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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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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 |||||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1869년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명이 6월부터 12월까지 대거 이주하니, 이를 ‘경오도강(庚午渡江)’이라 부른다. 이들의 이주는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 당국은 그런 한인의 이주를 환영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식민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슬로건 아래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크게 늘어가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께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외품자리’라는 떠돌이 임금노동자,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 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 시설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설 때, 이들 가운데는 공사관 직원이나 군사교관의 통역으로 조선에 들어오거나 조선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 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한인의 이주를 받아들인 러시아였지만, 러시아가 일본이나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한인 이주자들이 ‘적국(敵國)의 광범한 첩보조직’으로 기능할 것을 우려, 경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흑룡주 총독 곤닷치 같이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후원하던 이도 있었다. 그는 1912년 신한촌을 직접 방문해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한인들은 러시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한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망국을 전후해 해외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곳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던 안중근 의병부대의 근거지도 바로 연해주 지역이었다.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이들 의병을 적극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 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학교가 세워지고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이 발간되면서 계몽운동을 꽃피워 나갔다. 1910년 여름 망국이 임박해진 가운데 의병과 계몽인사들이 힘을 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를 조직하며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후에도 이 지역 한인의 독립운동은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2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던 한인들은 동년 6월 전로한족대표자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대회 결의에 따라 신한촌에서는 ‘한인신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청구신문’이 창간되었다. 10월혁명 후 한인사회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중앙총회,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이 만들어지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연해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러시아 지역, 서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대표들까지 아우른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더불어 해외 임시정부의 쌍두마차를 형성하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가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친볼셰비키적인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장기영 등이 1918년 5월11일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렇듯 연해주 지역은 해외 한인사회 가운데 어느 곳보다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이 크게 미치던 곳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던 한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일본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에는 시베리아에 침투한 일본군에 의해 대규모의 방화, 파괴, 학살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4월참변’이라 불리는 이 일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등 한인지도자들이 학살되는 등 한인사회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1922년 말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급격히 변질되어 갔다. 스탈린 정권은 민족적 가치를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한인의 전통 마을을 집단농장으로 재편해갔다. 민족적 한인들에 대한 체포, 감금, 처형 등 대탄압도 거세졌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연해주 지역의 안보를 우려한 스탈린 정권은 80여년 가까이 이 지역을 개척하며 혁명 전선에 앞장서왔던 한인들을 배신한 채 1937년 가을 무자비하게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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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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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 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대 첫 이주 이래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구 소련에 귀화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비귀화인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당연히 한국말이었다. 그만큼 민족성이 강한 한인들이었다. 그런 한인들을 스탈린은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들은 소련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강제이주라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1937년 9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그것이었다. 스탈린 정권이 왜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는가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구소련 정부는 ‘일본 첩자’로 이용될 우려가 있어 강제 이주시켰다고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사실 스탈린 정권은 훨씬 전부터 한인들의 강제이주를 계획한 일이 있었다. 192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한인 이주에 관한 지령’을 통해 대대적 이주정책을 수립한 바 있었고, 1930년 2월에는 스탈린이 직접 주재하면서 한인 이주에 관한 문제를 재차 다루었다. 1932년 7월에는 연해주 일대 한인들의 대량 이주에 관한 지령을 확정한 바 있었다. 이때 스탈린 정권은 이들 한인을 하바로프스크 변방의 외지로 분산시키고자 했다. 되도록 한인들을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고, 또 집단 생활을 영위하는 한인들을 분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193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극동지역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한인의 강제이주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제이주는 거대 강국의 야망을 가지고 전체주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스탈린 정권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련은 겉으로는 가장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를 표방했지만, 모든 정책은 오직 스탈린 독재를 위한 전체주의적 우상화가 지상 과제였다. 그리고 이를 공산당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소련내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통합수준이 높던 민족이었고, 밀집한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한인사회의 모습은 분할통치를 원하던 스탈린 정권의 방침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기근과 전염병 등의 재앙으로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끈질길 생명력을 가진 한인들의 전통적 농업활동인 벼농사와 채소 재배를 그곳에 도입시키려는 의도도 가미되고 있었다. 