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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선동 전기자료모음2

작성자儒珍 이선동 (평정공계 승지공 34세)|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쉼터 500년 – 고향 안식처, 동례·가조·거창
벽진이씨 평정공계 승지공파의 터전과 후손 이야기

목차

1. 머리말 – 쉼터 500년의 시작
2. 우리 가문의 뿌리 – 벽진이씨 평정공계
3. 동례리, 500년의 터전
4. 삼수정과 느티나무, 선조의 지혜
5. 경모재와 종중의 제향
6. 일하정과 밀양박씨 산소의 이야기
7. 안양산과 선조들의 묘역
8. 독새골과 승문원박사 이창일 선조
9. 내 어린 시절의 기억 – 강, 학교, 계절
10. 사송지와 학당골 못, 동네의 놀이터
11. 거창 생활과 향교동 재실 이야기
12. 성기마을 고산재와 승지공 이무 선조
13. 맺음말 – 전통의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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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 쉼터 500년의 시작
우리가족은 고려 개국공신 대장군 이총언을 시조로 모시는 벽진이씨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입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이곳은 20세 통정대부 검춘추 이건 선조 이래 500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우리의 고향이며 안식처입니다.
이는, 나의 유년기와 선조들의 자취가 녹아 있는 고향의 공간과 정신을 되새기며, 후손들에게 전통과 뿌리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엮었습니다.
2. 우리 가문의 뿌리 – 벽진이씨 평정공계
벽진이씨는 고려 개국공신 대장군 이총언을 시조로 합니다. 우리 계파는 조선시대에 활약한 평정공 이무를 중심으로 하는 평정공계이며, 그 중에서도 승지공파에 속합니다. 동례리에 입향한 지는 20세손 이건 선조로부터이며, 지금까지 500년의 세월이 이어져 왔습니다.
3. 동례리, 500년의 터전
동례리는 동쪽으로 합천 해인사, 서쪽으로 거창과 인접한 교통의 중심지이며, 마을 뒤편에는 88고속도로가 지나갑니다. 서남쪽에는 거대한 바위와 기암으로 이루어진 박유산이 우뚝 솟아 마을을 굽어봅니다.
70여 세대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며, 새앙골·중마·안금 등의 소마을이 인접해 있어 정감 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4. 삼수정과 느티나무, 선조의 지혜
마을 앞 언덕에는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은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지금도 정자와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정자는 **삼수정(三樹亭)**이라 불리며, 선조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마을의 역사를 품고, 후손을 지켜보는 나무들입니다.
5. 경모재와 종중의 제향
삼수정 맞은편, 도랑 건너편에는 21세 통덕랑 이난서 선조의 **경모재(景慕齋)**가 있습니다. 이곳은 매년 시제를 지내는 종중의 중심이며, 많은 일가가 이곳에 모여 선조를 추모하고 친목을 다졌습니다. 어린 시절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 안에 있기도 했습니다.
6. 일하정과 밀양박씨 산소의 이야기

재실 언덕 위에는 29세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동향이며, 마을과 멀리 고견사와 미녀봉, 그리고 가조면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입니다.
7. 안양산과 선조들의 묘역

박유산 줄기에서 뻗어내린 안양산의 8부 능선에는 21세 이난서 선조와 그 자손들의 묘소가 동향으로 자리합니다. 입향조의 후손들이 한 줄기처럼 이어진 산등성이에 정갈히 잠들어 있으며, 이 모두는 우리의 역사가 되는 공간입니다.
8. 독새골과 승문원박사 이창일 선조
동쪽 독새골 능선에는 22세 승문원박사 이창일 선조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후손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며, 중간에는 33세 동강 이창기 선조의 산소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멀리 88고속도로와 미녀봉이 조망되며, 후손들의 삶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9. 내 어린 시절의 기억 – 강, 학교, 계절
강 건너 마상리 소재지까지는 걸어서 등교해야 했습니다. 나무다리, 돌다리를 건너며 비에 젖고 추위에 발 시려워도,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지나던 그 길은 지금도 가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0. 사송지와 학당골 못, 동네의 놀이터
마을 뒤편 사송지에는 네 그루의 고송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잔디언덕을 뛰놀고, 학당골 못에서는 여름마다 물놀이를 즐기던 그 시절은 우리에게 자연이 곧 놀이터였던 때입니다.
11. 거창 생활과 향교동 재실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은 거창 읍내에서 하숙 또는 자취를 했습니다. 개화리 향교동 재실에서 지내며, 후에 이곳이 20세 이건 선조를 모신 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향에 참여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2. 성기마을 고산재와 승지공 이무 선조
22세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마을 뒷산에 계십니다. 마을 앞에는 사적비, 뒷산에는 고산재가 세워져 매년 제향을 올리며 공의 높은 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가문의 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13. 맺음말 – 전통의 길 위에 서서
동례리는 단지 고향이 아니라, 조상의 얼과 혼이 깃든 정신의 뿌리입니다. 이 작은 소책자가 후손과 일가분들에게 선조의 삶과 고향의 숨결을 기억하게 하는 작은 다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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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500년 머리말

– 고향 안식처, 동례·가조·거창 –

우리 가문은 고려 개국공신 대장군 이총언을 시조로 모시는 벽진이씨이며, 그 중에서도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으로,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500년 동안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에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34세손으로, 33세손 동강 이창기 선조와 흥해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1녀 중 차남으로, 형은 송월 이선숙, 아우는 동효 이선수, 구야 이선규, 그리고 여동생 선자입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 거창, 동쪽으로 합천 해인사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있으며, 마을 뒤편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고, 서남쪽 박유산이 우뚝 솟아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을은 현재 약 70여 세대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북쪽 새앙골, 남쪽 중마, 평지마, 안금 등의 작은 마을이 인근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마을 앞 동구밖 북쪽 언덕 위에는 정자가 하나 있고, 그 주변에는 27세 이가신 선조가 심은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정자는 삼수정이라 불리며, 선조의 호를 따서 이름 붙여졌고, 그 내력은 가조면지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맞은편 남쪽으로는 도랑을 건너 50미터 지점에 21세 통덕랑 이난서 선조를 기리는 경모재와 유적비가 있습니다. 매년 묘사 때면 종중 어른들이 모여 재실과 저희 집에서 하루를 묵고 시제를 지내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재실과 집이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 터 일부는 저희 집 소유로 등기되어 있습니다.

그 언덕에는 29세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 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과 멀리 가조면 소재지, 고견사, 그리고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을 남쪽 안양산에는 21세 이난서 선조와 그의 장손 이선일, 그 후손들의 산소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견사, 서쪽으로는 박유산을 마주한 양지바른 명당입니다.

북쪽 독새골 능선에는 승문원박사 이창일 선조의 묘소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후손들의 산소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 아래 중턱에는 33세 동강 이창기 선조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과 멀리 88고속도로, 미녀봉의 사계절 풍광을 굽어보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마을에서 1.5km 거리의 마상리 면소재지까지 걸어서 다녔고, 여름 장마철에는 강을 건너다 넘어지기도 하고, 겨울에는 얼음 위를 맨발로 건너기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어 편리하지만, 그 시절의 강물과 물놀이, 물고기 잡던 기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을 뒤편에는 소나무 네 그루가 있어 이름 붙여진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고, 그 북쪽으로는 학당골 못이 있어 여름마다 친구들과 목욕하며 뛰놀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서쪽으로 2km를 더 가면 88고속도로를 넘어 선조들의 선산인 안양산이 있습니다. 산줄기가 동으로 뻗어내려, 선조들은 양지바른 언덕에 편안히 잠들어 계십니다.

고등학교는 거창 읍내에서 다녔으며, 하숙과 자취를 병행하였고, 거창군청 북쪽 언덕의 개화리 향교동 재실에서도 생활하였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이곳은 20대 선조 통정대부 검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었습니다. 가을이면 부친과 종중 어른들이 묘사에 참석하셨고, 저도 아이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한편,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마을 뒷산 선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마을 옆에는 고산재라는 재실이 있고, 매년 제향이 봉행되며,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가 세워져 덕망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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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500년 머릿말 / 고향 안식처 동례 가조 거창 우리가족은 벽진이씨 이총언을 시조로 대장군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이다. 33세손 동강 이창기 와 흥해최씨사이에 4남1녀가 있다, 1남은 송월 이선숙이고, 2남은 덕명 동석천 이선동, 3남은 동효 이선수,4남은 구야 이선규 이고, 1녀 네째는 선자이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서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원 동례리 라 하며 북으로는 새앙골, 남으로는 중마.평지마,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동구 밖 북쪽으로는 약15미터 높이 언덕 과 그 위에는 정자가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 와 정자에는 벽리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 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삼수정 맞은편 남쪽으로 도랑을 건너 50미터 쯤에는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를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연유인즉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지금은 집은 옮겨서 없어지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어 마을앞을 지나 흐르는 강물과 멀리는 가조면 소재지 와 더 멀리 동쪽으로는 고견사와 아래쪽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동네 마을과 박유산을 뒤로 하고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선조는 합천숭산 200미터 높이 약산에 있다. 남으로 산등성이 내려져 오는데 9부능선에 저멀리 숭산.가야의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잠들어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강이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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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儒珍 李善東) 전기

유진(儒珍) 이선동은 벽진이씨 승지공파 34세손으로, 현대 산업계와 종중 활동 모두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경남 거창 가조 동례촌에서 동강 이창기와 최순주 부모님의 4남1녀중에서 2남으로 1954년 6월 14일 태어났다.
21대조 통덕량 난서공이래 400여년 동안 대대로 살아오고있다.
23대 과거급제 승문원 박사. 동곡 창일
조선후기 유학자 26대 유산 정매. 29대 일하정 학준. 삼수정등의 훌륭한 분들이 계신다.
시골에서 초.중등을하고 거창에서 고등을하고. 부산에서 동아대학교 학사. 석사. 이학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경북 구미에서 반도체 회사 종합연구소에 입사하여 국가주요과제등을 수행했으며. 일본 도시바기술연수등을 통해서 첨단과학기술을 연구했다.
또한 미국 여러지역. 중국유수지역. 일본 . 태국.필리핀등 많은 나라들의 문화와 산업발전을 체험을했다.
25년간 근무한 후 상무 임원으로 승진,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기며 구미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가문과 종중을 위한 봉사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후 중소기업 연구소장으로 기술지원을 하였으며, 이후 대기업 인재추천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는 자동차부품 회사에서 1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하기도했다. 그러던 중, 서울 지역 벽진이씨 종중 모임인 서울화수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추담 두헌 회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종중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선동은 서울화수회 이사로 시작하여 이후 상임부회장, 벽진산악회(벽산회) 회장으로 역임하며 수도권 벽리 종인의 친목과 화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화수회의 주요 행사인 벽진지 발간에도 참여하여, 제16.17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문의 기록을 남기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2021년, 전국의 벽진이씨 종인이 온라인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벽진이씨 일가 종친회’ 단체 카카오톡방을 개설하였다. 이 채널을 통해 각 문중의 향례 일정, 화수회 소식, 종친 간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같은 해 그는 ‘벽진이씨 종친회 벽진유림’ 다음카페와 유튜브 채널을 동시에 개설하여, 8천여 건이 넘는 종사 자료를 축적하고 영상 콘텐츠를 통해 후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유와 예를 숭상하며 벽진이씨 종인간에 화합단결을 위해노력하며. 숭조정신과 경종수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벽진이씨 대종회 문화위원장이 되어 대종회 홈페이지 관리책임자및 문중 선조님의 훌륭한 업적을 홍보하는데 노력했다.
종중의 제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관하였다. 상주 벽진면 경수당 시조공 제향, 김천 부항 모원당, 김천 화로서원(청백리 노촌 이약동 선생 향사), 합천 입향조 판서공 휘 승원, 거창 감천공 이건 등의 제향을 지원하였으며, 가조 지역 승지공 회장으로서 난서공 통덕랑과 후손들의 제향을 총괄하였다.

그 외에도 서울 및 경기 북부 방족의 향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김포 약산, 포천 평정공 이소원, 노원 동천재 충숙공 이상길, 양평 직장공, 화서 이항로 문경공 춘향례, 화서학회 재단 설립 및 학술발표회 주최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산악회 활동으로는 벽산회 6대 회장으로 청계산 시산제를 시작으로 매월 수도권 명산과 유적지를 탐방하며 선조의 자취를 기리고 있다. 이 모임은 원로 종친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소통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원로 10여 분과 함께 매월 돌아가며 점심모임을 가지는 '백세회' 활동도 통해, 종친 간의 우의를 돈독히 다져가고 있다.

유진 이선동은 산업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았고, 이후에는 벽진이씨 가문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한 개인의 삶을 넘어, 종중의 뿌리와 자긍심을 지켜온 조용한 실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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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 연보(儒珍 李善東 年譜)
연도 활동 내용

1954년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출생 (부: 동강 이창기, 모: 최순주, 4남 1녀 중 차남)

1960~1970년대 가조초등학교, 가조중학교, 거창고등학교 졸업

1970~2000년대 동아대학교 공학 학사 및 석사, 전자 반도체 박사 과정 수료

1980년대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반도체 기업 종합연구소 입사. 국가 주요 과제 수행, 일본 도시바 기술 연수 참여

1980~2000년대 미국, 일본, 중국, 태국, 필리핀 등지 산업 시찰 및 기술 교류 경험
2000년대 초 25년 근무 후, 상무 임원으로 승진하며 서울 본사 발령. 서울 정착
2000년대 중반 중소기업 기술연구소장, 대기업 인재추천 업무 담당
2010년대 초 중국 자동차부품회사 부사장 역임 (1년간)
2020년대 서울화수회 활동 시작, 추담 이두헌 회장과의 인연으로 종중 활동 본격화
2020년경~ 서울화수회 이사, 상임부회장, 벽산회(벽진산악회) 회장 역임
2020년~2025년 벽진지 제16호, 17호 편집위원으로 활동
2023년 '벽진이씨 일가 종친회' 카카오톡방 개설 (전국 종인의 소통 창구)
2023년 '벽진유림' 다음카페 개설 및 유튜브 채널 운영 시작 (종사 자료 8천여 건 정리)
2025년~ 벽진이씨 대종회 문화위원장, 홈페이지 관리자 및 콘텐츠 기획

연중 경수당(시조공), 모원당, 화로서원, 입향조 제향 등 다수 제례 주관 및 참여
연중 가조 승지공회 회장으로서 난서공 후손 제향 총괄
연중 김포 약산, 포천 평정공, 노원 충숙공, 양평 직장공 등 수도권 향사 주관
연중 화서 이항로 문경공 춘향제, 화서학회 재단행사 참여
연중 벽산회 6대 회장으로 청계산 시산제 시작, 수도권 명산 탐방 정례화
연중 원로 중심 '백세회' 운영 (매월 점심모임으로 종친 우의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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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동(李善東) 유진(儒珍) 선생 약력 및 인생사. 회고록
이선동(李善東) 유진(儒珍) 선생 약력 및 인생사

성명: 이선동(李善東)
호: 유진(儒珍).덕명. 동석천.
생년월일: 1954년 6월 14일
출생지: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1038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1동 1058번지 (구로우성아파트)
이메일: lsdsemi@naver.com
학력
1973년: 거창종합고등학교 졸업
1980년: 동아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
1990년: 동아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사
1993년: 동아 대학원 전자공학과 박사과정 수료
직업 경력
KEC(주) (1981.05 ~ 2007.09, 총 26년 근무)
연구개발 및 제조기술 (15년)
반도체 소자(DIODE, TRANSISTOR, IC) 설계 및 개발, CMOS 공정, PHOTO/금속/패키지 등 전 공정 기술 연구.
KAIST 위탁개발, 전자통신연구소(ETRI) 국책과제 참여.
제조 및 품질 부문
반도체 Fab 및 Assembly 공정 책임자로 생산라인 운영, 제조부장 및 공장장 역임.
품질보증본부장(상무)로 회사 퇴임.

자동차용 반도체 사업 (8년)
Alternator Diode, Regulator Module, Surge Absorb Diode, Pressure Sensor 등 자동차용 반도체 소자 개발 및 사업화 추진.
그 외 활동
2007년: 중소기업 연구소장
정보통신부 국책과제 '유비쿼터스용 CMOS 기반 고압 압력센서 개발' 과제 책임자 수행
이후 헤드헌팅 운영(오픈서치), 반도체 기술자문 및 불교수행 병행
자격 및 수료
1979년: 전자기사 1급 자격 취득
무선설비기능사 3급
1983년: 일본 TOSHIBA 반도체기술 연수(1개월)
2003년: 전경련 국제경영원 TECHNO CEO 과정 수료
서울대 MEMS연구소 장비선정 위원
업무 및 기술 전문 분야
반도체 소자 및 공정 기술 (Discrete, IC, CSP, MODULE)
자동차용 전자소자 (DIODE, MODULE, SENSOR)
MEMS 기반 Pressure Sensor, Flow Sensor
R&D 및 사업기획, 마케팅
국제기술 연수 및 국책과제 경험 풍부

종교적 수행과 사색의 길
퇴직 이후 인생의 후반기를 성찰과 수행으로 채워갔다. 청도 운문사 북대암, 김천 청암사, 금오산 약사암, 서울 청학사, 조계사 불교대학, 태백 정암사, 해인사, 보리암 등 국내 유수 사찰에서 철야기도, 불경 독송, 참선과 명상에 전념하였다.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등을 통하여 인생의 본질과 평안을 구하였으며, 도림스님에게 법명 ‘덕명’을 받음.

삶의 회고와 인연의 기록
고향 동례리의 자연과 유년기 추억, 가족사,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서의 고뇌, 불교적 수행과 평화의 순간들을 깊이 있게 되새기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비우는 삶”을 신조로 삼았다. 감나무 아래서의 동심, 모닥불 앞에서의 사색, 성원이와 함께한 가족 여행, 회사생활의 갈등과 기쁨, 그리고 전국 사찰에서의 기도와 봉사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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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 회고록

– 나의 삶을 돌아보며 –

1. 나의 시작

1954년 6월 14일,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재실 옆 감나무 두 그루, 대나무밭, 우물가의 미나리밭, 발동기 소리와 호롱불이 켜졌던 초가집의 풍경, 겨울 모닥불 앞에서 손을 녹이던 시간들.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쇠비름을 캐고,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러오던 날들, 그 모든 것이 나를 만들었다.

2. 배움의 길

1973년 거창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부산 동아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 과정을 마쳤다. 이어 1990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1993년에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며 반도체 기술의 길로 나아갈 기틀을 다졌다.
학창시절, 가조에서 자전거로 거창까지 통학하며 길고 험한 여정을 버텨낸 날들이 지금의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3. 산업 현장에서

1981년부터 2007년까지 26년간 KEC(주)에서 반도체 연구개발과 제조기술, 품질보증, 자동차용 반도체 사업 등을 맡아 일했다.
센서소자 개발, 자동차용 다이오드 및 레귤레이터 모듈, 압력센서 등 다양한 제품을 설계하고 사업화하는 데 참여했다. 사업부장(상무), 품질보증본부장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기술인으로, 조직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했다.
일본 TOSHIBA 연수(1983), 전자통신연구소 및 KAIST 프로젝트(1984~1987), 서울대 MEMS 연구소 참여 등 전문성과 리더십을 함께 길렀다.

4. 수행과 치유

회사 생활 중 겪은 수많은 고민과 번뇌는 나를 기도의 길로 이끌었다. 청도 운문사 북대암에서의 철야 3000배, 해인사 벽련암, 태백 정암사, 동화사, 서울 조계사와 법화정사, 강화 보문사 등 전국 사찰을 찾아 기도하고 정근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거창 금오산, 김천 청암사, 운문사 내원궁, 범화경 독경의 철야기도는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를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5. 가족과 추억

성원이와 함께 떠난 여름휴가, 서해, 동해, 남해 바닷가, 주왕산, 청암사 계곡에서 보낸 시간은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해주었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뛰놀던 과수원, 외가집과 고모댁에서 보냈던 방학, 초등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받아먹던 따스한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다.

6. 인연과 마무리

중고기업 연구소장으로 짧게 일한 뒤, 중국 금주에서도 근무하며 삶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건강 문제로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에는 회사를 떠나,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며 살았다.
헤드헌팅 회사 ‘오픈서치’ 운영, 과거를 정리하는 글쓰기와 종중 활동, 그리고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맺으며
나의 삶은, 거창 동례리 들판에서 시작해 반도체 기술현장을 거쳐, 수행자의 길로 이어진 여정이었다.
많이 모자랐고, 때로는 넘어졌지만, 진실하게 살고자 애써온 시간들이었다.
이제, 남은 인생은 나눔과 감사로 채우고자 한다. 나를 키워준 고향과 조상, 그리고 나와 함께해 준 가족과 이웃들에게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유진(儒珍) 이선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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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초안 구성안]
— 유진(儒珍) 이선동의 삶
1. 서문
삶을 돌아보며
후손과 동문, 종친들에게 전하는 말씀
2. 유년 시절의 기억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고향 이야기
감나무, 대나무밭, 안양골, 사동지의 추억

어린 시절의 일상과 학교 생활
3. 학창 시절의 자취와 추억
거창고등학교 시절의 도전과 고뇌
동아대 전자공학과 학사·석사·박사과정 수료
자취, 하숙, 통학의 기억들

4. 직장인의 삶, 반도체와 함께한 26년
KEC에서의 시작과 반도체 R&D
제조기술, 자동차용 소자개발, 품질보증까지
센서 개발과 국책과제 수행
리더로서의 고민과 회사생활의 의미

5. 영적 수행의 길
금오산, 운문사, 청암사, 통도사 등에서의 기도와 정진
철야 3000배, 독경, 새벽 정근의 시간들
법화정사, 조계사 불교대학 수료와 법명 '덕명' 수득

6. 가족과의 시간
결혼과 자녀 성원이와의 추억
가족여행, 청도 피서, 방생, 휴가의 기억
형제, 외가, 고모, 고향 친척들과의 이야기

7. 종중과 가문의 뿌리 찾기

— 디지털 시대, 선조의 숨결을 잇다
나는 서울에서의 노후 생활 중에도 뿌리를 잊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벽진이씨 종친으로서의 사명감은, 단순한 혈통적 자긍심을 넘어서 선조의 삶과 정신을 되살리고, 후손에게 올곧이 물려주는 일이었다.
종중 활동의 시작: 온라인 소통의 장을 열다
정보화 시대, 종중의 교류 방식도 바뀌어야 했다.
나는 다음카페를 개설하여 벽진이씨 가문과 종친들이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을 만들었고,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어 종중 행사, 유적지 탐방, 제향 기록 등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였다.
또한 단체 카카오톡방을 운영하면서 실시간 소통과 공지, 경조사 공유 등을 가능하게 하여, 전통과 현대의 가교 역할을 했다.

