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교육의 문제점과 해결책
현 용수 교수, Ph.D. (쉐마교육연구원 원장)
2003년은 미주에 한인 이민교회가 세워진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미주에는 3천 5백 개가 넘는 한인교회가 창립되어 교회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태어난 한인2세들의 영성교육에는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교육은 성공을 거두지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자녀 중 70% 이상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년 90%가 미국 교회나 한인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연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이에 지난 100년을 돌아보면서 한인자녀들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다음과 같이 청소년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통해 새로운
교육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다음 문제에 대한 교수님의 기탄없는 고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현용수 교수의 문제점 분석과 대안
서론 :
모든 문제점의 원인과 분석 및 대안은 서로 약간씩 다르더라도 서로 연결된 공통점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공통점은 반복 설명을 피하기 위하여 간단히 답한다.
그리고 이 글은 구속사적 입장이 아니라 교육학적 및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읽어야 이해하기 쉽다.
먼저 독자들은 다음의 연구 질문을 생각하며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약의 교회는 어느 민족이나 2000년간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자녀와 민족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신약의 기독교교육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도 유대인은 어떻게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4,20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데 성공했는가?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정의 문제점
문제점 1 :
왜 한인 1세들은 다른 민족에게보다 자녀들에게 더 차별대우를 받는가?
이유 : 이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실예로 감리교 목사님들은 한국 악센트를 가진 발음으로 미국 백인교회 목회를 잘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동일한 목사님이 한인교회 2세 교육목사로 들어와 설교를 하다보면 2세들에게 영어발음 때문에 배척당하기 쉽다.
뿐만 아니라 많은 2세들이 백인 목사의 말에는 순종하고 한국인 목사의 말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학교선생의 말은 잘 들으면서 부모님 말은 잘 안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한국인 1세가 너무 한국 전통 문화 가치들을 무시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인성교육의 기본인 효도교육을 안 가르쳤기 때문이다.
분석 :
한국인은 한국의 고전 노래를 안 가르친다. 한국의 청소년들도 미국의 유행가는 많이 알면서도 한국의 ‘옹달샘’이나 ‘반달’,
그리고 ‘고향의 봄’은 잘 모른다. 왜 한국인은 자신의 전통이나 고전을 무시하는가?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인은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큰 나라의 것은 존경하고 따르고 자신의 것은 업신여겨왔기 때문이다.
둘째,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군사 문화 30년은 한국인의 전통 사상 교육보다는 배고픔의 한을 풀기 위하여 서구의 세상 학문에만
집중되었다. 그리고
셋째, 군사 문화 30년은 독재를 하기 위하여 한국의 생각하는 지성인과 사상가를 제거하였다.
그 당시에는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지혜자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지혜자가 잠잠할 때는 악한 때이다(암 5:13).
이런 환경 속에서 과거 내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무시하면서 ‘민족의 과학화’나 ‘민족의 선진화’를 외치며 서양의 수평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한국적인 것은 없어지면서 서구화 되어갔다. 내 것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민족은 병든 민족이다.
이런 민족에게는 ‘내 것’이 없다. 정신적인 ‘내 집’이 없다. 내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만 끊임없이 모방하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적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사상적 고아가 된다. 예를 들면, 가장 한국적인 것 중 하나가 효사상이다.
그런데 서양 학문이 세차게 몰아치면서 효도는 구시대의 것인 양 생각하고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인 1세는 2세들에게 한국인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가르치기도 힘들고 가르치려고 노력도 안했다.
그 결과 2세들도 1세들의 한국적인 것들을 배척한다. 심는대로 거두는 법이다.
대안 :
첫째, 한국인은 2세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리 가난해도 내 가정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내 민족을 귀하게 여기는 민족을 축복하신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나’를 ‘내 가정’의 일원으로 또한 ‘한국인’으로 낳게 하시고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 빨리 한국인의 좋은 전통을 체계화하여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자신의 머리로 전통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는 장님과 같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가 미국 Fuller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할 때였다.
학기 첫 시간에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 백인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주문하였다.
