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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판서공 승원

묘각신창기. 영모재. 합천 장단. 일하정 이학준

작성자儒珍 이선동 (평정공계 승지공 34세)|작성시간26.06.11|조회수8 목록 댓글 0

墓閣新創記
惟我三嘉之長湍洞即柳長湍之所賦歸 田園而吾先祖利川公以甥館面因以世 居之地也簪纓文華之盛甲於嘉押吾李 之宅子兹紙自是數世復子孫之分在三 邑者亦為夥多而我判書公利川公两代 墳山在洞後嗚呼洞之名抚佳矣居之族 统巨矢则宜式毂世世而尤不后惟来之 敬也何世道嬗變易主隨多宗家基地亦 混入拎他而元無一間篡閣憶每歲祀時 子孫之誠拎先而來者或优屋而宿亦介 所而食其為苟且之狀不可形言則其是 笑拎人也必矣抑在咸時先行宿德百勝 拎今則宜其有為也而惜遵守吾清白貽 摸而不遑拎鳩財設役之事也往在乙酉 春不肖数輩然與傷與同志四五人首 發此議每冠下名收三錢銅計居昌三嘉 錢為若干矣或日財力之未足難於成屋 子姑為数年羡息後乃可面红誠之所聚 則安可不不日乎粤六年辛卯脱始得復 有基買人家則坎二堂二窕一合五架矣 縱不可謂軒敞之明為子孫者咸慕起敬 之心當復如何亦幸靈山之宗錢來 今年是知三邑居族之一心會同而居鏤 之鹿數取息今亦無改前日一乃心力則 未幾年成 比屋可期矣諸宗之一堂同會 昭穆列序齋宿行把拎今年始期先祖 之震基必口余有後夫孰曰不慶也去散 由是而可以怠则為之由是而可以誠則 誠吾祖逾孫升斯堂而油然生孝悌之心 矣盍相勉諦
壬辰年
二十九世孫 學俊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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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閣新創記(묘각신창기) 번역 및 해석
원문 작성자
二十九世孫 一何亭 李學峻 謹記 (29세손 一何亭 李學峻 삼가 기록하다)
작성 연대
壬辰年(1892년, 고종 29년)
번역
생각하건대 우리 三嘉의 長湍洞은 곧 柳長湍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전원에 은거하였던 곳이다.
우리 선조 利川公께서 외가 인연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아온 곳이기도 하다. 벼슬과 문학이 성하여 三嘉 고을에서도 으뜸이었고, 우리 李氏 가문의 세거지로서 여러 세대를 이어왔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三嘉·居昌·咸陽 등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게 되었으나, 우리 判書公과 利川公 두 분의 묘소는 모두 이 마을 뒤 산에 자리하고 있다.
아, 마을의 이름도 아름답고 거기에 사는 종족(宗族) 또한 크니, 마땅히 대대로 공경하고 받들어 후손에게 전해야 할 터인데,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종가의 터마저 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선영을 지키고 제사를 준비할 만한 조그마한 재실 하나조차 없게 되었다.
생각건대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자손들은 정성을 다하여 찾아왔으나,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남의 집에 의탁하여 잠을 자고, 또 다른 곳을 빌려 음식을 마련해야 하였다.
그 구차하고 민망한 형편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남들이 보기에 웃음거리가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옛날에는 선조들의 덕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많았으니 마땅히 이를 도모했어야 했으나, 선조께서 물려주신 청백한 가풍을 지키느라 재물을 모아 큰 공사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乙酉년(1885) 봄, 불초한 몇 사람이 뜻을 같이하는 종인 네댓 명과 함께 먼저 이 일을 의논하였다.
사람마다 이름 아래 일정한 액수의 돈을 거두니, 居昌과 三嘉에서 모인 돈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재력이 아직 부족하니 집을 짓기 어렵다. 몇 해 동안 불려서 이자를 모은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하였다.
하지만 정성이 이미 모였는데 어찌 차일피일 미룰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6년 뒤 辛卯년(1891)에 이르러 비로소 터를 마련하고 집 한 채를 사게 되었는데,
두 칸짜리 방 두 개와 부엌 한 칸을 갖춘 모두 다섯 칸 규모의 집이었다.
비록 넓고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손으로서 이곳에 오르면 모두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니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욱 다행인 것은 咸陽과 靈山에 있는 종인들도 재물을 보내와 힘을 보태 준 것이다.
이로써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던 종족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재산을 잘 운영하여 이자를 얻고 지금의 정성을 계속 이어간다면 머지않아 더 큰 집을 세우는 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종친들이 한자리에 모여 昭穆의 차례를 따라 줄을 지어 앉고, 재계하며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올해부터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선조의 터전이 다시 진작되었으니, 앞으로 후손들이 번성하게 될 것을 누가 경사롭지 않다 하겠는가.