한인들은 그런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는 준비 과정을 포함해 엄격하고, 지속적이며, 전면적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신상을 철저하게 파악해 놓고 있었으며, 철통 같은 감시를 통해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그렇게 해서 1937년 9월과 10월 두달 사이에 20여만명의 한인을 한 명도 빠짐없이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캄차카와 인근 벽지에 거주하던 한인들까지 이주시킴으로써, 하바로프스크 동쪽에 사는 한인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 강제이주의 수송 수단은 시베리아 철도였다. 50량 정도의 수송 열차에는 여객칸 1량, 위생보건칸 1량, 식당칸 1량, 유개화차 5~6량 외에 40여 량의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이 달려 있었다. 한인들은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에 2층 판자 침상과 조그만 난로를 설치해 개조한 차량에 짐짝같이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보통 한 칸에 5~6가구, 25~30명가량의 한인들을 실었으며, 한달 넘게 달려서야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카자흐스탄에 7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0여만명이 운송되었다. 수송 과정에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은 차마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 채 달리는 열차에서 죽어갔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자식과 어버이의 시신을 달리는 열차에서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강제이주 1세대자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었고, 그들에게는 지금도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겨져 있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은 20여 만명에 이르렀으나, 1938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한 한인의 수는 18만여 명이었다. 2만여 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 중 상당부분은 강제이주를 반대하다가, 또 수송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정착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소비에트정권 기간 내내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채 가슴속 깊게 묻고 살아야 했다. 강제이주 후 60여 년이 돼서야 러시아 정부는 1993년 4월 강제이주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정치적 탄압, 민족차별을 받아야 했던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20여 만명의 한인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강제이주 당시의 참상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스탈린 정권의 폭압적인 강제이주로 빚어진 통한의 역사는 어떻게 갈무리를 지어야 할까. 이들 한인의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어야 했던 희생 가운데도 가장 비극적인 상처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이해 그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장석흥|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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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下. 역경을 딛고선 고려인물 | |||||||||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극동을 떠나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졌다. 화물열차에 실린 지 한 달 만에 고려인들은 새로운 땅에 도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정치적 이유로 체포·처형되었고 또 다시 적지 않은 수가 이주 도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슬퍼할 틈도 없이 정착을 준비해야 했다. 고려인들은 버려진 주택을 수리하거나 땅굴을 파서 움막을 짓고 급히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의료시설이 없고 영양도 불충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여기에 또 다른 정치적 탄압이 가해졌다. 고려인들의 신분증명서를 회수하고 단기거주 증명서만 주어서 여행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고려인들은 철망 없는 수용소에 거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거주지 제한은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인들은 고강도 노동과 효율적인 경영을 통하여 얻어낸 자금을 자녀교육에 투자하였다. 고려인들이 교육에 투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육만이 주거제한을 벗어나 다른 민족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고려인들에게는 생존이자 동시에 명예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0~60년대에 고려인들은 콜호즈에서는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을 자녀교육에 투자하고 도시 이주 밑천으로 활용하여 집단농장제가 가지는 제약과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같은 노력으로 고려인들은 소련 내의 여러 민족들 중 도시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민족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뒤따른다. 고려인들이 어떻게 하여 콜호즈에서 높은 생산성을 올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고려인들이 ‘고본지’라고 부르는 임대차경영방식의 사용에 있었다. 사회주의적 경영방식을 고집한 소련의 콜호즈는 농민들의 근로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악명 높은 제도였다. 공동 생산, 공동 분배의 이름 하에 농업노동자화한 농민들은 사실상의 태업으로 이 제도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불법이었지만 임대차경영방식을 도입하여 계획을 수배씩 초과달성하였다. 그러므로 50~60년대에 고려인 콜호즈에서는 수많은 노력영웅이 나오게 되었다.
85년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해이다. 이 해를 계기로 하여 소련은 이후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고려인들의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 체제를 내부혁신을 통하여 개선하려는 의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졌고 결국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고려인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소련 정부가 고려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탄압했던 역사적 죄과를 인정하고 이들의 권리를 회복시킨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려인들은 수 십년 간 그들을 어둡게 짓눌렀던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려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통하여 극복하여 나가려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도 이미 목격된다. 또한 고려인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조상의 나라가 있으며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활기있게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고 있다. 한국의 자본이 투자되고 많은 기업인들이 진출함으로써 현지의 고려인들은 일자리를 얻고 경영을 배우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경험을 갖게 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고 일하는 방식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많은 부를 축적한 고려인 기업가들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인에게 주어진 상황은 지금도 어렵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슬기롭게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그 도움을 잘 활용하여 성공신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
출처 : 경향신문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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