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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이창기 전기 와 4형제(송월 선숙,덕명 선동,수야 선수,구야 선규)전체내용배분완료20260608

작성자儒珍 이선동 (평정공계 승지공 34세)|작성시간26.06.07|조회수2 목록 댓글 0

동강 이창기 전기 와 4형제(송월 선숙,덕명 선동,수야 선수,구야 선규)
동강 이창기 전기
동강 이창기공은 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성주벽진이며. 벽진이씨 고려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시조공의 33세손 이다. 지후대장군 성간의 22대손이고,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16대손이고, 거창입향조 오담 이건의 13대손이고,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의 12대손 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유산 이정매공의 7대손이고, 조선후기 유학자 일하정 이학준의 4대손 이시다.
증조부 승주공은 1822년 출생 하시어, 1887년 별세 하셨고, 조부 우화공은 1852년출생 하시어, 1887년별세 하셨고, 부친 우덕공은 1875년 출생해서 1932년에 별세 하셨다.
동강 이창기공은 1918년에 가창 가조 동례 마을에서 탄생하시어 2011년에 별세를하셔 93년수를 하셨다.
산소는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의 우측에, 독새골의 23대 찰방공 이창일 승문원 박사 산소가있는 산등선 아래에 우측의 중간지점으로 남향이다.
배는흥해최씨 최순주 이며, 1932년3월16일 탄생하시어 2021년에 별세하셨다..
산소는 내외쌍분이다. 부는 상세 조는 붕철, 증조 역진 평촌 숙량두 후손이다. 외조는 李佑東 성산인이다.
동례촌은 유와 예와 도를숭상한다는 마을을 뜻하며. 21대조 통덕량 난서공께서 입향하신이래 400여년동안 대대로 선조님께서 삶을 이어고있어 선조님의 얼과 정신이 배어있는곳이다.
 
 동강 창기공은 14살 어린 나이에 부친이 일찍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모친 슬하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한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로 전해져 오고있는, 선조님들의 문헌 자료을 통해서 고조부 및 윗대 선조님중에는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이며, 대대로 벽리의 경종수족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께서도 성년이 되고난 후에는 평생을 벽리종인의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아오셨다.

벽진이씨 시조공관련이나 임진년 경수당 중수추진에 참여하시었고, 그기록이 경수당 중수기에 기록되어있고, 갑자보 대동보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고 대동보에 기록되있다, 벽진이씨의 유명하신 선조님의 기록을 정리한 문헌록 편집에도 참여 하시었다고 문헌록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공과 경수당에 경종수족 정신으로는 예전에 구미에서 근무할 때에 시조공 추계 시향 때면 부친이신 동강 이창께서는 전날 구미에 오셔서 주무시고, 다음날에 같이 성주군 벽진면 경수당으로 가서 시제에 참석을 하곤 했다.
부친께서는 평생을 흰 두루마기인 한복을 입으시고 생활하셨다.
추향에 참석할 때마다 일가 어른 분들을 소개해주시고 인사를 시켜주시고, 훌륭하신 선조님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추향 제례시에는 시조공~10대조를 모시는데 제주는 방 안에서 제를 모시고 나머지 모든 제관은 전부 마당에 열을 지어 서서 참관하시는데,
부친은 제주 옆 문밖에서 큰소리로 제관 분들께 알려주시는 역할을 하시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니 제례시에 마당에 많이 오신 제관 대중에게 제례절차를 알리는 찬창을 하시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동강 이창기)께서는 시조공 벽진장군 유허비각 앞에 느티나무 밑으로 데려가서 본인이 직접 식 제하셨다고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씀을 해주셨다.
가끔은 처음 오시는 일가분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느티나무 나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7대조이신 삼수정 이 가신 선조님이 심으신 우리 동네의
고목 느티나무 3그루에 대한 영감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천 부항면에 대장군공의 모원당 재실이전 건립에도 참여하시고, 김천 양천동에 평정공의 노촌당 서원의 중건에도 참여하시고, 합천 대병에 판서공 재실 및 19대 우우정 후손의 족보 편집에도 참여하셨다.

가문에있어서는 조선후기 유학자이신 26대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집문헌과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집 문헌을 1956년에 편집 편찬하셔서 학문연구기관 및 대학도서관에 기증을 하시어 후학들의 참고자료가 되게하시었다.
유산집 문집의내용으로는 권두에 이의강의 서전이 있고, 권말에 창기의 지문이 있다.
권1은 시140수, 부록에 제인창수운 32수,
권2는 서10편,부록으로 내서첩이라는 제목아래 서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다.
야인행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글중에 민진원에게 보낸 상단암민상국진원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 시사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인의 도로써 시행 하여 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창의격문은 1728년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 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 과 향약절목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 문집은 4권1책이며. 석인본이고. 연세대학교 도서관 및 정부도서관등에 소장되어있다.
내용분류로는,
권1은 시 159수가수록되고,권2에 서37편과 문목있다,
권3에 서 7편, 기 11편, 상량문 2편, 제문 6편있고,
권4에 묘지 7편, 묘갈명 3편, 행장 4편, 사적 2편, 부록으로 기·만사·행장·묘갈명·차운시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홍석주·홍재철·이항로 등에게 보낸 증여시, 김경선·김수근등에게 준 송별시,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 탄적상산성황폐난지·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 등이 있다.
서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은 송내희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상에 상기와 복제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은 이기연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에 대한 기록이다.
일하정 문집 외에도학준공이 사용 하던호패와 직인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하정은 이학준공의 호인데
조선후기 거유 종족 화서 이항로공께서 친히 유산 이정매공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시며, 이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및 두공께서 주고받으신 서신등이 가보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양평 서종면 노문리에 건립된 화서기념관에 보내 전시토록해서 후손들에게 교육자료로 활용토록 추진하셨다.

가조동례마을 입구 좌측에 입형조 통덕량 이난서공의 얼과정신을 기르는 경모재 재실이있다.
그이전에는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재가 이었다고 거창군지에 전해지고있으나, 입향조 선조의 재실로 변경이되었다고, 경모재기에 기록되어있다.
경모재기는 동강 이창기공이 방후손 에게 부탁을 드려 글을 지어 입향조의 통덕량 이난서공의 높은 뜻을 받들었다.