“여러분 나라의 고유 음악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는지 보고 싶습니다.
몇 사람 나와 소개 좀 하시지요.” 선교학 강의실에는 세계 다양한 인종들이 모인 자리이다.
먼저 케냐에서 온 학생이 나와 아프리카 토속 춤을 추면서 케냐식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다음은 헝가리 학생이 나와 헝가리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 다음 한국 학생이 나와 개편 찬송가에 있는 곡을 불렀다.
교수님이 다 듣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 하며 하시는 말씀이 “그 곡은 우리 것이니 한국 고유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시
주문하였다. 두 번째 나와 용감하게(?) 부른 한국 학생도 개편 찬송가에 실려 있는 서양곡을 불렀다.
교수님은 어이없는 모습을 하면서 “그 곡도 우리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왜 여러분 나라의 음악이 없습니까?
대부분 한국 기독교인은 왜 우리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한국 학생이 또 나왔다.
그 분은 저자처럼 생활 한복을 입었다.
그리고 국악 찬양인 “예수님이 좋을 걸 어떡하나요......”를 덩실 덩실 한국 춤을 추면서 불렀다. 그 때 그 교수님은 “바로 저것입니다.
왜 꼭 한국인은 우리 서양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배웠다고 하는 엘리트 중에 이런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하나 둘인가?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국악의 형식(Forms, 작곡)에 하나님 말씀을 넣은(작사) 국악찬양도 개발하여야 한다.
한복도 마찬가지다. 옛날의 한복은 멋은 있지만 불편함이 많았다.
1998년부터 선보인 새로운 생활 한복은 옛날의 멋과 편리함을 조화시킨 걸작품이다.
이것을 더 개발하여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어느 나라에 가져다 놓아도 그 모양과 질이 손색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인이 너도 나도 한복을 입고 저자거리를 활보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세계화이며 진정한 애국자다.
저자가 한복을 입고 여러 나라에 집회를 다니면 많은 외국인이 이런 패선을 어디에 가면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여성의 한복은 미의 극치다. 그런데도 한국 여성은 왜 한복을 안 입는지 모르겠다.
이미 한국의 태권도는 세계화가 되었다. 전 세계 한국 태권도 사범은 기본 동작이나 자세를 한국말로 가르친다.
시작하기 전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현재 태권도는 올림픽 종목에 넣을 단계에 있지 않는가?
미국의 클린턴과 국회의원들을 가르친 이준구 사범은 정부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셈이다. 골프치는 사람들이 못하는 일을 해냈다.
그들이 진짜 애국자들이다. 이제 한국의 씨름도 세계화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 제1권 참조)
둘째, 인성교육의 기본인 효도교육을 시켜야 한다.
1) 효는 말씀전수를 위한 가장 필수요건이다
왜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육신의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에,
둘째는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셋째는 복음과 영적 말씀을 전수하여 영혼의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부모공경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자손손 전수하여 말씀맡은자(롬 3:2)로 키우는데 있다.
말씀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명도 중요하지만 자녀의 순종이 기본이다. 자녀를 낳으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관리(caring)와 교육이다. 자녀를 관리(caring)하고 교육하는데 가장 필수 조건이 순종이다.
자녀가 순종하지 않으면 부모가 자녀를 관리할 수도 없고 교육도 할 수 없다. 자녀의 순종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headship)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공경하면 부모 세대를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따라서 한인 1세들은 다른 민족에게보다 자녀들에게 더 차별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효도교육을 시켜야 한다.
어떤 이들은 2세들이 1세를 무시하는 이유를 다음 두 가지를 든다.
첫째, 1세들이 모본을 안 보였기 때문이다. 세금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등등…….
둘째,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1세들이 자신들의 단점을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2세들에게 존경을 받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에서 한국인 1세의 단점을 일일이 나열하여 이것을 고쳐야 2세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은 피한다.
설사 1세들의 단점을 지적한다고 하여도 잘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1세들에게 단점을 고치지 말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물론 고쳐나가야 한다. 한국인 1세에게 단점만 있는 가? 장점도 많다.