재실과 묘소 참배: 선조를 잊지 않다
나는 종중 선조들의 재실과 묘소를 수시로 찾아 참배하였다.
그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가문의 혼과 정신이 깃든 성소였다.
가조면 동례리 입향조 통덕랑의 영모제를 중심으로
성기 고산제(승지공), 거창 오담재(감천공),
합천 영모재(판서공), 감천 하로서원(평정공),
부항 모원당(대장군) 등 주요 재실을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제향을 주관하였다.

제향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선조에 대한 공경과 후손들의 결속을 다지는 정신문화의 실천이었다.

사실기와 당기 연구: 기록으로 남긴 선조의 숨결
종중의 뿌리를 찾기 위한 나의 여정은 ‘읽고, 정리하고, 나누는 일’로 이어졌다.
특히 벽진장군 이총언 시조공에 대한 《사실기》와, 종당의 정신을 보여주는 《경수당기》의 내용을 탐구하고 보급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경수당(敬收堂)**은 그 이름처럼, 후손들이 선조의 공덕을 공경스럽게 받아들이는 공간이며,
**사실기(事實記)**는 전승되어야 할 삶의 연대기이다.
이러한 고문서를 해독하고, 디지털로 편집·공유하는 작업은 후손들의 학습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전국 유적지 탐방: 혈맥으로 연결된 선현들의 발자취
나는 벽진이씨의 주요 인물과 유적지를 따라 전국을 순례하였다.
직계 중심의 재실 외에도, 다음과 같은 방계 종현들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덕봉서원(참판공, 유량), 복재공 유허지(창량수/외재공)
서울 노원 동천재(충숙공), 강화 충렬사(충숙공 배향)
경기 양평 화서 이항로 선생 기념관, 노산사
제천 자영영당(자운 이정관), 군위 모암재(문정공)
창녕 금헌재(정도공), 홈실 이언영 유허지

그 발길 하나하나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이 피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가”에 대한 내면의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었다.

종중 활동은 곧 나의 뿌리였다
나는 학문과 산업의 길을 걷다, 이제는 선조를 섬기고 후손을 이어주는 길 위에 서 있다.
종중 활동은 ‘과거를 기리는 일’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 다리가 되고자 한다.

> “나는 묻는다.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것은 유산이 아니라 정신이다.
그 정신은 기록되고, 전해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 연구
각종 재실 참배 및 후손의 예우
평정공, 감천공, 통덕랑, 승지공 등 선조 숭모
방계 인물들과 서원 탐방기

8. 디지털로 잇는 종중의 맥
벽진이씨 다음카페 개설
유튜브, 페이스북, 단톡방을 통한 온라인 종친회
서울 노후생활과 종중 활동의 새로운 방향

9. 회고와 다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삶의 자세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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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 활동"**은
선조를 기리고 가문의 뿌리를 잇는 정신적 중심축으로, 회고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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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순방(사업관련해서 해외 순방)
미국지역
보스톤. 이온임플란트 설비구매를 위해 보스톤지역 이튼회사방문을 했고,저녁식사에 랍스타 메뉴가 일품이 었다,
LA.웨스트 세미콘쇼에 4번 참석을 했는데, 관람후 이튼사의 저녁에 디너 선상파티의 밤풍경이 장관이었다.
한번은 세미콘 전시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느낄 정도로 고생한 기억이있다.
디즈니렌드..황임성.이용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모터쇼에는 3번참석했는데,지엠본사,포드차박물관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빌려 국경을넘어 이웃 케나다 지역으로 들어가서 나이야가라 폭포를 2번 이나 구경했다.
폭포 동굴로 들어가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풍경과 무지개와 물소리는 정말 멋있는 장면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금문교 다리를 걸어서 건너던기억, 다리건너 왼쪽동산에 올라 태평양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세상이 넓다는것을 인식하기도했고, 반도체 물리책을 출판한 버클리대학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타고, 101하이웨이로 LA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지나긴 시간의 운전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LA의 바다항구 피어스에서 바다동물을 구경도 할만했다.

조지아공과 대학을방문해서 패케이징관련 교수님를 만나 기술협의를 하고 학교투어와 코카콜라 박물관,ㅍ스톤마운트파크 관람이 기억에남는다.

필라델피아의 자동차경기장에서 레이서카 탑승이 기억에남고,시청청사관람했다.

필라델피아.델코레미,WTI차량용 반도체 마케팅을 위해 업체방문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이끼낀 큰 고목 나무가 기억난다.
디즈니랜드 관광도 재미있었다.
시에틀공항,덴버공항을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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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역
시안의 당관계자 만남, 전기연구소에 위탁과제 점검을 위한 업체방문,
시에서 배려해준 관용차를 타고 다닌기억, 병마용, 비림 즉 비석의숲을 감명깊게 관람했다.
호텔생활과 저녁 파티를 즐겁게하고 친구맺은 가정집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심양에가서 골프치고 회식,밤놀이.
내몽고 황산
금요일 밤열차로 내몽고의 황산에도착해서 환단고기 옛유적과 역사박물관관람.
밤열차를 타고 태산에가서 천하제일봉과 곡부의 공자묘 관람
금주에서 전장부품관련 생산지도로
9개월간 생활했다.
산해관의 만리장성 시작점,제일문.
하얼빈공대를 방문해서 업무협의.
러시아거리위 먹자거리구경
하얼빈간의 겨울 얼음공원
태양도를가다.
청진 안중근 폭파장소확인
만주국 박물관관람
상해 와이탄에서,밤배야경구경.
항주 서호의 뱃놀이.비단가게거리
서주.서주정류기. 굳닥 반도체공장방문. 태호 호수의 둘레길구경.
단둥의북한철교
대련의 동해공원,전적지
위해. 바닷가구경하다.업체방문품보
형주 유비의 묘소
삼고초려장소
무한공원앞에 황소 기념물
장사지역 기차연구소방문
상판 전장 부품협의
장사전기연구소기술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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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
희메지 기술연수.
일본계신 아저씨께서 10만엔을 보내주셔서 부친에게 귀한 모자를 사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셨다.
시즈오카의 온천욕, 후지산 둘레길 탐방.고베,나고야,오오사카관광
동경화학.
오카모드 웨이프회사.
도시바세라믹
일본교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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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지역
드골공항오후3시도착..렌트카로 르특기 발레오업체로 이동,
2시간정도거리를 길을잘못들어 밤12시경 호텔도착...시골지역에는 저녁8시이후는 인적이 드물어찿아가는데고생많이했던기억이 추억으로남는다.
영국해협 해저터널입구
에펠탑위로올라가서 4방을 구경,
목마르트언덕, 르브르박물관.
달팽이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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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시티관광버스를타고 다니면서
버버리매장,국회의사당관람및 유람
독일 보쉬업체방문 호프집만찬.
필리핀은 세라믹공장장시절관리차,
수빅만 미군기지,골프,카지노구경
태국은 반도체 본부장시절 치앙마이 반도체 공장관리차
홍콩..오션파크여행
싱가폴20년근무기념여행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숙박.나들이.
인도네시아업체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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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李氏 大宗會 文化委員長
碧珍李氏 宗親會. 編輯長.
서울 花樹會(碧山會長) 常任副會長.
平靖公理事.가조承旨公派 宗中 會長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碧珍儒林  李 善 東 (號 儒 珍) 덕명
碩士 / 理學博士 課程修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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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C 종합연구소입사. 연구센타장
상무 전장사업부장. 본부장퇴직
부천 센서 연구소장
중국 금주 하이브론 부사장
헤드헌트 오픈서치 대표


제1장. 어린 시절, 동례리 추억의 풍경

재실 옆 감나무 두 그루
가을이면 홍시가 익어가던 재실 옆 감나무 두 그루. 나뭇가지에 올라 조심스레 감을 따며 어머니의 꾸중을 피하던 기억이 난다. 그 옆 대나무밭은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을 불러왔고, 숨바꼭질 놀이터가 되었다.

집 앞 언덕과 우물가
쇠비름을 캐다 나물로 삶아 먹던 그 언덕, 우물가 미나리밭에서 놀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오두막 초가집, 밤이면 켜지던 호롱불의 불빛은 어린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모사와 손님맞이, 겨울 모닥불
모사(祖祀) 때 외부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음식 준비에 분주하셨고, 우리는 정갈하게 앉아 제사를 지냈다. 겨울 밤이면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손을 녹이며 웃던 가족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동구밖 그네와 마을의 잔치
감나무 아래 그네를 매달아 동무들과 놀고, 옆집 결혼식 때 떨어진 감을 주워 먹으며 뛰놀던 그 시절. 종실에서 감 따던 기억도, 개구리를 잡아 닭 모이로 주던 장난기도 모두 나의 한 조각이다.

초등학교 시절
망태를 메고 풀을 베러 가고, 작두로 켜고,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버들피리를 불었다. 새양골 못에서는 수영을, 안양골에서는 소 먹이고 물을 길었다. 사하라 태풍이 덮쳤을 때 도랑에 빠지던 해프닝도 지금은 웃음이 난다.

사과 과수원 시절
가북에 나무를 하러 다니고, 과수원에서는 농약을 뿌리며 힘들게 일했다. 사과를 수확해 광주 경매시장에 가져가던 기억, 흙벽돌을 찍고 집을 짓던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큰 경험이었다.

외갓집과 고모집
상가 외갓집을 따라가고, 일부리 외갓집에서 놀며 점연이 누나와 공기놀이를 하던 기억. 마상리 고모님은 엄격하셨고, 작은고모는 인자하셨다. 누나와 자형, 사촌들과의 정겨운 나날들이 지금도 가슴을 데운다.

소풍과 학교 생활
소풍 가던 날, 고견사 입구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비 오는 날 냇가에서 친구들과 손잡고 신발을 벗고 건너던 등하교. 학교에서는 옥수수빵, 우유빵을 배급받고, 겨울에는 난로 위에 도시락을 데워 먹던 그 따스한 시절이 지금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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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의 내면 여행과 불교 수행

구미 시절은 나에게 있어 마음을 다스리고 내려놓는 '수행의 시작점'이었다.

청도 운문사 북대암에서 철야 3,000배 기도를 드리며,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보현사에 불적을 두고, 금오산 약사암에서 고뇌와 번뇌를 씻어내며 기도했다. 회사의 갈등, 노조 문제로 마음이 어지러웠던 시기, 나는 산으로 향했다.

금오산 자주 오르다: 신입사원 시절 극기훈련으로 넘던 산, 그 산을 다시 오르며 삶을 되돌아보았다.

김천 청암사에서 범화경 독경 철야 기도. 스님들과의 차담은 사무적인 대화가 아닌,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끌었다.

성원이와 함께 불교학교를 다녔고, 도리사에서 부처님오신날 꽃공양을 도우며 가족 수행의 기쁨을 알았다. 퇴직 후에는 운문사 내원궁에서 6일간의 기도를 올리며, 인생 2막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다시 찾은 불법(佛法)
국민대 인근 청학사, 조계사 불교대학에서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 등을 공부하며 경전의 의미를 체득했다.

태백 정암사 1박 2일 새벽 정근, 해인사에서의 8만대장경 탑돌이, 법화정사 도림스님에게 법화경을 받고 덕명이라는 법명을 수계받으며 불자의 길을 명확히 했다.

한산도 야간 방생, 보리암, 보문사, 삼천사, 흥국사, 진관사, 대성사 등 수도권 사찰에 이르기까지 마음 따라 기도하며, 삶을 정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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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儒珍 李善東) 전기

유진(儒珍) 이선동은 벽진이씨 승지공파 34세손으로, 현대 산업계와 종중 활동 모두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경남 거창 가조 동례촌에서 동강 이창기와 최순주 부모님의 4남1녀중에서 2남으로 1954년 6월 14일 태어났다.
21대조 통덕량 난서공이래 400여년 동안 대대로 살아오고있다.
23대 과거급제 승문원 박사. 동곡 창일
조선후기 유학자 26대 유산 정매. 29대 일하정 학준. 삼수정등의 훌륭한 분들이 계신다.
시골에서 초.중등을하고 거창에서 고등을하고. 부산에서 동아대학교 학사. 석사. 이학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경북 구미에서 반도체 회사 종합연구소에 입사하여 국가주요과제등을 수행했으며. 일본 도시바기술연수등을 통해서 첨단과학기술을 연구했다.
또한 미국 여러지역. 중국유수지역. 일본 . 태국.필리핀등 많은 나라들의 문화와 산업발전을 체험을했다.
25년간 근무한 후 상무 임원으로 승진,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기며 구미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가문과 종중을 위한 봉사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후 중소기업 연구소장으로 기술지원을 하였으며, 이후 대기업 인재추천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는 자동차부품 회사에서 1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하기도했다. 그러던 중, 서울 지역 벽진이씨 종중 모임인 서울화수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추담 두헌 회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종중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선동은 서울화수회 이사로 시작하여 이후 상임부회장, 벽진산악회(벽산회) 회장으로 역임하며 수도권 벽리 종인의 친목과 화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화수회의 주요 행사인 벽진지 발간에도 참여하여, 제16.17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문의 기록을 남기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2021년, 전국의 벽진이씨 종인이 온라인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벽진이씨 일가 종친회’ 단체 카카오톡방을 개설하였다. 이 채널을 통해 각 문중의 향례 일정, 화수회 소식, 종친 간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같은 해 그는 ‘벽진이씨 종친회 벽진유림’ 다음카페와 유튜브 채널을 동시에 개설하여, 8천여 건이 넘는 종사 자료를 축적하고 영상 콘텐츠를 통해 후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유와 예를 숭상하며 벽진이씨 종인간에 화합단결을 위해노력하며. 숭조정신과 경종수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벽진이씨 대종회 문화위원장이 되어 대종회 홈페이지 관리책임자및 문중 선조님의 훌륭한 업적을 홍보하는데 노력했다.
종중의 제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관하였다. 상주 벽진면 경수당 시조공 제향, 김천 부항 모원당, 김천 화로서원(청백리 노촌 이약동 선생 향사), 합천 입향조 판서공 휘 승원, 거창 감천공 이건 등의 제향을 지원하였으며, 가조 지역 승지공 회장으로서 난서공 통덕랑과 후손들의 제향을 총괄하였다.

그 외에도 서울 및 경기 북부 방족의 향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김포 약산, 포천 평정공 이소원, 노원 동천재 충숙공 이상길, 양평 직장공, 화서 이항로 문경공 춘향례, 화서학회 재단 설립 및 학술발표회 주최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산악회 활동으로는 벽산회 6대 회장으로 청계산 시산제를 시작으로 매월 수도권 명산과 유적지를 탐방하며 선조의 자취를 기리고 있다. 이 모임은 원로 종친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소통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원로 10여 분과 함께 매월 돌아가며 점심모임을 가지는 '백세회' 활동도 통해, 종친 간의 우의를 돈독히 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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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500년머릿말 (거창 가조)
우리가족은 벽진이씨 이총언을 시조로 대장군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이다.33세손 동강 이창기 와 흥해최씨사이에 4남1녀가 있다,
1남은 송월 이선숙이고, 2남은 덕명 동석천 이선동, 3남은 구야 이선수, 4남은 구야 이선규 이고, 1녀 네째는 선자이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되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나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명명하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가조천의 강이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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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종친회 카페장

덕 명 동석천 이 선 동 (34세손)
승지공 종중 종회장(가조)
평정공 종중 종회 이사
서울 화수회 부회장

벽진장군 이총언 시조공으로부터 대장군공
평정공계 승지공파 34세손 이선동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로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습니다.

내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 거창군과 동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에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가면 박유산 동쪽에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원 동례리 라 하며 북으로는 새앙골, 남으로는 중마.평지마,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어 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동구 밖 언덕 위에 정자에는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었다는 3그루의 고목 느티나무가 있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삼수정 맞은편 도랑을 건너서는 21대 이난서 선조를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21대 통덕량 이난서 유적비가 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연유인즉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재실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등기로 되어있다
지금은 집은 옮겨서 없어지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어 북남으로 흐르는 물길과 가조면 소재지와 저 멀리 고견사와 아래쪽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동네 마을과 박유산을 뒤로하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 여미 터되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이물은 북쪽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댐으로 흘러가고 있다. 어릴 적에 고기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 동지) 잔디언덕이 있고 더 먼 곳에는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 동쪽 양지바른 곳에 승지공파 이무의 부친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를 시작으로 손자 1남 이선일 선조가 있고 맞은편 독새골에 2남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

중간에 윗대 선조가 있고, 아래쪽에는 부친인 33대손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마을 앞 강을 건너 2km쯤에 가조면 소재지가 있다 그 옆에 초등 , 중학교가 있다.
고향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는 거창에서 다니게 되었다.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에서 자취를 했다.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20대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은 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계시는
형님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아가면서
같이 생활했다.
평생을 부모님과 같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형님은 대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시고
교편생활. 부산교육청 장학관.
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퇴임을 하시면서 국민훈장 홍조장을 수여받으시고 지금은 부산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학교를 졸업하고 구미 산업단지 내에 반도체 회사에서 연구 업무를 하게 되어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졸업 및 공학박사 과정 수료까지 하게 되었다

회사 경력 25년 되던 해에 임원 직책을 보직받으면서 서울에 있는 본사로 발령 나서 서울로 이전해서 생활하게 되었다.

예전에 구미에서 근무할 때에 시조공 추계 시향 때면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전날 구미에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같이 성주군 벽진면 경수당으로 가서 시제에 참석을 하곤 했다.

부친께서는 평생을 흰두르마기인 한복을 입으시고 생활하셨다.
추향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 어른분들을 소개해주시고 인사를 시켜주시며 자랑스러워하시는 기억이 많이 난다.

추향 제례시에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는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큰소리로 제관 분들께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오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식 제하셨다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씀을 해주셨다.
가끔은 처음 오시는 일가분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느티나무 나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7대조이신 삼수정 이 가신 선조님이 심으신 우리 동네의
고목 느티나무 3그루에 대한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수당에는 우리 직계 가문의 귀중한 보물의 의미가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께서 1864년에 경수당기를 작성해서 본인의 일하정 문집에 남겨 벽진이씨 시조공 과 경수당의 높은 존경심을 기리고 있다.

또한 중계조인 17대조인 평정공 청백리 이약동의 노촌 실기 문집 간행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일하정 호는 직장공 27대 거유이시고, 애국지사인 화서 이항로 선생께서 이학준 문집의 학문과 덕을 높이 평가하셔 직접 친필로 서해주 셨다.
친필 현판은 경기도 양평 서종면 소재 화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고, 일 하정기를 집필해주셔서 그 내용이
일하정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화서 선생께서는 일하정 이학준의 경수당기 집필 1년뒤인 1865년에
시조 벽진장군 사실기를 집필하시어
그 내용이 대동보에 수록되어 후손들에게 시조공에 대한 존경심과 굳건한 믿음을 심어주고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당대 주자학의 대가이시며 독립운동 애국지사이시다.
평생에 학문을 가르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일생을 보내신 분이다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학문도 높아 연원 록에 의하면 11000명의 문하생을 두고 있다.
벽진 일가로서의 문하생은 일하정 이학준이 기록되어있다

이학준의 일하정집 과 이항로 화서문집에 두 분간에 오고 간서 신이
다수가 수록되어있어 두텁고 애정 어린 일가 인연을 나타내고 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직계 선대인 26대 이정매 유산집. 29대 이학준 일하정집을 편찬 , 출판해서 국립중앙도서관 및 대학도서관에 홍보해서 교육에 참고토록 했다

가족족보 19대 우우정보 와 대동보 편찬에도 기여했다고 각 책의 권말에 수록되어있다

중계 조인 노촌 청백리 이약동 노촌당 중수에도 참여해서 중수비에 기록되어있다.

이런 내용의 정보는 부친을 모시고 직계 및 일가 시제에 자주 참석해서 직접 선조님의 유산을 몸소 보고 들으면서 정보를 얻은 것 들이다

현실은 시간적 지리적으로 한계가 있어 조상님의 훌륭한 업적의 정보를 얻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그동안 보고 듣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수집한 벽진이씨 일가 관련
자료를 2300여건 수집해서
벽진이씨 종친회 카페를 만들었다.

1200여 년의 유구한 역사와
훌륭하신 선조님의 발자취가 각 지역에
각 공파 종중 후손에 비하면 여기 올린
내용은 대단히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벽진일가 모두가 선조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며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선조님의 유산을 발굴해서 보고 듣고 알림으로써 우리 일가의 발전은 물론 인류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데 일익이 되기를 바란다.

