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개인자료실

第二篇 學問의 길 4,5장

작성자儒珍 이선동 (평정공계 승지공 34세)|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第二篇 學問의

4 초등학교 시절
시골 아이의
강과 들판에서의 성장
친구들과의 추억


5 거창에서의 ·고등학교 생활
하숙과 자취 생활
향교동 재실 곁에서
학업과 인격 수양
진학을 향한 도전


6 부산에서의 대학 생활
東亞大學校 電子工學科 입학
형님의 도움과 가족의 사랑
학문과 청춘
전자공학도의


第四章 거창에서의 학창생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거창에서 다녔다.
친척집에서 하숙하기도 하고, 향교동 재실 인근에서 자취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립심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다.
전자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래 산업을 이끌 기술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第五章 부산 東亞大學校 시절
부산 東亞大學校 電子工學科에 진학하였다.
당시 형님의 경제적 지원은 힘이 되었다.
형님은 교직에 계시며 항상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부산 생활은 시야를 넓혀 소중한 경험이었다.
전자회로와 반도체 공학을 배우며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6 부산에서의 대학 생활
東亞大學校 電子工學科 입학
형님의 도움과 가족의 사랑
학문과 청춘
전자공학도의

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

3.유년시절.중학교.
제1장. 어린 시절, 동례리 추억의 풍경
우리집은 동례리 1038번지이고, 서쪽으로 통덕량 이난서 재실이 옆에 붙어있다. 재실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있고, 왼쪽언덕에는 앞쪽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 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 있었던 것같다.
감이 많이열리면 가마니로 3가마 정도 수확을 했다. 한광주리정도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한바구니는 물을 따뜻하게해서 항아리독에 땡감을 넣어 따뜻한 안방에 두면 감이삭아서 단감이된다. 나머지 많은 감들은 벼속에 파뭍어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 언덕이 있었는데, 양지바른곳은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 뜯어다가 보리밥을 비벼먹었던 생각이난다.
집앞 산소를 돌아서 언덕끝에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새싹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재실 옆 감나무 두 그루
가을이면 홍시가 익어가던 재실 옆 감나무 두 그루. 나뭇가지에 올라 조심스레 감을 따며 어머니의 꾸중을 피하던 기억이 난다. 그 옆 대나무밭은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을 불러왔고, 숨바꼭질 놀이터가 되었다.
집 앞 언덕과 우물가
쇠비름을 캐다 나물로 삶아 먹던 그 언덕, 우물가 미나리밭에서 놀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오두막 초가집, 밤이면 켜지던 호롱불의 불빛은 어린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모사와 손님맞이, 겨울 모닥불
모사(祖祀) 때 외부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음식 준비에 분주하셨고, 우리는 정갈하게 앉아 제사를 지냈다. 겨울 밤이면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손을 녹이며 웃던 가족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동구밖 그네와 마을의 잔치
감나무 아래 그네를 매달아 동무들과 놀고, 옆집 결혼식 때 떨어진 감을 주워 먹으며 뛰놀던 그 시절. 종실에서 감 따던 기억도, 개구리를 잡아 닭 모이로 주던 장난기도 모두 나의 한 조각이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가조천의 강이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망태를 메고 풀을 베러 가고, 작두로 켜고,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버들피리를 불었다. 새양골 못에서는 수영을, 안양골에서는 소 먹이고 물을 길었다. 사하라 태풍이 덮쳤을 때 도랑에 빠지던 해프닝도 지금은 웃음이 난다.
사과 과수원 시절
가북에 나무를 하러 다니고, 과수원에서는 농약을 뿌리며 힘들게 일했다. 사과를 수확해 광주 경매시장에 가져가던 기억, 흙벽돌을 찍고 집을 짓던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큰 경험이었다.
외갓집과 고모집
상가 외갓집을 따라가고, 일부리 외갓집에서 놀며 점연이 누나와 공기놀이를 하던 기억. 마상리 고모님은 엄격하셨고, 작은고모는 인자하셨다. 누나와 자형, 사촌들과의 정겨운 나날들이 지금도 가슴을 데운다.
소풍과 학교 생활
소풍 가던 날, 고견사 입구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비 오는 날 냇가에서 친구들과 손잡고 신발을 벗고 건너던 등하교. 학교에서는 옥수수빵, 우유빵을 배급받고, 겨울에는 난로 위에 도시락을 데워 먹던 그 따스한 시절이 지금도 그립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기와집을 새로짓다.
재실옆 우리집은 작은 초가집었는데,
부친이 종중일에 즁추적인 역활을 하시는관계로 종인또는 방문객이 많아서 감당을 할수가없었다.
그래서 1317번지인 동네 가운데 부촌지역에 200여평을 마련해서 기와집을 새로지었다.
집모양은 디귿자 모양이다. 본채는 4칸집이고,정남을 향해서 박유산을 정면읋 바라보고, 왼쪽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랑채가있고 오른쪽에는 창고, 곡간, 장독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다. 사랑채에는 유산정숙의 이정매공의 현판이 걸려있고, 부친께서 생활하시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도 계시고 해서 우리집에는 일년내내 손님들이 들락날낙했다.
어머니는 매일 음식준비에 바빠서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아도와 주셨다. 어머니는 시골잔치 음식준비의 달인이 되어서, 동네 길흉사 잔치에 가서 음식만드는데 진두지휘를했다.
 