정통파 유대인은 어떤가? 유대인도 우리처럼 단점이 많은 민족이다.
오히려 유대인은 한국인보다 현대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더 많다.
현대문명에 맞지 않는 구약의 모든 절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절기 지키는 현장에 가보면 전혀 21세기에 맞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많다.
그런데도 그들의 2세들은 어떻게 무모님과 부모 세대를 존경하고 따르는가? 그 이유는 효도교육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란에서 유대인의 2세는 1세의 단점이 있는데도 존경하고 순종하는데 왜 한국인 2세는 1세를 대체적으로
좋아하지 않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의 상황에서 1세들이 2세들에게 어떻게 존경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2) 왜 2세가 1세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는가? 그 성서적 모형
성경을 보자. 노아는 홍수 사건 이후 포도주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어 수치를 드러낸 적이 있다.
그 때에 아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다른 형제들에게 이를 알려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다른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아비의 하체, 즉 수치를 보지 않기 위하여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창 9:20-27).
이는 부모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 자녀가 나타내는 두 가지 모형, 즉 악한 아들과 선한 아들의 모형을 보여 준다.
첫째, 개인적인 측면에서 함이 부모의 수치를 조롱함으로써 성경의 근본 원리인 부모 공경에 대한 다섯 번째 계명을 어겼다.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함은 바로 하나님을 조롱함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부모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동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아들은 아비의 수치를 덮어 주어야 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함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이 축복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도 불완전한 인간이다.
부모도 잘못을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은 아버지의 약점을 덮어 주는 아들을 축복하시고 아버지의 약점을 조소하는 아들을 저주하신다.
둘째, 광의적인 측면에서 2세는 1세의 허물을 덮어 주고 긍정적으로 1세를 존경해야 한다.
즉, 2세가 아비 세대를 악하게 평하면 안 된다. 2세가 아비 세대를 악하게 평할 경우 2세는 아비의 세대를 존경하지 않게 된다.
아비의 세대를 존경하지 않게 되면 아비 세대에게서 자손 대대로 내려오는 성경의 역사와 말씀을 배우려 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1세와 2세와의 사이에 하나님 말씀의 역사와 전통의 단절이 오게 된다. 즉, 1세와 2세 사이에 세대 차이가 형성된다.
따라서 2세는 1세가 잘못을 했다손 치더라도 옷을 취하여, 즉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1세의 허물을 덮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은 1세의 약점을 덮어 주는 2세를 축복하시고 1세의 약점을 조소하는 2세는 저주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1세의 잘못을 무조건 덮어서 조상의 역사를 미화시키라는 뜻은 아니다.
잘못된 사실 자체는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그를 본받지 않도록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설사 조상이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조상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2세의 마음 자세이다.
3) 왜 한국인은 가정에서 효도교육을 시키는 데 실패했는가?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가정에서 효도교육을 시키는 데 실패했는가?
특히 한국인은 유교의 효도교육보다 기독교의 효도교육이 더 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첫째 이유는 기독교 2000년간 효신학이 조직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부모공경을 안 하면 죽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부모공경이 없으면 말씀을 전수할 수 없게 되고, 말씀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못하고 짐승 같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효신학을 정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자세한 것은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 제2권 유대인의 효도교육 참조)
둘째, 한국 기독교가 구원을 위한 복음에만 치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데 필요한 율법교육에는 소흘했기 때문이다.
효도교육(제5계명)은 율법 교육이다. 왜 자녀교육에는 율법이 필요한가?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은 인간에게 율법이 있으므로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시인하고,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의 귀중함을 알아 그를 구주로 영접하게 한다
(롬 3:20, 5:20, 7:7; 딤전 1:9).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 이것은 율법의 교육적 기능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이 먼저이고,
그 다음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두 가지 기능, 율법의 구원론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의 조화이기도 하며 신구약의 조화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의 가르침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어 왔다(갈 3:2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율법에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약의 하나님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말씀(율법)을 따라 구별된 백성이
되는 데는 미흡했다. 율법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별된(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율법 없이 어떻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이는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전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바울도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가장 완벽하게 활용하는 성경적 인성교육의 내용과 방법이다.