벽진일가 및 여러 종친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본 카페를
만들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또한
선조에 대한 자료나 유산이 있다면
본 카페에 올려서 많은 일가에게 알려
벽리의 긍지를 높이고, 벽지의 소통의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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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유림 유진 이선동 경종수족
승지공34세
구미 반도체회사에서 25년을 근무하고 상무임원 발령을 받고 서울 본사에 근무를 하게되어 구미의 세간을 모두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해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는 대구에서 살던 처가집 장모님이 오래전부터 서울 목동에서 살고 계셨다.
직장생활을 마치고는 중소기업 연구소장을 맡아 기술지원을 하다가 그만두고, 대기업에 인재를 추천해 주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종중인 벽진이씨 서울화수회가 있다는걸 알고, 서울 화수회장님이신 추담 두헌님을 만나서 인사하고 종중일과 화수회일을 알게되어 이사직을 맡으며, 종중에 관한일을 하게되었다.
다음 임원총회에서는 서울화수회 상임부회장과 서울화수회 벽진산악회 줄여 벽산회 회장을 역임했다.
2년에 1회 화수회에서 벽진지를 출간하는데, 벽진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서 제16호를 발간하였다.
서울화수회는 춘계,추계총회를 노원구 동천재에서 개최함으로 수도권역의 종인들의 친목도모 화합의 장으로 이용하고있다.
화수회 사무실은 장한평 자동차 매매시장 상가에 두고 주에 한두번씩 나가 화수및 종친일을 하고있다.

벽리종인의 친목도모및 정보교환을 위하여 "벽진이씨 일가 종친회" 단체카톡방을 2021년에 최초로 만들어 전국의 벽리종인의 친목,종사관련의 정보즉, 화수회개최, 각문중의 춘추향례의 내용 및 종친담소등을 주고받는 정보공유의 활용하고있다.

"벽진이씨 종친회 벽진유림" 다음카페를 2021년에 최초로 개설해서 벽리종인의 친목행사및 벽진이씨 종중, 종사관련 5000여건의 자료를 본카페에 게시함으로 후손들의 종사관련 이해를 돕는데 역활을 할수있도록 운영하고있다.

유튜브에 "벽진이씨 종친회 벽진유림" 방을 2021년에 최초로 만들어서 춘추향제및 시조공및 선조님의 유적과 업적의 주요내용을 동영상으로 편집해서 올림으로서 벽리종인의 이해를 돕는데 일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운영해 가고있는 중이다.

종사일은 상주군 벽진면에 있는 시조공의 종당 경수당에서 춘향례잋 추향제를 시행하고, 김천 부항면에 있는 모원당에서 추향제를 시행하고, 감천 감천동에 있는 화로서원에서 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춘향례와 추향제을 시향한다.
또한 합천입향조 휘 승원 판서공, 거창 이건 감천공, 추향제를 시행한다.
한편 가조승지공 회장으로 가조 21대선조 난서공 통덕량 선조님의 제향을 총괄하고 있으며, 23대 승문원박사 이창일선조밑 이하 선조님을 기리고있다,

방족으로는 김포약산 및 포천 펑정공3남 이소원 한림공 시제배향및 노원구 동천재에서 이상길 충숙공 시제배향, 양평 직장공 화서 이항로선생 문경공 노문사지 춘향례 배향을 한다.
화서학회 재단을 설립해서 매년 화서학회 학술발표회를 진행하고있다.

벽산회는 6대회장으로 매년 청계산에서 시산제를 시작으로 매월 수도권 부근의 산과 유적지와 선조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명소를 찿아가서 그뜻을 되세기는 계기로삼고있다.
시간여유가 되시는 원로분들이 많이 참여 하시는관겨로 자연스럽게 종친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논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종친의 앞날을 구상하는 의견수렴의 장이되었다. 한여름,한겨울및 시제가있는달은 쉬는달로했다.

또한 백세회가 있는데 뜻있는 원로 10여분이 매달 돌아가면서 장소를 마련해서 점심을하고 본인거주지 주변의 맛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제공하고 종친간의 친목 도모및 화합장을 마련 하고있다.
두헌님, 헌주님, 광수님, 소구님, 종면님, 영기님, 우암님, 선도님, 우희님, 선동으로 구성되있다.

종친관련
문곡서원 탐방및 산화선조추향제배향
강화도 충렬사배향. 제천 자양영단,
정도공 이장곤묘소와 금헌재실.
구미 북봉공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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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은 산업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았고, 이후에는 벽진이씨 가문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한 개인의 삶을 넘어, 종중의 뿌리와 자긍심을 지켜온 조용한 실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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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이선동 연보(儒珍 李善東 年譜)
연도 활동 내용

1954년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출생 (부: 동강 이창기, 모: 최순주, 4남 1녀 중 차남)

1960~1970년대 가조초등학교, 가조중학교, 거창고등학교 졸업

1970~2000년대 동아대학교 공학 학사 및 석사, 전자 반도체 박사 과정 수료

1980년대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반도체 기업 종합연구소 입사. 국가 주요 과제 수행, 일본 도시바 기술 연수 참여

1980~2000년대 미국, 일본, 중국, 태국, 필리핀 등지 산업 시찰 및 기술 교류 경험
2000년대 초 25년 근무 후, 상무 임원으로 승진하며 서울 본사 발령. 서울 정착
2000년대 중반 중소기업 기술연구소장, 대기업 인재추천 업무 담당
2010년대 초 중국 자동차부품회사 부사장 역임 (1년간)
2020년대 서울화수회 활동 시작, 추담 이두헌 회장과의 인연으로 종중 활동 본격화
2020년경~ 서울화수회 이사, 상임부회장, 벽산회(벽진산악회) 회장 역임
2020년~2025년 벽진지 제16호, 17호 편집위원으로 활동
2023년 '벽진이씨 일가 종친회' 카카오톡방 개설 (전국 종인의 소통 창구)
2023년 '벽진유림' 다음카페 개설 및 유튜브 채널 운영 시작 (종사 자료 8천여 건 정리)
2025년~ 벽진이씨 대종회 문화위원장, 홈페이지 관리자 및 콘텐츠 기획

연중 경수당(시조공), 모원당, 화로서원, 입향조 제향 등 다수 제례 주관 및 참여
연중 가조 승지공회 회장으로서 난서공 후손 제향 총괄
연중 김포 약산, 포천 평정공, 노원 충숙공, 양평 직장공 등 수도권 향사 주관
연중 화서 이항로 문경공 춘향제, 화서학회 재단행사 참여
연중 벽산회 6대 회장으로 청계산 시산제 시작, 수도권 명산 탐방 정례화
연중 원로 중심 '백세회' 운영 (매월 점심모임으로 종친 우의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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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이창기 전기 와 4형제(송월 선숙,덕명 선동,수야 선수,구야 선규)

동강 이창기 전기
동강 이창기공은 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성주벽진이며. 벽진이씨 고려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시조공의 33세손 이다. 지후대장군 성간의 22대손이고,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16대손이고, 거창입향조 오담 이건의 13대손이고,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의 12대손 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유산 이정매공의 7대손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일하정 이학준의 4대손 이시다.
증조부 승주공은 1822년 출생 하시어, 1887년 별세 하셨고, 조부 우화공은 1852년출생 하시어, 1887년별세 하셨고, 부친 우덕공은 1875년 출생해서 1932년에 별세 하셨다.
동강 이창기공은 1918년에 가창 가조 동례 마을에서 탄생하시어 2011년에 별세를하셔 93년수를 하셨다.
산소는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의 우측에, 독새골의 23대 찰방공 이창일 승문원 박사 산소가있는 산등선 아래에 우측의 중간지점으로 남향이다.
배는흥해최씨 최순주 이며, 1932년3월16일 탄생하시어 2021년에 별세하셨다..
산소는 내외쌍분이다. 부는 상세 조는 붕철, 증조 역진 평촌 숙량두 후손이다. 외조는 李佑東 성산인이다.
동례촌은 유와 예와 도를숭상한다는 마을을 뜻하며. 21대조 통덕량 난서공께서 입향하신이래 400여년동안 대대로 선조님께서 삶을 이어고있어 선조님의 얼과 정신이 배어있는곳이다.
 
 동강 창기공은 14살 어린 나이에 부친이 일찍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모친 슬하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한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로 전해져 오고있는, 선조님들의 문헌 자료을 통해서 고조부 및 윗대 선조님중에는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이며, 대대로 벽리의 경종수족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께서도 성년이 되고난 후에는 평생을 벽리종인의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아오셨다.

벽진이씨 시조공관련이나 임진년 경수당 중수추진에 참여하시었고, 그기록이 경수당 중수기에 기록되어있고, 갑자보 대동보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고 대동보에 기록되있다, 벽진이씨의 유명하신 선조님의 기록을 정리한 문헌록 편집에도 참여 하시었다고 문헌록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공과 경수당에 경종수족 정신으로는 예전에 구미에서 근무할 때에 시조공 추계 시향 때면 부친이신 동강 이창께서는 전날 구미에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같이 성주군 벽진면 경수당으로 가서 시제에 참석을 하곤 했다.
부친께서는 평생을 흰 두루마기인 한복을 입으시고 생활하셨다.
추향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 어른 분들을 소개해주시고 인사를 시켜주시고, 훌륭하신 선조님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추향 제례시에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는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큰소리로 제관 분들께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오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식 제하셨다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씀을 해주셨다.
가끔은 처음 오시는 일가분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느티나무 나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7대조이신 삼수정 이 가신 선조님이 심으신 우리 동네의
고목 느티나무 3그루에 대한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천 부항면에 대장군공의 모원당 재실이전 건립에도 참여하시고, 김천 양천동에 평정공의 노촌당 서원의 중건에도 참여하시고, 합천 대병에 판서공 재실 및 19대 우우정 후손의 족보 편집에도 참여하셨다.

가문에있어서는 조선후기 유학자이신 26대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집문헌과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집 문헌을 1956년에 편집 편찬하셔서 학문연구기관 및 대학도서관에 기증을 하시어 후학들의 참고자료가 되게하시었다.
유산집 문집의내용으로는 권두에 이의강의 서전이 있고, 권말에 창기의 지문이 있다.
권1은 시140수, 부록에 제인창수운 32수,
권2는 서10편,부록으로 내서첩이라는 제목아래 서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다.
야인행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글중에 민진원에게 보낸 상단암민상국진원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 시사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인의 도로써 시행 하여 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창의격문은 1728년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 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 과 향약절목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 문집은 4권1책이며. 석인본이고. 연세대학교 도서관 및 정부도서관등에 소장되어있다.
내용분류로는,
권1은 시 159수가수록되고,권2에 서37편과 문목있다,
권3에 서 7편, 기 11편, 상량문 2편, 제문 6편있고,
권4에 묘지 7편, 묘갈명 3편, 행장 4편, 사적 2편, 부록으로 기·만사·행장·묘갈명·차운시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홍석주·홍재철·이항로 등에게 보낸 증여시, 김경선·김수근등에게 준 송별시,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 탄적상산성황폐난지·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 등이 있다.
서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은 송내희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상에 상기와 복제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은 이기연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에 대한 기록이다.
일하정 문집 외에도학준공이 사용 하던호패와 직인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하정은 이학준공의 호인데
조선후기 거유 종족 화서 이항로공께서 친히 유산 이정매공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시며, 이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및 두공께서 주고받으신 서신등이 가보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양평 서종면 노문리에 건립된 화서기념관에 보내 전시토록해서 후손들에게 교육자료로 활용토록 추진하셨다.

가조동례마을 입구 좌측에 입형조 통덕량 이난서공의 얼과정신을 기르는 경모재 재실이있다.
그이전에는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재가 이었다고 거창군지에 전해지고있으나, 입향조 선조의 재실로 변경이되었다고, 경모재기에 기록되어있다.
경모재기는 동강 이창기공이 방후손 에게 부탁을 드려 글을 지어 입향조의 통덕량 이난서공의 높은 뜻을 받들었다.

경모재기 내용을보면
가야의 남쪽, 아림거창의 고호의 동쪽에 별다른 하나의 동천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동례고리라 불리우는 우리 벽리의 세거지이다. 재가 있고 그 위로 산을 등진채 물가에 우뚝 솟아 새롭게 중수한 것이 경모재이다. 과거 명종임금 시절에 통덕랑 휘 난서 공께서 자손들을 길이 이어지게 하려는 계책으로 읍치의 북쪽 개화리에서 이 곳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공이 평정공 노촌선생 의 문손 즉 명망있는 손자으로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 그대로, 덕을 심고 학업을 쌓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초야에 행적 을 감추고는 성현의 도를 밝혀 강론하였다. 선조의 미덕을 추앙하며 은둔하고도 근심이 없었으니, 참으로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되겠는가. 지금까지 수백년 사이에 고인일사로 세상에 이름이 우 뚝했던 분이 왕왕 계셨으니, 증 승지 휘 무, 동곡 휘 창일, 소리재 휘 정화, 유산 휘 정매공 같은 분들이 있었고, 그 유풍이 지금까지 미쳐 거주하는 종친들 모두가 순순하고 아칙하다. 할아버지의 글은 읽지 않아서는 안 되고, 예양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세습의 유래가 있음을 징험할 수 있다. 마을 뒤에 대대로 선영이 즐비하니, 탕산의 남쪽이 드디어 강여의 영구가 되었다. 경신년1920년 봄 후손 우석, 우덕씨가 제숙하는 장소가 없는 것이 한으로 여겨 여러 종인들과 논의하고 뜻 을 모아, 예전에 유산정숙이 있던 터에 재사 한 채를 지어 “경모”라 편액하였다. 손님이 추모하러 왔으나 재사가 오래되어 물이 새므로, 약재공 주화씨가 족질 우룡, 재종질 우창등 여러 종인들과 함께 거듭 수리하였고, 길이 전하게할 계획으로 소나무와 국화를 심어 마루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며 감흥을 일으킬 수 있게 하였다. 그 조상의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추념하고 가존께서 가업을 창조하시어 후손에게 물려준 본뜻이 간절하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긍구치 못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다가 이제야 비로소 충신효제만이 우리 집안의 내세울 만한 보물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경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 네.”라고 하였고, 진나라 때 송축하기를, “여기서 노래하고 여기서 곡하며 여기에 종족을 모이게 하여 몸을 보존함으로써 선대부를 구천에서 따르리라”고 하였다. 이 일은 존조에서 비롯되어 일가간에 화목하게 하는 일이므 로, 읽고 고무되어 기뻐하며 효도에 힘쓰게 하려는 생각에서 감히 시송을 짓는다. 후손 창기씨와 선균씨가 부탁하고 성기씨는 나를 찾아와 기문을 청하니, 사양치 못하고 일단 그 전말을 쓴다. 운물의 아름다움이나 유람하며 볼 경치 같은 것은 올라서 조망 해보고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임자년 1972년 음력 11월 하순에 방예손 원엽은 삼가 짓고, 성기는 삼가 쓴다. 라고했다.

동례마을 남쪽으로는 산높이 713미터인 박유산이있다.
본래 이름은 화룡산이다. 1970년대까지도 가조지역에 심한 가뭄이들때면, 박유산 정상에서 기우재를 지내는곳으로, 하늘과 연통이되는 신성한 산이라고 생각하고있는 산이다.
필자도 어린시절에 기우제를 지내기위해 이산에 오른적이있다.
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이유는 신라말에 박유가 불사이군의 충절를 지키고자,벼슬을 버리고 은든생활을 해온것에 유래해서 박유산이라고 했다고한다.그 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들어와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전한다.
5대후손이신 이정매공께서도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고, 불사이군의 높은 충절의 깊은의미를 갖는 산으로서 당시 이정매공께서도 학문과 덕망을 지향하는 선비정신을 기르고자 호를 유산으로했다.
거창군지에 의하면 이정매는 노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에 매진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재실은 소멸되고 유산정열의 현판만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예를 숭상하므로 예곡 또는 예동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리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이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서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북에서 남르로 일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동향인 앞으로는 북쪽의 가북에서 남쪽의 지산으로 폭70미터정도의 넒은 가조천의 물이 합천댐으로 흘러감으로서.
가조천 넘어의 동쪽의 넒은 평야인 가조분지의 논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고 있다..
박유산의 북서,동례마을의 서쪽 전답끝자락에 나지막한 안양산이 자리잡고있다. 이곳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묘소가 정상부에있고, 그아래에 33대까지의 후손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
안양산 끝자락에 학당골이있는데, 학당동은 거창군지에는 조선 인조때 과거에 등제한, 승정원 박사 이창일이 강학한 학당이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승문원박사 이창일공의 교지가 동강 이창기,송월 이선숙님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필자가 어릴적에는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곤 했다. 그동안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하며, 늦은밤에는 야참을 먹었던 기억이나며, 온마을이 잔치를 하는 분위기 였다.
그때는 재실이 우리집 옆마당에 있어서 한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산재실에 사용되었던 유산정숙의 현판과 유산공의 유산문집의 문헌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지었기 때문에,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인 울타리 땅들은 우리집의 토지로 등기가 되어 있다.
영모재 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선조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신라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그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부르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부친이신 33대 동강 이창기공 께서도 삼수정의 영감을 받아 성주군 벽진면에있는 벽진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경수당내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있다.
벽진이씨 28대 삼수정 이가신은 1739년에 태어나고, 1798년에 약추사로서 소수가되어 소청에 나아갔다. 1815년에 별세했다.
자는 성필이고, 호는 삼수정이다.
묘는 안금촌후 신좌이다.
행장및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배는 문화유씨이고, 1737년 9월 1일생이며, 1805년12월3일 별세했다. 묘는 증조고영하 량좌이다.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부는 영춘,조는 사심,증조는 수 충경공 형두후손이다.
외조는 임동헌 은진인이다.
삼수정의 고목 느티나무는 마을앞에 있는 당산이다.
벽진 27대 이가신이 쌓고 그 의 호를 삼수정이라 하였으며, 세 그루의 괴목이 있었는데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목으로 베어지고,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마을 신앙 풍속·풍습으로는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삼수정 옆에 있는 300년이 넘는 괴목나무 세 그루와 마을 서편에 있는 소나무였다. 삼수정은 벽진 이가신이 쌓고 그 호를 따서 삼수정이라 했는데, 괴목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징발되어 베어지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20 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데, 닷새 전에 제관을 선정했는데 선정된 제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함께 정성을 드려야 했으며,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자정이 지나면 목욕재계 했다.
제기는 제관집의 것을 사용했고 제물은 유사가 장에 가서 마련했는데 부정된 것을 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돼지는 열나흘 날 유사집에서 잡아 위턱을 윗 당산에 쓰고 아래턱은 아랫 당산에서 사용했는데, 제를 지내고 나면 당산나무 앞에 묻었다. 제수는 두 벌을 장만하여 각각 따로 쓰며, 밥은 제관집에서 지어 가지고 가서 올린다. 자정이 지나 제를 올리고 나서 보름날 아침 음복을 하고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을 했으며 기우제는 박유산 만당에서 했다고 박종섭이 거창군의 마을신앙 도서에 기술하고있다

동강 이창기옹은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선숙은1951년 11월6일생이고,배는 밀양변씨 변필효 1954년생 7월 27일생이고, 부는용국이고, 조는원식이며, 증조는 영근이고, 외조는김섭이고 김녕인 이다. 장남 선숙은 부산 동아대학교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 북부산교육청 교육장 및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에서 거주하고있다. 슬하에 2남 정원,광원이 두었다,
2남 선동은 1954년 6월14일생 이고,배는 인동장씨 장정숙이고, 부는 도안 조는 갑술 이다.
2남 이선동은 부산 동아대학교 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졸업후에 구미에있는 반도체기업에 근무했으나 임원 승진후에는 본사근무를 하게됨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게되었다.
슬하에 1남 이성원, 2녀 이주연 ,이지현을 두었다.
3남 선수는 1956년 11월15일생 이고, 배는 배경전 1959년 6월17일생이고, 부는 만원, 조는 붕기이다.
가조 동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1남 이인원, 1녀 이은정을 두었다.
4남 선규는1965년1월17일생이고, 배는 전주최씨 최지영 19681년 10월17일생 이고, 부는 성림이고, 조는 인준이고 외조는 송대현 은진인이다
이선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복지 요양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을했다.
슬하에 2녀 이소진, 이소연을 두었다.
녀 선자는 1962년1월21일생이고, 부는 하재룡 진양인 공학석사 이다.부는 우성이다. 슬하에 2남 하종욱, 하선일을 두었다.


우리집은 동례리 1038번지이고, 서쪽으로 통덕량 이난서 재실이 옆에 붙어있다. 재실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있고, 왼쪽언덕에는 앞쪽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 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 있었던 것같다.
감이 많이열리면 가마니로 3가마 정도 수확을 했다. 한광주리정도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한바구니는 물을 따뜻하게해서 항아리독에 땡감을 넣어 따뜻한 안방에 두면 감이삭아서 단감이된다. 나머지 많은 감들은 벼속에 파뭍어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 언덕이 있었는데, 양지바른곳은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 뜯어다가 버리밥을 비벼먹었던 생각이난다.
집앞 산소를 돌아서 언덕끝에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새싹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기와집을 새로짓다.
재실옆 우리집은 작은 초가집었는데,
부친이 종중일에 즁추적인 역활을 하시는관계로 종인또는 방문객이 많아서 감당을 할수가없었다.
그래서 1317번지인 동네 가운데 부촌지역에 200여평을 마련해서 기와집을 새로지었다.
집모양은 디귿자 모양이다. 본채는 4칸집이고,정남을 향해서 박유산을 정면읋 바라보고, 왼쪽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랑채가있고 오른쪽에는 창고, 곡간, 장독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다. 사랑채에는 유산정숙의 이정매공의 현판이 걸려있고, 부친께서 생활하시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도 계시고 해서 우리집에는 일년내내 손님들이 들락날낙했다.
어머니는 매일 음식준비에 바빠서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아도와 주셨다. 어머니는 시골잔치 음식준비의 달인이 되어서, 동네 길흉사 잔치에 가서 음식만드는데 진두지휘를했다.