경모재기 내용을보면
가야의 남쪽, 아림거창의 고호의 동쪽에 별다른 하나의 동천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동례고리라 불리우는 우리 벽리의 세거지이다. 재가 있고 그 위로 산을 등진채 물가에 우뚝 솟아 새롭게 중수한 것이 경모재이다. 과거 명종임금 시절에 통덕랑 휘 난서 공께서 자손들을 길이 이어지게 하려는 계책으로 읍치의 북쪽 개화리에서 이 곳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공이 평정공 노촌선생 의 문손 즉 명망있는 손자으로 가정에서 받은 가르침 그대로, 덕을 심고 학업을 쌓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초야에 행적 을 감추고는 성현의 도를 밝혀 강론하였다. 선조의 미덕을 추앙하며 은둔하고도 근심이 없었으니, 참으로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되겠는가. 지금까지 수백년 사이에 고인일사로 세상에 이름이 우 뚝했던 분이 왕왕 계셨으니, 증 승지 휘 무, 동곡 휘 창일, 소리재 휘 정화, 유산 휘 정매공 같은 분들이 있었고, 그 유풍이 지금까지 미쳐 거주하는 종친들 모두가 순순하고 아칙하다. 할아버지의 글은 읽지 않아서는 안 되고, 예양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세습의 유래가 있음을 징험할 수 있다. 마을 뒤에 대대로 선영이 즐비하니, 탕산의 남쪽이 드디어 강여의 영구가 되었다. 경신년1920년 봄 후손 우석, 우덕씨가 제숙하는 장소가 없는 것이 한으로 여겨 여러 종인들과 논의하고 뜻 을 모아, 예전에 유산정숙이 있던 터에 재사 한 채를 지어 “경모”라 편액하였다. 손님이 추모하러 왔으나 재사가 오래되어 물이 새므로, 약재공 주화씨가 족질 우룡, 재종질 우창등 여러 종인들과 함께 거듭 수리하였고, 길이 전하게할 계획으로 소나무와 국화를 심어 마루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며 감흥을 일으킬 수 있게 하였다. 그 조상의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추념하고 가존께서 가업을 창조하시어 후손에게 물려준 본뜻이 간절하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긍구치 못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다가 이제야 비로소 충신효제만이 우리 집안의 내세울 만한 보물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경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 네.”라고 하였고, 진나라 때 송축하기를, “여기서 노래하고 여기서 곡하며 여기에 종족을 모이게 하여 몸을 보존함으로써 선대부를 구천에서 따르리라”고 하였다. 이 일은 존조에서 비롯되어 일가간에 화목하게 하는 일이므 로, 읽고 고무되어 기뻐하며 효도에 힘쓰게 하려는 생각에서 감히 시송을 짓는다. 후손 창기씨와 선균씨가 부탁하고 성기씨는 나를 찾아와 기문을 청하니, 사양치 못하고 일단 그 전말을 쓴다. 운물의 아름다움이나 유람하며 볼 경치 같은 것은 올라서 조망 해보고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임자년 1972년 음력 11월 하순에 방예손 원엽은 삼가 짓고, 성기는 삼가 쓴다. 라고했다.

동례마을 남쪽으로는 산높이 713미터인 박유산이있다.
본래 이름은 화룡산이다. 1970년대까지도 가조지역에 심한 가뭄이들때면, 박유산 정상에서 기우재를 지내는곳으로, 하늘과 연통이되는 신성한 산이라고 생각하고있는 산이다.
필자도 어린시절에 기우제를 지내기위해 이산에 오른적이있다.
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이유는 신라말에 박유가 불사이군의 충절를 지키고자,벼슬을 버리고 은든생활을 해온것에 유래해서 박유산이라고 했다고한다.그 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들어와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전한다.
5대후손이신 이정매공께서도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고, 불사이군의 높은 충절의 깊은의미를 갖는 산으로서 당시 이정매공께서도 학문과 덕망을 지향하는 선비정신을 기르고자 호를 유산으로했다.
거창군지에 의하면 이정매는 노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에 매진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재실은 소멸되고 유산정열의 현판만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예를 숭상하므로 예곡 또는 예동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리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이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서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북에서 남르로 일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동향인 앞으로는 북쪽의 가북에서 남쪽의 지산으로 폭70미터정도의 넒은 가조천의 물이 합천댐으로 흘러감으로서.
가조천 넘어의 동쪽의 넒은 평야인 가조분지의 논밭을 옥토로 만들어 주고 있다..
박유산의 북서,동례마을의 서쪽 전답끝자락에 나지막한 안양산이 자리잡고있다. 이곳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묘소가 정상부에있고, 그아래에 33대까지의 후손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
안양산 끝자락에 학당골이있는데, 학당동은 거창군지에는 조선 인조때 과거에 등제한, 승정원 박사 이창일이 강학한 학당이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승문원박사 이창일공의 교지가 동강 이창기,송월 이선숙님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필자가 어릴적에는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곤 했다. 그동안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하며, 늦은밤에는 야참을 먹었던 기억이나며, 온마을이 잔치를 하는 분위기 였다.
그때는 재실이 우리집 옆마당에 있어서 한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산재실에 사용되었던 유산정숙의 현판과 유산공의 유산문집의 문헌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지었기 때문에,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인 울타리 땅들은 우리집의 토지로 등기가 되어 있다.
영모재 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선조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신라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그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부르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부친이신 33대 동강 이창기공 께서도 삼수정의 영감을 받아 성주군 벽진면에있는 벽진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경수당내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있다.
벽진이씨 28대 삼수정 이가신은 1739년에 태어나고, 1798년에 약추사로서 소수가되어 소청에 나아갔다. 1815년에 별세했다.
자는 성필이고, 호는 삼수정이다.
묘는 안금촌후 신좌이다.
행장및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배는 문화유씨이고, 1737년 9월 1일생이며, 1805년12월3일 별세했다. 묘는 증조고영하 량좌이다.
묘지는 손 학준이 지었다.
부는 영춘,조는 사심,증조는 수 충경공 형두후손이다.
외조는 임동헌 은진인이다.
삼수정의 고목 느티나무는 마을앞에 있는 당산이다.
벽진 27대 이가신이 쌓고 그 의 호를 삼수정이라 하였으며, 세 그루의 괴목이 있었는데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때 조선목으로 베어지고,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마을 신앙 풍속·풍습으로는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삼수정 옆에 있는 300년이 넘는 괴목나무 세 그루와 마을 서편에 있는 소나무였다. 삼수정은 벽진 이가신이 쌓고 그 호를 따서 삼수정이라 했는데, 괴목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목으로 징발되어 베어지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20 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데, 닷새 전에 제관을 선정했는데 선정된 제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함께 정성을 드려야 했으며,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에서 자정이 지나면 목욕재계 했다.
제기는 제관집의 것을 사용했고 제물은 유사가 장에 가서 마련했는데 부정된 것을 보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돼지는 열나흘 날 유사집에서 잡아 위턱을 윗 당산에 쓰고 아래턱은 아랫 당산에서 사용했는데, 제를 지내고 나면 당산나무 앞에 묻었다. 제수는 두 벌을 장만하여 각각 따로 쓰며, 밥은 제관집에서 지어 가지고 가서 올린다. 자정이 지나 제를 올리고 나서 보름날 아침 음복을 하고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윷놀이 등을 했으며 기우제는 박유산 만당에서 했다고 박종섭이 거창군의 마을신앙 도서에 기술하고있다

동강 이창기옹은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선숙은1951년 11월6일생이고,배는 밀양변씨 변필효 1954년생 7월 27일생이고, 부는용국이고, 조는원식이며, 증조는 영근이고, 외조는김섭이고 김녕인 이다. 장남 선숙은 부산 동아대학교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 북부산교육청 교육장 및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에서 거주하고있다. 슬하에 2남 정원,광원이 두었다,
2남 선동은 1954년 6월14일생 이고,배는 인동장씨 장정숙이고, 부는 도안 조는 갑술 이다.
2남 이선동은 부산 동아대학교 학사,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졸업후에 구미에있는 반도체기업에 근무했으나 임원 승진후에는 본사근무를 하게됨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게되었다.
슬하에 1남 이성원, 2녀 이주연 ,이지현을 두었다.
3남 선수는 1956년 11월15일생 이고, 배는 배경전 1959년 6월17일생이고, 부는 만원, 조는 붕기이다.
가조 동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1남 이인원, 1녀 이은정을 두었다.
4남 선규는1965년1월17일생이고, 배는 전주최씨 최지영 19681년 10월17일생 이고, 부는 성림이고, 조는 인준이고 외조는 송대현 은진인이다
이선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복지 요양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을했다.
슬하에 2녀 이소진, 이소연을 두었다.
녀 선자는 1962년1월21일생이고, 부는 하재룡 진양인 공학석사 이다.부는 우성이다. 슬하에 2남 하종욱, 하선일을 두었다.