따라서 영적 유대인인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기독교교육의 기능으로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성화의 도구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신약의
성도들이 율법을 행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현대 정통파 유대인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 없이 행하는
선민교육이고,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행함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구원 받아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성화 과정이다
(롬 8:4). 따라서 신약 시대의 유대인은 구원을 위한 복음(예수님)이 필요하고,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선민교육인
쉐마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동반자여야 한다.
율법은 논하다보면 예수님이나 바울을 괴롭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율법주의(legalism)자들이다.
율법과 율법주의자는 다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남용하는 자들이다.
문제는 성경대로 살라는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남용하는 율법주의자가 악하다.
오늘날 한인이 일부 유대인에게 피해를 본다는 사실은 이런 교활한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현재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나 바울도 율법주의자들의 피해자였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바리새인(율법주의 유대인)의 교훈은 배워 지켜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31:1-3)고 하셨겠는가?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좋은 유대인 교육의 내용은 배워 지켜 행하되
혹 율법적인 악한 유대인이 있다면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율법교육은 IQ증진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법만을 너무 강조하면 인정미가 메마르기 쉽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깐깐한 법을 잘못 남용하여 순진한 사람을 골탕 먹이는 교활한 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EQ(사랑) 없는 IQ교육만의 위험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말씀, 머리-IQ)과 은혜(성령, 기도, 가슴-EQ)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행위가 변하여야 한다.
유대인의 쉐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신 6:6)는 뜻이 여기에 있다.
(자세한 것은 필자의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참조)
문제점 2: 왜 한인 2세들이 일류학교를 졸업하고도 70% 이상 미국 주류사회 진출에 실패하는가?
이유 :
1. 부모들이 학교교육에만 의존하였다.
2. 부모들이 IQ교육에만 치중하고 전인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3. 부모들이 인성교육이 무엇인지 모른다.
4. 가장 심각한 것은 부모가 자녀교육 방법을 모르면서도 배울 생각을 안 한다.
분석 : 이 문제는 한국인 2세뿐 아니라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각 민족마다 상대적 성취율이 다를 것이다. 가령 유대인이나 독일인 및 영국인 같이 어려서부터 전인교육을 잘 시킨
민족의 자녀들은 미주류 사회에 높은 진출율을 보일 것이고, IQ교육에만 진력하는 한국인 같은 민족은 일류대학 진학률은
높을지라도 졸업 후 사회 진출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IQ교육), 인간관계(EQ교육) 지혜교육 및 의지교육이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가정에서 한국인의 수직문화 교육, 예절교육 및 고난교육은 전혀 시키지 않고 미국 학교교육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일류학교를 졸업하고도 70% 이상 미국 주류사회 진출에 실패한다. 상당한 손실이다.
대안 : 인간의 전인교육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 인간의 전인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의 세 가지 영역 즉,
첫째, 가정, 둘째, 학교 및 셋째, 사회가 모두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첫째, 가정에서는 도덕과 윤리의 가치관 교육을 시킨다.
이것은 자녀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키우기 위한 "도덕 발달 교육(Moral development education)"이다.
그러면 자녀의 도덕과 윤리의 가치관의 내용과 기준은 무엇인가? 이는 부모의 종교교육 몫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도덕적 가치관은 그 부모의 종교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둘째, 학교에서는 자녀에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지식 발달 교육(Cognitive development education)"을 시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재교육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을 극대화 시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발전시킨다.
이는 학교 등 전문 기관에서 가르친다.
셋째, 사회는 자녀가 원만한 인간관계의 방법을 배우는 학습의 장(Human relationship or Leadership training)을 만들어 준다.
한 인간은 여러 사람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신의 약점이 보완된다.
그리고 상대방과 마찰 없이 피해가는 기술도 터득한다.
