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篇 東禮村의 품에서
第1章 東禮村에 태어나다
禮鄕 東禮村의 자연과 역사
朴儒山과 安養山의 품속에서
가조천과 어린 시절의 풍경
당산나무와 마을 공동체
동례촌의 지명 유래
第2章 家庭과 祖上
부모님의 가르침
형제와 가족 이야기
초가집 시절의 추억
새 기와집을 짓다
종중과 함께한 어린 시절
第3章 碧珍李氏의 뿌리
始祖 碧珍將軍 李忩言
東禮村 入鄕祖 通德郞 李蘭瑞
察訪公 李昌一
儒山 李挺邁
一何亭 李學峻
東崗 李昌基
선조들의 忠孝와 學德
第一章 出生과 故鄕
1954년 6월 14일, 慶尙南道 居昌郡 加祚面 東禮里 東禮村에서 태어났다.
東禮村은 예로부터 禮義와 孝道를 숭상하던 마을로, 碧珍李氏가 수백 년 동안 세거해 온 전통적인 집성촌이었다.
마을 앞에는 넓은 가조천이 흐르고, 뒤로는 朴儒山과 安養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맑은 강물에서는 물고기가 뛰놀았고, 들판에는 벼가 익어갔으며,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정겨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가 이어졌고, 어른들은 효와 예절을 가르치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일깨워 주었다.
이러한 환경은 어린 나의 인격 형성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第二章 家庭과 부모님의 가르침
부친께서는 종중 일에 깊이 참여하시며 문중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힘쓰셨다.
집에는 종친과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종족 공동체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
모친께서는 검소함과 근면함을 몸소 실천하시며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하셨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고 조상을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
이 가르침은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第三章 초등학교 시절
동례촌 앞을 흐르는 가조천은 어린 시절 가장 큰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논과 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자연 속에서 성장하였다.
학교가 끝나면 소를 몰고 들판을 다니기도 하였고, 겨울이면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마음만은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
전기1. 유진선동.동례촌소개. 박유산.유산. 안양산. 학당골. 동강창기.
1내고향동례촌소개
박유산소개
박유산은 동례리(동유골) 남쪽에있는 높이 713m인 산이고. 화룡산(華龍山) 또는 화룡산(火龍山)이라고도 하였다. 1970년대 까지도 가조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때면, 박유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는곳으로, 하늘과 연통이되는 신성한 산이라고 생각하고있는 산이다. 필자도 어린시절에 기우제를 지내기위해 이산에 오른적이 있다. 산정을 중심으로 동쪽에 가조면 동례리의 동례, 중평, 안금마을 등을 품고 있으며, 산 동쪽으로는 가조천이 흐르고 있다. 서쪽은 남하면 양항리 아주마을을 산골짜기 깊숙이 끌어안고 있다. 북쪽은 동례리(동유골)및 학당골을 지나 고속도로 위 살피재 지방도로는 1919년 3월 22일 '대한독 립만세'를 외치던 가조인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며 멀리는 금귀봉 산이있다. 금귀봉 산록 아래 있는 살피재를 지나는 광주 대구간고속도로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남으로 뻗은 줄기에 호두봉(虎頭峰)이 솟아 그 아래로 남하면 지산리가 안겨 수 기의 고인돌이 산재한다.
동국여지승람 과 거창고읍지, 조선환여승람 등의 고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말기에 신라가 국운이 다하고, 고려가 건국되는 시기에 우리고장 선비 박유(朴儒)선생은 조국인 신라에 대한 충절에 변함이 없었으나.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여러번 벼슬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신라에 대한 충절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굽이지 않자. 날이 갈수록 태조의 간청은 심해지기 때문에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입산하니, 그 산이 바로 박유산(朴儒山)이였던 것이다. 후인들이 박유(朴儒)선생의 높은 충절을 찬양하여 박유산 이라 했다. 그리고 고려 말 판도판서 전충수 선생도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박유산에 은둔하였으며, 그의 외손자인 운봉현감 고은 이지활 선생도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박유산에 은거하면서 신라 충신인 박유 처사와 같은 처지의 충절심으로 박유산에 망월정이라는 사당을 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충신 이시익이 또한 박유산하 동례로 은거했으며, 공신 오세창이 또한 박유산 아래 안금에 은거해서 살았다. 그 遺蹟이 處士岩, 望北岩 등이 전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박유산 줄기 끝자락에 과수농원이 있어서 농막과 사과창고를 짓고, 농사철에는 가끔씩 농막에서 지내고했던 기억이있어 박유산에대한 많은 친근감이 있다.
박유산과 유산
東禮里에 巍然히 솟아 있는 朴儒山은 단순한 山이 아니라, 忠節과 隱居, 學問과 人格의 脈이 千年 歲月을 따라 이어져 온 精神의 山이라 할수있다. 朴儒山을 中心으로, 그 麓에 根을 내린 高士들과 그들이 이어온 道學의 傳統, 儒林精神의 繼承, 나아가 今日에 이르기까지 碧珍李氏 家門의 歷史文化的 足跡을 이어오고 있다.이 精神의 脈은 朝鮮 後期 碧珍李氏의 入鄕祖이신 二十一代 通德郞 李鸞瑞(1537~1592) 先祖이시다.