가소천에서 천엽으로 추어탕먹다
동네마을에세 50미터쯤 나가면 가조에서 제일큰 강폭이 70여미터되는 가소천이있다.
어린시절에는 다리가 없어서 여름 장마철 에는 항상 신발벗고, 바지 올리고 책보따리 머리에 이고 조심 스럽게 건너가곤했다. 초등1년때는 매우 무서웠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튼튼한 다리도있고, 북쪽 가북에 댐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기위해, 수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향상 일정한 물이 흘러간다.
어린시절에는 비가올때면 물이 많았으나. 가뭄이 들때면 무릅까지 물이내려간다. 날씨가 개인날엔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고기를 잡고, 아주머니들은 야채와 양념, 국수를 주빈해서 개울가에 솥을걸어놓고 추어탕을 끌어서 맛있게먹던 생각이 난다.

논에서 보리타작.
가소천 건너에 우리논이 있는데, 가을에 보리를심어 겨울내 햑교다니면서, 보리가 자라는걸 바라보며 다녔다.보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다익어서 누렇게되면, 보리를베어 말린후에 타작을 해야하는데.
말린보리를 다발로 묽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도리께로 할때도있고, 논바닥에서 할때도 많았다.
논한가운대쯤에 보리를 걷어내고 베고남은 보리대를 뿌리채 뽐아내고 보리타자 마당을 만들고 물뿌리고 발로 단단하게 밞는다.
땅이 마를때쯤에 주위에 보리대를 모아놓고 도리께로 타작을 하는데, 논면적이 크면밤늦게 까지 여러판을 한다.12시쯤되면 세벽이슬이 비치면 녹아서 더이상 타작을 할수가없어 보리알 선별 작업을한다.
채에담아서 어께높이 만큼올려서 흔들며 흘러내리면 보리알은 바로밑에싸이고 찌끄기는 가벼서 멀리날아간다. 새벽2시정도되면
대충일이 마무리된다. 늦은밤이라 잠이쏟아져 집에가지안고, 보리를 털고난 뿍데기 무덤속에 들어가서 잠을청한다.온몸에 보리수염의 가시가 묻어있어 약간따가운 느낌이든다.조그만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별들이 서로 자랑 하듯이 반짝 반짝거린다. 정말 밤하늘이 아릅답구나 하는 순간에 깊은 잠이들어 피곤한몸을 꿈나라로 보낸다. 아침동이트면 일어나서 식사를하고 이슬이 사라지고나면 또 보리타작을 했다. 논이 여러군데있어 옮겨가면서 몇날을 한걸로 기억이 된다. 이러한고된 생활이 훗날 사회에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데 좋은 인생의 지침서가 된걸로 생각이 된다.