포용력도 넓어진다. 남에게 존경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무형의 자산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는 두 사람 이상의 집단이기 때문에 가족끼리의 인간관계, 학교에서의 스포츠 및 클럽 활동, 교회
그리고 일반사회 등 모든 인간관계의 범위를 뜻한다. 이는 어려서부터 시켜야 효과적이다.
더 넓은 세계관을 위해서는 풍부한 인간관계의 경험과 이중문화의 경험 즉, 타인종과 껴안아 보기도 해야 가능하다.
왜 한국인의 수재가 미 주류사회나 국제화에 뒤지고 있는가? 두뇌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고 인간관계의 성숙도가 낮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교육 중 두 번째에 속하는 학교 교육의 영재교육에만 치중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첫째, 가정에서의 종교교육과 셋째, 사회에서의 인간관계 교육을 소흘이 한 결과다.
가정에서의 가치관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면 타인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도덕적 가치관 교육이 결핍되어 있고 인간관계가 서툴다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아무리 스트레이트 A를 받고 일류 대학을 졸업했다
손 치더라도 미 주류 사회나 국제사회에서는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다.
미주에서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이 어렵게 받은 일류대학 졸업장이 미 주류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먼저 전인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늦기 십상이다.
유대인은 위의 세 가지 교육을 골고루 시키되 그 중에서도 특히 가정교육의 종교교육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정교육의 교과서는 무엇인가? ?토라(모세오경)?를 중심으로 한 탈무드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천재교육의 비결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마땅히 신구약 성경이 가정교육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셋째, 수직문화를 가르쳐 참을성과 도전 의식을 강하게 하여야 한다.
한국인에게는 약점 만 있는가? 아니다. 다른 민족보다 더 나은 장점도 많다.
가산을 정리해서라도 자녀를 교육시키겠다는 높은 교육열. 목표를 향한 강한 투지. 다양한 재주. 이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무형의 값비싼 자산이다. 이 자산이 어떻게 국제적 무대에서 유대인처럼 빛을 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먼저 성서적 가치관이 정립된 인간교육을 해야 한다. 이는 오직 가정의 종교교육 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원만한 인관관계를 소유한 인재 양성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의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교육의 바탕 위에 한국인의 교육적 장점을 개발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멀지 않아 세계에 우뚝 선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지 않겠는가?
교회 교육의 문제점
1. 한인 2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90-95%가 교회를 떠난다.
그 원인은 90% 이상 교회교육이 실패한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교회 교육의 실패 원인은?
이유 :
1. 부모들이 교회학교 교육에만 의존하였다.
2. 자녀들이 마음의 밭을 황폐화 시키는 수평문화에 물들어 있다.
3. 교회교육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하나님 말씀이나 기도 중심보다는 재미 위주의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나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약하다.
분석 : 한국 교회는 주일학교에 천문학적인 교회 헌금과 인력을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90% 이상 실패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가정 중심의 쉐마교육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쉐마의 성경적 원리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말씀의 제자로 삼지 못하고 교회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원래 성경적인 자녀교육은 교회교육 위주가 아니라 가정교육 중심이다.
기독교교육의 역사적 측면에서도 주일학교는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버려진 부랑아들이 많아 1780년 글로스터에 살던 레이크(Robert Raikes, 1735-1811)란
사람이 메레딧 여사의 부엌에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발전하여 된 것이다.
이는 차선책은 될 수 있지만 근본 대안은 될 수가 없다.
둘째, 인성교육의 원리인 수직문화 교육을 멀리하고 수평문화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수평문화와 수직문화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할 때 설명함). 수평문화에 오염되면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설사 받아들였다하여도 열매 맺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7, 18-23; 마 4:1-25; 눅 8:4-15)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마음밭이
돌작밭이나 길가밭 혹은 가시덤불 밭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직문화와 EQ교육을 시켜야 자녀들이 마음밭이 옥토가 된다.
이것이 바로 전도하기 쉬운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pre-evangelism).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교회가 1970년 이전에는 교회학교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당시에는 TV나 전자매체의 발달이 안 되어 한국이나 미국 사회 전반적으로 수직문화가 강하고 수평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평문화가 만연된 현대에는 힘들다.