우리집은 동례리 1038번지이고, 서쪽으로 통덕량 이난서 재실이 옆에 붙어있다. 재실둘레의 주변에는 작은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집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오른쪽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의 산소가있고, 왼쪽언덕에는 앞쪽에는 오래된 감나무 3그루가 일렬로 서 있고, 뒤로는 대나무가 무성한 밭이다.
가을이되면 감을 따는 일이 재미 있었던 것같다.
감이 많이열리면 가마니로 3가마 정도 수확을 했다. 한광주리정도는 감겁질을 깍아 말리려서 곶감을 만들고, 한바구니는 물을 따뜻하게해서 항아리독에 땡감을 넣어 따뜻한 안방에 두면 감이삭아서 단감이된다. 나머지 많은 감들은 벼속에 파뭍어두고 겨울내내 홍시를 골라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앞마당 넘어 비스듬이 굽어진 3미터 언덕이 있었는데, 양지바른곳은 옷나무 밭이있고, 햇빛이 들지않는 음지에는 쇠비름나물이 자라고있어, 뜯어다가 버리밥을 비벼먹었던 생각이난다.
집앞 산소를 돌아서 언덕끝에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크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물이 흘러 나오는 고량에는 미나리가 많이 자라고있어 매년 봄에는 새싹 미나리를 잘라서 밥에 비벼먹던 기억이 난다.
집 맞은편 동구밖 마을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기울어진 큰줄기 가지에 밧줄을 매어, 그네를 만들어서 그네뛰기 시합을 하곤 했다.

기와집을 새로짓다.
재실옆 우리집은 작은 초가집었는데,
부친이 종중일에 즁추적인 역활을 하시는관계로 종인또는 방문객이 많아서 감당을 할수가없었다.
그래서 1317번지인 동네 가운데 부촌지역에 200여평을 마련해서 기와집을 새로지었다.
집모양은 디귿자 모양이다. 본채는 4칸집이고,정남을 향해서 박유산을 정면읋 바라보고, 왼쪽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랑채가있고 오른쪽에는 창고, 곡간, 장독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다. 사랑채에는 유산정숙의 이정매공의 현판이 걸려있고, 부친께서 생활하시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도 계시고 해서 우리집에는 일년내내 손님들이 들락날낙했다.
어머니는 매일 음식준비에 바빠서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아도와 주셨다. 어머니는 시골잔치 음식준비의 달인이 되어서, 동네 길흉사 잔치에 가서 음식만드는데 진두지휘를했다.

가소천에서 천엽으로 추어탕먹다
동네마을에세 50미터쯤 나가면 가조에서 제일큰 강폭이 70여미터되는 가소천이있다.
어린시절에는 다리가 없어서 여름 장마철 에는 항상 신발벗고, 바지 올리고 책보따리 머리에 이고 조심 스럽게 건너가곤했다. 초등1년때는 매우 무서웠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튼튼한 다리도있고, 북쪽 가북에 댐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기위해, 수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향상 일정한 물이 흘러간다.
어린시절에는 비가올때면 물이 많았으나. 가뭄이 들때면 무릅까지 물이내려간다. 날씨가 개인날엔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고기를 잡고, 아주머니들은 야채와 양념, 국수를 주빈해서 개울가에 솥을걸어놓고 추어탕을 끌어서 맛있게먹던 생각이 난다.

논에서 보리타작.
가소천 건너에 우리논이 있는데, 가을에 보리를심어 겨울내 햑교다니면서, 보리가 자라는걸 바라보며 다녔다.보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다익어서 누렇게되면, 보리를베어 말린후에 타작을 해야하는데.
말린보리를 다발로 묽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도리께로 할때도있고, 논바닥에서 할때도 많았다.
논한가운대쯤에 보리를 걷어내고 베고남은 보리대를 뿌리채 뽐아내고 보리타자 마당을 만들고 물뿌리고 발로 단단하게 밞는다.
땅이 마를때쯤에 주위에 보리대를 모아놓고 도리께로 타작을 하는데, 논면적이 크면밤늦게 까지 여러판을 한다.12시쯤되면 세벽이슬이 비치면 녹아서 더이상 타작을 할수가없어 보리알 선별 작업을한다.
채에담아서 어께높이 만큼올려서 흔들며 흘러내리면 보리알은 바로밑에싸이고 찌끄기는 가벼서 멀리날아간다. 새벽2시정도되면
대충일이 마무리된다. 늦은밤이라 잠이쏟아져 집에가지안고, 보리를 털고난 뿍데기 무덤속에 들어가서 잠을청한다.온몸에 보리수염의 가시가 묻어있어 약간따가운 느낌이든다.조그만 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별들이 서로 자랑 하듯이 반짝 반짝거린다. 정말 밤하늘이 아릅답구나 하는 순간에 깊은 잠이들어 피곤한몸을 꿈나라로 보낸다. 아침동이트면 일어나서 식사를하고 이슬이 사라지고나면 또 보리타작을 했다. 논이 여러군데있어 옮겨가면서 몇날을 한걸로 기억이 된다. 이러한고된 생활이 훗날 사회에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데 좋은 인생의 지침서가 된걸로 생각이 된다.

수월리 불당의 소풍나들이.
초등학교시절 봄,가을로 소풍나들이를 하는데 수월리 동네를 지나 좀더들어가면 불당이라는 넓은 평지가나온다. 아마도 예전엔 불교와 관련되 지역인가보다 느낀다.
북쪽에는 천미터넘는 우두산과 의상봉이있고, 8부능선에는 천년의 고찰 고견사가 있어 그정기를 아래로 내려준다.
소풍날에는 특별히 쌀밥과 계란 후라이, 멸치조림등 맛있는 도시락을 가방에메고, 학교에 가서 학년인원이 2백여명되는데 단체로 걸어서 불당에 도착하면 점심 시간이 되어
친구들과 오랜만의 특식 만찬을 하고나면.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서 장기자랑 하는동안에, 선생님들이 바위나 나무가지,덤불에 보물이름이 적힌쪽지를 접어서 눈에 띄지않는 곳에 숨겨둔다, 장기자랑이 끝나면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보물을 찿는다.
보물은 연필,공책,필통등 학용품이다.
비싼 필통,크레파스를 찿은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오래간많에 야유회를 가서 맛있는 최고의 도시락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던 생각이난다.
중학교때는 좀더 높고 거리가먼 고견사로 소풍나들이를 해서 천년이 넘는 고견사의 역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마을뒷동산 사동지추억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동례마을 뒤동산 언덕위 수백년노송
어릴적 동산에올라 고향의 봄노래하고 친구들과 언덕 잔디밭에 몸 구르기 하면 즐겁게놀던시절..
백년 노송 나무에 올라가서 가조의 푸른들판을 바라보고 풍년을 기원하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옛시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솔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푸른하늘의 뭉게구름 수백년흘러 지나 갔건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재자리에 꿋꿋이서서 솔향기 쁨으면서 선비의 고고한 자태로 나를 반겨주는구나....
4계절 자연의 만물이 흐르고..
바람도..구름도..흘러가갔건만..
너만 홀로서서 독야 청청하는구나.
사송정(四松亭)/가조 동례리 촌후 사동지마을 뒤에 있다. 선비 신후명(愼後明)·이명(而明) 형제가 네그 루 소나무를 심어 대를 쌓고 노닐던 곳으로 후손들이 가꾸고 기리는 곳이다.
현재는 한그루가 남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2000년 3월 거창군 보호수로 지정 되었고 수령은 약 380여 년으로 추정되며 수고 11m, 나무둘레 3.9m이다. 곽가은이 지은 사송정기(四松亭記), 송정훈이 전한다.