가소천에서 천엽으로 추어탕먹다
동네마을에세 50미터쯤 나가면 가조에서 제일큰 강폭이 70여미터되는 가소천이있다.
어린시절에는 다리가 없어서 여름 장마철 에는 항상 신발벗고, 바지 올리고 책보따리 머리에 이고 조심 스럽게 건너가곤했다. 초등1년때는 매우 무서웠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튼튼한 다리도있고, 북쪽 가북에 댐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기위해, 수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향상 일정한 물이 흘러간다.
어린시절에는 비가올때면 물이 많았으나. 가뭄이 들때면 무릅까지 물이내려간다. 날씨가 개인날엔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고기를 잡고, 아주머니들은 야채와 양념, 국수를 주빈해서 개울가에 솥을걸어놓고 추어탕을 끌어서 맛있게먹던 생각이 난다.

논에서 보리타작.
가소천 건너에 우리논이 있는데, 가을에 보리를심어 겨울내 햑교다니면서, 보리가 자라는걸 바라보며 다녔다.보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다익어서 누렇게되면, 보리를베어 말린후에 타작을 해야하는데.
말린보리를 다발로 묽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도리께로 할때도있고, 논바닥에서 할때도 많았다.
논한가운대쯤에 보리를 걷어내고 베고남은 보리대를 뿌리채 뽐아내고 보리타자 마당을 만들고 물뿌리고 발로 단단하게 밞는다.
땅이 마를때쯤에 주위에 보리대를 모아놓고 도리께로 타작을 하는데, 논면적이 크면밤늦게 까지 여러판을 한다.12시쯤되면 세벽이슬이 비치면 녹아서 더이상 타작을 할수가없어 보리알 선별 작업을한다.
채에담아서 어께높이 만큼올려서 흔들며 흘러내리면 보리알은 바로밑에싸이고 찌끄기는 가벼서 멀리날아간다. 새벽2시정도되면
대충일이 마무리된다. 늦은밤이라 잠이쏟아져 집에가지안고, 보리를 털고난 뿍데기 무덤속에 들어가서 잠을청한다.온몸에 보리수염의 가시가 묻어있어 약간따가운 느낌이든다.조그만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별들이 서로 자랑 하듯이 반짝 반짝거린다. 정말 밤하늘이 아릅답구나 하는 순간에 깊은 잠이들어 피곤한몸을 꿈나라로 보낸다. 아침동이트면 일어나서 식사를하고 이슬이 사라지고나면 또 보리타작을 했다. 논이 여러군데있어 옮겨가면서 몇날을 한걸로 기억이 된다. 이러한고된 생활이 훗날 사회에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데 좋은 인생의 지침서가 된걸로 생각이 된다.

수월리 불당의 소풍나들이.
초등학교시절 봄,가을로 소풍나들이를 하는데 수월리 동네를 지나 좀더들어가면 불당이라는 넓은 평지가나온다. 아마도 예전엔 불교와 관련되 지역인가보다 느낀다.
북쪽에는 천미터넘는 우두산과 의상봉이있고, 8부능선에는 천년의 고찰 고견사가 있어 그정기를 아래로 내려준다.
소풍날에는 특별히 쌀밥과 계란 후라이, 멸치조림등 맛있는 도시락을 가방에메고, 학교에 가서 학년인원이 2백여명되는데 단체로 걸어서 불당에 도착하면 점심 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오랜만의 특식 만찬을 하고나면.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서 장기자랑 하는동안에, 선생님들이 바위나 나무가지,덤불에 보물이름이 적힌쪽지를 접어서 눈에 띄지않는 곳에 숨겨둔다, 장기자랑이 끝나면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보물을 찿는다.
보물은 연필,공책,필통등 학용품이다.
비싼 필통,크레파스를 찿은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오래간많에 야유회를 가서 맛있는 최고의 도시락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던 생각이난다.
중학교때는 좀더 높고 거리가먼 고견사로 소풍나들이를 해서 천년이 넘는 고견사의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마을뒷동산 사동지추억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동례마을 뒤동산 언덕위 수백년노송
어릴적 동산에올라 고향의 봄노래하고 친구들과 언덕 잔디밭에 몸 구르기 하면 즐겁게놀던시절..
백년 노송 나무에 올라가서 가조의 푸른들판을 바라보고 풍년을 기원하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옛시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솔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푸른하늘의 뭉게구름 수백년흘러 지나 갔건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재자리에 꿋꿋이서서 솔향기 쁨으면서 선비의 고고한 자태로 나를 반겨주는구나....
4계절 자연의 만물이 흐르고..
바람도..구름도..흘러가갔건만..
너만 홀로서서 독야 청청하는구나.
사송정(四松亭)/가조 동례리 촌후 사동지마을 뒤에 있다. 선비 신후명(愼後明)·이명(而明) 형제가 네그 루 소나무를 심어 대를 쌓고 노닐던 곳으로 후손들이 가꾸고 기리는 곳이다.
현재는 한그루가 남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 3월 거창군 보호수로 지정 되었고 수령은 약 380여 년으로 추정되며 수고 11m, 나무둘레 3.9m이다. 곽가은이 지은 사송정기(四松亭記), 송정훈이 전한다.

동네에서 서쪽 논밭끝자락에 안양산이있다. 산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시조공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들이 고이잠들고있다.
학교를하고 방과후에는 집에와서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오후종일 산풀을뜯긴다.
마을에 집집마다 소가있어 전체 67십마리가있다. 산에가서 고삐를 매고 방목을 하면 소떼들중에 대장이있어 이산 저산을 돌며 풀을 즐긴다.
풀을 뜯는동안에 아이들은 꼴망테에 꼴을베기도 하고, 도라지나 잔듸를 케기도하고, 겨울에가서 가재잡기도 한다. 풀베어주기 게임도한다. 낫을 멀리땅에 던져 꼿히면 진사람이 풀을 베어주는게임이다. 오후에 해가넘어갈즈음에 대장소는 동네소를 이끌고 아래장소에 모이는데,간혹 대장소를 따르지않는 소는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찿아다니는데, 소도 밤에는 무서워하는지 꼭 산소옆에 안자있는다.

박유산밑 과수농원.
박유산 동쪽 산능선 끝자락에 3정보땅에 300그루의 과수농원이 있었다. 집에서 1500미터쯤 떨어져 있다. 거리가 멀어서 황토 벽돌집을 지어서 여름에는 자기도하고 들일 올때 사용하기도했다.
부친 말씀에는 방아간을 처분해서 샀다고한다. 산밑이라 토질이 좋아서 사과나무가 아주 튼튼했다. 년령이 20년이 넘어서 사과가 20상자이상 수확했다.국광,홍옥,인도,스타킹 수종으로 이루져 있다,
초봄에 나무가 튼튼하라고 유황약을 치는것 부터해서 시작해서, 15일마다 약을 쳐야하는 매우 힘이 들었다.
또한가지치기를 해주어야 과일이 크게열린다.
일요일은 과수원에와서 공부도 하고,소풀도 베고,사과도 지키고했다.
점심때가 되면 집이 멀어 가기가 싫어서, 하루종일 사과만먹었다.
가끔은 밤에 자기도 했다.
과수원에는 불독개, 세퍼트의 큰개를 키우기 때문이 안전했다.
사과수확기에는 사과를 화물차에 가득싣고,주로 광주 시장에 경매를 넘기는데, 중간상인이 물건을 팔고 돈을 주지않아 중학생이 었던 내가 직접 따라 가기도 했다. 하루종일 사과를 따서 싣고,늦은 저녁을 먹고 밤10시경 출발해서 천천히 가면 새벽3시에 경매장에 도착해서 사과를내리면 4시쯤 경매를 하고 돈을 받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난다.

시골방아간
우리아래동네의 중마 방아간을 가지고 있었다.물레방아오 발동기가 있어서, 물많은 여름에는 물레방아를 돌리고, 건기인 겨울에는 발동기를 사용했다.
방아간운영은 거창 양평의 가느들 아저씨가 일해주었다.
벼을 가지고와서 쌀로 찌으면 2되정도 삮을 받았던것같다.
가래떡도 내리고, 고추도 갈고했다.
명절때면 가레떡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난다. 방아간을 하고난 후 부터는 힌살밥을 자주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부리 외가집추억
외가집은 우리집 반대쪽인 일부리 이다. 어머니는 친정에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명절이나 제사날에는 음식과 과일을 보내고했다. 외할머니가 계시기도했지만, 돌아 가시고도 갖다주시라고,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주우리집에 와서 오래동안 머물고하셨다. 점년이누나, 금연이도 우리집에 몇달간 같이 지내기도했다.
같이 사동지 가서놀기도하고, 땅따먹기, 공기놀이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재실에 가서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과수원에 가서 사과도 따먹기도했다.

할머니별세
우리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상세한 기억은 잘나지않고 씩씩한 할머니라고 생각이되어진다.
모든일은 할머니가 관여하는걸로 느껴진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2대독자라서 많이 사랑하고 일도많이 시키지 않았던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호통잘치는 호랑이 할머니라고했다.
우린 아들이 4형제인데 내가둘째인데 딸을 보고싶었던지 내남동생에게는 치마를 입혀업고 다녀던 기억이난다. 가끔은 재실 처마밑에 가서 박쥐똥을 주워먹이 기도했다. 이유는 잘모르겠다. 눈밝으라고했는지,여하튼 몸에좋다고 많이 주워서 먹였다.초등학교 저학년때 이라서 거억은은 잘나지 않지만, 가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해가질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왔다. 90이넘어서 돌아가셔서 장수를 하셨다. 문상을 치르는데 아마도 보름정도의 긴날자에 걸쳐 치르는것 같았다. 산소는 안양골 선산에 모셨다. 사랑채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상복을 입으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을하고 절을하셔다.
3년 동안 급한일이 없으면 출타하지않고 상복을 입고 계셨다. 외부에서 문상을 오시거나 손님이 찿아와도 술을 따르고 재례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다. 아마도 10살이전에 돌아가신걸로 기억이된다. 할머니가 애정과 사랑으로 뒷바라지를 다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적으로 힘들었을것으로 생각이든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자라서 인지,펴앵을 5남매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않았고, 욕소리 한번 하지않으시고, 손대말을 자주 사용해 주셨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이된다. 아버지도 할머니피를 이어받아 93세 까지 사시다가 별세를했다.


마상리 고모집추억
가조면 소재지 의 중학교 뒤편에 막내고모님이 살고있다.
고모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 고모부네 식구랑 같이 생활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는 고모네집에가서 세참으로 준비해둔 고구마, 감자,과일등을 먹고해다. 고모는 그집에 제일 어른이라 모든살림 살이를 관장하고 있었고, 작은 고모님이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작은 고모님은 매우 인자했다. 향상 우리를 반겨주셨고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했다.
기수형과 정희, 정화,문희 식구들과도 즐겁게 보낸기억이난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거창으로 고등학교를 하고 부산에서 대학등 외지 생활을 계속되어서 그이후로는 많은 추억을 갖지못하고, 명절이나 휴가때쯤 고향갈때에 찿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고모님 나이 99세때 봄에 시골에가서 만나뵈었는데,내년 100세가 되면 가조면에서 장수할머니로 잔치를 해주신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는데, 해를 다채우지 못하고 별세를 하셨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동안 배려해주신 은혜을 기억하고 좋은세상에 가셔서 편한한 생활을 하시라고 기도하고 장례절차 마무리 짓고 올라왔다.

마상리 누나집추억
고모님옆집 근처에는 내가 어릴때 호적상 양자로 보내졌던 누나가 살고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승문원 박사 이창일 종손이 후손이 없었는데 나를 그집 호적에 올려 대를 있게했다. 호적상으로는 양자가 되었으나, 호적상 양자로 가족이 없고
시집간 누나만 있기때문에 나는 우리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마상리 누나는 내가 대를 이어줄 고마운 동생이라고 항상 친절히 대해주었다, 마상리 고모집에 갈때면 향상 누나집에 들렀다. 자형께서도 매우인자하시며, 친절이 대해주었다. 누나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왔다.
몇번인가 마상리가서 제례를 지냈던 기억이난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집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20년 넘게 부모님모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셔서 내가 양부모 제사를 모셨다.아내가 불교인이라 성의끝 제사를 모셔오고있다.나는 양자를 가서 부모가 먼저돌아간 독자로 되어서 정식군대에 가지않고, 가조면 예비군 중대장 보좌일을 6개월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어릴적에는 양자의 개념을 잘몰랐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속으로는 마음의 고뇌를 겪기도했다.
그래서 절을 좋아하게 된것이아닌가 하는 생각도든다. 오랜 기간동안 사찰에 다니면서 인생이란 무었 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대구감년 누나집추억
아버지 여동생이 3이있었는데 마상리 고모님을 제외한 2분은 일찍돌아가셔 얼굴이 기억나지않고,
딸이 대구에 사는 감년이누나이다.
어릴적에는 가북 용산에 살았는데, 결혼을 하면서 대구로 갔다. 자형은 북한출신이라 집안이 별로없어서 우리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
방학때가 되면 대구에가서 놀기도하고 소애, 무용, 영애,무식가 시골에 내려와서 시골 경험도하고
서로 새로운 환경을 경험을 번갈아 하면서 즐거운생활을 했다.누나는 대구 평리동에 살았는데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향상 웃는얼굴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어서 즐겁게해주셨다. 양가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다들 바쁜생활로 가끔 안부를 물어보고 잘지낸다고 하니, 감사할따름이다.


거창 고모집하숙생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 가조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형님과 3년 차이라서 내가1학년때 형님은 3학년이었다
형님은 서부경남의 명문고인 거창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떨어져서 거창종합고등학교 인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이다닐때는 하숙비가 비싸서 1년 남짓 자취생활을 했다. 시내에서도하고 개화리 오담재 재실 관리실 집에서도 했다. 형님이 졸업하고 난후에는 계속 하숙을했는데, 작은집 고모네집과 합천 일가인 그릇집 누나네 집에서 하숙을했다.부모님은 5일장이나 나들이일이 있을때마다 찿아 오곤 했다. 내가 하숙을 하고있어서일까.올때마다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 과일등을 가지고 오셨다. 나한테도 공부열심히 하라고 용돈도 쥐어 주시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 까지는 키가 반에서 3등이내 였는데, 고3이 되는 해에 12센티나 부쩍 자라게되어 보통의 키가되었다. 어릴적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면 못알아볼 정도로 변하게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어릴때기억은 별로나지 않는다. 항상 할머니 옆에서 지내곤 했다. 철이든 중학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에 별로안계셨던 기억이다. 항상 한복 두루마기 옷을 입으시고, 출타 하셨다가 몇일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문중일을 하시느라, 바깥일이 많았던것 같다. 지금생각하면 대동보 만든다고 족보 단수 받는일, 각 문중 재실 짓는다고 헌성금모으는일,
지금도 집에는 각가문에 다소 계보가적인 종이가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후손이나 방손의 각종문헌 문집이 보관되어있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셨는데, 가방에 묘사를 지내고 음북을 받아왔는데 각기다른 모양의 음식을 담은 비닐봉지 여러개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받은지가 오래되어 음식이 상한 봉지도 있었다. 문중의 묘사를 다참석하시느라 기일이 오래걸려 먼저받은 음식이 상한것이다.
어머니는 음식을 골라내서 괜찮은것을 솥에 쪄서 주시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두루마기 한복을 빨고 풀칠을하고 다듬이로두드려 펴고나서 새로운 동전깃을 달아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버지는 향상 소식을 하면서 생활하셨고, 먼길도 걸어다니시거나
대중교통은 완행버스, 옛날 비둘기 야간열차만 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남들과 대화를 할때는 항상 존대말을 사용하셨다. 동네 마을이나 지역에서도 존경을 받고 살았다.
국회위원이나 군수등 부임시에 인사차 방문을 했다.
아버지가 외부일로 바깥에 시간을 보내는관계로 집안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가장 힘든것이 농사일과 재정 운영 이다. 다행이도 4형제라 농사일을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은 일꾼을 들여 일을해야 만했다. 논을 경리 정리한 후에 자갈 줍기,과수원 농약치기, 모심기,등이 힘들 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집안일을 돕지않는다고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본연의 일을 하곤했다. 나는 일이 힘든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했다. 형님은 맏이라 조금은 부담스러워 했다. 자식들 대학 등록금및 학비를 감당하느라 많은 고생을했다. 한번은 긴급자금이 필요해서 달러 이자돈을 빌렸는데, 너무힘이들어서 논을 팔아서 갚았던기억이있다.형님은 명문고 우등생이라 서울대에도 들어 갈수 있는 실력이나, 동생들 학비때문에 빨리 돈벌수있는 2년제 부산 교육 대학에 들어가서, 우등생으로 졸업 해서 당해연도에 교직발령을 받았다.
나도 부산으로 대학을 가서 형님한테 학비를 지원받아 학교를 마쳤다.
내가공부했던 몇년간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부산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접빈객,집안대소사를 많이 치르셔서 마을의 길흉사,일가 집안의 큰잔치에는 참석해서 일처리를 해주곤했다.먼저 아버지가 93세에 별세를 했고 어머니도 10년쯤뒤에 92세로 별세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내가 오십중반이었다. 적지않은때 나이임에도 많이 했었다.

여동생선자사망
우리집은 5남인데 4째가 여동생이다.
딸이 하나라 집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자랐다. 나이차이가 많아서 서로객지 생활을 함으로 명절때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수있었다.
나는 직장이 구미이고 여동생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평촌에 살았다.
내가 본사발령을 받고 서울로 이사 와서는 시간날때마다 자주만나서 집에도 방문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주변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에 갑자기 여동생이 뇌출혈이 생겨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중추뇌 출혈로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주었다. 그래도 1주일간 이라도 상태를 보자고 제안을했다. 치료를 했으나 날이갈수록 영양주사로 몸은 부어지고 맥박과 혈압은 떨어지데니 결국은 저세상으로 떠났다.










발동기 돌아가는소리 오두막초가집.호롱불.배추뿌리.
기와집지을때 겨울에 모닥불생각.참외수박밭지키기.
개구리잡아닭모이.

초등학교시절
망태메고풀베고.작두케고찔래꽃.버들피리.새양골못수영.

사동지
친구들과 소나무타기.언덕구르기.

사하라태풍에 사갓쥐고있다가
동네입구 도랑에 넘어짐.사하라태풍

앞냇가에서 멱감고.고기잡고.추어탕먹던기억.
비가많이와 강건너던생각

아카시아씨앗심기.
가북에나무하기.소풀뜯기.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물지게지고 물길던생각.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집짓던기억..흙벽돌찍기.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석강이모집 놀던시절
기호.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김대원신경쓰이던기억

거창고등시절..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괴롭힘.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대학시절
단축마라톤30위이내
교내.동산에 산책.김을용.김용해.
해운대추억.태종대.광안리.용두산추억.
거제도 텐트여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전자기사1급.무선설비기능가3급

한국전자근무직급년수
1981년5/6일입사...2007년9월퇴사...26년근무 

연구원3년..3개월교육.물리전자.까뮈.Ic설계
             경북대공정연구.서울대설계교육
주임연구원2년..S1575.To92L.일본TSB3개월sw소자  
              한국전자통신6 ETRI6개월파견..PSA. NSA 
과장대리.(주임연구원)1년
선임연구원1년..화합물소자.PW소자.압력센서개발
연구1과장1년...연구소8년
제조기술1과장2년..Fab
제조기술부장대행1년..기술Fab1.2. Assy3.4과
제조부장1년  반도체.조립전체
제조1부장1년..sot1234
조립.세라라믹.공장장3년...
       조립반도체1년      TO92.L.sot.pw.Ic.....
       세라믹2년

SBU2년..전장
사업부장상무2년..전장
품질보증본부장1년


회사그기훈련 금오산등반 새벽에동촌도착
연구1과야유회에서 오른발 장단지화상으로밤샘고통
현진욱.유옥희 서무들수고
사내체육대회 반도체제조 펩2 조립3.정비2..
7개과900명데리고 시합
제조1부장시절.Sot과 분임조경연대회 대통령상수상
영덕바닷가 MT시 밤샘놓이 밤에홍삼먹음.