대안 :
첫째, 교회학교교육에만 매달리지 말고 유대인의 성경적 쉐마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학교에 투자하는 천문학적인 헌금을 쉐마에 투자해야 한다.
부모가 100%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기 위하여 90%이상을 쉐마에 투자하고 10%만 교회학교에 투자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의 제자 삼는 운동을 벌려야 한다.
실제로 구약 시대의 유대인 아버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그리고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각 가정의 아버지에게 공중 예배에 대한 지식, 절기를 지키는 방법, 말씀 해석,
선민으로서의 의무, 도덕적 및 윤리적 권면 등을 가르쳤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목회자는 교회에서 부모들을 가르치고 부모들은 집에 가서 자녀를 가르치는 모델이 성서적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교육’은 이미 구약 유대인의 교육 모델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자녀 교육은 부모 교육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리고 교회교육은 차선책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실제로 칼빈신학교가 있는 그랜드 래피드의 화란계 청교도들은 유대인처럼 가정 중심의 기독교교육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신앙전수에 성공하고 있다.
둘째, 수직문화를 가르치고 수평문화를 차단해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직문화와 수평문화에 대하여 설명해야 한다.
1. 수직 문화(Vertical Culture)
수직 문화는 ‘심연 문화’ 혹은 ‘뿌리 문화’(the Deep Culture or Roots Culture)라고도 한다.
이 문화는 한 인종의 뿌리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그리고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인 문화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요소들이 수직 문화를 형성하는가?
종교, 전통(관습), 효도, 사상, 이상, 언어, 고전 문학이나 고전 음악, 철학 및 사상 그리고 역사 등이다.
이러한 수직 문화의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이며, 인간이 생각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수직 문화는 유형?무형의 교육을 통하여 대를 이어 가면서 물려주는 인간의 정신적인 유산을 말한다.
이 유형?무형의 교육 내용은 인간의 정신적인 것, 사상적인 것, 그리고 고전적인 가치들을 말한다.
수직 문화는 외형적이면서도 일시적인 가치들과 대조되며, 인간의 내면적인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마음의 양식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 철학적, 이상적인 가치(Idealism) 및 지혜이다.
수직 문화가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라면, 수평 문화는 일시적으로 필요한 지식이다.
그리고 수직 문화는 인생을 살면서 터득하는 지혜 혹은 고난을 겪으면서 쌓이는 지혜 및 깊은 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직 문화를 철학적인 견해(Axiology-Aesthetics and Ethics: 심미학적 및 윤리학적 가치들)로는 인간의 내면적인 가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Morris & Pai, 1976). 따라서 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 전통적인 수직 문화를 고수한다면 유대인처럼
세대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2. 수평 문화(Horizontal Culture)
수평 문화는 깊은 사상이 없는, 표면에 나타난 문화이며, 이를 표면 문화(Surface Culture)라고도 한다.
수직 문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수평 문화는 일시적이면서도 인간의
외형적인 눈에 보여지고 만져지는 형이하학적인 가치들이다.
예를 들면, 물질, 권력, 명예, 성(sex), IQ 위주의 현대 학문 및 과학, 외형적인 생김새나 유행, 즉 유행가, 청바지 문화, 그리고
햄버거 문화 등 전통적인 가치들보다는 일시적인 만족과 쾌락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싫증이 나면 곧 다른 것으로 항상 바뀌는
문화이다. 수직 문화가 “인간은 무엇이고 왜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인생이 사는 의미를 찾는 문화라면 수평 문화는 삶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인간의 육의 재미를 찾는 문화이다. 즉, 기분을 좌우하는 충동문화일 수 있다.
수평 문화를 철학적인 견해(Axiology-Aesthetics and Ethics: 심미학적 및 윤리학적 가치들)로는 인간의 외형적인 가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Morris & Pai, 1976). 그리고 미국과 같은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인종 문화 외에 주변의 다른
인종 문화들을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수평 문화는 할리우드나 압구정동 문화이다. 이는 땅의 것에 가치를 두는 것들이다.