수월리 불당의 소풍나들이.
초등학교시절 봄,가을로 소풍나들이를 하는데 수월리 동네를 지나 좀더들어가면 불당이라는 넓은 평지가나온다. 아마도 예전엔 불교와 관련되 지역인가보다 느낀다.
북쪽에는 천미터넘는 우두산과 의상봉이있고, 8부능선에는 천년의 고찰 고견사가 있어 그정기를 아래로 내려준다.
소풍날에는 특별히 쌀밥과 계란 후라이, 멸치조림등 맛있는 도시락을 가방에메고, 학교에 가서 학년인원이 2백여명되는데 단체로 걸어서 불당에 도착하면 점심 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오랜만의 특식 만찬을 하고나면.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서 장기자랑 하는동안에, 선생님들이 바위나 나무가지,덤불에 보물이름이 적힌쪽지를 접어서 눈에 띄지않는 곳에 숨겨둔다, 장기자랑이 끝나면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보물을 찿는다.
보물은 연필,공책,필통등 학용품이다.
비싼 필통,크레파스를 찿은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오래간많에 야유회를 가서 맛있는 최고의 도시락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던 생각이난다.
중학교때는 좀더 높고 거리가먼 고견사로 소풍나들이를 해서 천년이 넘는 고견사의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마을뒷동산 사동지추억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동례마을 뒤동산 언덕위 수백년노송
어릴적 동산에올라 고향의 봄노래하고 친구들과 언덕 잔디밭에 몸 구르기 하면 즐겁게놀던시절..
백년 노송 나무에 올라가서 가조의 푸른들판을 바라보고 풍년을 기원하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옛시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솔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푸른하늘의 뭉게구름 수백년흘러 지나 갔건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재자리에 꿋꿋이서서 솔향기 쁨으면서 선비의 고고한 자태로 나를 반겨주는구나....
4계절 자연의 만물이 흐르고..
바람도..구름도..흘러가갔건만..
너만 홀로서서 독야 청청하는구나.
사송정(四松亭)/가조 동례리 촌후 사동지마을 뒤에 있다. 선비 신후명(愼後明)·이명(而明) 형제가 네그 루 소나무를 심어 대를 쌓고 노닐던 곳으로 후손들이 가꾸고 기리는 곳이다.
현재는 한그루가 남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 3월 거창군 보호수로 지정 되었고 수령은 약 380여 년으로 추정되며 수고 11m, 나무둘레 3.9m이다. 곽가은이 지은 사송정기(四松亭記), 송정훈이 전한다.