그 後孫인 二十三代 察訪公 李昌一 先祖께서는 文科에 及第하시어 承文院博士를 지내셨고, 學堂谷에 學堂書堂을 建立하시어 經學을 奬勵하였다고『居昌郡誌』에 그 事績이 기록되어 있고, 교지가 가문에 전하고있다. 또한 碧珍李氏 最初族譜인 『壬辰譜』의 編纂에 參與하셨음이 『壬辰譜識』에 실려 있다. 그 後孫인 26代 儒山 李挺邁 公은 正巖 趙光祖의 學脈을 이은 丹巖 閔鎭遠 門下에서 學問을 익히고, 山川에 隱棲하며 禮義로 삶을 다한 眞實한 士人이었다. 先祖의 遺意를 이어받아 雅號를 ‘儒山’이라 하였고, 晩年에는 朴儒山 東쪽 끝자락 東禮村 洞口 밖에 儒山齋室을 建築하여 講學에 매진했다고 거창군지에 기록되어있다. 儒山集을 世에 남기셨다. 또한 居昌與地勝覽인 『居昌地圖』를 製作하였다. 비록 齋室은 歲月이 흐르며 亡失되었으나 유산정열의 현판이 가문에 전하고있다, 그자리에 後孫이 21代 入鄕祖인 通德郞 李鸞瑞公의 齋室인 永慕齋를 重建하여 祖先의 遺志를 繼承하고 있다. 그의 後孫인 29代 一何亭 李學俊公은 舊韓末 國難의 시기에 忠孝를 實踐하고 學德을 쌓아 鄕里와 儒林의 指導者가 되었으며, 崇祖報本의 마음으로 祖先을 奉養하고, 敬宗修族의 精神으로 벽진이씨 門中에 크나큰 業績을 남기셨다. 壁珍李氏 始祖公의 宗堂인 星州 敬收堂에 '敬收堂記'를 撰하시고, 『平靖公 老村實記』에 參與하였으며, 陜川 入鄕祖인 判書公 李承元 先祖의 齋室인 敬慕齋를 建築하여 奉祀하셨고, 居昌 入鄕祖 監川公 李建 先祖의 齋室인 오潭齋에는 '敬慕齋記'를 남기셨다. ‘一何亭’이라는 雅號는 大性理學者인 華西 李恒老 선생께서 贈하셨으며, 이 公의 學德을 찬양하며 ‘一何亭記文’도 撰하여 주셨다. 평생을 山林에 머무르며 學問에 전념하시고, 一何亭文集을 世에 남기셨다. 近代에 이르러 東岡 李昌基 公은 宗中과 地域을 爲한 奉仕와 精神文化의 実踐者로 活躍하였다. 文獻과 宗譜를 정리하고, 大同譜와 諸文集을 간행하였으며, 各處 齋室과 書院을 維修하여 先賢의 뜻을 弘揚하였다. 實로 本家門은 忠孝와 節義로 이어오며 文과 行이 함께 빛난 朝鮮後期 碩儒之家로서, 後人의 郎鑑이 되었다. 本集에 수록된 諸記錄과 人物의 足跡은 單純한 個人史가 아니라, 精神의 系譜이자 士風文化의 遺産이다. 옛 先賢들은 世道의 呼聲에 耳傾하시며, 無名으로 默默히 살아가셨으나, 그 精神은 山과 같아 深고도 永한 바, 今日의 우리가 다시 그 자취를 좇아 朴儒山에 오르고, 巖石에 새겨진 이름을 仰望하며, 胸中에 傳來하는 그 精神을 體認하고자 함은 正體性의 回復이요, 祖先과의 對話라 할 것이다. 後孫들이 自身의 所在를 明辨하고, 어떠한 精神을 繼承하였는지 깊이 깨달아, 다가올 未來에도 흔들림 없는 根을 지녀가길 眞切히 祈願한다.
안양산
안양산은 박유산의 등선이 북으로 이어져 있으며넘어로는 아주동네와 거창읍이 있다. 동례촌에서 서쪽으로 논밭 끝자락에서 600미터 높이의 산으로 해뜨는 동쪽으로 산등성을 길게 뻗어있으며. 박유산과 동레촌을 바라보고있다. 안양산 7부능선에는 가조동례촌 입합조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님의 산소가있고. 바로아래는 장손 선일산소가 있고. 그아래로 후손의 산소가 선대별로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건너편 독새골에는 차손인 23대 과거급제 승문원박사이신 찰발공 창일 선조님의 산소가 있고 그아래쪽 산줄기에는 후손들의 산소가 이어져있고. 아래에는 33대 동강 창기공 산소가 있어 500여년 동안 대대로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이어오고있다. 산의 내력을 보면 처음에는 안양산 전체가 찰방공 창일선조님의 산으로 등기가 되어있었는데. 입향조 통덕량 난서 선조님이계신 산줄기부분은 등기를 분리해서 입향조 통덕량 이난서선조님의
종중에서 관리하고있다.
약새미 전설
안양산 가운데골 골짜기에 약새미가 있었는데 피부병 환자가 세수를하고 나았다고 한다. 그 후 물이 적어졌으며 오래전 상수도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물길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물이 없어졌다고 한다.
동례촌유래과 학당골
동례촌은 기묘사화때에 신윤지가 사직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예 를 숭상하므로 예곡(禮谷) 또는 예동(禮洞)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東儒谷)이라고도 한다. 동쪽으로는 가조면 들판을 넘어 저멀리는 88고속 도로와 우뚝솟은 우두산의 의상봉과 고견사가있고, 그넘어는 가야산 해인사이고. 가야산 상봉을 넘어서는 벽진이씨 시조공이신 벽진장군 이총언 선조님의 성지인 경수당과 산소가있는 성주군 벽진이다. 남으로는 동례촌 논밭 끝자락에 박유산이있어 온아한 모습으로 동례촌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있다.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원 동례리 라 하며 북으로는 새앙골, 남으로는 중마.평지마,안금이 약 500~1000m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구밖 동향에는 가조천이 북쪽의 가북에서 남쪽의 지산으로 폭70m정도의 넒은 강물이 합천댐으로 흘러감으로서. 가조천 넘어의 동쪽의 넒은 평야인 가조분지의 논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고 있다.