인생이 사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재미를 찾는 문화이다.
이러한 수평 문화는 미국처럼 선진국일수록 강하다. 육을 고도로 자극하는 음악, TV, 퇴폐 오락 등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랍비들도 다른 나라에 거주할 때보다 미국에서의 자녀 교육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따라서 인간이 수평 문화에 물들게 되면, 수직 문화를 잃게 된다.
수직 문화를 잃게 되면 1세대와 2세대 사이에 세대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유대인이었던 바울도 이 세대, 즉 이 땅의 수평 문화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롬 12:2).
1. 수직 문화와 수평 문화의 비유
A. 수직 문화는 신앙을 담는 그릇이다
수직 문화와 수평 문화를 바다의 파도에 비유해 보자. 고요한 바닷물에 폭풍우가 몰아치면 심한 파도가 일기 시작한다.
그 파도가 칠 때 움직이는 물은 표면에 있는 물이다.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바다 속 깊은 곳의 물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수평 문화에 젖은 사람은 인생의 외풍이 칠 때 파도에 따라 움직이는 바닷물처럼 자신의 주체 의식이나 신앙이 쉽게 움직이고
변질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의 외풍’이란 이 땅의 쾌락일 수도 있고, 고난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인생의 좁은 길을 택하지 않고 넓은 길을 택한다.
수직 문화에 젖은 사람은 인생의 외풍이 아무리 몰아닥쳐도 깊은 곳의 바닷물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주체 의식이나
신앙에 변동이 없다. 따라서 수직 문화가 강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리 육의 수평 문화가 유혹한다하더라도 또한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수직 문화가 강한 사람은 심지가 깊고 의지도 강하다.
반대로 수평 문화가 강한 사람은 심지가 얕으며 의지도 약하다. 수평 문화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하여도 육의 유혹에 약하다.
다시 말하면, 수평 문화에 젖은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쉽게 받지만 수직 문화에 젖은 사람은 환경의 지배에 초연하다.
이런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한다(마 7:25). 반대로 수평 문화에 젖은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마 7:26-27).
수직 문화가 강한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은 내재적 종교성과의 관계도 현저히 높다.
반대로 수평 문화가 강한 사람은 바리세인과 같은 외재적 종교성과의 관계가 현저히 높다(현용수, 1990, 1999).
수평 문화를 표면 문화라고도 하며, 수직 문화를 심연 문화 혹은 뿌리 문화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려서부터 수직 문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어떤 이는 예수님과 수직 문화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고 묻는다.
중요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수직 문화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가?
예수님과 수직 문화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과 수직 문화는 그 존재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오신 메시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직 문화는 한 인간의 신앙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한 인간이나 한 민족은 자신들이 준비한 그릇만큼 쓰임 받는다.
우리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도 그 개인이나 민족이 준비한 그릇만큼 일어나고 지속되고 또 쓰임 받는다.
수직 문화가 크고 견고하고 아름답게 준비된 그릇은 예수님을 믿어도 크고 견고하고 아름답게 사용되지만 그 그릇이 작고
부실하고 추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예수님을 믿어도 그 정도 밖에 사용될 수 없다.
수직 문화를 한 인간의 그릇에 비유하는 것은 단지 종교적 신앙을 담는 그릇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학문의 세계, 정치, 사업 및
예술 등 다방면의 삶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직 문화에 강한 사람은 학문을 하여도 자신의 전공을 깊고 넓게 연구하며,
설사 노벨상을 탄다하여도 겸손하며 현실이나 인기에 타협하지 않고 평생 자신의 전공분야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수직 문화에 강한 사람은 사업을 한다하여도 큰 사업을 오래할 뿐만 아니라 큰 돈을 벌어도 교만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큰 돈을 자신의 육을 위하여 낭비하지 아니하며 오래 간직할 수 있다.