동네에서 서쪽 논밭끝자락에 안양산이있다. 산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시조공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들이 고이잠들고있다.
학교를하고 방과후에는 집에와서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오후종일 산풀을뜯긴다.
마을에 집집마다 소가있어 전체 67십마리가있다. 산에가서 고삐를 매고 방목을 하면 소떼들중에 대장이있어 이산 저산을 돌며 풀을 즐긴다.
풀을 뜯는동안에 아이들은 꼴망테에 꼴을베기도 하고, 도라지나 잔듸를 케기도하고, 겨울에가서 가재잡기도 한다. 풀베어주기 게임도한다. 낫을 멀리땅에 던져 꼿히면 진사람이 풀을 베어주는게임이다. 오후에 해가넘어갈즈음에 대장소는 동네소를 이끌고 아래장소에 모이는데,간혹 대장소를 따르지않는 소는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찿아다니는데, 소도 밤에는 무서워하는지 꼭 산소옆에 안자있는다.
ㅡㅡㅡ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ㅡㅡ
박유산밑 과수농원.
박유산 동쪽 산능선 끝자락에 3정보땅에 300그루의 과수농원이 있었다. 집에서 1500미터쯤 떨어져 있다. 거리가 멀어서 황토 벽돌집을 지어서 여름에는 자기도하고 들일 올때 사용하기도했다.
부친 말씀에는 방아간을 처분해서 샀다고한다. 산밑이라 토질이 좋아서 사과나무가 아주 튼튼했다. 년령이 20년이 넘어서 사과가 20상자이상 수확했다.국광,홍옥,인도,스타킹 수종으로 이루져 있다,
초봄에 나무가 튼튼하라고 유황약을 치는것 부터해서 시작해서, 15일마다 약을 쳐야하는 매우 힘이 들었다.
또한가지치기를 해주어야 과일이 크게열린다.
일요일은 과수원에와서 공부도 하고,소풀도 베고,사과도 지키고했다.
점심때가 되면 집이 멀어 가기가 싫어서, 하루종일 사과만먹었다.
가끔은 밤에 자기도 했다.
과수원에는 불독개, 세퍼트의 큰개를 키우기 때문이 안전했다.
사과수확기에는 사과를 화물차에 가득싣고,주로 광주 시장에 경매를 넘기는데, 중간상인이 물건을 팔고 돈을 주지않아 중학생이 었던 내가 직접 따라 가기도 했다. 하루종일 사과를 따서 싣고,늦은 저녁을 먹고 밤10시경 출발해서 천천히 가면 새벽3시에 경매장에 도착해서 사과를내리면 4시쯤 경매를 하고 돈을 받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난다.
시골방아간
우리아래동네의 중마 방아간을 가지고 있었다.물레방아오 발동기가 있어서, 물많은 여름에는 물레방아를 돌리고, 건기인 겨울에는 발동기를 사용했다.
방아간운영은 거창 양평의 가느들 아저씨가 일해주었다.
벼을 가지고와서 쌀로 찌으면 2되정도 삮을 받았던것같다.
가래떡도 내리고, 고추도 갈고했다.
명절때면 가레떡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난다. 방아간을 하고난 후 부터는 힌살밥을 자주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부리 외가집추억
외가집은 우리집 반대쪽인 일부리 이다. 어머니는 친정에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명절이나 제사날에는 음식과 과일을 보내고했다. 외할머니가 계시기도했지만, 돌아 가시고도 갖다주시라고,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주우리집에 와서 오래동안 머물고하셨다. 점년이누나, 금연이도 우리집에 몇달간 같이 지내기도했다.
같이 사동지 가서놀기도하고, 땅따먹기, 공기놀이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재실에 가서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과수원에 가서 사과도 따먹기도했다.

할머니별세
우리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상세한 기억은 잘나지않고 씩씩한 할머니라고 생각이되어진다.
모든일은 할머니가 관여하는걸로 느껴진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2대독자라서 많이 사랑하고 일도많이 시키지 않았던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호통잘치는 호랑이 할머니라고했다.
우린 아들이 4형제인데 내가둘째인데 딸을 보고싶었던지 내남동생에게는 치마를 입혀업고 다녀던 기억이난다. 가끔은 재실 처마밑에 가서 박쥐똥을 주워먹이 기도했다. 이유는 잘모르겠다. 눈밝으라고했는지,여하튼 몸에좋다고 많이 주워서 먹였다.초등학교 저학년때 이라서 거억은은 잘나지 않지만, 가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해가질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왔다. 90이넘어서 돌아가셔서 장수를 하셨다. 문상을 치르는데 아마도 보름정도의 긴날자에 걸쳐 치르는것 같았다. 산소는 안양골 선산에 모셨다. 사랑채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상복을 입으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을하고 절을하셔다.
3년 동안 급한일이 없으면 출타하지않고 상복을 입고 계셨다. 외부에서 문상을 오시거나 손님이 찿아와도 술을 따르고 재례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다. 아마도 10살이전에 돌아가신걸로 기억이된다. 할머니가 애정과 사랑으로 뒷바라지를 다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적으로 힘들었을것으로 생각이든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자라서 인지,펴앵을 5남매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않았고, 욕소리 한번 하지않으시고, 손대말을 자주 사용해 주셨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이된다. 아버지도 할머니피를 이어받아 93세 까지 사시다가 별세를했다.