동네에서 서쪽 논밭끝자락에 안양산이있다. 산에는 벽진이씨 가조입향조 시조공 산소가있고 그아래로 후손들이 고이잠들고있다.
학교를하고 방과후에는 집에와서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오후종일 산풀을뜯긴다.
마을에 집집마다 소가있어 전체 67십마리가있다. 산에가서 고삐를 매고 방목을 하면 소떼들중에 대장이있어 이산 저산을 돌며 풀을 즐긴다.
풀을 뜯는동안에 아이들은 꼴망테에 꼴을베기도 하고, 도라지나 잔듸를 케기도하고, 겨울에가서 가재잡기도 한다. 풀베어주기 게임도한다. 낫을 멀리땅에 던져 꼿히면 진사람이 풀을 베어주는게임이다. 오후에 해가넘어갈즈음에 대장소는 동네소를 이끌고 아래장소에 모이는데,간혹 대장소를 따르지않는 소는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찿아다니는데, 소도 밤에는 무서워하는지 꼭 산소옆에 안자있는다.

박유산밑 과수농원.
박유산 동쪽 산능선 끝자락에 3정보땅에 300그루의 과수농원이 있었다. 집에서 1500미터쯤 떨어져 있다. 거리가 멀어서 황토 벽돌집을 지어서 여름에는 자기도하고 들일 올때 사용하기도했다.
부친 말씀에는 방아간을 처분해서 샀다고한다. 산밑이라 토질이 좋아서 사과나무가 아주 튼튼했다. 년령이 20년이 넘어서 사과가 20상자이상 수확했다.국광,홍옥,인도,스타킹 수종으로 이루져 있다,
초봄에 나무가 튼튼하라고 유황약을 치는것 부터해서 시작해서, 15일마다 약을 쳐야하는 매우 힘이 들었다.
또한가지치기를 해주어야 과일이 크게열린다.
일요일은 과수원에와서 공부도 하고,소풀도 베고,사과도 지키고했다.
점심때가 되면 집이 멀어 가기가 싫어서, 하루종일 사과만먹었다.
가끔은 밤에 자기도 했다.
과수원에는 불독개, 세퍼트의 큰개를 키우기 때문이 안전했다.
사과수확기에는 사과를 화물차에 가득싣고,주로 광주 시장에 경매를 넘기는데, 중간상인이 물건을 팔고 돈을 주지않아 중학생이 었던 내가 직접 따라 가기도 했다. 하루종일 사과를 따서 싣고,늦은 저녁을 먹고 밤10시경 출발해서 천천히 가면 새벽3시에 경매장에 도착해서 사과를내리면 4시쯤 경매를 하고 돈을 받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난다.

시골방아간
우리아래동네의 중마 방아간을 가지고 있었다.물레방아오 발동기가 있어서, 물많은 여름에는 물레방아를 돌리고, 건기인 겨울에는 발동기를 사용했다.
방아간운영은 거창 양평의 가느들 아저씨가 일해주었다.
벼을 가지고와서 쌀로 찌으면 2되정도 삮을 받았던것같다.
가래떡도 내리고, 고추도 갈고했다.
명절때면 가레떡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난다. 방아간을 하고난 후 부터는 힌살밥을 자주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부리 외가집추억
외가집은 우리집 반대쪽인 일부리 이다. 어머니는 친정에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명절이나 제사날에는 음식과 과일을 보내고했다. 외할머니가 계시기도했지만, 돌아 가시고도 갖다주시라고,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외할머니께서는 자주우리집에 와서 오래동안 머물고하셨다. 점년이누나, 금연이도 우리집에 몇달간 같이 지내기도했다.
같이 사동지 가서놀기도하고, 땅따먹기, 공기놀이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재실에 가서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과수원에 가서 사과도 따먹기도했다.

할머니별세
우리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상세한 기억은 잘나지않고 씩씩한 할머니라고 생각이되어진다.
모든일은 할머니가 관여하는걸로 느껴진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2대독자라서 많이 사랑하고 일도많이 시키지 않았던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호통잘치는 호랑이 할머니라고했다.
우린 아들이 4형제인데 내가둘째인데 딸을 보고싶었던지 내남동생에게는 치마를 입혀업고 다녀던 기억이난다. 가끔은 재실 처마밑에 가서 박쥐똥을 주워먹이 기도했다. 이유는 잘모르겠다. 눈밝으라고했는지,여하튼 몸에좋다고 많이 주워서 먹였다.초등학교 저학년때 이라서 거억은은 잘나지 않지만, 가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해가질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이왔다. 90이넘어서 돌아가셔서 장수를 하셨다. 문상을 치르는데 아마도 보름정도의 긴날자에 걸쳐 치르는것 같았다. 산소는 안양골 선산에 모셨다. 사랑채에 빈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상복을 입으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곡을하고 절을하셔다.
3년 동안 급한일이 없으면 출타하지않고 상복을 입고 계셨다. 외부에서 문상을 오시거나 손님이 찿아와도 술을 따르고 재례를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찍돌아가셨다. 아마도 10살이전에 돌아가신걸로 기억이된다. 할머니가 애정과 사랑으로 뒷바라지를 다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적으로 힘들었을것으로 생각이든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자라서 인지,펴앵을 5남매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지않았고, 욕소리 한번 하지않으시고, 손대말을 자주 사용해 주셨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이된다. 아버지도 할머니피를 이어받아 93세 까지 사시다가 별세를했다.


마상리 고모집추억
가조면 소재지 의 중학교 뒤편에 막내고모님이 살고있다.
고모부는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 고모부네 식구랑 같이 생활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는 고모네집에가서 세참으로 준비해둔 고구마, 감자,과일등을 먹고해다. 고모는 그집에 제일 어른이라 모든살림 살이를 관장하고 있었고, 작은 고모님이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작은 고모님은 매우 인자했다. 향상 우리를 반겨주셨고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했다.
기수형과 정희, 정화,문희 식구들과도 즐겁게 보낸기억이난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거창으로 고등학교를 하고 부산에서 대학등 외지 생활을 계속되어서 그이후로는 많은 추억을 갖지못하고, 명절이나 휴가때쯤 고향갈때에 찿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고모님 나이 99세때 봄에 시골에가서 만나뵈었는데,내년 100세가 되면 가조면에서 장수할머니로 잔치를 해주신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는데, 해를 다채우지 못하고 별세를 하셨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동안 배려해주신 은혜을 기억하고 좋은세상에 가셔서 편한한 생활을 하시라고 기도하고 장례절차 마무리 짓고 올라왔다.