집안행사
아버지60회갑연
형님결혼식
내결혼식
성원이와둘이 여름휴가 서해안면도. 남해땅끝마을.밤샘비.동해 고성바닷가...좋은추억기억됨
대덕청암사 계곡에서 한여름피서에서폭우만남.
청암사근처 성태경씨와 피서 밤추위로 텐트속불남.
집에서 새벽2시쯤 청송주왕산으로 이동
정서방.큰처남댁함께..술마시고놈.
프레스토 차몰고 처음서울올때 올림픽도로에서 경찰차에스코트기억.
운문산 북대암에서 기도와 새벽해돋이바라봄.
청암사 절에서 밤샘 범화경독경..
성원이가 좋아했던 청암사스님들
여름학교에서 반야심경 독송해서칭찬받음
청도운문사 철야 3천배
조계사에서 반야심경.천수경교육과정
거제 건영집에서 밤낙시.회
안동 종열 친척집 밤샘 놀던기억
김수철네와 무주구천동 여름휴가.
처우회 정기모임...제주도한라산.울릉도여행.설악산등반  
최태영지점장 가족과 나들이추억
당진.홍성.여주..음성땅구매. 고구마재배.
회사친구(대현.인철)모임추억...선산.
백대현 고양땅에 야체심기
주민센터 웰빙댄스 교육
중국 금주현지근무.
가족과함께 생활
주말여행...태산.공자묘.홍산.대련.압록강.만주국
인간관계어려움.
스트레스성 건선피부악화로 9개월근무귀국
그린센서 근무.9개월
헤드헌트 4년솔로몬
자체운영
경비업무...화곡 보건센타.1년..가산 한성근무3년
초등모임
둥국.일본해외여행
고등모임
오남리 1박2일 야유회
2019 10.12일 내여동생 하늘나라로가다



마음을비우다
구미에서 직장을 다닐때 연구 개발 업무나, 직장 단체생활에서 힘든때가 있을땐 마음을 식힐겸해서, 청도 운문사에서 북으로 북대암 암자절에 가끔가곤했다.
암자는 북쪽의 산봉우리의 7부능선에 남향을보고 있다.
암자뒤로는 조금만 올라라가면 전체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있다.
거리가 멀어 1시간30분정도 걸려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나면 마음의 평화을 얻는기분이어서 자주들렀다.
저녁예불과 공양을 마치고, 뒤산에올라 해가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자연의 황홀한 경치를 바라라보며, 해질녁의 찬기섞인 바람이 산에서부터 내려려오는 쌀쌀한 공기의 맛을본다.
땅거미가 밀려올때면 산새소리도 줄어들고 풀벌래소리도 하루종일 생활에 힘들어 숨을 죽이는것같은 적막함이 흐르고, 이따금 귀투라미가 끼륵.하고 울리는 소리가들린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짙어질때면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밝은 달이 만물을 조용히 비춘다.
내생애의 삶에 대한 깊은생각을 해보곤했다.
어떻게 살아왔나,어떻게 살아갈까.
인간답게 살아가는게 어떤것인가.
늦은밤 기온의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방으로 들어와 피곤한몸을 달래며 깊은잠에 들곤했다.
한편 피곤해서 일찍 잠에들었던 어느날에는 새벽4시경 정신이 들었는데, 더이상 잠이오지 않아 조용히 나와 뒷산 중턱으로 올왔다.
주변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하늘의 별과 달도 상대적으로 희미해져가며 빛을바래간다.
새벽의 상쾌한공기가 콧속을 시큰둥하게 해준다.
해가뜰 때쯤이면 저아래 골자기에서 뭉굴 뭉글한 물안개가 바람에 밀려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태양이 뜨기전에는 건너편 먼산에서 부터 엷게물든 붉은 기운이 스며들다가 레이져같은 한줄기 빛이 세상에 비추며, 모든 우주만물에게 찬란한 새아침이 왔다고, 깨어나라는 알림을 전해주고있다. 내가슴에도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인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새로운 마음의 충전을 하는것같다.
그래 어제까지 힘드고 고뇌했던 모든것을 암흑속으로 날려보내고, 지금 이순간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거야, 하면서 내가슴에 새로운 정기와 회망을 불어넣곤했다.
지금에 생각하면 내몸과 내생각과 나의영혼을 위로해는 주는 마음의 안식처 였던것 같다.
우리가족은 딸이 둘이었는데
이절에 다니면서 막내 성원이가 태어나서, 큰축복을 밭았다고 생각이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시간이 날때마다 절에오게되어, 많은날을 암자에서 보낸것같다.
이후로는 가까운거리의 보현사로 거쳐를 옮겨서 마음을 공부를 하게되었다.
보현사에서는 3000배 심야기도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김천지래 대덕의 청암사의추억이다.
수덕산의 골자기에 승려대학겸 청암사가 있다.
승용차로 집에서 1시간반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불교를 좀더이해하고 마음을 다스리었던 마음의 안식처이다.
깊은계곡이라 여름이면 피서겸해서 자주찿았던 곳이다. 막내성원이가 무럭 무럭자라서 초등학생쯤인가,여름방학때 불교학교를 열었는데 참여 어린이들이 많았는데, 반야심경 외우기에서 전문을 다외워서 승가대학장님,주지스님 이하 모든스님들이 칭찬해주시던 생각이난다. 그이후로는 스님들과 잘지내곤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했다. 체육시설에가서 주지스님과 탁구를 치기도하고, 학장스님이나 주지스님 방에가서 다과를 들면서 오랜시간 담소를 나누기도했다.
비구니 스님이시라 계율을 엄격히 지켜서 신도님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다.
불교기념일이 되면 심야 법화경 읽기 기도회를 진행하는데 저녁에 시작해서 밤이 새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여름에 텐트치고 야영하다가 추워서 불피고 자다가 불이났던생각.
처가집 식구들과 계곡에 놀러갔다가 소낙비를 만나서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

구미의 금오산 정상부근에 약사암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거리라 휴일이면 혼자또는가족들과또는 친구들과 자주산에 가기도한곳이다.
직장생활에 힘이들때 자주찿아와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공장장 시절에는 직원이 2천명이 넘는 관계로 여러가지 문재가 발생하곤 했다. 가장힘든 것이 노사관계의 어려움이 있어 마음 고생한 것이 기억난다.그래서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있다.
김천에계시는 벽진이씨 17대조 청백리 노촌 이약동공께서는 이절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통해서 영흠을 얻어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약사암의 약자와 김천의 동쪽에 있는산이라 동자로해서 존암을 약동으로 했다는 내용이 문헌으로 기록되어있다. 혹자는 노촌실기가 이곳에서 편집,편찬 되었다고 도한다.
노촌실기편집,편찬에 나의 5대조이신 일하정 이학준공이 참여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훌륭한 선조님의 공덕을 잘누리고 있구나하며, 항상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약사암을 찿곤했다.


26년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다음날, 집사람과 기분전환할겸
고창 선운사 깊숙이 자리잡은 내원궁에 가서, 1주일동안 사찰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대해서 마음의정리를 하고 새로운 삶을 생각해보는 좋은시간 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공양을 하고는 혼자또는 스님과 산책하며 담소를 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법당에가서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원궁 암자는 처소에서 400미터 높은 산중턱에 있어, 자리를 잡고 앞을 바라보면 계곡 저건너 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경치가좋았다.
내원궁 암자의 이름에 걸맞는 명소 이다.
회사생활에서 일에 대한 회고, 직장 동료및상하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회개, 반성, 고마운일,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많은시간을 보냈다. 이를계기로 인생전반을 마무리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지나온 과거를 회개하고 모든기억을 지울려고 했는데 10년은 넘게 회상이 되기도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을 돌이켜보면 잘했구나하는 생각이든다.
올라오는길 고창 대흥사에 들러 새벽예불 드렸던기억이난다.

서울생활을 하게되므로 청도,구미,청암사는 거리가 멀어 자주 갈수가 없어서, 국민대옆 북한산 아래있는 청학사를 다니게되었다.
비구스님이 계셨는데, 진정한 불법을 구도하는 정신으로,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고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사동에있는 조계종본당인 조계사의 불교대학에서 3개교육과정인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과정을 1년에 걸쳐서 교리공부를 했다. 나름열심히 해서 모범이되었다고 상도타고,수료증을 받게되었다.
그동안 마음으로만 읽혔던 교리를 체계적으로 하는계기가되었다.
교리공부를 함으로서 좀더나은 신앙생활을 하게되었다.

제기동 법화정사에서 도림스님.
법화경 불경을 선물로 주시면서 덕명 이라는 법명을 표지에 적어주셨다.

해인사.벽련암
8만대장경탑돌이.사리친견
태백 정암사 1박2일 새벽정근
다보탑돌이
충주 청평사 1박2일 새벽정근
동화사 갓바위대학기원기도
선산 도리사
김천직지사 중암
한산도 야간선상에서 방생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강릉해안 암자



1981년5월에 반도체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업무의 직무로는 반도체 연구, 개발, 제조, 반도체및 세라믹공장장,
전장부품사업최고책임자,
품질보증최고 책임자를 역임하고.
2007년에 퇴직을 했다.
공장장일때는 2500여명의 종업원을 통솔하기도 했다.
26년의 근무기간 동안에 기술연수및 국가핵심과제 연구로 많은기간을 사외에 파견근무를 했다.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많은 추억들이 있다.입사후는 신입사원의 극기훈련으로 저녁을먹고 밤중에 금오산을 넘어서 동틀때쯤 목적지에 도착경기였는데 우리팀이 우승을 했다.
에피를 성장시키는 챔버가 고장이 나서 한밤에 서울에 올라와서 밤샘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술자를 픽업해 구미공장으로 데려오던 기억이 떠오른다.
설비가 정상화되자 공장장님께서 수고했다고 양주 한병을 주셨는데,
30년이 넘게지난 지금에도 보관하고 있다.
직장단체 생활에서 협동정신을 기르기위한 분임조활동 실천 전국발표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서 기쁨을 누리기도했다.

사내체육대회에서 2500여명의 대군을 인솔하고 운동장으로 가서 신나게운동하던 기억이난다.

가을 야유회 밤늦게 모닥불 피워놓고 밤샘놀이, 몸에 기름이튀어 장단지에 화상입었던기억, 15년근속으로 제주도여행, 20년 근속으로 입사 동기들과 싱가폴 여행하던생각.
사내 부서별 합창단 발표회, 설악산 대청봉 등산대회, 낚시반, 사진반 활동하던시절이 생각이난다.

협력업체인 자회사가 해외에 많이있어 즉, 반도체 태국공장, 중국서주공장, 세라믹 필리핀공장에 기술지도및 점검을 위해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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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연구개발관련 주요 업무로는
1983년 3월에는 일본의 도시바 반도체 회사에 연수를 가서, 1개월 동안 반도체 첨단 기술연수를 받고 국내정착에 시켰으며,
1984년부터 2년간은 국가핵심 과제로 전자통신 연구소에 파견되어 최첨단 핵심 반도체기술을 연구에 참여했다..

1987년에는 6개월간에 걸처서 카이스트와 고휘도발광 다이오드 과제를 연구했고,
2003년에는3개월간에 걸쳐서 전경련 국제 경영원에서 테크노 최고 경영자 교육을 받았다.
전기연구소와 고전력소자 공동 개발을 진행했고. 자동차부품연구소와 차세대 기술을공동연구하기도했다.
한편 서울대 멤스연구소 장비선정 심의위원 및 반도체분야의 산업기술평가원의 국책과제 심의 위원으로 참여하기도했다.

연구개발 업무는기업에서 국가 개발 과제를 도출해서, 정부에 제안을 하면 심의회에서 국가과제로 선정되면, 정부자금을 받아서 그비용으로 연구개발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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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관련해서 해외 순방으로는
미국지역은 이온임플란트 설비구매를 위해 보스톤지역 이튼회사방문을 했고,저녁식사에 랍스타 메뉴가 일품이 었다,
웨스트 세미콘쇼에 4번 참석을 했는데, 관람후 이튼사의 저녁에 디너 선상파티의 밤풍경이 장관이었다.
한번은 세미콘 전시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느낄 정도로 고생한 기억이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모터쇼에는 3번참석했는데,지엠본사,포드차박물관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빌려 국경을넘어 이웃 케나다 지역으로 들어가서 나이야가라 폭포를 2번 이나 구경했다.
폭포 동굴로 들어가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풍경과 무지개와 물소리는 정말 멋있는 장면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금문교 다리를 걸어서 건너던기억, 다리건너 왼쪽동산에 올라 태평양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세상이 넓다는것을 인식하기도했고, 반도체 물리책을 출판한 버클리대학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타고, 101하이웨이로 LA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지나긴 시간의 운전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LA의 바다항구 피어스에서 바다동물을 구경도 할만했다.

조지아공과 대학을방문해서 패케이징관련 교수님를 만나 기술협의를 하고 학교투어와 코카콜라 박물관,스톤마운트파크 관람이 기억에남는다.

필라델피아의 자동차경기장에서 레이서카 탑승이 기억에남고,시청청사관람했다.

차량용 반도체 마케팅을 위해델코레미,WTI업체방문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이끼낀 큰 고목 나무가 기억난다.
디즈니랜드 관광도 재미있었다.
시에틀공항,덴버공항을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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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역 방문은
시안의 당관계자 만남, 전기연구소에 위탁과제 점검을 위한 업체방문,시에서 배려해준 관용차를 타고 다닌기억, 병마용, 비림즉 비석의숲을 감명깊게 관람했다.
호텔생활과 저녁 파티를 즐겁게하고 친구맺은 가정집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심양에가서 골프치고 회식,밤놀이.
금요일 밤열차로 내몽고의 황산에도착해서 환단고기 옛유적과 역사박물관관람.
밤열차를 타고 태산에가서 천하제일봉과 곡부의 공자묘 관람
금주에서 전장부품관련 생산지도로
9개월간 생활했다.
산해관의 만리장성 시작점,제일문.
하얼빈공대를 방문해서 업무협의.
러시아거리위 먹자거리구경
하얼빈간의 겨울 얼음공원
안중근 폭파장소확인
만주국 박물관관람
상해 와이탄에서,밤배야경구경.
항주 서호의 뱃놀이.
서주.반도체공장방문및 태호 호수의 둘레길구경.
단둥의북한철교
대련의 동해공원,전적지
위해업체방문품보
유비의 묘소
삼고초려장소
무한공원앞에 황소 기념물
장사지역 기차연구소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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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으로는 희메지 기술연수시
일본에게신 아저씨께서 10만엔을 보내주셔서 부친에게 귀한 모자를 사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셨다.
시즈오카의 온천욕, 후지산 둘레길 탐방.고베,나고야,오오사카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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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특기 지역방문
드골공항오후3시도착..렌트카로 르특기 델코레미업체로 이동,
2시간정도거리를 길을잘못들어 밤12시경 호텔도착...시골지역에는 저녁8시이후는 인적이 드물어찿아가는데고생많이했던기억이 추억으로남는다.
에펠탑위로올라가서 4방을 구경,
목마르트언덕, 르브르박물관.
달팽이요리,영국해협 해저터널입구

영국..,시티관광버스를타고 다니면서
버버리매장,국회의사당관람및 유람
독일 보쉬 호프집만찬.
필리핀은 세라믹공장광리차,수빅만 미군기지,골프,카지노구경
태국은 치앙마이 반도체 공장관리차
홍콩..오션파크여행
싱가폴20년근무기념여행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숙박.나들이.
인도네시아업체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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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명 발자취2(어린시절)
우리집은 동례리 1038번지이고, 서쪽으로 통덕량 이난서 재실이 옆에 붙어있다. 재실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있고, 왼쪽언덕에는 앞쪽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 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 있었던 것같다.
감이 많이열리면 가마니로 3가마 정도 수확을 했다. 한광주리정도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한바구니는 물을 따뜻하게해서 항아리독에 땡감을 넣어 따뜻한 안방에 두면 감이삭아서 단감이된다. 나머지 많은 감들은 벼속에 파뭍어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 언덕이 있었는데, 양지바른곳은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 뜯어다가 버리밥을 비벼먹었던 생각이난다.
집앞 산소를 돌아서 언덕끝에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새싹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기와집을 새로짓다.
재실옆 우리집은 작은 초가집었는데,
부친이 종중일에 즁추적인 역활을 하시는관계로 종인또는 방문객이 많아서 감당을 할수가없었다.
그래서 1317번지인 동네 가운데 부촌지역에 200여평을 마련해서 기와집을 새로지었다.
집모양은 디귿자 모양이다. 본채는 4칸집이고,정남을 향해서 박유산을 정면읋 바라보고, 왼쪽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랑채가있고 오른쪽에는 창고, 곡간, 장독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다. 사랑채에는 유산정숙의 이정매공의 현판이 걸려있고, 부친께서 생활하시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도 계시고 해서 우리집에는 일년내내 손님들이 들락날낙했다.
어머니는 매일 음식준비에 바빠서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아도와 주셨다. 어머니는 시골잔치 음식준비의 달인이 되어서, 동네 길흉사 잔치에 가서 음식만드는데 진두지휘를했다.

가소천에서 천렵을해서 잡은물고기로 추어탕을 끊어서 맛있게 먹었다
동네마을에세 50미터쯤 나가면 가조에서 제일큰 강폭이 70여미터되는 가소천이있다.
어린시절에는 다리가 없어서 여름 장마철 에는 항상 신발벗고, 바지 올리고 책보따리 머리에 이고 조심 스럽게 건너가곤했다. 초등1년때는 매우 무서웠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튼튼한 다리도있고, 북쪽 가북에 댐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기위해, 수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향상 일정한 물이 흘러간다.
어린시절에는 비가올때면 물이 많았으나. 가뭄이 들때면 무릅까지 물이내려간다. 날씨가 개인날엔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고기를 잡고, 아주머니들은 야채와 양념, 국수를 주빈해서 개울가에 솥을걸어놓고 추어탕을 끌어서 맛있게먹던 생각이 난다.

논에서 보리타작.
가소천 건너에 우리논이 있는데, 가을에 보리를심어 겨울내 햑교다니면서, 보리가 자라는걸 바라보며 다녔다.보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다익어서 누렇게되면, 보리를베어 말린후에 타작을 해야하는데.
말린보리를 다발로 묽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도리께로 할때도있고, 논바닥에서 할때도 많았다.
논한가운대쯤에 보리를 걷어내고 베고남은 보리대를 뿌리채 뽐아내고 보리타자 마당을 만들고 물뿌리고 발로 단단하게 밞는다.
땅이 마를때쯤에 주위에 보리대를 모아놓고 도리께로 타작을 하는데, 논면적이 크면밤늦게 까지 여러판을 한다.12시쯤되면 세벽이슬이 비치면 녹아서 더이상 타작을 할수가없어 보리알 선별 작업을한다.
채에담아서 어께높이 만큼올려서 흔들며 흘러내리면 보리알은 바로밑에싸이고 찌끄기는 가벼서 멀리날아간다. 새벽2시정도되면
대충일이 마무리된다. 늦은밤이라 잠이쏟아져 집에가지안고, 보리를 털고난 뿍데기 무덤속에 들어가서 잠을청한다.온몸에 보리수염의 가시가 묻어있어 약간따가운 느낌이든다.조그만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별들이 서로 자랑 하듯이 반짝 반짝거린다. 정말 밤하늘이 아릅답구나 하는 순간에 깊은 잠이들어 피곤한몸을 꿈나라로 보낸다. 아침동이트면 일어나서 식사를하고 이슬이 사라지고나면 또 보리타작을 했다. 논이 여러군데있어 옮겨가면서 몇날을 한걸로 기억이 된다. 이러한고된 생활이 훗날 사회에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데 좋은 인생의 지침서가 된걸로 생각이 된다.

수월리 불당의 소풍나들이.
초등학교시절 봄,가을로 소풍나들이를 하는데 수월리 동네를 지나 좀더들어가면 불당이라는 넓은 평지가나온다. 아마도 예전엔 불교와 관련되 지역인가보다 느낀다.
북쪽에는 천미터넘는 우두산과 의상봉이있고, 8부능선에는 천년의 고찰 고견사가 있어 그정기를 아래로 내려준다.
소풍날에는 특별히 쌀밥과 계란 후라이, 멸치조림등 맛있는 도시락을 가방에메고, 학교에 가서 학년인원이 2백여명되는데 단체로 걸어서 불당에 도착하면 점심 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오랜만의 특식 만찬을 하고나면.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서 장기자랑 하는동안에, 선생님들이 바위나 나무가지,덤불에 보물이름이 적힌쪽지를 접어서 눈에 띄지않는 곳에 숨겨둔다, 장기자랑이 끝나면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보물을 찿는다.
보물은 연필,공책,필통등 학용품이다.
비싼 필통,크레파스를 찿은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오래간많에 야유회를 가서 맛있는 최고의 도시락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던 생각이난다.
중학교때는 좀더 높고 거리가먼 고견사로 소풍나들이를 해서 천년이 넘는 고견사의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마을뒷동산 사동지추억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동례마을 뒤동산 언덕위 수백년노송
어릴적 동산에올라 고향의 봄노래하고 친구들과 언덕 잔디밭에 몸 구르기 하면 즐겁게놀던시절..
백년 노송 나무에 올라가서 가조의 푸른들판을 바라보고 풍년을 기원하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옛시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솔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푸른하늘의 뭉게구름 수백년흘러 지나 갔건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재자리에 꿋꿋이서서 솔향기 쁨으면서 선비의 고고한 자태로 나를 반겨주는구나....
4계절 자연의 만물이 흐르고..
바람도..구름도..흘러가갔건만..
너만 홀로서서 독야 청청하는구나.
사송정(四松亭)/가조 동례리 촌후 사동지마을 뒤에 있다. 선비 신후명(愼後明)·이명(而明) 형제가 네그 루 소나무를 심어 대를 쌓고 노닐던 곳으로 후손들이 가꾸고 기리는 곳이다.
현재는 한그루가 남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 3월 거창군 보호수로 지정 되었고 수령은 약 380여 년으로 추정되며 수고 11m, 나무둘레 3.9m이다. 곽가은이 지은 사송정기(四松亭記), 송정훈이 전한다.

동네에서 서쪽 논밭끝자락에 안양산이있다. 산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시조공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들이 고이잠들고있다.
학교를하고 방과후에는 집에와서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오후종일 산풀을뜯긴다.
마을에 집집마다 소가있어 전체 67십마리가있다. 산에가서 고삐를 매고 방목을 하면 소떼들중에 대장이있어 이산 저산을 돌며 풀을 즐긴다.
풀을 뜯는동안에 아이들은 꼴망테에 꼴을베기도 하고, 도라지나 잔듸를 케기도하고, 겨울에가서 가재잡기도 한다. 풀베어주기 게임도한다. 낫을 멀리땅에 던져 꼿히면 진사람이 풀을 베어주는게임이다. 오후에 해가넘어갈즈음에 대장소는 동네소를 이끌고 아래장소에 모이는데,간혹 대장소를 따르지않는 소는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찿아다니는데, 소도 밤에는 무서워하는지 꼭 산소옆에 안자있는다.

박유산밑 과수농원.
박유산 동쪽 산능선 끝자락에 3정보땅에 300그루의 과수농원이 있었다. 집에서 1500미터쯤 떨어져 있다. 거리가 멀어서 황토 벽돌집을 지어서 여름에는 자기도하고 들일 올때 사용하기도했다.
부친 말씀에는 방아간을 처분해서 샀다고한다. 산밑이라 토질이 좋아서 사과나무가 아주 튼튼했다. 년령이 20년이 넘어서 사과가 20상자이상 수확했다.국광,홍옥,인도,스타킹 수종으로 이루져 있다,
초봄에 나무가 튼튼하라고 유황약을 치는것 부터해서 시작해서, 15일마다 약을 쳐야하는 매우 힘이 들었다.
또한가지치기를 해주어야 과일이 크게열린다.
일요일은 과수원에와서 공부도 하고,소풀도 베고,사과도 지키고했다.
점심때가 되면 집이 멀어 가기가 싫어서, 하루종일 사과만먹었다.
가끔은 밤에 자기도 했다.
과수원에는 불독개, 세퍼트의 큰개를 키우기 때문이 안전했다.
사과수확기에는 사과를 화물차에 가득싣고,주로 광주 시장에 경매를 넘기는데, 중간상인이 물건을 팔고 돈을 주지않아 중학생이 었던 내가 직접 따라 가기도 했다. 하루종일 사과를 따서 싣고,늦은 저녁을 먹고 밤10시경 출발해서 천천히 가면 새벽3시에 경매장에 도착해서 사과를내리면 4시쯤 경매를 하고 돈을 받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난다.