이제부터는 흩어졌던 종족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다시 모일 수 있고, 이곳으로 말미암아 게을러지지 않으며, 더욱 정성을 다하게 될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이 집에 올라올 때마다 자연히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우러나오게 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써 실천하지 않겠는가.
해설
이 글은 一何亭 李學峻이 1892년에 작성한 「墓閣新創記」로서, 선조 묘소 아래에 재실(墓閣)을 마련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기문이다.
1. 장단동(長湍洞)의 역사
벽진이씨 선조인 利川公이 외가 인연으로 정착한 세거지.
문중이 번성하여 삼가 지역의 명문가가 되었음.
判書公과 利川公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함.
2. 재실이 없었던 어려움
세월이 지나 종가 터가 타인에게 넘어감.
제사를 준비할 장소가 없어 종인들이 남의 집을 빌려 숙식함.
문중의 위상에 비해 매우 초라한 형편이었음.
3. 재실 건립 운동
1885년(乙酉)에 문중 인사들이 모금 시작.
6년간 준비 끝에 1891년(辛卯)에 집을 구입.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선조를 받들 공간을 마련함.
4. 문중 화합의 상징
居昌·三嘉·咸陽·靈山 등지에 흩어진 후손들이 함께 참여.
재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문중 단결의 구심점이 됨.
효제(孝悌)와 숭조(崇祖)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 공간으로 인식됨.
이 기문의 핵심 정신
「聚族敦宗(취족돈종)」
흩어진 종족을 모아 종통을 돈독히 하고,
「追遠報本(추원보본)」
선조를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하고,
「孝悌傳家(효제전가)」
효도와 우애의 가풍을 후세에 전하려는 뜻을 밝힌 글이다.
따라서 「墓閣新創記」는 단순한 건물 신축 기록이 아니라, 벽진이씨 후손들이 선조의 묘소와 문중의 구심점을 다시 세우고 숭조돈목(崇祖敦睦)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한 역사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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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閣新創記 定本(校勘本)
墓閣新創記
惟我三嘉之長湍洞,即柳長湍之所賦歸田園之地也。吾先祖利川公,以甥館之因,遂世居於此。簪纓文華之盛,甲於三嘉,吾李之宅于玆,蓋數世矣。
子孫之分居三邑者,亦為夥多。而我判書公、利川公兩代墳山,俱在洞後。嗚呼!洞之名既佳,居之族既鉅,則宜式穀世世,而尤不忘其所自來之敬也。
何世道嬗變,宗家基地亦混入於他,而元無一間齋閣。每歲祀時,子孫之誠,趨先而來者,或假屋而宿,或借所而食。其苟且之狀,不可形言。則其見笑於人也必矣。
抑在昔時,先行宿德百世之澤,至於今則宜其有為也。而惜乎遵守吾祖清白之貽謨,不遑於鳩財設役之事也。
往在乙酉春,不肖數輩,慨然與同志四五人首發此議。每冠下名,收三錢銅,計居昌、三嘉之錢,為若干矣。
或曰:「財力未足,難於成屋,姑為數年羨息,然後乃可。」
余曰:「誠之所聚,安可不日乎?」
粤六年辛卯,始得有基,買人家一區。則坎二、堂二、竈一,合五架矣。縱不可謂軒敞之制,而為子孫者,咸慕起敬之心,其當復如何哉!
亦幸靈山之宗,輸錢來助。於是知三邑居族之一心會同,而居鏤之資,取息於今,亦無改前日之誠也。
乃心力則未幾年,成比屋可期矣。諸宗一堂同會,昭穆列序,齋宿行祀。自今年始,則先祖之靈基,必有光矣。今將大振,其孰曰不慶也!
去散由是而可以聚,怠者由是而可以勵,誠者由是而益誠。吾祖後孫,升斯堂者,油然生孝悌之心矣。
盍相勉諸!
壬辰年
二十九世孫 一何亭 李學峻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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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 「墓閣新創記」는 壬辰年(1892) 一何亭 李學峻이 지은 기문으로, 三嘉 長湍洞에 위치한 判書公·利川公 선영 아래 재실(墓閣)을 건립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글
기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長湍洞은 利川公 이래 벽진이씨 세거지이다.
判書公과 利川公의 묘소가 있으나 재실이 없어 제향에 큰 불편이 있었다.
乙酉年(1885) 문중 인사들이 발의하여 성금을 모았다.
辛卯年(1891) 집 한 채를 매입하여 묘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三嘉·居昌·靈山 등 여러 지역 종인들의 합심으로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효제(孝悌)와 숭조(崇祖)의 정신을 기르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기문은 단순한 건물 신축 기록이 아니라, 碧珍李氏 門中의 崇祖敦宗 정신과 宗族結束의 역사적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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