마상리 고모집추억
가조면 소재지 의 중학교 뒤편에 막내고모님이 살고있다.
고모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 고모부네 식구랑 같이 생활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는 고모네집에가서 세참으로 준비해둔 고구마, 감자,과일등을 먹고해다. 고모는 그집에 제일 어른이라 모든살림 살이를 관장하고 있었고, 작은 고모님이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작은 고모님은 매우 인자했다. 향상 우리를 반겨주셨고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했다.
기수형과 정희, 정화,문희 식구들과도 즐겁게 보낸기억이난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거창으로 고등학교를 하고 부산에서 대학등 외지 생활을 계속되어서 그이후로는 많은 추억을 갖지못하고, 명절이나 휴가때쯤 고향갈때에 찿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고모님 나이 99세때 봄에 시골에가서 만나뵈었는데,내년 100세가 되면 가조면에서 장수할머니로 잔치를 해주신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는데, 해를 다채우지 못하고 별세를 하셨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동안 배려해주신 은혜을 기억하고 좋은세상에 가셔서 편한한 생활을 하시라고 기도하고 장례절차 마무리 짓고 올라왔다.

마상리 누나집추억
고모님옆집 근처에는 내가 어릴때 호적상 양자로 보내졌던 누나가 살고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승문원 박사 이창일 종손이 후손이 없었는데 나를 그집 호적에 올려 대를 있게했다. 호적상으로는 양자가 되었으나, 호적상 양자로 가족이 없고
시집간 누나만 있기때문에 나는 우리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마상리 누나는 내가 대를 이어줄 고마운 동생이라고 항상 친절히 대해주었다, 마상리 고모집에 갈때면 향상 누나집에 들렀다. 자형께서도 매우인자하시며, 친절이 대해주었다. 누나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왔다.
몇번인가 마상리가서 제례를 지냈던 기억이난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집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20년 넘게 부모님모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셔서 내가 양부모 제사를 모셨다.아내가 불교인이라 성의끝 제사를 모셔오고있다.나는 양자를 가서 부모가 먼저돌아간 독자로 되어서 정식군대에 가지않고, 가조면 예비군 중대장 보좌일을 6개월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어릴적에는 양자의 개념을 잘몰랐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속으로는 마음의 고뇌를 겪기도했다.
그래서 절을 좋아하게 된것이아닌가 하는 생각도든다. 오랜 기간동안 사찰에 다니면서 인생이란 무었 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대구감년 누나집추억
아버지 여동생이 3이있었는데 마상리 고모님을 제외한 2분은 일찍돌아가셔 얼굴이 기억나지않고,
딸이 대구에 사는 감년이누나이다.
어릴적에는 가북 용산에 살았는데, 결혼을 하면서 대구로 갔다. 자형은 북한출신이라 집안이 별로없어서 우리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
방학때가 되면 대구에가서 놀기도하고 소애, 무용, 영애,무식가 시골에 내려와서 시골 경험도하고
서로 새로운 환경을 경험을 번갈아 하면서 즐거운생활을 했다.누나는 대구 평리동에 살았는데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향상 웃는얼굴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어서 즐겁게해주셨다. 양가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다들 바쁜생활로 가끔 안부를 물어보고 잘지낸다고 하니, 감사할따름이다.
거창 고모집하숙생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 가조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형님과 3년 차이라서 내가1학년때 형님은 3학년이었다
형님은 서부경남의 명문고인 거창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떨어져서 거창종합고등학교 인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이다닐때는 하숙비가 비싸서 1년 남짓 자취생활을 했다. 시내에서도하고 개화리 오담재 재실 관리실 집에서도 했다. 형님이 졸업하고 난후에는 계속 하숙을했는데, 작은집 고모네집과 합천 일가인 그릇집 누나네 집에서 하숙을했다.부모님은 5일장이나 나들이일이 있을때마다 찿아 오곤 했다. 내가 하숙을 하고있어서일까.올때마다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 과일등을 가지고 오셨다. 나한테도 공부열심히 하라고 용돈도 쥐어 주시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 까지는 키가 반에서 3등이내 였는데, 고3이 되는 해에 12센티나 부쩍 자라게되어 보통의 키가되었다. 어릴적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면 못알아볼 정도로 변하게되었다.
여동생선자사망
우리집은 5남인데 4째가 여동생이다.
딸이 하나라 집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자랐다. 나이차이가 많아서 서로객지 생활을 함으로 명절때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수있었다.
나는 직장이 구미이고 여동생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평촌에 살았다.
내가 본사발령을 받고 서울로 이사 와서는 시간날때마다 자주만나서 집에도 방문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주변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에 갑자기 여동생이 뇌출혈이 생겨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중추뇌 출혈로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주었다. 그래도 1주일간 이라도 상태를 보자고 제안을했다. 치료를 했으나 날이갈수록 영양주사로 몸은 부어지고 맥박과 혈압은 떨어지데니 결국은 저세상으로 떠났다.