마상리 누나집추억
고모님옆집 근처에는 내가 어릴때 호적상 양자로 보내졌던 누나가 살고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승문원 박사 이창일 종손이 후손이 없었는데 나를 그집 호적에 올려 대를 있게했다. 호적상으로는 양자가 되었으나, 호적상 양자로 가족이 없고
시집간 누나만 있기때문에 나는 우리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마상리 누나는 내가 대를 이어줄 고마운 동생이라고 항상 친절히 대해주었다, 마상리 고모집에 갈때면 향상 누나집에 들렀다. 자형께서도 매우인자하시며, 친절이 대해주었다. 누나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왔다.
몇번인가 마상리가서 제례를 지냈던 기억이난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집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20년 넘게 부모님모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셔서 내가 양부모 제사를 모셨다.아내가 불교인이라 성의끝 제사를 모셔오고있다.나는 양자를 가서 부모가 먼저돌아간 독자로 되어서 정식군대에 가지않고, 가조면 예비군 중대장 보좌일을 6개월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어릴적에는 양자의 개념을 잘몰랐는데, 점차 성장하면서 속으로는 마음의 고뇌를 겪기도했다.
그래서 절을 좋아하게 된것이아닌가 하는 생각도든다. 오랜 기간동안 사찰에 다니면서 인생이란 무었 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대구감년 누나집추억
아버지 여동생이 3이있었는데 마상리 고모님을 제외한 2분은 일찍돌아가셔 얼굴이 기억나지않고,
딸이 대구에 사는 감년이누나이다.
어릴적에는 가북 용산에 살았는데, 결혼을 하면서 대구로 갔다. 자형은 북한출신이라 집안이 별로없어서 우리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
방학때가 되면 대구에가서 놀기도하고 소애, 무용, 영애,무식가 시골에 내려와서 시골 경험도하고
서로 새로운 환경을 경험을 번갈아 하면서 즐거운생활을 했다.누나는 대구 평리동에 살았는데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향상 웃는얼굴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어서 즐겁게해주셨다. 양가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다들 바쁜생활로 가끔 안부를 물어보고 잘지낸다고 하니, 감사할따름이다.


거창 고모집하숙생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 가조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형님과 3년 차이라서 내가1학년때 형님은 3학년이었다
형님은 서부경남의 명문고인 거창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는 떨어져서 거창종합고등학교 인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이다닐때는 하숙비가 비싸서 1년 남짓 자취생활을 했다. 시내에서도하고 개화리 오담재 재실 관리실 집에서도 했다. 형님이 졸업하고 난후에는 계속 하숙을했는데, 작은집 고모네집과 합천 일가인 그릇집 누나네 집에서 하숙을했다.부모님은 5일장이나 나들이일이 있을때마다 찿아 오곤 했다. 내가 하숙을 하고있어서일까.올때마다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 과일등을 가지고 오셨다. 나한테도 공부열심히 하라고 용돈도 쥐어 주시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 까지는 키가 반에서 3등이내 였는데, 고3이 되는 해에 12센티나 부쩍 자라게되어 보통의 키가되었다. 어릴적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면 못알아볼 정도로 변하게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어릴때기억은 별로나지 않는다. 항상 할머니 옆에서 지내곤 했다. 철이든 중학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에 별로안계셨던 기억이다. 항상 한복 두루마기 옷을 입으시고, 출타 하셨다가 몇일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문중일을 하시느라, 바깥일이 많았던것 같다. 지금생각하면 대동보 만든다고 족보 단수 받는일, 각 문중 재실 짓는다고 헌성금모으는일,
지금도 집에는 각가문에 다소 계보가적인 종이가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후손이나 방손의 각종문헌 문집이 보관되어있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셨는데, 가방에 묘사를 지내고 음북을 받아왔는데 각기다른 모양의 음식을 담은 비닐봉지 여러개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받은지가 오래되어 음식이 상한 봉지도 있었다. 문중의 묘사를 다참석하시느라 기일이 오래걸려 먼저받은 음식이 상한것이다.
어머니는 음식을 골라내서 괜찮은것을 솥에 쪄서 주시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두루마기 한복을 빨고 풀칠을하고 다듬이로두드려 펴고나서 새로운 동전깃을 달아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버지는 향상 소식을 하면서 생활하셨고, 먼길도 걸어다니시거나
대중교통은 완행버스, 옛날 비둘기 야간열차만 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남들과 대화를 할때는 항상 존대말을 사용하셨다. 동네 마을이나 지역에서도 존경을 받고 살았다.
국회위원이나 군수등 부임시에 인사차 방문을 했다.
아버지가 외부일로 바깥에 시간을 보내는관계로 집안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가장 힘든것이 농사일과 재정 운영 이다. 다행이도 4형제라 농사일을 조금씩 도와주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은 일꾼을 들여 일을해야 만했다. 논을 경리 정리한 후에 자갈 줍기,과수원 농약치기, 모심기,등이 힘들 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집안일을 돕지않는다고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본연의 일을 하곤했다. 나는 일이 힘든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했다. 형님은 맏이라 조금은 부담스러워 했다. 자식들 대학 등록금및 학비를 감당하느라 많은 고생을했다. 한번은 긴급자금이 필요해서 달러 이자돈을 빌렸는데, 너무힘이들어서 논을 팔아서 갚았던기억이있다.형님은 명문고 우등생이라 서울대에도 들어 갈수 있는 실력이나, 동생들 학비때문에 빨리 돈벌수있는 2년제 부산 교육 대학에 들어가서, 우등생으로 졸업 해서 당해연도에 교직발령을 받았다.
나도 부산으로 대학을 가서 형님한테 학비를 지원받아 학교를 마쳤다.
내가공부했던 몇년간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부산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접빈객,집안대소사를 많이 치르셔서 마을의 길흉사,일가 집안의 큰잔치에는 참석해서 일처리를 해주곤했다.먼저 아버지가 93세에 별세를 했고 어머니도 10년쯤뒤에 92세로 별세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내가 오십중반이었다. 적지않은때 나이임에도 많이 했었다.

여동생선자사망
우리집은 5남인데 4째가 여동생이다.
딸이 하나라 집안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자랐다. 나이차이가 많아서 서로객지 생활을 함으로 명절때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수있었다.
나는 직장이 구미이고 여동생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평촌에 살았다.
내가 본사발령을 받고 서울로 이사 와서는 시간날때마다 자주만나서 집에도 방문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주변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에 갑자기 여동생이 뇌출혈이 생겨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와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중추뇌 출혈로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주었다. 그래도 1주일간 이라도 상태를 보자고 제안을했다. 치료를 했으나 날이갈수록 영양주사로 몸은 부어지고 맥박과 혈압은 떨어지데니 결국은 저세상으로 떠났다.










