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착검한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궁궐 안까지 거리낌없이 드나드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어전회의는 일본 제안을 거부한다는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절대불가론,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도 이에 동조하였다.
5개조로 되어 있는 늑약문은 외교권 접수,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하였는데, 이로써 한국의 대외교섭권이 박탈되어
늑약의 강제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장지연(張志淵)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한편 고종은 1905년 11월 미국에 보낸 전문(電文)과 1906년 1월 국서를 통해 이 늑약이 불법·무효임을 주장·선언한 데 이어,
을사늑약에 분개한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해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에서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 등이
-------------------------------------------------------------------------------
| 구분 | 일어 | 한국어 |
| 전문 | 日本國政府及韓國政府ハ兩帝國ヲ結合スル利害共通ノ主義ヲ鞏固ナラシメムコトヲ欲シ韓國ノ富強ノ實ヲ認ムル時ニ至ル迄此目的ヲ以テ左ノ條款ヲ約定セリ |
한국 정부 및 일본국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부강해 진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의 조항과 같이 약정한다.
|
| 제1조 | 日本國政府ハ在東京外務省ニ由リ今後韓國ノ外國ニ對スル關係及事務ヲ監理指揮スへク日本國ノ外交代表者及領事ハ外國ニ於ケル韓國ノ臣民及利益ヲ保護スへシ |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금후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감리 및 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대하여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한다.
|
| 제2조 | 日本國政府ハ韓國ト他國トノ間ニ現存スル條約ノ實行ヲ全フスルノ任ニ當リ韓國政府ハ今後日本國政府ノ仲介ニ由ラスシテ國際的性質ヲ有スル何等ノ條約若ハ約束ヲナササルコトヲ約ス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지금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 없이는 어떠한 국제적 성질을 가지는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다.
|
| 제3조 | 日本國政府ハ其代表者トシテ韓國皇帝陛下ノ闕下ニ一名ノ統監(レヂデントゼネラル)ヲ置ク統監ハ專ラ外交ニ關スル事項ヲ管理スル爲京城ニ駐在シ親シク韓國皇帝陛下ニ内謁スルノ權利ヲ有ス日本國政府ハ又韓國ノ各開港場及其他日本國政府ノ必要ト認ムル地ニ理事官(レヂデント)ヲ置クノ權利ヲ有ス理事官ハ統監ノ指揮ノ下ニ從來在韓國日本領事ニ屬シタル一切ノ職權ヲ執行シ並ニ本協約ノ條款ヲ完全ニ實行スル爲必要トスヘキ一切ノ事務ヲ掌理スへシ |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한 명의 통감(레지던트제네럴)을 두며, 통감은 모든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여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할 권리가 있다.
또한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레지던트)을 둘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주한국 일본영사의 업무에 속하던 모든 업무를 관장하며,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사무를 관리한다.
|
| 제4조 | 日本國ト韓國トノ間ニ現存スル條約及約束ハ本協約ノ條款ニ抵觸セサル限總テ其效力ヲ繼續スルモノトス |
일본국과 한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
| 제5조 | 日本國政府ハ韓國皇室ノ安寧ト尊嚴ヲ維持スルコトヲ保証ス |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고 보호한다.
|
| 결문 | 右証據トシテ下名ハ本國政府ヲリ相當ノ委任ヲ受ケ本協約ニ記名調印スルモノナリ |
이상의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본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날인한다.
|
| 일본측 서명자 | 明治三十八年十一月十七日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
| 대한제국측 서명자 | 光武九年十一月十七日 外部大臣 朴齊純 | 광무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 이 조약을 근거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고종황제의 무효 선언
이후 고종 황제는 을사 체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29일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22일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22일 프랑스 대통령에 보낸 친서 ▲1907년 4월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1905년의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을사조약 체결당시 강박(强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을사조약)이 무효’라고 밝혔다.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에서 제2조 사항에서 다음과 같이 무효를 선언하였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을사조약의 성격과 의의는 무엇일까?
1. 자료 1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실상 동양 삼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 후작이 본래부터 주장하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성의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2. 자료 2
●비운의 해 1905년
1904년 1월 일본 해군의 뤼순(旅順) 항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은 1905년 1월에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진입한 일본군이 뤼순-다롄(大連)지구를 점령하고 이 해 5월에는 러시아 해군의 주력인 발틱 함대를 대한 해협에서
격전 끝에 섬멸시켜 버렸다. 더 이상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된 러시아는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의 신참자 일본은 세계 열강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전쟁은 20세기를 특징 지은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고 러시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원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어떻든 청·일 전쟁에 이어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풍전 등화 같은 대한 제국의 운명에는 치명적·파멸적 결과를 몰고 왔다.
비운의 해 1905년. 그것은 한반도에서는 ‘을사조약의 해’요, ‘시일야방성대곡’의 해가 되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오랜 쇄국의 빗장을 열고 어지럽고 낯선 세계 속에서 늦잠을 깬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 열강과 상호 양해의 그물을 짜서 한반도를 집어 삼킬 준비를 착착 실현해 가고 있었다.
1905년 7월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같은 해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뒤이어 9월에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자
일본은 이제 열강의 승인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 조약을 강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 11월 한국에 도착한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정부 각료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거듭한 끝에
고종 황제와 참정 대신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 오적’이라 일컫는 ‘다섯 대신만으로 회의를 열어 이른바
‘한일 협상 조약’이라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일본 군인들의 무력 시위 속에서 남의 나라 궁중에 헌병 사령관까지 대동하여 강제 개최한 어전 회의에서,
그것도 외국과의 조약 체결권을 가진 황제의 재가도 못얻은 한일 협약이란 마땅히 ‘불법’이요,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이 ‘양육 강식’을 일삼던 20세기 초의 국제 정치에서는 ‘힘’이 ‘법’이요, 힘이 없는 정의야말로 ‘무효’였다.
불법적인 을사조약은 따라서 강력한 일본이 무력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대한 제국의 강토에 일본의 통감부를 둔다는
그 내용을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유효였다. 그리고 외교권의 박탈은 실제적으로는 국권의 박탈과 다름이 없었다.
힘이 법이요, 힘 앞에서는 불법도 유효한 현실이 되는 기막힌 역사 속에서 힘 없는 겨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황성 신문의 대논객 지연의 이 날 논설처럼 ‘목을 놓아 통곡’하는 일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자결’하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억울한
국권 침탈의 울분을 터뜨렸다. ‘자강 운동’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을 강하게
하자는 대한 자강회 등 단체의 설립도 있었다. 을사 오적을 암살 처치하려는 의열 투쟁도 있었고
그보다도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 의병 항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망국의 비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절망적인 울부짖음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 문화 일보 98. 03. 23. ]
3. 분석 및 개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가 보이자 그 해 8월 외부 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공사 사이에 ‘외국인 용빙 협정’을 체결시켜
한국 재정에 대해 직접적인 간섭을 시작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 회담이 열려
(포츠머스 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열강이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포츠머스 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협약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 대신 박제순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한 후 정동의 손탁 호텔에서 참정 대신 한규설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 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 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법부 대신 이하영이었고, 학부 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 오적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칙재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 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 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한 을사 오적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 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 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 보호의 최고 감독 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 법과 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 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 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