동례촌 남서쪽 동구밖.박유산 끝자락에 동례촌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선조님 재실인 영모재실있다. 원래는 26대 조선후기 학자이신 유산 이정매선조께서 유산의 정신을 기르고자 말년에 유산재실을 짓고 학문을 했다는 내용이 거창군지기록 되어있다. 세월이 흘러 재실이 손실되고. 같은자리에 일가 후손이 재실을 다시짓고 동례촌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선조님을 얼과 정신을 기르기위한 영모재실을 지었다고 영모재기에 전하고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을 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곤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하며, 늦은 밤에는 야참을 먹었던 기억이 나며, 온 마을이 잔치를 하는 분위기였다. 재실 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되어 있다.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 있고, 재실 마당 왼쪽 언덕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으로 되어있다.
영모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 동향 가소천. 우두산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재실입구의 왼쪽언덕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나란히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 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가 있었다. 감이 많이 열릴때면 3가마니정도로 많이 열렸다. 일부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일부는 항아리독에 따뜻한물에 땡감을 담구어두면 감이 삭아서 단감이되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난다. 나머지 감들은 창고의 나락속에 파뭍어 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에는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정도의 언덕이 있다. 양지 바른곳에는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북향의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서, 봄이되면 뜯어다가 보리밥에 비벼먹었던 생각이 난다. 재실을 들어가는 초입언덕 왼쪽에는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우물가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동례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3그루가 있는데. 27대 이가신 선조님이 마을의 수호신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심고 가꾸어서 그의 아호를 삼수정이라 불렀다고 거창군지에 기록이되있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m 되는 강이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마을 신앙 풍속·풍습으로는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삼수정 옆에 있는 300년이 넘는 괴목나무 세 그루와 마을 서편에 있는 소나무였다. 삼수정은 벽진 이가신이 쌓고 그 호를 따서 삼수정이라 했는데, 괴목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징발되어 베어지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20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데, 닷새 전에 제관을 선정했는데 선정된 제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함께 정성을 드려야 했으며,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자정이 지나면 목욕재계 했다. 제기는 제관집의 것을 사용했고 제물은 유사가 장에 가서 마련했는데 부정된 것을 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돼지는 열나흘 날 유사집에서 잡아 위턱을 윗 당산에 쓰고 아래턱은 아랫 당산에서 사용했는데, 제를 지내고 나면 당산나무 앞에 묻었다. 제수는 두 벌을 장만하여 각각 따로 쓰며, 밥은 제관집에서 지어 가지고 가서 올린다. 자정이 지나 제를 올리고 나서 보름날 아침 음복을 하고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을 했으며 기우제는 박유산 만당에서 했다고 박종섭이 거창군의 마을신앙 도서에 기술하고있다
학당동(學堂洞)
마을뒤 서북쪽에 사동지넘어 큰마을인 학당동(學堂洞)과 사량동(士良洞)이 있었다고 거창군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선조님의 산소와 동레촌 중간지점에 위치한곳으로 아마도 입향하실때 처음으로 정착하셨던곳으로 짐작이되며, 입향조 난서공의 2남인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학당을 지어 강학을 했다고하여 학당동이라고 불렀다한다.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는 조선 인조 때 과거급제한 승문원박사를 하셨다. 거창군지에는 학당과 묘각이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은나 지금은 없어지고, 창일선조님의 찰방공 교지가 가문에 전해지고있다.
사량동(士良洞)의전설
동례 북서쪽에 200m 지점에 학당동(學堂洞)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평온하게 잘 살고 있는데 20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하여 학당 과 전마을이 잿더미로 변하였고, 불이나기 전날 쥐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넘어 이곳으 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옛말에 큰 재해가 일어나기 전 개미, 쥐 등 곤충 짐승들이 이 사를 간다는 말처럼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상하게 생각 하였는데 쥐들이 이사한 사랑동에 마을 터를 잡아 살게 되었는데 황씨들이 마을을 열었 다고 전한다.
2. 조선후기 학자가문 동강 창기공
33代 동강 창기공의 숭조정신
동강 이창기공은 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성주벽진이며. 벽진이씨 고려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시조공의 33세손 이다. 지후대장군 성간의 22대손이고, 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16대손이고, 거창입향조 오담 이건의 13대손이고,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의 12대손 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유산 이정매공의 7대손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일하정 이학준의 4대손 이시다.
증조부 승주공은 1822년 출생 하시어, 1887년 별세 하셨고, 조부 우화공은 1852년출생 하시어, 1887년별세 하셨고, 부친 우덕공은 1875년 출생해서 1932년에 별세 하셨다.
동강 이창기공은 1918년에 가창 가조 동례 마을에서 탄생하시어 2011년에 별세를하셔 93년수를 하셨다. 산소는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의 우측에, 독새골의 23대 찰방공 이창일 승문원 박사 산소가있는 산등선 아래에 우측의 중간지점으로 남향이다. 배는흥해최씨 최순주 이며, 1932년3월16일 탄생하시어 2021년에 별세하셨다. 21대조 통덕량 난서공께서 입향하신이래 400여년동안 대대로 선조님께서 삶을 이어고있어 선조님의 얼과 정신이 배어있는곳이다.