발동기 돌아가는소리 오두막초가집.호롱불.배추뿌리.
기와집지을때 겨울에 모닥불생각.참외수박밭지키기.
개구리잡아닭모이.

초등학교시절
망태메고풀베고.작두케고찔래꽃.버들피리.새양골못수영.

사동지
친구들과 소나무타기.언덕구르기.

사하라태풍에 사갓쥐고있다가
동네입구 도랑에 넘어짐.사하라태풍

앞냇가에서 멱감고.고기잡고.추어탕먹던기억.
비가많이와 강건너던생각

아카시아씨앗심기.
가북에나무하기.소풀뜯기.과수원 과일먹고 놀던기억.
농약뿌리기힘든시절.사과팔러광주경매갔던생각.
물지게지고 물길던생각.아버지와 상가외갓집방문.일부리외가집놀던기억. 외가집점연누나금연이 우리집에있던기억..공기놀이. 대구누나
소애.무용.무식이놀던기억.
과수원 집짓던기억..흙벽돌찍기.한밤에서가래나무지고오던기억..안양골모사지내고
엄북생각..곡식주고과자빵사먹던기억.기타사달라고조름.마상리고모집에놀던기억
기수형.정희.문희...학교방과후방문.고모님이엄격함.작은고모인자함..마상리 누나집에서놀던기억.자형인자함.종학.종선.종호.석강이모집 놀던시절
기호.

초등학교시절...
키가작고 몸이약했음.
매사에적극적이지 못하고 순하게 따라가는습관
고견사입구 소풍.보물찿기.
앞냇가에 비만오면 신발벗고여럿이손잡고 (2군데)등하교기억. 학교에서옥수수빵.우유빵 배급받던생각.
겨울에 난로에밴또넣어 따듯이먹던시절.
중학교시절
용산풒소풍.해인사까지걸어서가서 1박.
조용히 공부만했던기억. 김대원신경쓰이던기억

거창고등시절..
그릇집유서방네누나집 하숙하던시절
작은집고모집하숙시절
갈마리종실집에서 자취시절
갈마리에서 자취하던시절
가조에서자전거로 거창까지등교.
휴일날걸어서 가조에서거창까지3~4시간소요
김종원이집자주갔던기억.괴롭힘.
학교농원에서 밤에  사과따먹던시절




대학시절
단축마라톤30위이내
교내.동산에 산책.김을용.김용해.
해운대추억.태종대.광안리.용두산추억.
거제도 텐트여행.
석박사시절
회사에서 부산까지 등하교..
주2회 밤차타고 다니면서 많은생각
회사병행으로 아쉬움많음
서울 카이스트입학시험 문제4문항 맨지10장떨어지고부산동아대원입학
전자기사1급.무선설비기능가3급

한국전자근무직급년수
1981년5/6일입사...2007년9월퇴사...26년근무 

연구원3년..3개월교육.물리전자.까뮈.Ic설계
             경북대공정연구.서울대설계교육
주임연구원2년..S1575.To92L.일본TSB3개월sw소자  
              한국전자통신6 ETRI6개월파견..PSA. NSA 
과장대리.(주임연구원)1년
선임연구원1년..화합물소자.PW소자.압력센서개발
연구1과장1년...연구소8년
제조기술1과장2년..Fab
제조기술부장대행1년..기술Fab1.2. Assy3.4과
제조부장1년  반도체.조립전체
제조1부장1년..sot1234
조립.세라라믹.공장장3년...
       조립반도체1년      TO92.L.sot.pw.Ic.....
       세라믹2년

SBU2년..전장
사업부장상무2년..전장
품질보증본부장1년


회사그기훈련 금오산등반 새벽에동촌도착
연구1과야유회에서 오른발 장단지화상으로밤샘고통
현진욱.유옥희 서무들수고
사내체육대회 반도체제조 펩2 조립3.정비2..
7개과900명데리고 시합
제조1부장시절.Sot과 분임조경연대회 대통령상수상
영덕바닷가 MT시 밤샘놓이 밤에홍삼먹음.

집안행사
아버지60회갑연
형님결혼식
내결혼식
성원이와둘이 여름휴가 서해안면도. 남해땅끝마을.밤샘비.동해 고성바닷가...좋은추억기억됨
대덕청암사 계곡에서 한여름피서에서폭우만남.
청암사근처 성태경씨와 피서 밤추위로 텐트속불남.
집에서 새벽2시쯤 청송주왕산으로 이동
정서방.큰처남댁함께..술마시고놈.
프레스토 차몰고 처음서울올때 올림픽도로에서 경찰차에스코트기억.
운문산 북대암에서 기도와 새벽해돋이바라봄.
청암사 절에서 밤샘 범화경독경..
성원이가 좋아했던 청암사스님들
여름학교에서 반야심경 독송해서칭찬받음
청도운문사 철야 3천배
조계사에서 반야심경.천수경교육과정
거제 건영집에서 밤낙시.회
안동 종열 친척집 밤샘 놀던기억
김수철네와 무주구천동 여름휴가.
처우회 정기모임...제주도한라산.울릉도여행.설악산등반  
최태영지점장 가족과 나들이추억
당진.홍성.여주..음성땅구매. 고구마재배.
회사친구(대현.인철)모임추억...선산.
백대현 고양땅에 야체심기
주민센터 웰빙댄스 교육
중국 금주현지근무.
가족과함께 생활
주말여행...태산.공자묘.홍산.대련.압록강.만주국
인간관계어려움.
스트레스성 건선피부악화로 9개월근무귀국
그린센서 근무.9개월
헤드헌트 4년솔로몬
자체운영
경비업무...화곡 보건센타.1년..가산 한성근무3년
초등모임
둥국.일본해외여행
고등모임
오남리 1박2일 야유회
2019 10.12일 내여동생 하늘나라로가다