시골방아간
우리아래동네의 중마 방아간을 가지고 있었다.물레방아오 발동기가 있어서, 물많은 여름에는 물레방아를 돌리고, 건기인 겨울에는 발동기를 사용했다.
방아간운영은 거창 양평의 가느들 아저씨가 일해주었다.
벼을 가지고와서 쌀로 찌으면 2되정도 삮을 받았던것같다.
가래떡도 내리고, 고추도 갈고했다.
명절때면 가레떡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난다. 방아간을 하고난 후 부터는 힌살밥을 자주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부리 외가집추억
외가집은 우리집 반대쪽인 일부리 이다. 어머니는 친정에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명절이나 제사날에는 음식과 과일을 보내고했다. 외할머니가 계시기도했지만, 돌아 가시고도 갖다주시라고,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주우리집에 와서 오래동안 머물고하셨다. 점년이누나, 금연이도 우리집에 몇달간 같이 지내기도했다.
같이 사동지 가서놀기도하고, 땅따먹기, 공기놀이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재실에 가서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과수원에 가서 사과도 따먹기도했다.

할머니별세
우리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상세한 기억은 잘나지않고 씩씩한 할머니라고 생각이되어진다.
모든일은 할머니가 관여하는걸로 느껴진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2대독자라서 많이 사랑하고 일도많이 시키지 않았던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호통잘치는 호랑이 할머니라고했다.
우린 아들이 4형제인데 내가둘째인데 딸을 보고싶었던지 내남동생에게는 치마를 입혀업고 다녀던 기억이난다. 가끔은 재실 처마밑에 가서 박쥐똥을 주워먹이 기도했다. 이유는 잘모르겠다. 눈밝으라고했는지,여하튼 몸에좋다고 많이 주워서 먹였다.초등학교 저학년때 이라서 거억은은 잘나지 않지만, 가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해가질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왔다. 90이넘어서 돌아가셔서 장수를 하셨다. 문상을 치르는데 아마도 보름정도의 긴날자에 걸쳐 치르는것 같았다. 산소는 안양골 선산에 모셨다. 사랑채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상복을 입으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을하고 절을하셔다.
3년 동안 급한일이 없으면 출타하지않고 상복을 입고 계셨다. 외부에서 문상을 오시거나 손님이 찿아와도 술을 따르고 재례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다. 아마도 10살이전에 돌아가신걸로 기억이된다. 할머니가 애정과 사랑으로 뒷바라지를 다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적으로 힘들었을것으로 생각이든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자라서 인지,평생을 5남매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않았고, 욕소리 한번 하지않으시고, 손대말을 자주 사용해 주셨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이된다. 아버지도 할머니피를 이어받아 93세 까지 사시다가 별세를했다.


마상리 고모집추억
가조면 소재지 의 중학교 뒤편에 막내고모님이 살고있다.
고모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 고모부네 식구랑 같이 생활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는 고모네집에가서 세참으로 준비해둔 고구마, 감자,과일등을 먹고해다. 고모는 그집에 제일 어른이라 모든살림 살이를 관장하고 있었고, 작은 고모님이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작은 고모님은 매우 인자했다. 향상 우리를 반겨주셨고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했다.
기수형과 정희, 정화,문희 식구들과도 즐겁게 보낸기억이난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거창으로 고등학교를 하고 부산에서 대학등 외지 생활을 계속되어서 그이후로는 많은 추억을 갖지못하고, 명절이나 휴가때쯤 고향갈때에 찿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고모님 나이 99세때 봄에 시골에가서 만나뵈었는데,내년 100세가 되면 가조면에서 장수할머니로 잔치를 해주신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는데, 해를 다채우지 못하고 별세를 하셨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동안 배려해주신 은혜을 기억하고 좋은세상에 가셔서 편한한 생활을 하시라고 기도하고 장례절차 마무리 짓고 올라왔다.

마상리 누나집추억
고모님옆집 근처에는 내가 어릴때 호적상 양자로 보내졌던 누나가 살고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승문원 박사 이창일 종손이 후손이 없었는데 나를 그집 호적에 올려 대를 있게했다. 호적상으로는 양자가 되었으나, 호적상 양자로 가족이 없고
시집간 누나만 있기때문에 나는 우리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마상리 누나는 내가 대를 이어줄 고마운 동생이라고 항상 친절히 대해주었다, 마상리 고모집에 갈때면 향상 누나집에 들렀다. 자형께서도 매우인자하시며, 친절이 대해주었다. 누나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왔다.
몇번인가 마상리가서 제례를 지냈던 기억이난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집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20년 넘게 부모님모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셔서 내가 양부모 제사를 모셨다.아내가 불교인이라 성의끝 제사를 모셔오고있다.나는 양자를 가서 부모가 먼저돌아간 독자로 되어서 정식군대에 가지않고, 가조면 예비군 중대장 보좌일을 6개월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어릴적에는 양자의 개념을 잘몰랐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속으로는 마음의 고뇌를 겪기도했다.
그래서 절을 좋아하게 된것이아닌가 하는 생각도든다. 오랜 기간동안 사찰에 다니면서 인생이란 무었 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대구감년 누나집추억
아버지 여동생이 3이있었는데 마상리 고모님을 제외한 2분은 일찍돌아가셔 얼굴이 기억나지않고,
딸이 대구에 사는 감년이누나이다.
어릴적에는 가북 용산에 살았는데, 결혼을 하면서 대구로 갔다. 자형은 북한출신이라 집안이 별로없어서 우리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
방학때가 되면 대구에가서 놀기도하고 소애, 무용, 영애,무식가 시골에 내려와서 시골 경험도하고
서로 새로운 환경을 경험을 번갈아 하면서 즐거운생활을 했다.누나는 대구 평리동에 살았는데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향상 웃는얼굴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어서 즐겁게해주셨다. 양가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다들 바쁜생활로 가끔 안부를 물어보고 잘지낸다고 하니, 감사할따름이다.


거창 고모집하숙생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 가조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형님과 3년 차이라서 내가1학년때 형님은 3학년이었다
형님은 서부경남의 명문고인 거창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떨어져서 거창종합고등학교 인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이다닐때는 하숙비가 비싸서 1년 남짓 자취생활을 했다. 시내에서도하고 개화리 오담재 재실 관리실 집에서도 했다. 형님이 졸업하고 난후에는 계속 하숙을했는데, 작은집 고모네집과 합천 일가인 그릇집 누나네 집에서 하숙을했다.부모님은 5일장이나 나들이일이 있을때마다 찿아 오곤 했다. 내가 하숙을 하고있어서일까.올때마다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 과일등을 가지고 오셨다. 나한테도 공부열심히 하라고 용돈도 쥐어 주시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 까지는 키가 반에서 3등이내 였는데, 고3이 되는 해에 12센티나 부쩍 자라게되어 보통의 키가되었다. 어릴적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면 못알아볼 정도로 변하게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어릴때기억은 별로나지 않는다. 항상 할머니 옆에서 지내곤 했다. 철이든 중학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에 별로안계셨던 기억이다. 항상 한복 두루마기 옷을 입으시고, 출타 하셨다가 몇일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문중일을 하시느라, 바깥일이 많았던것 같다. 지금생각하면 대동보 만든다고 족보 단수 받는일, 각 문중 재실 짓는다고 헌성금모으는일,
지금도 집에는 각가문에 다소 계보가적인 종이가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후손이나 방손의 각종문헌 문집이 보관되어있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셨는데, 가방에 묘사를 지내고 음북을 받아왔는데 각기다른 모양의 음식을 담은 비닐봉지 여러개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받은지가 오래되어 음식이 상한 봉지도 있었다. 문중의 묘사를 다참석하시느라 기일이 오래걸려 먼저받은 음식이 상한것이다.
어머니는 음식을 골라내서 괜찮은것을 솥에 쪄서 주시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두루마기 한복을 빨고 풀칠을하고 다듬이로두드려 펴고나서 새로운 동전깃을 달아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버지는 향상 소식을 하면서 생활하셨고, 먼길도 걸어다니시거나
대중교통은 완행버스, 옛날 비둘기 야간열차만 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남들과 대화를 할때는 항상 존대말을 사용하셨다. 동네 마을이나 지역에서도 존경을 받고 살았다.
국회위원이나 군수등 부임시에 인사차 방문을 했다.
아버지가 외부일로 바깥에 시간을 보내는관계로 집안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가장 힘든것이 농사일과 재정 운영 이다. 다행이도 4형제라 농사일을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은 일꾼을 들여 일을해야 만했다. 논을 경리 정리한 후에 자갈 줍기,과수원 농약치기, 모심기,등이 힘들 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집안일을 돕지않는다고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본연의 일을 하곤했다. 나는 일이 힘든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했다. 형님은 맏이라 조금은 부담스러워 했다. 자식들 대학 등록금및 학비를 감당하느라 많은 고생을했다. 한번은 긴급자금이 필요해서 달러 이자돈을 빌렸는데, 너무힘이들어서 논을 팔아서 갚았던기억이있다.형님은 명문고 우등생이라 서울대에도 들어 갈수 있는 실력이나, 동생들 학비때문에 빨리 돈벌수있는 2년제 부산 교육 대학에 들어가서, 우등생으로 졸업 해서 당해연도에 교직발령을 받았다.
나도 부산으로 대학을 가서 형님한테 학비를 지원받아 학교를 마쳤다.
내가공부했던 몇년간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부산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접빈객,집안대소사를 많이 치르셔서 마을의 길흉사,일가 집안의 큰잔치에는 참석해서 일처리를 해주곤했다.먼저 아버지가 93세에 별세를 했고 어머니도 10년쯤뒤에 92세로 별세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내가 오십중반이었다. 적지않은때 나이임에도 많이 했었다.

여동생선자사망
우리집은 5남인데 4째가 여동생이다.
딸이 하나라 집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자랐다. 나이차이가 많아서 서로객지 생활을 함으로 명절때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수있었다.
나는 직장이 구미이고 여동생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평촌에 살았다.
내가 본사발령을 받고 서울로 이사 와서는 시간날때마다 자주만나서 집에도 방문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주변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에 갑자기 여동생이 뇌출혈이 생겨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중추뇌 출혈로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주었다. 그래도 1주일간 이라도 상태를 보자고 제안을했다. 치료를 했으나 날이갈수록 영양주사로 몸은 부어지고 맥박과 혈압은 떨어지데니 결국은 저세상으로 떠났다.










발동기 돌아가는소리 오두막초가집.호롱불.배추뿌리.
기와집지을때 겨울에 모닥불생각.참외수박밭지키기.
개구리잡아닭모이.

초등학교시절
망태메고풀베고.작두케고찔래꽃.버들피리.새양골못수영.

사동지
친구들과 소나무타기.언덕구르기.

사하라태풍에 사갓쥐고있다가
동네입구 도랑에 넘어짐.사하라태풍

앞냇가에서 멱감고.고기잡고.추어탕먹던기억.
비가많이와 강건너던생각

아카시아씨앗심기.
가북에나무하기.소풀뜯기.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물지게지고 물길던생각.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집짓던기억..흙벽돌찍기.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석강이모집 놀던시절
기호.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김대원신경쓰이던기억

거창고등시절..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괴롭힘.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대학시절
단축마라톤30위이내
교내.동산에 산책.김을용.김용해.
해운대추억.태종대.광안리.용두산추억.
거제도 텐트여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전자기사1급.무선설비기능가3급

한국전자근무직급년수
1981년5/6일입사...2007년9월퇴사...26년근무 

연구원3년..3개월교육.물리전자.까뮈.Ic설계
             경북대공정연구.서울대설계교육
주임연구원2년..S1575.To92L.일본TSB3개월sw소자  
              한국전자통신6 ETRI6개월파견..PSA. NSA 
과장대리.(주임연구원)1년
선임연구원1년..화합물소자.PW소자.압력센서개발
연구1과장1년...연구소8년
제조기술1과장2년..Fab
제조기술부장대행1년..기술Fab1.2. Assy3.4과
제조부장1년  반도체.조립전체
제조1부장1년..sot1234
조립.세라라믹.공장장3년...
       조립반도체1년      TO92.L.sot.pw.Ic.....
       세라믹2년

SBU2년..전장
사업부장상무2년..전장
품질보증본부장1년


회사그기훈련 금오산등반 새벽에동촌도착
연구1과야유회에서 오른발 장단지화상으로밤샘고통
현진욱.유옥희 서무들수고
사내체육대회 반도체제조 펩2 조립3.정비2..
7개과900명데리고 시합
제조1부장시절.Sot과 분임조경연대회 대통령상수상
영덕바닷가 MT시 밤샘놓이 밤에홍삼먹음.

집안행사
아버지60회갑연
형님결혼식
내결혼식
성원이와둘이 여름휴가 서해안면도. 남해땅끝마을.밤샘비.동해 고성바닷가...좋은추억기억됨
대덕청암사 계곡에서 한여름피서에서폭우만남.
청암사근처 성태경씨와 피서 밤추위로 텐트속불남.
집에서 새벽2시쯤 청송주왕산으로 이동
정서방.큰처남댁함께..술마시고놈.
프레스토 차몰고 처음서울올때 올림픽도로에서 경찰차에스코트기억.
운문산 북대암에서 기도와 새벽해돋이바라봄.
청암사 절에서 밤샘 범화경독경..
성원이가 좋아했던 청암사스님들
여름학교에서 반야심경 독송해서칭찬받음
청도운문사 철야 3천배
조계사에서 반야심경.천수경교육과정
거제 건영집에서 밤낙시.회
안동 종열 친척집 밤샘 놀던기억
김수철네와 무주구천동 여름휴가.
처우회 정기모임...제주도한라산.울릉도여행.설악산등반  
최태영지점장 가족과 나들이추억
당진.홍성.여주..음성땅구매. 고구마재배.
회사친구(대현.인철)모임추억...선산.
백대현 고양땅에 야체심기
주민센터 웰빙댄스 교육
중국 금주현지근무.
가족과함께 생활
주말여행...태산.공자묘.홍산.대련.압록강.만주국
인간관계어려움.
스트레스성 건선피부악화로 9개월근무귀국
그린센서 근무.9개월
헤드헌트 4년솔로몬
자체운영
경비업무...화곡 보건센타.1년..가산 한성근무3년
초등모임
둥국.일본해외여행
고등모임
오남리 1박2일 야유회
2019 10.12일 내여동생 하늘나라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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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발자취. 사찰을찿아서

마음을비우다
구미에서 직장을 다닐때 연구 개발 업무나, 직장 단체생활에서 힘든때가 있을땐 마음을 식힐겸해서, 청도 운문사에서 북으로 북대암 암자절에 가끔가곤했다.
암자는 북쪽의 산봉우리의 7부능선에 남향을보고 있다.
암자뒤로는 조금만 올라라가면 전체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있다.
거리가 멀어 1시간30분정도 걸려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나면 마음의 평화을 얻는기분이어서 자주들렀다.
저녁예불과 공양을 마치고, 뒤산에올라 해가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자연의 황홀한 경치를 바라라보며, 해질녁의 찬기섞인 바람이 산에서부터 내려려오는 쌀쌀한 공기의 맛을본다.
땅거미가 밀려올때면 산새소리도 줄어들고 풀벌래소리도 하루종일 생활에 힘들어 숨을 죽이는것같은 적막함이 흐르고, 이따금 귀투라미가 끼륵.하고 울리는 소리가들린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짙어질때면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밝은 달이 만물을 조용히 비춘다.
내생애의 삶에 대한 깊은생각을 해보곤했다.
어떻게 살아왔나,어떻게 살아갈까.
인간답게 살아가는게 어떤것인가.
늦은밤 기온의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방으로 들어와 피곤한몸을 달래며 깊은잠에 들곤했다.
한편 피곤해서 일찍 잠에들었던 어느날에는 새벽4시경 정신이 들었는데, 더이상 잠이오지 않아 조용히 나와 뒷산 중턱으로 올왔다.
주변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하늘의 별과 달도 상대적으로 희미해져가며 빛을바래간다.
새벽의 상쾌한공기가 콧속을 시큰둥하게 해준다.
해가뜰 때쯤이면 저아래 골자기에서 뭉굴 뭉글한 물안개가 바람에 밀려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태양이 뜨기전에는 건너편 먼산에서 부터 엷게물든 붉은 기운이 스며들다가 레이져같은 한줄기 빛이 세상에 비추며, 모든 우주만물에게 찬란한 새아침이 왔다고, 깨어나라는 알림을 전해주고있다. 내가슴에도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인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새로운 마음의 충전을 하는것같다.
그래 어제까지 힘드고 고뇌했던 모든것을 암흑속으로 날려보내고, 지금 이순간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거야, 하면서 내가슴에 새로운 정기와 회망을 불어넣곤했다.
지금에 생각하면 내몸과 내생각과 나의영혼을 위로해는 주는 마음의 안식처 였던것 같다.
우리가족은 딸이 둘이었는데
이절에 다니면서 막내 성원이가 태어나서, 큰축복을 밭았다고 생각이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시간이 날때마다 절에오게되어, 많은날을 암자에서 보낸것같다.
이후로는 가까운거리의 보현사로 거쳐를 옮겨서 마음을 공부를 하게되었다.
보현사에서는 3000배 심야기도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김천지래 대덕의 청암사의추억이다.
수덕산의 골자기에 승려대학겸 청암사가 있다.
승용차로 집에서 1시간반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불교를 좀더이해하고 마음을 다스리었던 마음의 안식처이다.
깊은계곡이라 여름이면 피서겸해서 자주찿았던 곳이다. 막내성원이가 무럭 무럭자라서 초등학생쯤인가,여름방학때 불교학교를 열었는데 참여 어린이들이 많았는데, 반야심경 외우기에서 전문을 다외워서 승가대학장님,주지스님 이하 모든스님들이 칭찬해주시던 생각이난다. 그이후로는 스님들과 잘지내곤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했다. 체육시설에가서 주지스님과 탁구를 치기도하고, 학장스님이나 주지스님 방에가서 다과를 들면서 오랜시간 담소를 나누기도했다.
비구니 스님이시라 계율을 엄격히 지켜서 신도님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다.
불교기념일이 되면 심야 법화경 읽기 기도회를 진행하는데 저녁에 시작해서 밤이 새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여름에 텐트치고 야영하다가 추워서 불피고 자다가 불이났던생각.
처가집 식구들과 계곡에 놀러갔다가 소낙비를 만나서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

구미의 금오산 정상부근에 약사암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거리라 휴일이면 혼자또는가족들과또는 친구들과 자주산에 가기도한곳이다.
직장생활에 힘이들때 자주찿아와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공장장 시절에는 직원이 2천명이 넘는 관계로 여러가지 문재가 발생하곤 했다. 가장힘든 것이 노사관계의 어려움이 있어 마음 고생한 것이 기억난다.그래서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있다.
김천에계시는 벽진이씨 17대조 청백리 노촌 이약동공께서는 이절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통해서 영흠을 얻어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약사암의 약자와 김천의 동쪽에 있는산이라 동자로해서 존암을 약동으로 했다는 내용이 문헌으로 기록되어있다. 혹자는 노촌실기가 이곳에서 편집,편찬 되었다고 도한다.
노촌실기편집,편찬에 나의 5대조이신 일하정 이학준공이 참여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훌륭한 선조님의 공덕을 잘누리고 있구나하며, 항상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약사암을 찿곤했다.


26년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다음날, 집사람과 기분전환할겸
고창 선운사 깊숙이 자리잡은 내원궁에 가서, 1주일동안 사찰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대해서 마음의정리를 하고 새로운 삶을 생각해보는 좋은시간 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공양을 하고는 혼자또는 스님과 산책하며 담소를 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법당에가서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원궁 암자는 처소에서 400미터 높은 산중턱에 있어, 자리를 잡고 앞을 바라보면 계곡 저건너 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경치가좋았다.
내원궁 암자의 이름에 걸맞는 명소 이다.
회사생활에서 일에 대한 회고, 직장 동료및상하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회개, 반성, 고마운일,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많은시간을 보냈다. 이를계기로 인생전반을 마무리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지나온 과거를 회개하고 모든기억을 지울려고 했는데 10년은 넘게 회상이 되기도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을 돌이켜보면 잘했구나하는 생각이든다.
올라오는길 고창 대흥사에 들러 새벽예불 드렸던기억이난다.

서울생활을 하게되므로 청도,구미,청암사는 거리가 멀어 자주 갈수가 없어서, 국민대옆 북한산 아래있는 청학사를 다니게되었다.
비구스님이 계셨는데, 진정한 불법을 구도하는 정신으로,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고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사동에있는 조계종본당인 조계사의 불교대학에서 3개교육과정인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과정을 1년에 걸쳐서 교리공부를 했다. 나름열심히 해서 모범이되었다고 상도타고,수료증을 받게되었다.
그동안 마음으로만 읽혔던 교리를 체계적으로 하는계기가되었다.
교리공부를 함으로서 좀더나은 신앙생활을 하게되었다.

제기동 법화정사에서 도림스님.
법화경 불경을 선물로 주시면서 덕명 이라는 법명을 표지에 적어주셨다.