동강 창기공은 14살 어린 나이에 부친이 일찍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모친 슬하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한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로 전해져 오고있는, 선조님들의 문헌 자료을 통해서 고조부 및 윗대 선조님중에는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이며, 대대로 벽리의 경종수족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께서도 성년이 되고난 후에는 평생을 벽리종인의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아오셨다. 아버지의 어릴때기억은 별로나지 않는다. 항상 할머니 옆에서 지내곤 했다. 철이든 중학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에 별로안계셨던 기억이다. 항상 한복 두루마기 옷을 입으시고, 출타 하셨다가 몇일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문중일을 하시느라, 바깥일이 많았던것 같다. 지금생각하면 대동보 만든다고 족보 단수 받는일, 각 문중 재실 짓는다고 헌성금모으는일을 하셨다. 지금도 집에는 각가문에 다소 계보가 적힌 서류가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후손이나 방손의 각종문헌 문집이 보관되어있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셨는데, 가방에 묘사를 지내고 음북을 받아왔는데 각기다른 모양의 음식을 담은 비닐봉지 여러개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받은지가 오래되어 음식이 상한 봉지도 있었다. 문중의 묘사를 다참석하시느라 기일이 오래걸려 먼저받은 음식이 상한것이다. 어머니는 음식을 골라내서 괜찮은것을 솥에 쪄서 주시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두루마기 한복을 빨고 풀칠을하고 다듬이로두드려 펴고나서 새로운 동전깃을 달아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버지는 향상 소식을 하면서 생활하셨고, 먼길도 걸어다니 시거나 대중교통은 완행버스, 옛날 비둘기 야간열차만 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남들과 대화를 할때는 항상 존대말을 사용하셨다. 동네 마을이나 지역에서도 존경을 받고 살았다.
국회위원이나 군수등 부임시에는 항상 인사차 우리집을 방문하신걸로 기억이된다..
아버지가 외부일로 바깥에 시간을 보내는관계로 집안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가장 힘든것이 농사일과 재정 운영 이다. 다행이도 4형제라 농사일을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은 일꾼을 들여 일을해야 만했다. 논을 경리 정리한 후에 자갈 줍기,과수원 농약치기, 모심기등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형님은 명문고 우등생이라 서울대에도 들어 갈수 있는 실력이나, 동생들 학비때문에 빨리 돈벌수있는 2년제 부산 교육 대학에 들어가서, 우등생으로 졸업 해서 당해연도에 교직발령을 받았다. 나도 부산으로 대학을 가서 형님한테 학비를 지원받아 학교를 마쳤다.
내가공부했던 몇년간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부산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접빈객 및 집안대소사를 많이 치르셔서 마을의 길흉사, 일가 집안의 큰잔치에 참석해서 일를 해주시곤 했다. 먼저 아버지가 93세에 별세를 했고 어머니도 10년쯤뒤에 92세로 별세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내가 오십중반이었다.
벽진이씨 시조공관련이나 임진년 경수당 중수추진에 참여하시었고, 그기록이 경수당 중수기에 기록되어있고, 갑자보 대동보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고 대동보에 기록되있다, 벽진이씨의 유명하신 선조님의 기록을 정리한 문헌록 편집에도 참여 하시었다고 문헌록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공과 경수당에 경종수족 정신으로는 예전에 구미에서 근무할 때에 시조공 춘계,추계 시향 때면 부친이신 동강 이창께서는 전날 구미에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같이 성주군 벽진면 경수당으로 가서 시제에 참석을 하곤 했다.
부친께서는 평생을 흰 두루마기인 한복을 입으시고 생활하셨다.
추향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 어른 분들을 소개해주시고 인사를 시켜주시고, 훌륭하신 선조님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추향 제례시에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는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큰소리로 제관 분들께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오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식 제하셨다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씀을 해주셨다.
가끔은 처음 오시는 일가분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느티나무 나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7대조이신 삼수정 이 가신 선조님이 심으신 우리 동네의
고목 느티나무 3그루에 대한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수당에는 우리 직계 가문의 귀중한 보물의 의미가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께서 1864년에 경수당기를 작성해서 본인의 일하정 문집에 남겨 벽진이씨 시조공 과 경수당의 높은 존경심을 기리고 있다. 또한 17대조인 평정공 청백리 이약동의 노촌 실기 문집 간행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일하정 호는 직장공 27대 거유이시고, 애국지사인 화서 이항로 선생께서 이학준 문집의 학문과 덕을 높이 평가하셔 직접 친필로 서해주 셨다.친필 현판은 경기도 양평 서종면 소재 화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고, 일하정기를 집필해주셔서 그 내용이 일하정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이학준의 일하정집 과 이항로 화서문집에 두 분간에 오고 간서신이 다수가 수록되어있어 두텁고 애정 어린 일가 인연을 나타내고 있다
김천 부항면에 대장군공의 모원당 재실이전 건립에도 참여하시고, 김천 양천동에 평정공의 노촌당 서원의 중건에도 참여하시고, 합천 대병에 판서공 재실 및 19대 우우정 후손의 족보 편집에도 참여하셨다.
가족족보 19대 우우정보 와 대동보 편찬에도 기여했다고 각 책의 권말에 수록되어있다
중계 조인 노촌 청백리 이약동 노촌당 중수에도 참여해서 중수비에 기록되어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직계 선대인 26대 이정매 유산집. 29대 이학준 일하정집을 편찬 , 출판해서 국립중앙도서관 및 대학도서관에 홍보해서 교육에 참고토록 했다
동강 이창기공은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선숙은1951년 11월6일생이고,배는 밀양변씨 변필효 1954년생 7월 27일생이고, 부는용국이고, 조는원식이며, 증조는 영근이고, 외조는김섭이고 김녕인 이다. 장남 선숙은 부산 동아대학교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 북부산교육청 교육장 및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에서 거주하고있다. 슬하에 2남 정원, 광원이 두었다,
2남 선동은 1954년 6월 14일생이고, 배는 인동장씨 장정숙이고, 부는 도안 조는 갑술이다.
2남 이선동은 부산 동아대학교 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졸업후에 구미에있는 반도체기업에 근무했으나 임원 승진후에는 본사근무를 하게됨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게되었다.
