 거듭나리다.(생명의 신비·2)”라는 결의에 찬 집념에 그 존재감은 더없이 빛남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관계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훑어 후비며 빚어내는 사계의 신비(神祕)다.’라는 탄성을 한껏 울린 끝에 자연의 위대함에 때로는 영탄법을 쏟아내며 “자연의 법칙에 끝내 순종하리니/세월이 흘러도 사계의 신비는 영원하다.(사계의 신비)”라는 그 자연에 대한 찬사는 경건한 종교성과의 놀라운 합일이다.
특히 생생한 일탈(逸脫)의 정신을 축으로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로서 자연에의 회귀를 시각화한 행위는 탈진(Burn-out)된 생명 외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정신적 현재성으로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까닭에 언어공해가 심각한 사각의 도시 공간에서도 그 자신의 시적 교감(交感)은 “단군(檀君)에 얽힌 눈부신 설화(說話)에/백두대간 줄기차게 뻗어내린 중심봉우리,/태백산의 상고대 그 위상 황홀경(怳惚境)이다.(태백산 상고대)”의 일면이나 또 ‘쏟아져 내린 봄볕이 길러낸 미화 봄의 전령사 영춘화(迎春化)’에 대한 그 나름의 찬탄과 경이로움은 “영혼의 아픔까지 위로해주는 그 기품/언제나 순결하고 청순한 너를 못 잊어.(봄의 전령사)”와 맞물려 한순간 격정으로 치닫던 불안감마저 끝내 생명감을 안겨주는 유의미한 정신작업이다.
각론하고 초조와 망설임 끝에 묶어낸 그 자신의 시편에서 맑은 영성이 깨어있는 그 자신의 경우, 짐짓 ‘일상의 개아(個我)에 현대성을 융합시킨 진술시와 묘사시’를 비중 있게 구도 처리한 추이도 새삼 지켜볼 점이다. 까닭에 이채롭게도 ‘유달리 아름다웠던 금강산 팔 선녀탕’을 그 자신이 능란한 화가의 붓놀림으로 화폭에 담아 정신 풍경화로 빚어낸 “높은 산자락 샘솟는 폭포와 자연이 빚은 땅./놀라우리만치 오묘한 비경의 금강산 팔 선녀탕, (금강산 ‘팔 선녀탕’)”도 그렇거니와 단조로운 호흡과 나직한 음조로 읊어낸 “언제 어디서나 영글어 갈수록 가치가 높은 건/누구에게나 소탈하게 환영받는 존재인 까닭이다.(여름날 넝쿨의 싱그러움)”에서의 시적 정감은 ‘굽이쳐 흘러내리는 신비한 생명수로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임’에 틀림이 없다.
3. 맑은 영혼의 울림과 시적 상상력
차제에 그 자신의 시적 차별화는 생태주의(Ecotopia)의 색채감에서 기인(起因)된 연계성이기에 경계 해체의 비법을 숙련된 솜씨로 유감없이 활용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고뇌와 집념은 동질의 직물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투시하는 시적 투사로 새롭게 시의 지평을 열어놓은 잠시의 숨결 고르기로, ‘자기만의 육성, 느낌을 담아 정렬화한 언어의 밀도 있는 조명이기’에 동시대의 충직한 독자에게 일체 갈등의 요소를 충동하지 아니한다. 까닭에 에밀 슈타이거(E. Steiger)가 서정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懷感)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는 역설처럼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성은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하는 공감의 영역을 확장하는 가능성이 주어지기에 혈연의 관계 층위 또한 가정에 관한 지극한 관심사이다.
그 같은 일면에서 ‘노란 산국(山菊)의 향 맡을 여유도 없이 천진한 손주들의 재롱 못내 보고파’ 또 그렇게 “힘든 일도 지나치고 ‘쿵덕쿵! 랄랄라!’/아이쿠나, 신바람 솔솔 손주들 사랑 노래다.(은총의 삶)”의 일면도 그렇거니와 비록 이미지의 형상화인 따뜻한 정감의 시적 작위는 ‘해맑은 손주의 눈동자 보고픈 충동에 놀랍게도 한순간 단숨에 지나칠 정도로’ “두 볼 보조개의 손주들 만만세다.(손주의 향기)”라는 그 상황의 끝맺음은 진정한 삶의 환희요, 축복받은 은총(恩寵)의 눈부신 편린(片鱗)이다. 또 한편 그간의 시적 열정을 쏟아부은 끝에 향토적 자연과 사물 속에서 자서전적 삶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깊은 사유와 고뇌의 결과물을 빚어냄은 못내 뜻깊다. 까닭에 그 자신이 날刃 푸른 비평의 시선으로 예리하게 응시하면서도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그 소임을 자인하였기에, 투명한 눈물을 머금는 생명의 존엄성은 마치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가 “작가와 작품은 별개이다.”라는 그 역설처럼 창조적인 재현再現에 맞물린 시적 행위가 그 자신의 불꽃 같은 열정과 사유에 잇닿아 있음은 더없이 자명한 분위기다.