발동기 돌아가는소리 오두막초가집.호롱불.배추뿌리.
기와집지을때 겨울에 모닥불생각.참외수박밭지키기.
개구리잡아닭모이.
초등학교시절
망태메고풀베고.작두케고찔래꽃.버들피리.새양골못수영.
사동지
친구들과 소나무타기.언덕구르기.
사하라태풍에 사갓쥐고있다가
동네입구 도랑에 넘어짐.사하라태풍
앞냇가에서 멱감고.고기잡고.추어탕먹던기억.
비가많이와 강건너던생각
아카시아씨앗심기.
가북에나무하기.소풀뜯기.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물지게지고 물길던생각.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집짓던기억..흙벽돌찍기.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석강이모집 놀던시절
기호.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김대원신경쓰이던기억
ㅡㅡㅡ
사과농원시절
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
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집짓던기억.과수원집.동네창고.
흙벽돌찍기.
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
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 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
마상리 누나 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
석강이모집 석강기호와  놀던시절

ㅡㅡㅡㅡㅡ

3 학창(초중고)시절

동례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동례촌 뒤편에는 사동지라는 조그만 동산에 큰소나무가 있어 친구들과 자주 놀러다녔다.
사동지 넘어는 학당골 저수지가있어서 여름이면 목욕을했던 생각이난다.
좀더올라가면 옛날 학당골이라는 자리에는 사람은 살지않고 집터 와 감나무 몇그루가 남아있던 기억이난다.
거창군지에는 과거급제 승문원박사 23대 찰방공 창일선조님께서 학당을 운영했다고 기록에 되어있으니 지금은 사람이 살지않고있다.
마을 뒤편 서쪽으로 논밭을 지나면 안양산의 안양골이 있다.
아양골 8부능선에는 가조 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선조님이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500여년동안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어릴때 학교에 다녀와서는 소를몰고 산에가서 풀을먹이고, 망태에 풀어띁어 오곤했다.
가끔은 잔디 도라지도캐고, 계곡에서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있다.
동구밖 언덕에는 27대 가신선조님이 느티나무 3그루를 심어서 마을을 이롭게 했다고 삼수정이란 호를 얻게되었다고 거창군지에 기록이 되어있다. 동구밖 건너편 박유산 끝자락에 21대 가조입향조 통덕량 난서공의 재실인 영모재가있다.
원래 이재실 자리는 조선후기 학자이신 26대 유산 정매공께서 유산재실(현판 유산정열)을 건립해서 학문을 했던것 인데 노후로 멸실이 된것곳인데 그후에 영모재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진 그당시는 거창종합 고등학교 인문계를 다녔다.
내가 1학년때 형님은 거창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화리에서도 생활을 하기도했다.