마음을비우다
구미에서 직장을 다닐때 연구 개발 업무나, 직장 단체생활에서 힘든때가 있을땐 마음을 식힐겸해서, 청도 운문사에서 북으로 북대암 암자절에 가끔가곤했다.
암자는 북쪽의 산봉우리의 7부능선에 남향을보고 있다.
암자뒤로는 조금만 올라라가면 전체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있다.
거리가 멀어 1시간30분정도 걸려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나면 마음의 평화을 얻는기분이어서 자주들렀다.
저녁예불과 공양을 마치고, 뒤산에올라 해가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자연의 황홀한 경치를 바라라보며, 해질녁의 찬기섞인 바람이 산에서부터 내려려오는 쌀쌀한 공기의 맛을본다.
땅거미가 밀려올때면 산새소리도 줄어들고 풀벌래소리도 하루종일 생활에 힘들어 숨을 죽이는것같은 적막함이 흐르고, 이따금 귀투라미가 끼륵.하고 울리는 소리가들린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짙어질때면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밝은 달이 만물을 조용히 비춘다.
내생애의 삶에 대한 깊은생각을 해보곤했다.
어떻게 살아왔나,어떻게 살아갈까.
인간답게 살아가는게 어떤것인가.
늦은밤 기온의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방으로 들어와 피곤한몸을 달래며 깊은잠에 들곤했다.
한편 피곤해서 일찍 잠에들었던 어느날에는 새벽4시경 정신이 들었는데, 더이상 잠이오지 않아 조용히 나와 뒷산 중턱으로 올왔다.
주변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하늘의 별과 달도 상대적으로 희미해져가며 빛을바래간다.
새벽의 상쾌한공기가 콧속을 시큰둥하게 해준다.
해가뜰 때쯤이면 저아래 골자기에서 뭉굴 뭉글한 물안개가 바람에 밀려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태양이 뜨기전에는 건너편 먼산에서 부터 엷게물든 붉은 기운이 스며들다가 레이져같은 한줄기 빛이 세상에 비추며, 모든 우주만물에게 찬란한 새아침이 왔다고, 깨어나라는 알림을 전해주고있다. 내가슴에도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인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새로운 마음의 충전을 하는것같다.
그래 어제까지 힘드고 고뇌했던 모든것을 암흑속으로 날려보내고, 지금 이순간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거야, 하면서 내가슴에 새로운 정기와 회망을 불어넣곤했다.
지금에 생각하면 내몸과 내생각과 나의영혼을 위로해는 주는 마음의 안식처 였던것 같다.
우리가족은 딸이 둘이었는데
이절에 다니면서 막내 성원이가 태어나서, 큰축복을 밭았다고 생각이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시간이 날때마다 절에오게되어, 많은날을 암자에서 보낸것같다.
이후로는 가까운거리의 보현사로 거쳐를 옮겨서 마음을 공부를 하게되었다.
보현사에서는 3000배 심야기도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김천지래 대덕의 청암사의추억이다.
수덕산의 골자기에 승려대학겸 청암사가 있다.
승용차로 집에서 1시간반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불교를 좀더이해하고 마음을 다스리었던 마음의 안식처이다.
깊은계곡이라 여름이면 피서겸해서 자주찿았던 곳이다. 막내성원이가 무럭 무럭자라서 초등학생쯤인가,여름방학때 불교학교를 열었는데 참여 어린이들이 많았는데, 반야심경 외우기에서 전문을 다외워서 승가대학장님,주지스님 이하 모든스님들이 칭찬해주시던 생각이난다. 그이후로는 스님들과 잘지내곤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했다. 체육시설에가서 주지스님과 탁구를 치기도하고, 학장스님이나 주지스님 방에가서 다과를 들면서 오랜시간 담소를 나누기도했다.
비구니 스님이시라 계율을 엄격히 지켜서 신도님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있었다.
불교기념일이 되면 심야 법화경 읽기 기도회를 진행하는데 저녁에 시작해서 밤이 새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여름에 텐트치고 야영하다가 추워서 불피고 자다가 불이났던생각.
처가집 식구들과 계곡에 놀러갔다가 소낙비를 만나서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

구미의 금오산 정상부근에 약사암이 있다. 집에서 가까운거리라 휴일이면 혼자또는가족들과또는 친구들과 자주산에 가기도한곳이다.
직장생활에 힘이들때 자주찿아와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공장장 시절에는 직원이 2천명이 넘는 관계로 여러가지 문재가 발생하곤 했다. 가장힘든 것이 노사관계의 어려움이 있어 마음 고생한 것이 기억난다.그래서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있다.
김천에계시는 벽진이씨 17대조 청백리 노촌 이약동공께서는 이절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통해서 영흠을 얻어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약사암의 약자와 김천의 동쪽에 있는산이라 동자로해서 존암을 약동으로 했다는 내용이 문헌으로 기록되어있다. 혹자는 노촌실기가 이곳에서 편집,편찬 되었다고 도한다.
노촌실기편집,편찬에 나의 5대조이신 일하정 이학준공이 참여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훌륭한 선조님의 공덕을 잘누리고 있구나하며, 항상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약사암을 찿곤했다.


26년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다음날, 집사람과 기분전환할겸
고창 선운사 깊숙이 자리잡은 내원궁에 가서, 1주일동안 사찰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대해서 마음의정리를 하고 새로운 삶을 생각해보는 좋은시간 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공양을 하고는 혼자또는 스님과 산책하며 담소를 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법당에가서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원궁 암자는 처소에서 400미터 높은 산중턱에 있어, 자리를 잡고 앞을 바라보면 계곡 저건너 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경치가좋았다.
내원궁 암자의 이름에 걸맞는 명소 이다.
회사생활에서 일에 대한 회고, 직장 동료및상하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회개, 반성, 고마운일, 고마운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많은시간을 보냈다. 이를계기로 인생전반을 마무리하는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지나온 과거를 회개하고 모든기억을 지울려고 했는데 10년은 넘게 회상이 되기도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을 돌이켜보면 잘했구나하는 생각이든다.
올라오는길 고창 대흥사에 들러 새벽예불 드렸던기억이난다.

서울생활을 하게되므로 청도,구미,청암사는 거리가 멀어 자주 갈수가 없어서, 국민대옆 북한산 아래있는 청학사를 다니게되었다.
비구스님이 계셨는데, 진정한 불법을 구도하는 정신으로,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고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사동에있는 조계종본당인 조계사의 불교대학에서 3개교육과정인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과정을 1년에 걸쳐서 교리공부를 했다. 나름열심히 해서 모범이되었다고 상도타고,수료증을 받게되었다.
그동안 마음으로만 읽혔던 교리를 체계적으로 하는계기가되었다.
교리공부를 함으로서 좀더나은 신앙생활을 하게되었다.

제기동 법화정사에서 도림스님.
법화경 불경을 선물로 주시면서 덕명 이라는 법명을 표지에 적어주셨다.