해인사.벽련암
8만대장경탑돌이.사리친견
태백 정암사 1박2일 새벽정근
다보탑돌이
충주 청평사 1박2일 새벽정근
동화사 갓바위대학기원기도
선산 도리사
김천직지사 중암
한산도 야간선상에서 방생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강릉해안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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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명발자취 2 (회사및해외추억)

1981년5월에 반도체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업무의 직무로는 반도체 연구, 개발, 제조, 반도체및 세라믹공장장,
전장부품사업최고책임자,
품질보증최고 책임자를 역임하고.
2007년에 퇴직을 했다.
공장장일때는 2500여명의 종업원을 통솔하기도 했다.
26년의 근무기간 동안에 기술연수및 국가핵심과제 연구로 많은기간을 사외에 파견근무를 했다.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많은 추억들이 있다.입사후는 신입사원의 극기훈련으로 저녁을먹고 밤중에 금오산을 넘어서 동틀때쯤 목적지에 도착경기였는데 우리팀이 우승을 했다.
에피를 성장시키는 챔버가 고장이 나서 한밤에 서울에 올라와서 밤샘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술자를 픽업해 구미공장으로 데려오던 기억이 떠오른다.
설비가 정상화되자 공장장님께서 수고했다고 양주 한병을 주셨는데,
30년이 넘게지난 지금에도 보관하고 있다.
직장단체 생활에서 협동정신을 기르기위한 분임조활동 실천 전국발표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서 기쁨을 누리기도했다.

사내체육대회에서 2500여명의 대군을 인솔하고 운동장으로 가서 신나게운동하던 기억이난다.

가을 야유회 밤늦게 모닥불 피워놓고 밤샘놀이, 몸에 기름이튀어 장단지에 화상입었던기억, 15년근속으로 제주도여행, 20년 근속으로 입사 동기들과 싱가폴 여행하던생각.
사내 부서별 합창단 발표회, 설악산 대청봉 등산대회, 낚시반, 사진반 활동하던시절이 생각이난다.

협력업체인 자회사가 해외에 많이있어 즉, 반도체 태국공장, 중국서주공장, 세라믹 필리핀공장에 기술지도및 점검을 위해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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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연구개발관련 주요 업무로는
1983년 3월에는 일본의 도시바 반도체 회사에 연수를 가서, 1개월 동안 반도체 첨단 기술연수를 받고 국내정착에 시켰으며,
1984년부터 2년간은 국가핵심 과제로 전자통신 연구소에 파견되어 최첨단 핵심 반도체기술을 연구에 참여했다..

1987년에는 6개월간에 걸처서 카이스트와 고휘도발광 다이오드 과제를 연구했고,
2003년에는3개월간에 걸쳐서 전경련 국제 경영원에서 테크노 최고 경영자 교육을 받았다.
전기연구소와 고전력소자 공동 개발을 진행했고. 자동차부품연구소와 차세대 기술을공동연구하기도했다.
한편 서울대 멤스연구소 장비선정 심의위원 및 반도체분야의 산업기술평가원의 국책과제 심의 위원으로 참여하기도했다.

연구개발 업무는기업에서 국가 개발 과제를 도출해서, 정부에 제안을 하면 심의회에서 국가과제로 선정되면, 정부자금을 받아서 그비용으로 연구개발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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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관련해서 해외 순방으로는
미국지역은 이온임플란트 설비구매를 위해 보스톤지역 이튼회사방문을 했고,저녁식사에 랍스타 메뉴가 일품이 었다,
웨스트 세미콘쇼에 4번 참석을 했는데, 관람후 이튼사의 저녁에 디너 선상파티의 밤풍경이 장관이었다.
한번은 세미콘 전시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느낄 정도로 고생한 기억이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모터쇼에는 3번참석했는데,지엠본사,포드차박물관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빌려 국경을넘어 이웃 케나다 지역으로 들어가서 나이야가라 폭포를 2번 이나 구경했다.
폭포 동굴로 들어가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풍경과 무지개와 물소리는 정말 멋있는 장면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금문교 다리를 걸어서 건너던기억, 다리건너 왼쪽동산에 올라 태평양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세상이 넓다는것을 인식하기도했고, 반도체 물리책을 출판한 버클리대학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타고, 101하이웨이로 LA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지나긴 시간의 운전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LA의 바다항구 피어스에서 바다동물을 구경도 할만했다.

조지아공과 대학을방문해서 패케이징관련 교수님를 만나 기술협의를 하고 학교투어와 코카콜라 박물관,스톤마운트파크 관람이 기억에남는다.

필라델피아의 자동차경기장에서 레이서카 탑승이 기억에남고,시청청사관람했다.

차량용 반도체 마케팅을 위해델코레미,WTI업체방문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이끼낀 큰 고목 나무가 기억난다.
디즈니랜드 관광도 재미있었다.
시에틀공항,덴버공항을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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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역 방문은
시안의 당관계자 만남, 전기연구소에 위탁과제 점검을 위한 업체방문,시에서 배려해준 관용차를 타고 다닌기억, 병마용, 비림즉 비석의숲을 감명깊게 관람했다.
호텔생활과 저녁 파티를 즐겁게하고 친구맺은 가정집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심양에가서 골프치고 회식,밤놀이.
금요일 밤열차로 내몽고의 황산에도착해서 환단고기 옛유적과 역사박물관관람.
밤열차를 타고 태산에가서 천하제일봉과 곡부의 공자묘 관람
금주에서 전장부품관련 생산지도로
9개월간 생활했다.
산해관의 만리장성 시작점,제일문.
하얼빈공대를 방문해서 업무협의.
러시아거리위 먹자거리구경
하얼빈간의 겨울 얼음공원
안중근 폭파장소확인
만주국 박물관관람
상해 와이탄에서,밤배야경구경.
항주 서호의 뱃놀이.
서주.반도체공장방문및 태호 호수의 둘레길구경.
단둥의북한철교
대련의 동해공원,전적지
위해업체방문품보
유비의 묘소
삼고초려장소
무한공원앞에 황소 기념물
장사지역 기차연구소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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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으로는 희메지 기술연수시
일본에게신 아저씨께서 10만엔을 보내주셔서 부친에게 귀한 모자를 사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셨다.
시즈오카의 온천욕, 후지산 둘레길 탐방.고베,나고야,오오사카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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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특기 지역방문
드골공항오후3시도착..렌트카로 르특기 델코레미업체로 이동,
2시간정도거리를 길을잘못들어 밤12시경 호텔도착...시골지역에는 저녁8시이후는 인적이 드물어찿아가는데고생많이했던기억이 추억으로남는다.
에펠탑위로올라가서 4방을 구경,
목마르트언덕, 르브르박물관.
달팽이요리,영국해협 해저터널입구

영국..,시티관광버스를타고 다니면서
버버리매장,국회의사당관람및 유람
독일 보쉬 호프집만찬.
필리핀은 세라믹공장광리차,수빅만 미군기지,골프,카지노구경
태국은 치앙마이 반도체 공장관리차
홍콩..오션파크여행
싱가폴20년근무기념여행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숙박.나들이.
인도네시아업체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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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발자취. 500년선조쉼터

필자는 1954년 6월14일 가조 동례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는 고향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거창에서, 대학을 마치고는 1981년5월에 구미에있는 반도체 기업연구소에 입사해서 회사의배례를 받아서,대학원 석사,박사과정을 마쳤다.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본사인 서울근무를 하게되어 서울생활을 하고있다.
세월이 흘러서 60후반에 직장일을 모두 마치고, 벽진이씨 33대 평정공계 승지공후손인 부친 동강 이창기님께서 평생을 경종수족의 종중일 하시면서 보관해오던 선조님들의 각종 문헌, 문집, 유물들을 접하게되었다,
많은 자료들이 선조님께서 돌아가시고 수십년 혹은 수백년뒤에 자료가 정리됩으로 인해 귀한자료 유실등으로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이해하는데 부족한점이 많았다.
따라서 본필자는 금년에 칠순을 맞이하여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자손들에게 전하고자한다.

필자의 고향 동례리는 예를 숭상하므로 예곡 또는 예동이라 하다가,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리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 이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서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북에서 남르로 일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동향인 앞으로는 북쪽의 가북에서 남쪽의 지산으로 폭70미터정도의 넒은 가조천의 물이 합천댐으로 흘러감으로서.
가조천 넘어의 동쪽의 넒은 평야인 가조분지의 논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고 있다..
박유산의 북서,동례마을의 서쪽 전답끝자락에 나지막한 안양산이 자리잡고있다. 이곳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묘소가 정상부에있고, 그아래에 33대까지의 후손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
안양산 끝자락에 학당골이있는데, 학당동은 거창군지에는 조선 인조때 과거에 등제한,
벽진이씨 23대 승정원 박사 이창일공께서 강학한 학당이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승문원박사 이창일공의 교지가 동강 이창기,송월 이선숙님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필자가 어릴적에는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곤 했다. 그동안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하며, 늦은밤에는 야참을 먹었던 기억이나며, 온마을이 잔치를 하는 분위기 였다.
그때는 재실이 우리집 옆마당에 있어서 한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산재실에 사용되었던 유산정숙의 현판과 유산공의 유산문집의 문헌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지었기 때문에,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인 울타리 땅들은 우리집의 토지로 등기가 되어 있다.
영모재 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선조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신라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그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부르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부친이신 33대 동강 이창기공 께서도 삼수정의 영감을 받아 성주군 벽진면에있는 벽진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경수당내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있다..

22대 승지공의 파조인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 재실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낭재실은 거창군 개발사업으로 인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종토는, 보상비를 받고, 2023년에 오담공 산소옆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었다.

대학은 부산에서 필자보다 3살 연배이신 송월 이선숙 형님께서 교육직에 계셨던 관계로 경제적 도움을 받아 가면서 학교생활을 잘마쳤다. 평생을 부모님과 같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형님은 대학, 대학원 석사 학업을 마치시고 부산 북부교육청 교육장.교장을 역임하셨다. 국민훈장 홍조장을 수여받으시고 지금은 부산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대학을 졸업하고 구미의 반도체기업 연구소에 들어가서 반도체 연구를 하게되었는데, 회사의 배려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및 공학박사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임원으로 승진이 되어 본사인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예전에 구미에서 근무할 때에는 벽진이씨 시조공 늦가을 묘사때가 되면 부친이신 동강 이창기님 께서는 전날에 집으로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부친을 모시고 성주군 벽진면소재 경수당 시제에 참석하곤 했다.
부친께서는 평생을 흰두르마기인 한복을 입으시고 생활을 하셨다.
추향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종인 분들을 인사와 소개를 해주시며,
선조님의 발자취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셨다.

추향 제례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인 헌관은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마당의 제관분들께 큰소리로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참석하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심은 나무라며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향마을에 27대조이신 삼수정 이 가신 선조님이 심으신 동네의
고목 느티나무 3그루에 대한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수당에는 우리 직계 가문의 귀중한 보물의 의미가 있다.
부친의 5대조이신 29대 일하정 이학준공께서는 1864년에 시조공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있는, 경수당에대한 경수당기를 기술해서 공의문집인 일하정 문집에 남겨서 벽진이씨의 사적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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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창(초중고)시절

동례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동례촌 뒤편에는 사동지라는 조그만 동산에 큰소나무가 있어 친구들과 자주 놀러다녔다.
사동지 넘어는 학당골 저수지가있어서 여름이면 목욕을했던 생각이난다.
좀더올라가면 옛날 학당골이라는 자리에는 사람은 살지않고 집터 와 감나무 몇그루가 남아있던 기억이난다.
거창군지에는 과거급제 승문원박사 23대 찰방공 창일선조님께서 학당을 운영했다고 기록에 되어있으니 지금은 사람이 살지않고있다.
마을 뒤편 서쪽으로 논밭을 지나면 안양산의 안양골이 있다.
아양골 8부능선에는 가조 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선조님이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500여년동안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어릴때 학교에 다녀와서는 소를몰고 산에가서 풀을먹이고, 망태에 풀어띁어 오곤했다.
가끔은 잔디 도라지도캐고, 계곡에서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있다.
동구밖 언덕에는 27대 가신선조님이 느티나무 3그루를 심어서 마을을 이롭게 했다고 삼수정이란 호를 얻게되었다고 거창군지에 기록이 되어있다. 동구밖 건너편 박유산 끝자락에 21대 가조입향조 통덕량 난서공의 재실인 영모재가있다.
원래 이재실 자리는 조선후기 학자이신 26대 유산 정매공께서 유산재실(현판 유산정열)을 건립해서 학문을 했던것 인데 노후로 멸실이 된것곳인데 그후에 영모재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진 그당시는 거창종합 고등학교 인문계를 다녔다.
내가 1학년때 형님은 거창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화리에서도 생활을 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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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고향 박유산과 동례촌 유진
1. 박유산(朴儒山)의 유래.
박유산 높이는 713m이고, 본래는 화룡산이다. 동례리(동유골) 남쪽 1km남짓에있는 마을산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동쪽에 가조면 동례리의 동례, 중평, 안금마을 등을 품고 있으며, 산 아래로 가조천이 흐르고 있 다.
서쪽은 남하면 양항리 아주마을을 산골짜기 깊숙이 끌어안고 있다.
북쪽은 금귀봉과 사이 고속도로 위 살피재 지방도로는 1919년 3월 22일 '대한독 립만세'를 외치던 가조인들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금귀봉 산록 아래 있는 살피재를 지나는 광주 대구간고속도로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남으로 뻗은 줄기에 호두봉(虎頭峰)이 솟아 그 아래로 남하면 지산리가 안겨 수 기의 고인돌이 산재한다.
박유산은 신라 말 절의를 지킨 박유 처사에서 이름한 산이라 한다. 동국여지승람 과 거창고읍지, 조선환여승람 등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가 국운이 다하여​, 고려가 건국되는시기에 우리 고장 선비 박유(朴儒)선생은 조국인 신라에 대한 충절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여러번 벼슬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신라에 대한 충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태조의 간청은 심해지기 때문에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입산하니, 그 산이 바로 박유산(朴儒山)이였던 것이다. 후인들이 박유(朴儒)선생의 높은 충절을 찬양하여 박유산이라 했다.
그 뒤를이어 고려말 판도판서 전충수가 은거했고, 단종 충신 이고은이 은거했으며, 충신 이시익이 또한 박유산하 동례로 은거했으며, 공신 오세창이 또한 박유산 아래 안금에 은거해서 살았다.

3.동례촌 유래
동례촌은 기묘사화때에 신윤지가 사직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예 를 숭상하므로 예곡(禮谷) 또는 예동(禮洞)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東儒谷)이라고도 한다.
속칭 학당동(學堂洞)과 사량동(士良洞)도 있었다.
학당동(學堂洞)은 조선 인조 때 과거급제한 승문원박사 벽진이씨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강학한 학당이 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되었다.

사량동(士良洞)의전설
동례 북서쪽에 200m 지점에 학당동(學堂洞)이란 큰 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평 온하게 잘 살고 있는데 20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하여 학당 전 마 을이 잿더미로 변하였고 불이나기 전날 쥐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넘어 이곳으 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옛말에 큰 재해가 일어나기 전 개미, 쥐 등 곤충 짐승들이 이 사를 간다는 말처럼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상하게 생각 하였는데 쥐들이 이사한 이곳에 마을 터를 잡아 살게 되었는데 황씨들이 마을을 열었 다고 전한다.
<약새미 전설>
가운데골 골짜기에 약새미가 있었는데 피부병 환자가 세수를 하고 나았다고 한다. 그 후 물이 적어졌으며 오래전 상수도원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물길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물이 없어졌다고 한다.
사량동은 어진 선비가 살았다고 하며 처음 엔 천동(泉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벽진이씨 평정공후 증손 20대 감정공 오담 이건선조님(1502~1589)께서 거찰 개화리에 입향하셨고, 오담공 3남인 21대 통덕량 난서공 (1537~1592)께서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동례촌으로 입향하셨다.
현재 34대까지 예를숭상하고 절의를 지키면서 500여년을 살고있다.

조선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한 승문원박사 벽진이씨 23대 승지공 이창일(李昌一)공께서 강학한 학당을 지어 학문을 강학했으며,

26대 유산 정매공 ( 1701~1761) 께서는 노년에는 동례촌의 박유산 끝자락에 유산재실(유산정열 현판이 전하고있음)을 짓고 예를 숭상하고 선대의 높으신 충절을 기르며, 조선후기 학자로서 학문에 열중해서 유산집 문헌을 남겨져있다
당시 유산재실이 멸실된후에 그장소에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난서공의 재실인 영모재가 건립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있다 라고 거창군지에 기록되어있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동례촌은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서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원 동례리 라 하며 북으로는 새앙골, 남으로는 중마.평지마,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동구 밖 북쪽으로는 약15미터 높이 언덕 과 그 위에는 정자가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 와 정자에는 벽리 27대 이가신 선조가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 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삼수정 맞은편 남쪽으로 도랑을 건너
50미터 쯤에는 21대 통덕량 이난서 선조를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 연유인즉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지금은 집은 옮겨서 없어지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어 마을앞을 지나 흐르는 강물과 멀리는 가조면 소재지 와 더 멀리 동쪽으로는 고견사와 아래쪽 미녀봉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동네 마을과 박유산을 뒤로 하고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선조는 합천숭산 200미터 높이 약산에 있다.
남으로 산등성이 내려져 오는데 9부능선에 저멀리 숭산.가야의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잠들어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강이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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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하는마음 산사를찿아서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런 자연 순환의 진행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 갖는가. 그냥 바람처럼
스쳐가는 자연현상인가.
내가 살다 가면 자연에 무슨 영향을 주는가.
왜 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릴때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학교, 좋은직장 들어 가는것.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

마음을비우다
청도 운문사 북대암 법춘스님
구미에서 2시간거리
철야기도.
새벽 동녁에 날이밝아오는 세상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무었이고 어떠게살아가야하는가.
고뇌와번뇌
마음을비우자.
있는그대로받아들이자.

청암사 범화경 철야독경..철야기도
새벽이 따뜻한 죽 간식먹던기억
학장스님지형스님.주지스님 상덕스님
계곡에서 텐트야영..홍기한
여름밤 깊은계곡에서 시원하게 등욕하던일
상덕스님과 재미있게 탁구치던일
거사방에서 잠자리
성원이방학 불교학교
어릴때 반야심경 완독으로 칭찬받던일
중학생때 봉사활동할때

선산 도리사 법등스님
구미에서 가까워 휴일이면 자주가곤했다.
부처님오신날 부인이 꽃봉양

금오산 약사암.
구미시내 서쪽으로 900미터 정도의 우뚝솟은 도립공원인 금오산이있다. 이곳 9부능선에 약사암 암자가있다.
집에서 가까워서 여가생활겸 자주 올랐다.
화시에서 마음고생할때마다 산에올라 약사암에가서
절을 하곤했다.

청도보현사..장한스님
3000배 철야기도
부처님 오신날 부인이 꽃봉양
거사방에서 잠자고
가을에 감따던생각
성원이 탄생과 관련 감사마음.

국민대 청학사 장적스님
스님의 무소유 마음
진정한 불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접견했다.
접견시간을 갖고 진정한 나에대한 설문답
내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것은 애착때문이다.
애착을 내려놓으면 자연이 마음에 욕심과 근심을 줄일수있다는 말씀.

고창 선운사 내원궁
직장생활을 26년만 퇴직을하고 다음날
마음이 무거울때 집사람과 선운사 내원궁에서
6일간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 정리하고
앞으로 어떠게 살것인가에 대해 계획해보는 좋은시간이되었다.
세벽 에 일어나기도하고. 저녁에 늦게까지 기도함으로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동안 직장이나 사회에서 관계했던 지난과거를 회상해보고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내스스로
마을내려 놓는 회계의 기도를 열심했다.
그리고 현재 여기있는 내가 무엇이고 어떤존재인를 재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것인가에 대한 구상하는 좋은시간을 가졌다. 6일간 산중기도 기간을 끝내고 암자를 나설때는 무거웠던 마을을 많이 내려놓아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휠신 가벼워서 즐겁고 안정된 마을으로
돌아오게되었다.
15년이 지남 이시간에 생각해보면 계획대로 전부된것은 아니지만 무난하게 잘 생활해온것에 감사의 마음을 갖게한다.


태백 정암사 1박2일에 야간기도에 참석하기위해
정암사에갔다. 거리가멀어서 저녁늦게 도착했다.
저녁공양을 하고 밥기도예참석해서
그동안 생활에서 싸였던 업보를 회계하고 마음을 내려놓는기도를했다.
새벽예불을 참석하고 태백산맥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에나섰다.

조계사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과정
마음의정리




해인사.벽련암
8만대장경탑돌이.사리친견


제기동 법화정사 도림스님.
법화경 책선물....덕명 법명받음

김천직지사 중암

충주 청평사 1박2일 새벽정근

한산도 야간선상에서 방생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동화사 갓바위대학기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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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에서 부친과 제향하다4

승지공파 34세손
덕명 동석천 이선동

이총언이 61세 때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올랐고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벽진으로 하였다.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따라 삼국을 정복,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등 초기부터 명문거족으로 번성한 벽진이씨는 후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이회(李會), 이실(李實), 이극송(李克松), 이옹(李雍)등을 꼽는데 이중 이극송은 고려 고종23년 명경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청렴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의 벼슬에 올라 "맑고 깨끗하여 아무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 하여 고종이 친히 영옥(永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특히 시조의 10세손 이옹의 아들 4 형제중 장남 이견간(李堅幹)은 고려 충열, 충선, 충숙왕등 3왕대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이맹전(李孟專) 들어 이씨가문의 충의와 절개의 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사람이다. 세종때 친시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등에 오른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꾀하는데 분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며 초야에 묻혔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때 대사성에 이른 이철균(李鐵均), 병자호란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상길(李尙吉)은 높은학문과 충의의 인물로 이씨가문을 빛냈다.
또한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중종때 대사헌, 병조판서를 지낸 이장곤(李長坤), 조선말기의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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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시조공 이후에 유명한 후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를 기르기 위해서 경북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경수당(敬收堂)에 시조공 부터10선조의 위패를 보시고 매년 10월 3일 제향을 한다.