슬하에 1남 이성원, 2녀 이주연 ,이지현을 두었다.
3남 선수는 1956년 11월15일생 이고, 배는 배경전 1959년 6월17일생이고, 부는 만원, 조는 붕기이다.가조 동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1남 이인원, 1녀 이은정을 두었다.
4남 선규는1965년1월17일생이고, 배는 전주최씨 최지영 19681년 10월17일생 이고, 부는 성림이고, 조는 인준이고 외조는 송대현 은진인이다 이선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복지 요양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을했다. 슬하에 2녀 이소진, 이소연을 두었다.
녀 선자는 1962년1월21일생이고, 부는 하재룡 진양인 공학석사 이다.부는 우성이다. 슬하에 2남 하종욱, 하선일을 두었다.
ㅡㅡㅡㅡㅡㅡㅡ
유진 선동
1내고향소개
박유산소개
박유산과 유산 유진
동례촌소개
학당골소개
박유산소개
박유산
경상남도 거창군의 가조면 동례리와 남하면 지산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12m이다.박유산 명칭 유래는 『여지도서(輿地圖書)』[거창]에 "박유산(朴儒山)은 가조현 남쪽 5리에 있다. 금귀산 남쪽 산기슭이다. 신라 처사 박유가 세상을 피해 이곳에 살았다. [중략]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박유산’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박유가 살았던 것에서 산 지명이 유래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창군사』에 의하면 박유산은 화룡산(華龍山) 또는 화룡산(火龍山)이라고도 하였다
ㅡ
박유처사는 신라 말엽 시대의 가소현 출신으로. 학문이 높고 지조가 굳은 선비로서, 개국한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여러 번 자기를 도와 줄 것을 간청 하였지만 끝내 신라에 대한 충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태조의 간청이 심해지자 이 산으로 입산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서 박유산 이라한다. 그리고 고려 말 판도판서 전충수 선생도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박유산에 은둔하였으며, 그의 외손자인 운봉현감 고은 이지활 선생도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박유산에 은거하면서 신라 충신인 박유 처사와 같은 처지의 충절심으로 박유산에 망월정이라는 사당을 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ㅡ
박유산(朴儒山)의 유래.
박유산 높이는 713m이고, 본래는 화룡산이다. 동례리(동유골) 남쪽 1km남짓에있는 마을산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동쪽에 가조면 동례리의 동례, 중평, 안금마을 등을 품고 있으며, 산 아래로 가조천이 흐르고 있 다.
서쪽은 남하면 양항리 아주마을을 산골짜기 깊숙이 끌어안고 있다.
북쪽은 금귀봉과 사이 고속도로 위 살피재 지방도로는 1919년 3월 22일 '대한독 립만세'를 외치던 가조인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금귀봉 산록 아래 있는 살피재를 지나는 광주 대구간고속도로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남으로 뻗은 줄기에 호두봉(虎頭峰)이 솟아 그 아래로 남하면 지산리가 안겨 수 기의 고인돌이 산재한다.
박유산은 신라 말 절의를 지킨 박유 처사에서 이름한 산이라 한다. 동국여지승람 과 거창고읍지, 조선환여승람 등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가 국운이 다하여, 고려가 건국되는 시기에 우리 고장 선비 박유(朴儒)선생은 조국인 신라에 대한 충절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여러번 벼슬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신라에 대한 충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태조의 간청은 심해지기 때문에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입산하니, 그 산이 바로 박유산(朴儒山)이였던 것이다. 후인들이 박유(朴儒)선생의 높은 충절을 찬양하여 박유산이라 했다.
그 뒤를이어 고려말 판도판서 전충수가 은거했고, 단종 충신 이고은이 은거했으며, 충신 이시익이 또한 박유산하 동례로 은거했으며, 공신 오세창이 또한 박유산 아래 안금에 은거해서 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유산과 유산 유진
朴儒山과 東禮村 碧珍李氏, 그 精神의 根源을 좇아 –
慶南 居昌郡 加祚面 東禮里에 巍然히 솟아 있는 朴儒山은 단순한 山이 아니라, 忠節과 隱居, 學問과 人格의 脈이 千年 歲月을 따라 이어져 온 精神의 山也.
本 文集은 卽此 朴儒山을 中心으로, 그 麓에 根을 내린 高士들과 그들이 이어온 道學의 傳統, 儒林精神의 繼承, 나아가 今日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碧珍李氏 家門의 歷史文化的 足跡을 밝히고자 編纂한 바이다.
本山은 古에는 火龍山이라 稱하였으나, 高麗朝에 忠節로 이름난 朴儒 處士께서 此地에 隱居하시매 後人이 그 德을 仰慕하여 山名을 ‘朴儒山’이라 改稱하였고, 그 精神은 世代를 거쳐 傳承되었다.
이후 朝鮮 中期에는 此山 자락에 田忠粹, 高隱 李之活, 愼允之 等의 忠節志士들이 居處하며 그 遺蹟이 處士岩, 望北岩 등으로 至今 傳하고 있다.
이 精神의 脈은 朝鮮 後期 碧珍李氏의 入鄕祖이신 二十一代 通德郞 李鸞瑞(1537~1592) 先祖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
그 後孫인 二十三代 察訪公 李昌一 先祖께서는 文科에 及第하시어 承文院博士를 지내셨고, 學堂谷에 學堂書堂을 建立하시어 經學을 奬勵하셨으며, 『居昌郡誌』에 그 事績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碧珍李氏 初之 族譜인 『壬辰譜』의 編纂에 參與하셨음이 『壬辰譜識』에 실려 있다.