해인사.벽련암
8만대장경탑돌이.사리친견
태백 정암사 1박2일 새벽정근
다보탑돌이
충주 청평사 1박2일 새벽정근
동화사 갓바위대학기원기도
선산 도리사
김천직지사 중암
한산도 야간선상에서 방생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강릉해안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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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500년머릿말 (거창 가조)
우리가족은 벽진이씨 이총언을 시조로 대장군 평정공계 승지공파 후손이다.33세손 동강 이창기 와 흥해최씨사이에 4남1녀가 있다,
1남은 송월 이선숙이고, 2남은 덕명 동석천 이선동, 3남은 구야 이선수, 4남은 구야 이선규 이고, 1녀 네째는 선자이다.
내 고향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벽진이씨 평정공계 20대 통정대부 검춘추 이 건 선조님으로부터 5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
고향 동례리는 서쪽으로는 거창군과 동쪽으로는 합천 해인사 중간지역으로 마을뒤 서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지나 가고 있다. 남쪽에는 박유산이 우뚝솟아 마을의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다. 거창에서 살피재를 넘어서 내려오면 7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중간 정도의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박유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원동례리이고 더넘어는 새앙골, 서쪽으로는 중마. 평지마, 안금이 약 500~100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행정상으로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는 가조 입향조이신
21대 통덕량 이난서공을 모시는 경모재 재실과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매년 묘사때가 되면 전날에 주변 각 지역의 종중 일가 분들이 많이오셔서 우리집과 재실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시제에 참석 하시고 돌아 가시고 했다.
어릴 적에는 재실과 우리 집이 같은 울타리안에 있었다.
거창군지에 26대 유선 이정매공이 말년에 유산재를 짓고 경학을했다는 기록이있다. 그후대에 내려오면서 가조입향조 통덕량의 재실인 영모재로 고쳐부르게되었다.
윗대 선조께서 우리 집 마당 안에 재실을 짓도록 해서.지금도 재실의 주변부의 작은 언덕 땅은 우리 집 토지 등기로 되어 있다
박유산은 본명은 화룡산이었는데 나말 박유거사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며 이산에 은거하며 보냈다하여 충정을 높이받들어 박유산이라 명명하고있다. 그이후에도 많은 충신들이 이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이있다. 26대 유산 이정매공 께서도 높은뜻을 깨닫고 박유산 동쪽의 끝자락에 유산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으리라 생각된다.
영모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배위 밀양박씨 산소가 동향으로 있다.
영모재 재실 맞은편 북쪽 50미터쯤 도랑건너 동구밖에 언덕의 마을입구에는 삼수정이라는 나무3그루와 정자가있는데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와 언덕 중간부의 정자에는 거창군지에 벽진이씨 27대선조 이가신공께서 심었다는 고목 느티나무 3그루가 300년 넘게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 보며 마을 수호신 역활을 하고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의 호를 삼수정으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가조면지에 수록되어 전해 지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폭이 100여미터 되는 가조천의 강이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은 북쪽의 가북 댐에서 남쪽 합천 댐으로 흘러 가고 있다.
강건너 논을지나 1.5키로가면 면소재지로 초등. 중학교등 행정중심 마을 마상리가 있다
어릴 시절에 학교에등교 할때는 돌다리와 나무다리로 강을건너는데 여름철 장마때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세져 넘어지고 신발.책보따리를
잃어버린 기억, 추운겨울에 신발벋고 건너야 할때등 고생했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날씨 좋은 계절에는 고기도 잡고 물장난 치고 놀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있어서 편리하게 지나 다니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사송지(사동지)와 잔디 언덕이 있다. 사송지는 오래된 소나무 4그루 가 있다고 붙여진 명소이다. 어릴때에는 친구들과 소나무에 올라 가기도 하고, 잔디밭 언덕에서 뛰어놀고 구르고 하던 생각이 난다.
사동지 언덕 북으로는 길이 100미터 되는 사각형의 학당골 못이 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치며 목욕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서쪽으로 좀더 가다보면 88 고속도로를 지나고 2키로 더 가면 안양산인 선조님의 선산이 있다
안양산은 박유산 줄기에서 내려온 300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며,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내려 져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승지공파 이무 선조의 부친인 21대 통덕량 이난서 산소가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밑에는 첯째 손자 이선일 선조와 그 후손이 차레로 자리잡고 있어 오른쪽에는 박유산,
동쪽 멀리는 고견사를 바라보고있다.
입향조 선조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후손 들의 지나간 삶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겄이다.

북쪽 맞은 편에 독새골 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와 있다.
산등선의 8부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 둘째 손자 승무원박사 이창일 선조가 자리 잡고 있다.그 아래로는 직계 후손 선조님의 산소가 차레로 자리 하고,
아래쪽 중간 위치에는 부친인 33대인 동강 이창기 산소가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앞을 지나 남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고, 멀리는 대구에서 오는 88 고속도로를 바라보고, 더 멀리는 미녀봉의 4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시골집에서 면소재지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봄에는 보리밭 새싹을 밞으며,가을에는
누렇게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즐겁게 등.하교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시골집에서 서쪽으로15키로 떨어져있는 거창에서 다녔다.
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개화리 향교동 재실 옆에 있는 관리소 집에서 자취를 하기도했다.
재실의 위치가 거창군청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지나 2~3키로에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초입에는 대성고.상고.향교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실에서는 가을 묘사 때가 되면 부친은 물론 종중 어르신께서 많이 오셔서 시제를 지내고 하루밤을 묵고 가시기도했다.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거창 입향조 이신 20대선조 통정대부 검 춘추 오담 이건을 모시는 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2대 승지공 이무 선조는 주상면 성기
마을 뒤산인 선산에 계신다.
거창에서 김천가는길목에 오른쪽 개울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옆에는 공의 높은 덕망을 기르기위해 고산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하고있다.
마을 앞에는 공의 사적비를 세워서 추모하고있다.


일반적 내용을 정리해보면
동례리소개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10개 법정리 중 한 지역이다. 동례리(東禮里)에는 안금리, 중평리, 동례리 등 3개 행정리가 있고, 행정리 안금리에 속하는 안금 마을, 행정리 중평리에 속하는 중마촌 마을, 평촌 마을, 행정리 동례리에 속하는 동례 마을, 사양동 마을 등 4개 자연 마을이 있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신윤지가 벼슬을 버리고 이 지역에 은거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 하여 예곡 또는 예동으로 불렸으며, 박유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동유골(東儒谷), 동례라고 했다. 동례 마을의 지명을 바탕으로 ‘동례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안금(安琴) 마을은 지형이 거문고 같아서 어루만질 안(按) 자와 거문고 금(琴) 자를 써서 ‘안금’이라 하다가, 이후 편안한 안(安) 자로 바뀌었다. 안금과 동례의 가운데 있는 마을인 중마촌 마을과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평촌 마을을 합하여 중평리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하가남면(下加南面)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하가남면이 가서면에 통합되고 이후 1928년 가서면이 가동면과 통합되어 가조면이 되면서 오늘날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가 되었다.

안금 마을은 해주 오씨가 처음 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환경
동례리는 가조면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발 고도 712m의 박유산 자락이 남북으로 크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산지 지형이다. 따라서 지역의 동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가천천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지 발달이 미약하다. 내륙 산간 지역으로 일교차가 심하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현황
동례리의 인구는 2016년 4월 말 현재 196세대 398명[남자 193명, 여자 205명]으로, 가조면 전체 인구 4,010명의 약 10%에 해당한다. 서쪽의 남하면 둔마리와 동쪽의 가조면 대초리에 걸쳐 동례리의 북쪽 지역에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지나간다.

참고문헌
『(문답식)거창 역사』(거창 문화원, 1999)
박종섭, 『서부 경남의 전설』1-거창 편(문창사, 2013)
내부 자료(거창군 가조면사무소)
거창군 주민 등록 인구 현황(2016년 4월 말)
거창군청(http://www.geochang.go.kr

박유산
경상남도 거창군의 가조면 동례리와 남하면 지산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12m이다.

명칭 유래
박유산 명칭 유래는 『여지도서(輿地圖書)』[거창]에 "박유산(朴儒山)은 가조현 남쪽 5리에 있다. 금귀산 남쪽 산기슭이다. 신라 처사 박유가 세상을 피해 이곳에 살았다. [중략]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박유산’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박유가 살았던 것에서 산 지명이 유래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창군사』에 의하면 박유산은 화룡산(華龍山) 또는 화룡산(火龍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상 가조 분지의 남쪽에 자리해 ‘불의 산’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자연환경
박유산 북쪽으로는 보해산과 금귀산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박유산 산기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크고 작은 소류지들을 만들고 서쪽으로 지산천과 대곡천을 이루고 있다.

현황
박유산은 장년 산지의 특색을 띠고 있으며 사면이 비교적 완만하여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북쪽으로 가조면의 산간 분지를 볼 수 있다.


유진선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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