예전에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내에 있는 반도체회사에 근무할 때에 매년 늦가을이 되면 시조공 추계 시향을 하는데 여러번 참석했다.
특히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전날 구미에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같이 성주군 벽진면 경수당으로 가서 시제에 참석을 하곤 했다.
시제에는 서울 부산 대구등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오신다.
대청마루에서 제주 및 제관들이 모여서
홀기,제향순서를 서필하고,
초헌관 중헌관 아헌관을 정했다.
각 신위마다 차례상이 준비되면 집사자는 홀기에 있는 진행순서 대로 제향을 진행한다
추향 제례에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는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큰소리로 제관 분들께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무슨 역활 인지를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오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사를 지내는동안 밖에서는 제관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라 바쁘시다.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장작을 피워 국을 끌이곤했다.
늦가을이라 쌀쌀하기때문에 제관에게
따뜻한 국밥을 나누어 주었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난다.
최근에는 음식준비일 번거로워서 도시락을 제공해 주어 아쉬움있었다

시제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 어른분들을 소개해주시고 인사를 시켜주시며 자랑스러워하시는 기억이 많이 난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심어져 있는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식제 하셨다고 말씀 하시며 나무를 어루만지셨다.
가끔은 처음 오시는 일가분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또 나에게도 소개시켜주시고 느티나무 나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7대조이신
이 가신 선조님이 호가 삼수정 인데 우리 동네의 동구밖 언덕에 느티나무 3그루에 심어서 전해 내려 오고 있어
이를기르기 위해 호를 삼수정이라 했다고 한다.
부친께서도 이런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경수당에는 우리 직계 가문의 귀중한 보물의 의미가 있다.
29대 일하정 이학준 선조께서 1864년에 경수당기를 작성해서 널리알리고 본인의 일하정 문집에 남겨 벽진이씨 시조공 과 경수당의 높은 존경심을 기리고 있다.

또한 중계조인 17대조인 평정공 청백리 이약동의 노촌 실기 문집 간행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일하정 호는 직장공 27대 거유이시고, 애국지사인 화서 이항로 선생께서 이학준 문집의 학문과 덕을 높이 평가하셔 직접 친필로 서해주 셨다.
친필 현판은 경기도 양평 서종면 소재 화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고, 일 하정기를 집필해주셔서 그 내용이
일하정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화서 선생께서는 일하정 이학준의 경수당기 집필 1년뒤인 1865년에
시조 벽진장군 사실기를 집필하시어
그 내용이 대동보에 수록되어 후손들에게 시조공에 대한 존경심과 굳건한 믿음을 심어주고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당대 주자학의 대가이시며 독립운동 애국지사이시다.
평생에 학문을 가르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일생을 보내신 분이다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학문도 높아 연원 록에 의하면 11000명의 문하생을 두고 있다.
벽진 일가로서의 문하생은 일하정 이학준이 기록되어있다

이학준의 일하정집 과 이항로 화서문집에 두 분간에 오고 간서 신이
다수가 수록되어있어 두텁고 애정 어린 일가 인연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연유인지 몰라도 시조공,선조님 및 경수당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찿게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떠든 지금의 나를 있게해주신 선조님들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우리모두 훌륭한 조싱의 얼을 되살려
가꾸고 다듬어서 후손들에게 귀감이되어
우리 벽리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덕명 동석천 이선동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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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500년 머릿말 5 / 고향 안식처 동례 가조 거창

 

작성자:이선동 덕명 동석천(34세손)일하정
작성시간:2022.12.25 조회수:2
댓글0
우리가족은 벽진이씨 이총언을 시조로
대장군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이다.
33세손 동강 이창기 와 흥해최씨사이에
4남1녀가 있다,
1남은 송월 이선숙이고, 2남은 덕명 동석천 이선동, 3남은 구야 이선수,4남은 구야 이선규 이고, 1녀 네째는 선자이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되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나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명명하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가조천의 강이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일반적 내용을 정리해보면
동례리소개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10개 법정리 중 한 지역이다. 동례리(東禮里)에는 안금리, 중평리, 동례리 등 3개 행정리가 있고, 행정리 안금리에 속하는 안금 마을, 행정리 중평리에 속하는 중마촌 마을, 평촌 마을, 행정리 동례리에 속하는 동례 마을, 사양동 마을 등 4개 자연 마을이 있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신윤지가 벼슬을 버리고 이 지역에 은거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 하여 예곡 또는 예동으로 불렸으며, 박유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동유골(東儒谷), 동례라고 했다. 동례 마을의 지명을 바탕으로 ‘동례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안금(安琴) 마을은 지형이 거문고 같아서 어루만질 안(按) 자와 거문고 금(琴) 자를 써서 ‘안금’이라 하다가, 이후 편안한 안(安) 자로 바뀌었다. 안금과 동례의 가운데 있는 마을인 중마촌 마을과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평촌 마을을 합하여 중평리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하가남면(下加南面)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하가남면이 가서면에 통합되고 이후 1928년 가서면이 가동면과 통합되어 가조면이 되면서 오늘날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가 되었다.

안금 마을은 해주 오씨가 처음 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환경
동례리는 가조면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발 고도 712m의 박유산 자락이 남북으로 크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산지 지형이다. 따라서 지역의 동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가천천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지 발달이 미약하다. 내륙 산간 지역으로 일교차가 심하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현황
동례리의 인구는 2016년 4월 말 현재 196세대 398명[남자 193명, 여자 205명]으로, 가조면 전체 인구 4,010명의 약 10%에 해당한다. 서쪽의 남하면 둔마리와 동쪽의 가조면 대초리에 걸쳐 동례리의 북쪽 지역에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지나간다.

참고문헌
『(문답식)거창 역사』(거창 문화원, 1999)
박종섭, 『서부 경남의 전설』1-거창 편(문창사, 2013)
내부 자료(거창군 가조면사무소)
거창군 주민 등록 인구 현황(2016년 4월 말)
거창군청(http://www.geochang.go.kr

박유산
경상남도 거창군의 가조면 동례리와 남하면 지산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12m이다.

명칭 유래
박유산 명칭 유래는 『여지도서(輿地圖書)』[거창]에 "박유산(朴儒山)은 가조현 남쪽 5리에 있다. 금귀산 남쪽 산기슭이다. 신라 처사 박유가 세상을 피해 이곳에 살았다. [중략]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박유산’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박유가 살았던 것에서 산 지명이 유래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창군사』에 의하면 박유산은 화룡산(華龍山) 또는 화룡산(火龍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상 가조 분지의 남쪽에 자리해 ‘불의 산’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자연환경
박유산 북쪽으로는 보해산과 금귀산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박유산 산기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크고 작은 소류지들을 만들고 서쪽으로 지산천과 대곡천을 이루고 있다.

현황
박유산은 장년 산지의 특색을 띠고 있으며 사면이 비교적 완만하여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북쪽으로 가조면의 산간 분지를 볼 수 있다.



가조면소개
가조면은 거창군의 동부를 이루며 합천군의 서북부와 맞닿고 높은 산줄기에 둘러 쌓인 큰 분지이다. 가소(加召)라는 성읍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시대에는 가소현, 함음현이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가소현, 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시대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조선조 말까지 본면은 4개 면으로 나뉘었는데, 하가남면이 가조면의 동남부에 있어서, 기동리, 대초리, 도곡리, 평지리, 왕대리, 탄동리의 6개의 리를 두었고, 상가남면을 북동부에 두고, 부산리, 장항리, 명지리, 도산서원리의 4개 리가 있었으며, 가서면을 가조면의 서쪽에다 두었는데, 동례리, 원천리, 평지리,안금리, 상현리의 5개 리로 나누었고, 가동면을 본면의 가운데에 두어, 병산리, 창동리, 당산리, 적마리, 수월동리의 5개 리로 나누었다.

1914년 3월 동쪽부분인 상가남면과 가동면을 합하여 가동면으로 서쪽부분인 하가남면과 가서면을 합하여 가서면으로 1928년 4월 다시 가동, 가서면을 합하여 가서면으로, 1928년 4월에 다시 가동, 가서 두면 을 합쳐 가조면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석강리, 기리, 대초리, 동례리, 장기리, 사병리, 마상리, 수월리, 일부리, 도리의 10개의 리로 나뉜다.

 

 

유진 주요 행적과 이력. 어린시절.구미직장생활.해외순방.서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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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李氏
大宗會 文化委員長

가조승지공 종중회 종회장
서울화수회 상임부회장
서울화수회 벽진지 편집위원
서울 산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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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C 종합연구소입사. 연구센타장
상무 전장사업부장. 본부장퇴직
부천 센서 연구소장
중국 금주 하이브론 부사장
헤드헌트 오픈서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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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순방(사업관련해서 해외 순방)
미국지역
보스톤. 이온임플란트 설비구매를 위해 보스톤지역 이튼회사방문을 했고,저녁식사에 랍스타 메뉴가 일품이 었다,
LA.웨스트 세미콘쇼에 4번 참석을 했는데, 관람후 이튼사의 저녁에 디너 선상파티의 밤풍경이 장관이었다.
한번은 세미콘 전시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느낄 정도로 고생한 기억이있다.
디즈니렌드..황임성.이용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모터쇼에는 3번참석했는데,지엠본사,포드차박물관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빌려 국경을넘어 이웃 케나다 지역으로 들어가서 나이야가라 폭포를 2번 이나 구경했다.
폭포 동굴로 들어가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풍경과 무지개와 물소리는 정말 멋있는 장면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금문교 다리를 걸어서 건너던기억, 다리건너 왼쪽동산에 올라 태평양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세상이 넓다는것을 인식하기도했고, 반도체 물리책을 출판한 버클리대학을 관람하고, 렌트카를 타고, 101하이웨이로 LA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지나긴 시간의 운전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LA의 바다항구 피어스에서 바다동물을 구경도 할만했다.

조지아공과 대학을방문해서 패케이징관련 교수님를 만나 기술협의를 하고 학교투어와 코카콜라 박물관,ㅍ스톤마운트파크 관람이 기억에남는다.

필라델피아의 자동차경기장에서 레이서카 탑승이 기억에남고,시청청사관람했다.

필라델피아.델코레미,WTI차량용 반도체 마케팅을 위해 업체방문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이끼낀 큰 고목 나무가 기억난다.
디즈니랜드 관광도 재미있었다.
시에틀공항,덴버공항을 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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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역
시안의 당관계자 만남, 전기연구소에 위탁과제 점검을 위한 업체방문,
시에서 배려해준 관용차를 타고 다닌기억, 병마용, 비림 즉 비석의숲을 감명깊게 관람했다.
호텔생활과 저녁 파티를 즐겁게하고 친구맺은 가정집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심양에가서 골프치고 회식,밤놀이.
내몽고 황산
금요일 밤열차로 내몽고의 황산에도착해서 환단고기 옛유적과 역사박물관관람.
밤열차를 타고 태산에가서 천하제일봉과 곡부의 공자묘 관람
금주에서 전장부품관련 생산지도로
9개월간 생활했다.
산해관의 만리장성 시작점,제일문.
하얼빈공대를 방문해서 업무협의.
러시아거리위 먹자거리구경
하얼빈간의 겨울 얼음공원
태양도를가다.
청진 안중근 폭파장소확인
만주국 박물관관람
상해 와이탄에서,밤배야경구경.
항주 서호의 뱃놀이.비단가게거리
서주.서주정류기. 굳닥 반도체공장방문. 태호 호수의 둘레길구경.
단둥의북한철교
대련의 동해공원,전적지
위해. 바닷가구경하다.업체방문품보
형주 유비의 묘소
삼고초려장소
무한공원앞에 황소 기념물
장사지역 기차연구소방문
상판 전장 부품협의
장사전기연구소기술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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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
희메지 기술연수.
일본계신 아저씨께서 10만엔을 보내주셔서 부친에게 귀한 모자를 사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셨다.
시즈오카의 온천욕, 후지산 둘레길 탐방.고베,나고야,오오사카관광
동경화학.
오카모드 웨이프회사.
도시바세라믹
일본교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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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지역
드골공항오후3시도착..렌트카로 르특기 발레오업체로 이동,
2시간정도거리를 길을잘못들어 밤12시경 호텔도착...시골지역에는 저녁8시이후는 인적이 드물어찿아가는데고생많이했던기억이 추억으로남는다.
영국해협 해저터널입구
에펠탑위로올라가서 4방을 구경,
목마르트언덕, 르브르박물관.
달팽이요리,
영국..,시티관광버스를타고 다니면서
버버리매장,국회의사당관람및 유람
독일 보쉬업체방문 호프집만찬.
필리핀은 세라믹공장장시절관리차,
수빅만 미군기지,골프,카지노구경
태국은 반도체 본부장시절 치앙마이 반도체 공장관리차
홍콩..오션파크여행
싱가폴20년근무기념여행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숙박.나들이.
인도네시아업체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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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1954년6월14일
주소;서울시 구로구구로1동 1058번지 구로우성아파트 
E- Mail; lsdsemi@naver.com
학력사항
1973년;거창종합고등학교 졸업
1980년;부산동아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사졸업
1990년;부산동아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사졸업
1993년;부산동아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박사과정수료
회사경력
KEC(주) 26년근무 1981년종합연구소입사;
반도체설계.연구개발.제조기술업무15년
반도체소자(DIODE,TRANSISTOR,집적소자)설계및 연구개발.
반도체공정(WAFER.PHOTO.METAL.PACKAGE)연구개발.
센서소자 설계및연구개발
반도체연구센터장
반도체조립공장장 2년
자동차용 반도체사업 사업부장 8년(상무).
자동차용ALTERNATOR DIOED. REGIC MODULE, SURGE ABSORB DIODE. PRESSURE SENSOR소자개발, MARKETING, 사업추진.
2006년1월-8월;품질보증실장(상무) 재직및 퇴직.
2007년1월 그린센서(주) 연구소장
정보통신부 국책과제
유비퀘터스용 CMOS 기반 고압압력센서 과제책임자 수행

교육및기술연수
1983년3월;일본 TOSHIBA 반도체기술연수(1개월)
1984년;전자 통신 연구소와 2년간 반도체 국책과제 참여.
1987년;KAIST위탁개발수행(6개월) SUPERBRIGHT BLUE LED
2003년;전경연 국제경영원교육(3개월) TECHNO CEO과정
서울대 MEMS연구소 장비선정 심의회원 및산업기술평가원 국책과제
기술자격
1979년11월;전자기사1급.한국기술 검정공단.
무선설비기능가3급
업무경험분야
-Semiconductot Parts,
R&D. Biz Marketing/Plan.
Device Design, wafer fabrication,
assembly process Engineering,
-Diode, Discrete&IC Chip &Package(CSP, MODULE)
-Semiconductor for automobiles
(DIODE, MR SAD, REG IC MODULE)
-Sensor(MEMS)Device
(PRESSURE, FLOW, USN, ROBOT, AUTOMOBILE)
-IPM ,TRIAC, PW LED ,OEM,SCT Biz
한국전자근무직급년수
1981년5/6일입사...2007년9월퇴사...26년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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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3년..3개월교육.물리전자.까뮈.Ic설계
경북대공정연구.서울대설계교육
주임연구원2년..S1575.To92L.일본TSB3개월sw소자
한국전자통신6 ETRI6개월파견..PSA. NSA
과장대리.(주임연구원)1년
선임연구원1년..화합물소자.PW소자.압력센서개발
연구1과장1년...연구소8년
제조기술1과장2년..Fab
제조기술부장대행1년..기술Fab1.2. Assy3.4과
제조부장1년 반도체.조립전체
제조1부장1년..sot1234
조립.세라라믹.공장장3년...
조립반도체1년 TO92.L.sot.pw.Ic.....
세라믹2년..공장장
SBU2년..전장..사업부장상무2년..전장..
품질보증본부장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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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생활
마음을비우고.마음을 다스리다.
청도 운문사 북대암에 다니다.
3000배 철야기도..
새벽 동녁에 날이밝아오는 세상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무었이고 어떠게살아가야하는가.
고뇌와번뇌
마음을비우자.
있는그대로받아들이자.
청도보현사에 불적을두다.
3000배 철야기도
성원이 탄생하다.
금오산 약사암에 기도하다.
회사생활의 고뇌와번뇌를 벗어나다.
(약동선조님의탄생 백일기도로 암자)
노조관련 고뇌로 절하던생각
금오산 자주오르다
신입시절 극기훈련 금오산넘다
김천 대덕 청암사에다니다.
범화경독경 철야기도
탁구치고.
계곡에서 목욕하고
학장스님.주지스님과 차마시며 대화하다
성원이 방학때 불교학교
선산 도리사 부처님오신날 법당꽃꽃이 봉사
운문사 내원궁기도하다
회사퇴직후 6일동안 마음정리하기 기도.
회사생활 회생.회개.
앞으로설계
동화사 갓바위대학기원기도
양산통도사
서울생활
국민대 북한산 청학사에다니다.
스님의 철학이좋았다
불법굥부를 많이했다.
인사동 조계사 불교대학 공부하다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과정
마음의정리
태백 정암사 1박2일 새벽정근 다보탑돌이
해인사.벽련암
8만대장경탑돌이.사리친견
제기동 법화정사 도림스님.
법화경 책선물....덕명 법명받음
김천직지사 중암
충주 청평사 1박2일 새벽정근
한산도 야간선상에서 방생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구파발역 삼천사.흥국사.
연신내역 진관사
송추 대성사에서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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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인생길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1038번지
어린시절
재실옆감나무2그루 감따던생각.대나무밭.
모사때 외부손님방문해서 음식준비.
방에부때던생각.집앞언덕에 쇠비름케서
나물밤먹던생각.
집에들어 가는입구 우물가의미나리밭.언덕위 이발소.
발동기 돌아가는소리 오두막초가집.호롱불.배추뿌리먹던시절.
기와집지을때
겨울에 모닥불생각.참외수박밭지키기.
.중마방아간.종실감따던시절.옆집결혼식때감나무떨어짐. 동구밖나무그네놀이
개구리잡아닭모이.
초등학교시절
안양골소먹이고 망태메고풀베고. 작두케고찔래꽃.버들피리.새양골못수영.
물지게지고 물길던생각.
사동지
친구들과 소나무타기.언덕구르기.
사하라태풍에 (사갓쥐고있다가
동네입구 도랑에 넘어짐).
앞냇가에서 멱감고.고기잡고.추어탕먹던기억.
비가많이와 강건너던생각
아카시아씨앗심기.
가북에 나무하기. 소풀뜯기.
사과농원시절
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
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집짓던기억.과수원집.동네창고.
흙벽돌찍기.
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
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 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
마상리 누나 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
석강이모집 석강기호와  놀던시절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방가후 마상리고모집에서 놀던기억
거창고등시절..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대학시절
단축마라톤30위이내
교내.동산에 산책.김을용.김용해.
해운대추억.태종대.광안리.용두산추억.
거제도 텐트여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kec근무시절
회사그기훈련 금오산등반 새벽에동촌도착
연구1과야유회에서 오른발 장단지화상으로밤샘고통
현진욱.유옥희 서무들수고
사내체육대회 반도체제조 펩2 조립3.정비2..
7개과900명데리고 시합
제조1부장시절.Sot과 분임조경연대회 대통령상수상
영덕바닷가 MT시 밤샘놓이 밤에홍삼먹음.
집안행사
아버지60회갑연
형님결혼식
내결혼식
구미 직장시절 가족추억
성원이와둘이 여름휴가 서해안면도. 남해땅끝마을.밤샘비.동해 고성바닷가...좋은추억기억됨
대덕청암사 계곡에서 한여름피서에서폭우만남.
청암사근처 성태경씨와 피서 밤추위로 텐트속불남.
집에서 새벽2시쯤 청송주왕산으로 이동
정서방.큰처남댁함께..술마시고놈.
프레스토 차몰고 처음서울올때 올림픽도로에서 경찰차에스코트기억.
운문산 북대암에서 기도와 새벽해돋이 바라봄.
청암사 절에서 밤샘 범화경독경..
성원이가 좋아했던 청암사스님들
여름학교에서 반야심경 독송해서칭찬받음
청도운문사 철야 3천배
조계사에서 반야심경.천수경교육과정
거제 건영집에서 밤낙시.회
안동 종열 친척집 밤샘 놀던기억
김수철네와 무주구천동 여름휴가.
처우회 정기모임...제주도한라산.울릉도여행.설악산등반  
최태영지점장 가족과 나들이추억
당진.홍성.여주..음성땅구매. 고구마재배.
회사친구(대현.인철)모임추억...선산.
백대현 고양땅에 야체심기
주민센터 웰빙댄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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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금주현지근무.
가족과함께 생활
주말여행...태산.공자묘.홍산.대련.압록강.만주국
인간관계어려움.
스트레스성 건선피부악화로 9개월근무귀국
그린센서 근무.9개월
헤드헌트 오픈서치4년운영. 솔로몬
초등모임
둥국.일본해외여행
고등모임
오남리 1박2일 야유회
2019 10.12일 내여동생 하늘나라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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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노후생활
벽진이씨 종친회
다음카페개설.
유튜브개설
페이스북개설.
단체카톡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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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선조님 재실및 묘사참배.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
경수당및 경수당기 탐구
부항 모원당 (대장군)
감천 하로서원(평정공)
합천 영모재(판서공)
거창 오담재(감천공)
가조 영모제(통덕량) 입향조
성기 고산제(승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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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공 방계
참판공 덕봉서원..유량
창량수/외재공.복재/
서울노원.동천재 충숙공. 강화충렬사.
경기양평 화서선생 기념관. 노산사. 제천 자영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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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곡서원 산화공
군위 모암재
홈실 이언영
창녕 정도공 금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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