그 後裔인 儒山 李挺邁 公은 正巖 趙光祖의 學脈을 이은 丹巖 閔鎭遠 門下에서 學問을 익히고, 山川에 隱棲하며 禮義로 삶을 다한 眞實한 士人이었다.
先祖의 遺意를 이어받아 雅號를 ‘儒山’이라 하였고, 晩年에는 朴儒山 東쪽 끝자락 東禮村 洞口 밖에 儒山齋室을 建築하여 講學에 힘쓰셨으며, 『儒山集을 編纂하여 世에 남기셨다.
비록 齋室은 歲月이 흐르며 亡失되었으나, 後孫이 21代 入鄕祖인 通德郞 李鸞瑞 公의 齋室인 永慕齋를 同地에 重建하여 祖先의 遺志를 繼承하고 있다. 또한 居昌與地勝覽인 『居昌地圖』를 製作하였다.
그의 후손인 一何亭 李學俊 公은 舊韓末 國難의 시기에 忠孝를 實踐하고 學德을 쌓아 鄕里와 儒林의 指導者가 되었으며, 崇祖報本의 마음으로 祖先을 奉養하고, 敬宗修族의 精神으로 文中에 크나큰 業績을 남기셨다.
壁珍李氏 始祖公의 宗堂인 星州 敬收堂에 '敬收堂記'를 撰하시고, 『平靖公 老村實記』에 參與하였으며,
陜川 入鄕祖인 判書公 李承元 先祖의 齋室인 敬慕齋를 建築하여 奉祀하셨고, 居昌 入鄕祖 監川公 李建 先祖의 齋室인 오潭齋에는 '敬慕齋記'를 남기셨다.
‘一何亭’이라는 雅號는 大性理學者인 華西 李恒老 선생께서 贈하셨으며, 이 公의 學德을 찬양하며 **‘一何亭記文’**도 撰하여 주셨다. 평생을 山林에 머무르며 學問에 전념하시고, 『一何亭文集』을 世에 남기셨다.
近代에 이르러 東岡 李昌基 公은 宗中과 地域을 爲한 奉仕와 精神文化의 実踐者로 活躍하였다. 文獻과 宗譜를 정리하고, 大同譜와 諸文集을 간행하였으며, 各處 齋室과 書院을 維修하여 先賢의 뜻을 弘揚하였다.
實로 本家門은 忠孝와 節義로 이어오며 文과 行이 함께 빛난 朝鮮後期 碩儒之家로서, 後人의 郎鑑이 되었다.
本集에 수록된 諸記錄과 人物의 足跡은 單純한 個人史가 아니라, 精神의 系譜이자 士風文化의 遺産이다.
옛 先賢들은 世道의 呼聲에 耳傾하시며, 無名으로 默默히 살아가셨으나, 그 精神은 山과 같아 深고도 永한 바,
今日의 우리가 다시 그 자취를 좇아 朴儒山에 오르고, 巖石에 새겨진 이름을 仰望하며, 胸中에 傳來하는 그 精神을 體認하고자 함은 正體性의 回復이요, 祖先과의 對話라 할 것이다.
此 文을 通하여, 後孫들이 自身의 所在를 明辨하고, 어떠한 精神을 繼承하였는지 깊이 깨달아, 다가올 未來에도 흔들림 없는 根을 지녀가길 眞切히 祈願한다.
乙巳年 仲夏
儒珍 李善東 謹書
ㅡ
동례마을 남쪽으로는 산높이 713미터인 박유산이있다.
본래 이름은 화룡산이다. 1970년대까지도 가조지역에 심한 가뭄이들때면, 박유산 정상에서 기우재를 지내는곳으로, 하늘과 연통이되는 신성한 산이라고 생각하고있는 산이다.
필자도 어린시절에 기우제를 지내기위해 이산에 오른적이있다.
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이유는 신라말에 박유가 불사이군의 충절를 지키고자,벼슬을 버리고 은든생활을 해온것에 유래해서 박유산이라고 했다고한다.그 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들어와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전한다.
5대후손이신 유산 이정매공께서도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고, 불사이군의 높은 충절의 깊은의미를 갖는 산으로서 당시 이정매공께서도 학문과 덕망을 지향하는 선비정신을 기르고자 호를 유산으로했다.
거창군지에 의하면 이정매는 노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에 매진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재실은 소멸되고 유산정열의 현판만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ㅡㅡㅡㅡ
동례촌소개
가조면소개
가조면은 거창군의 동부를 이루며 합천군의 서북부와 맞닿고 높은 산줄기에 둘러 쌓인 큰 분지이다. 가소(加召)라는 성읍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시대에는 가소현, 함음현이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가소현, 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시대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조선조 말까지 본면은 4개 면으로 나뉘었는데, 하가남면이 가조면의 동남부에 있어서, 기동리, 대초리, 도곡리, 평지리, 왕대리, 탄동리의 6개의 리를 두었고, 상가남면을 북동부에 두고, 부산리, 장항리, 명지리, 도산서원리의 4개 리가 있었으며, 가서면을 가조면의 서쪽에다 두었는데, 동례리, 원천리, 평지리,안금리, 상현리의 5개 리로 나누었고, 가동면을 본면의 가운데에 두어, 병산리, 창동리, 당산리, 적마리, 수월동리의 5개 리로 나누었다.
1914년 3월 동쪽부분인 상가남면과 가동면을 합하여 가동면으로 서쪽부분인 하가남면과 가서면을 합하여 가서면으로 1928년 4월 다시 가동, 가서면을 합하여 가서면으로, 1928년 4월에 다시 가동, 가서 두면 을 합쳐 가조면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석강리, 기리, 대초리, 동례리, 장기리, 사병리, 마상리, 수월리, 일부리, 도리의 10개의 리로 나뉜다.