각론하고 치열한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지식정보화시대에 아일랜드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무관심은 죄악이다.”라는 역설은 지혜로운 삶의 교시(敎示)다. 짐짓 갈등과 모호성 다음에 그 자신이 맞는 한순간의 놀라움은 천상을 향해 비상하는 생명의 언어, 넘쳐나는 영혼의 은총인 탓에 긍정적인 시 정신은, 독자들의 관심을 흡입하는 시적 매력이다. 따라서 시적 영토를 가꾸기 위한 황혼 녘 삶의 일면이지만, ‘노부부의 자랑이라 보고 또 보아도 자꾸만 보고픈 정겨운 심사(心事)에 하루 해도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라는 솔직 담백한 술회(述懷)로 “두 볼 보조개로 가득히 채워지는 얼굴/힘든 일도 절로 잊고 얼씨구다.(창조주의 은총)”에서 놀랍게 확증되는 신선한 충격이며 감동의 회복이다. 또 한편 시적 구도가 기승전결(起承轉結)로 함축된 ‘하늘의 별, 지상의 꽃, 그리고 마음의 시’라는 시편「풀꽃 사랑이여」는 순수시의 본말(本末)인 서정성을 확증한 결과물이다.
삶의 애환(哀歡) 떨치고 저만치 달아나/따사로운 봄볕도 잘 견뎌낸/모질게 딛고 일어선 풀꽃 사랑이다.//
여름밤 은하수(銀河水)의 다리 건너/풀잎 이슬로 쓸어내린 삶의 고뇌(苦惱)/맑은 영혼의 그 놀라운 사랑이다.//
-「풀꽃 사랑이여」에서
차제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호대비 시키는 그 자신의 시적 발상은 순백의 언어로 정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의 경이로움에 견주어진다. 그의 시적 음계는 연계 음이 자리해 ‘존재의 사라짐’을 서정적 미감으로 수용한 이상성(Ideality)과 시 의미의 추구 또한 이채로워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거부감이 없다. 푸른 식물성 언어를 통한 그 자신의 시 의식은 마침내 “싱그러운 과육의 상큼 달콤한 맛의 조화에/온유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멋의 상승이다.(하느님의 오묘한 손길)”도 그렇거니와 ‘비록 한 치 앞 예상 못 하는 삶의 일상에서 무릎 꿇고 순종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리라.’라는 그 자신의 신앙적 일체감 뒤 “아득한 본향(本鄕)을 향하여/냉철한 현실을 차분히 밟으며/끝내 나아가리라. 미래의 파라다이스(Paradise)*(본향을 향하여)”라는 결의도 이채롭지만, 그 자신이 단조로운 선율과 담백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끝내 천상을 탯줄 묻은 고향으로 연계 맺은 신앙적 행위랄까? “강릉 남대천의 그 갈매기 떼/가만히 묵언으로 응시(凝視)하면/갈매기 그 사랑의 밀어는 다정다감이다.(강릉 남대천 갈매기들)”라는 고향에 대한 일편단심은 더없이 매혹적이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 독자의 관점에서 그 자신에게 거는 절박한 기대는, 현대시문학의 밝은 미래는 서정성을 통한 감동의 회복과 맞물려 있기에 상처받은 영혼을 삶의 잠언으로 교시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지녀야 한다. 까닭에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비상의 날갯짓으로 맑은 영성을 통해 이분법으로 치닫는 현재성을 시대적 소임으로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모쪼록 암울함 속에서 물상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침 없이 탐색하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초연하게 자존감을 지켜내되 시의 불꽃을 온전히 지펴내는 정신작업을 끊임없이 수행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