 

 

ㅡㅡㅡㅡㅡ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방가후 마상리고모집에서 놀던기억

4. 고등학교.거창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거창 읍내에서 다녔으며, 하숙과 자취를 병행하였고, 거창군청 북쪽 언덕의 개화리 향교동 재실에서도 생활하였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이곳은 20대 선조 통정대부 검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었습니다. 가을이면 부친과 종중 어른들이 묘사에 참석하셨고, 저도 아이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ㅡㅡㅡㅡㅡㅡ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괴롭힘.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아버지60회갑연
형님결혼식
내결혼식
성원이와둘이 여름휴가 서해안면도. 남해땅끝마을.밤샘비.동해 고성바닷가...좋은추억기억됨
대덕청암사 계곡에서 한여름피서에서폭우만남.
청암사근처 성태경씨와 피서 밤추위로 텐트속불남.
집에서 새벽2시쯤 청송주왕산으로 이동
정서방.큰처남댁함께..술마시고놈.
프레스토 차몰고 처음서울올때 올림픽도로에서 경찰차에스코트기억.
운문산 북대암에서 기도와 새벽해돋이바라봄.
청암사 절에서 밤샘 범화경독경..
성원이가 좋아했던 청암사스님들
여름학교에서 반야심경 독송해서칭찬받음
청도운문사 철야 3천배
조계사에서 반야심경.천수경교육과정
거제 건영집에서 밤낙시.회
안동 종열 친척집 밤샘 놀던기억
김수철네와 무주구천동 여름휴가.
처우회 정기모임...제주도한라산.울릉도여행.설악산등반  
최태영지점장 가족과 나들이추억
당진.홍성.여주..음성땅구매. 고구마재배.
회사친구(대현.인철)모임추억...선산.
백대현 고양땅에 야체심기
주민센터 웰빙댄스 교육
중국 금주현지근무.
가족과함께 생활
주말여행...태산.공자묘.홍산.대련.압록강.만주국
인간관계어려움.
스트레스성 건선피부악화로 9개월근무귀국
그린센서 근무.9개월
헤드헌트 4년솔로몬
자체운영
경비업무...화곡 보건센타.1년..가산 한성근무3년
초등모임
둥국.일본해외여행
고등모임
오남리 1박2일 야유회
2019 10.12일 내여동생 하늘나라로가다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5 대학부산(배움의길)
대학은 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계시는형님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가면서같이 생활했다.
평생을 부모님과 같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형님은 대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시고교편생활. 부산교육청 장학관.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퇴임을 하시면서 국민훈장 홍조장을 수여받으시고 지금은 부산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학교를 졸업하고 구미 산업단지 내에 반도체 회사에서 연구 업무를 하게 되어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졸업 및 공학박사 과정 수료까지 하게 되었다
회사 경력 25년 되던 해에 임원 직책을 보직받으면서 서울에 있는 본사로 발령 나서 서울로 이전해서 생활하게 되었다.
1973년 거창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부산 동아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 과정을 마쳤다. 이어 1990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1993년에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며 반도체 기술의 길로 나아갈 기틀을 다졌다.
학창시절, 가조에서 자전거로 거창까지 통학하며 길고 험한 여정을 버텨낸 날들이 지금의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ㅡㅡㅡㅡㅡ
대학시절
단축마라톤30위이내
교내.동산에 산책.김을용.김용해.
해운대추억.태종대.광안리.용두산추억.
거제도 텐트여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전자기사1급.무선설비기능가3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