동례촌 유래
동례촌은 기묘사화때에 신윤지가 사직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예 를 숭상하므로 예곡(禮谷) 또는 예동(禮洞)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東儒谷)이라고도 한다.
속칭 학당동(學堂洞)과 사량동(士良洞)도 있었다.
학당동(學堂洞)은 조선 인조 때 과거급제한 승문원박사 벽진이씨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강학한 학당이 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되었다.
사량동(士良洞)의전설
동례 북서쪽에 200m 지점에 학당동(學堂洞)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평 온하게 잘 살고 있는데 20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하여 학당 전 마 을이 잿더미로 변하였고 불이나기 전날 쥐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넘어 이곳으 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옛말에 큰 재해가 일어나기 전 개미, 쥐 등 곤충 짐승들이 이 사를 간다는 말처럼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상하게 생각 하였는데 쥐들이 이사한 이곳에 마을 터를 잡아 살게 되었는데 황씨들이 마을을 열었 다고 전한다.
<약새미 전설>
가운데골 골짜기에 약새미가 있었는데 피부병 환자가 세수를 하고 나았다고 한다. 그 후 물이 적어졌으며 오래전 상수도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물길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물이 없어졌다고 한다.
사량동은 어진 선비가 살았다고 하며 처음 엔 천동(泉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마을 신앙 풍속·풍습으로는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삼수정 옆에 있는 300년이 넘는 괴목나무 세 그루와 마을 서편에 있는 소나무였다. 삼수정은 벽진 이가신이 쌓고 그 호를 따서 삼수정이라 했는데, 괴목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징발되어 베어지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20 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데, 닷새 전에 제관을 선정했는데 선정된 제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함께 정성을 드려야 했으며,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자정이 지나면 목욕재계 했다.
제기는 제관집의 것을 사용했고 제물은 유사가 장에 가서 마련했는데 부정된 것을 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돼지는 열나흘 날 유사집에서 잡아 위턱을 윗 당산에 쓰고 아래턱은 아랫 당산에서 사용했는데, 제를 지내고 나면 당산나무 앞에 묻었다. 제수는 두 벌을 장만하여 각각 따로 쓰며, 밥은 제관집에서 지어 가지고 가서 올린다. 자정이 지나 제를 올리고 나서 보름날 아침 음복을 하고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을 했으며 기우제는 박유산 만당에서 했다고 박종섭이 거창군의 마을신앙 도서에 기술하고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리마을소개
우리집은 동례리 1038번지이고, 서쪽으로 통덕량 이난서 재실이 옆에 붙어있다. 재실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있고, 왼쪽언덕에는 앞쪽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 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 있었던 것같다.
감이 많이열리면 가마니로 3가마 정도 수확을 했다. 한광주리정도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한바구니는 물을 따뜻하게해서 항아리독에 땡감을 넣어 따뜻한 안방에 두면 감이삭아서 단감이된다. 나머지 많은 감들은 벼속에 파뭍어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 언덕이 있었는데, 양지바른곳은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 뜯어다가 버리밥을 비벼먹었던 생각이난다.
집앞 산소를 돌아서 언덕끝에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새싹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ㅡㅡㅡㅡ
고향 동례리는 예를 숭상하므로 예곡 또는 예동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리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이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서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북에서 남르로 일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동향인 앞으로는 북쪽의 가북에서 남쪽의 지산으로 폭70미터정도의 넒은 가조천의 물이 합천댐으로 흘러감으로서.
가조천 넘어의 동쪽의 넒은 평야인 가조분지의 논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고 있다..
박유산의 북서,동례마을의 서쪽 전답끝자락에 나지막한 안양산이 자리잡고있다. 이곳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묘소가 정상부에있고, 그아래에 33대까지의 후손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
안양산 끝자락에 학당골이있는데, 학당동은 거창군지에는 조선 인조때 과거에 등제한, 승정원 박사 이창일이 강학한 학당이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승문원박사 이창일공의 교지가 동강 이창기,송월 이선숙님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필자가 어릴적에는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곤 했다. 그동안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하며, 늦은밤에는 야참을 먹었던 기억이나며, 온마을이 잔치를 하는 분위기 였다.
그때는 재실이 우리집 옆마당에 있어서 한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산재실에 사용되었던 유산정숙의 현판과 유산공의 유산문집의 문헌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지었기 때문에,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인 울타리 땅들은 우리집의 토지로 등기가 되어 있다.
영모재 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선조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신라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그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부르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부친이신 33대 동강 이창기공 께서도 삼수정의 영감을 받아 성주군 벽진면에있는 벽진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경수당내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있다.
벽진이씨 28대 삼수정 이가신은 1739년에 태어나고, 1798년에 약추사로서 소수가되어 소청에 나아갔다. 1815년에 별세했다.
자는 성필이고, 호는 삼수정이다.
묘는 안금촌후 신좌이다.
행장및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배는 문화유씨이고, 1737년 9월 1일생이며, 1805년12월3일 별세했다. 묘는 증조고영하 량좌이다.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부는 영춘,조는 사심,증조는 수 충경공 형두후손이다.
외조는 임동헌 은진인이다.
삼수정의 고목 느티나무는 마을앞에 있는 당산이다.
벽진 27대 이가신이 쌓고 그 의 호를 삼수정이라 하였으며, 세 그루의 괴목이 있었는데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목으로 베어지고,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마을 신앙 풍속·풍습으로는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삼수정 옆에 있는 300년이 넘는 괴목나무 세 그루와 마을 서편에 있는 소나무였다. 삼수정은 벽진 이가신이 쌓고 그 호를 따서 삼수정이라 했는데, 괴목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징발되어 베어지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20 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데, 닷새 전에 제관을 선정했는데 선정된 제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함께 정성을 드려야 했으며,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자정이 지나면 목욕재계 했다.
