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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교실

[동양사]인도-굽타왕조

작성자푸른날개|작성시간08.09.02|조회수871 목록 댓글 0
인도 북동부(지금의 비하르 지방)에 있던 마가다 국을 지배한 왕조.
굽타왕조는 고대 인도의 통일왕조로서 기원후 320~550년경 인도의 북부지역과 중서부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창건자는 찬드라 굽타 1세이다.
십진법과 산스크리트 대서사시 및 힌두 미술을 낳았고, 천문학·수학·야금술도 발달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浮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마우리아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가리켜 불완전하나마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기본 골격인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으나, 그 세력권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마가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세력가 집안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서서히 왕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조는 제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을 계기로 비로소 인도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한낱 지방 공국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의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를 혼인동맹의 상대로 삼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굽타 왕조가 그 계급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시기가 320년경이기 때문에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알하바드
지역에 해당하는 프라야가에 세워졌던 석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무드라 굽타는 델리 주변과
우타르프라데시 서쪽에 있던 4개의 소왕국을 정복했으며, 동인도와 남인도의 군소 왕국들로부터도 충성을 맹세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영역이 현재의 마드라스 지역인 칸치푸람의 동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갠지스 강 서쪽 유역인 아리아바르타 지역의 8명의 왕도 무력으로 평정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써 인도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명실상부하게 인도 전역에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찬드라 굽타 2세는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1세의 이름을 딴 군주로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영명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375~415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이었다.
이들간의 세력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서북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서북 지방의 항구도시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과도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405~4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남긴 〈불국기 佛國記〉에 의하면
 당시의 굽타 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한 예로 찬드라굽타 2세는 산스크리트 극작가인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둘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 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굽타 왕조도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프탈족
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역대의 왕들은 더이상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의 민족적 이동과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면서 여러 군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 때 일어난 나라들이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이다.
이들간의 각축장에서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일정 기간 인도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그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로 불릴만큼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이때 활약했던 칼리다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최고 극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물 등의 조형물에서도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승원(僧院 vihara)과 예배소(chaitya) 등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이유는 8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철저한 파괴행위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힌두교는 그 세력을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가지만,
불교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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