제기는 제관집의 것을 사용했고 제물은 유사가 장에 가서 마련했는데 부정된 것을 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돼지는 열나흘 날 유사집에서 잡아 위턱을 윗 당산에 쓰고 아래턱은 아랫 당산에서 사용했는데, 제를 지내고 나면 당산나무 앞에 묻었다. 제수는 두 벌을 장만하여 각각 따로 쓰며, 밥은 제관집에서 지어 가지고 가서 올린다. 자정이 지나 제를 올리고 나서 보름날 아침 음복을 하고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을 했으며 기우제는 박유산 만당에서 했다고 박종섭이 거창군의 마을신앙 도서에 기술하고있다
ㅡㅡㅡ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되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나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명명하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가조천의 강이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ㅡ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서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원 동례리 라 하며 북으로는 새앙골, 남으로는 중마.평지마,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동구 밖 북쪽으로는 약15미터 높이 언덕 과 그 위에는 정자가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 와 정자에는 벽리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 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삼수정 맞은편 남쪽으로 도랑을 건너 50미터 쯤에는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를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연유인즉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지금은 집은 옮겨서 없어지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어 마을앞을 지나 흐르는 강물과 멀리는 가조면 소재지 와 더 멀리 동쪽으로는 고견사와 아래쪽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동네 마을과 박유산을 뒤로 하고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선조는 합천숭산 200미터 높이 약산에 있다. 남으로 산등성이 내려져 오는데 9부능선에 저멀리 숭산.가야의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잠들어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강이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당골소개(거창군지기록)
동례촌은 일명 동유골(東儒谷)이라고도 한다.
속칭 학당동(學堂洞)과 사량동(士良洞)도 있었다.
동례 북서쪽에 200m 지점에 학당동(學堂洞)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아마도 벽진이씨 집성촌으로 예상.
학당동(學堂洞)은 조선 인조 때 과거급제한 승문원박사 벽진이씨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강학한 학당이 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되었다.
ㅡ
사량동(士良洞)의전설
동례 북서쪽에 200m 지점에 학당동(學堂洞)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평 온하게 잘 살고 있는데 20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하여 학당 전 마 을이 잿더미로 변하였고 불이나기 전날 쥐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넘어 이곳으 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옛말에 큰 재해가 일어나기 전 개미, 쥐 등 곤충 짐승들이 이 사를 간다는 말처럼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상하게 생각 하였는데 쥐들이 이사한 이곳에 마을 터를 잡아 살게 되었는데 황씨들이 마을을 열었 다고 전한다.
2.동강 창기공과 500년선조님
동강 창기공
동강 이창기옹은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선숙은1951년 11월6일생이고,배는 밀양변씨 변필효 1954년생 7월 27일생이고, 부는용국이고, 조는원식이며, 증조는 영근이고, 외조는김섭이고 김녕인 이다. 장남 선숙은 부산 동아대학교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 북부산교육청 교육장 및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에서 거주하고있다. 슬하에 2남 정원,광원이 두었다,
2남 선동은 1954년 6월14일생 이고,배는 인동장씨 장정숙이고, 부는 도안 조는 갑술 이다.
2남 이선동은 부산 동아대학교 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졸업후에 구미에있는 반도체기업에 근무했으나 임원 승진후에는 본사근무를 하게됨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게되었다.
슬하에 1남 이성원, 2녀 이주연 ,이지현을 두었다.
3남 선수는 1956년 11월15일생 이고, 배는 배경전 1959년 6월17일생이고, 부는 만원, 조는 붕기이다.
가조 동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1남 이인원, 1녀 이은정을 두었다.
4남 선규는1965년1월17일생이고, 배는 전주최씨 최지영 19681년 10월17일생 이고, 부는 성림이고, 조는 인준이고 외조는 송대현 은진인이다
이선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복지 요양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을했다.
슬하에 2녀 이소진, 이소연을 두었다.
녀 선자는 1962년1월21일생이고, 부는 하재룡 진양인 공학석사 이다.부는 우성이다. 슬하에 2남 하종욱, 하선일을 두었다.
500년선조님
벽진이씨 평정공후 증손 20대 감정공 오담 이건선조님(1502~1589)께서 거창 개화리에 입향하셨고, 오담공 3남인 21대 통덕량 난서공 (1537~1592)께서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동례촌으로 입향하셨다.
현재 34대까지 예를숭상하고 절의를 지키면서 500여년을 살고있다.
조선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한 승문원박사 벽진이씨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강학한 학당을 지어 학문을 강학했으며,
26대 유산 정매공 ( 1701~1761) 께서는 노년에는 동례촌의 박유산 끝자락에 유산재실(유산정열 현판이 전하고있음)을 짓고 예를 숭상하고 선대의 높으신 충절을 기르며, 조선후기 학자로서 학문에 열중해서 유산집 문헌을 남겨져있다
당시 유산재실이 멸실된후에 그장소에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공의 재실인 영모재가 건립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있다 라고 거창군지에 기록되어있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마을 앞 동구 밖 북쪽으로는 약15미터 높이 언덕 과 그 위에는 정자가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 와 정자에는 벽리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 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삼수정 맞은편 남쪽으로 도랑을 건너
50미터 쯤에는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를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연유인즉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지금은 집은 옮겨서 없어지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어 마을앞을 지나 흐르는 강물과 멀리는 가조면 소재지 와 더 멀리 동쪽으로는 고견사와 아래쪽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동네 마을과 박유산을 뒤로 하고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선조는 합천숭산 200미터 높이 약산에 있다.
남으로 산등성이 내려져 오는데 9부능선에 저멀리 숭산.가야의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잠들어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강이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