항시 변하는 인기나 물질, 권력이나 명예 같은 눈에 보이는 수평문화 즉,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즉 수직 문화는 학문을 담는 그릇이나 혹은 물질을 담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수직 문화 교육은 그만큼 중요하다.
수직 문화에 속하는 유대인은 어떻게 보면 고생을 사서하는 사람들이다.
왜냐 하면 21세기에 살면서도 쉽고, 편하고, 육을 자극하는 외풍에 너무나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넓은 길을 택하지 않고 열조들이 걸어갔던 좁은 길을 아직도 택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이 정성을 다하여 신본주의 신앙을 지키려는 의지만은
본받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만큼 수평 문화에 관계 없이 굳건한 신앙을 지킬 수 있다.
바울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가 남달리 유대주의에 심취하여 하나님께 열심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남보다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즉 그의 수직 문화의 그릇이 남달리 크고 견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크고 견고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쓰임받았다.
따라서 부모가 자녀를 낳으면 자녀를 수직 문화가 강한 사람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숫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도 랍비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대부분의 랍비들은 성경에서 몸에 상처 내는 일을 피하라고 했기 때문에 수염을 기른다.
따라서 수염을 기른 사람은 성경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는 랍비로 보기 쉽다.
그러나 숫양이 수염을 길렀다고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즉 겉이 같다고 속이 같을 수는 없다.
여기에서 숫양의 겉은 수평 문화를, 랍비의 속은 수직 문화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의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내면적인 깊고 넓은 사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사상이 자자손손 전수되는가?
B. 자녀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키워라
이스라엘의 공립초등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체벌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성경공부 시간에는 체벌을 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공부 중에 어느 때에 체벌이 가능한가? 토라(성경) 공부 시간에 어린 학생들이 성경을 읽게 한다.
그들은 매일 읽어야 할 성경의 할당량이 있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는 각 학생에게 다가가 “너는 이 내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 때 학생이 예를 들어 출애굽기 12장을 읽고 “저는 우리 조상이 애굽에서 그 혹독한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유월절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나도 크면 모세처럼 하나님과 우리민족을 위하여 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좋아!”하고는
다음 학생에게 다가간다. 이때 만약 다음 학생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면, “너는 왜 생각이 없느냐?
생각 좀 해라!”고 다그치며 매를 때린다.
유대인은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민족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에 관하여
넓고 깊게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자녀를 매사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똑똑하고 주체의식이 강한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세계 역사 속에서 인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훌륭한 철학자들; 칸트, 키케골, 이퇴계 선생 같은 분들도 모두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은 바쁜 일과 속에서도 시간만 나면 산 속의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막 1:35, 마 16:23).
세상 소리가 안 들리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사역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시고 쉬셨다.
깊고 넓은 사상과 철학은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한적한 곳과 하나님과 자연과의 대화에서 나온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불란서의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so I am.)"라고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각도 깊은 생각이 있고 얕은 생각이 있다.
넓은 생각이 있고 좁은 생각이 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있고 적은 생각이 있다.
수직 문화의 사람은 인생을 깊게, 넓게 그리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수직 문화의 사람은 생각의 질(質)이나 양(量)에서 우수하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인생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수평 문화에 물든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얕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넓게 생각하지를 않고 좁게 생각한다. 수평 문화의 사람은 생각의 질(質)이나 양(量)에서도 열등하다.
그리고 형이하학적인 인생의 육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현대에는 교회에서도 재미가 없으면 자녀들이 교회에 안 나오려고 한다.
그 결과 교회학교 교사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하나님 말씀 위주의 교육에서 아이들의 흥미에 맞도록 얄팍한 재미 위주의
프로그램만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교사는 “하나님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까”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추세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해 하실까.
물론 인생의 의미를 찾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으면서 재미도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즉, 교회에서도 교수법을 개발하여 재미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말씀 위주로 가르쳐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기독교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학생들도 한번 하나님을 체험하면 인생의 육을 자극하는 재미를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교사의 필수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기도생활이다.
자녀 교육의 문제점은 해외 선교사 가정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원주민 선교에만 너무 주력한 나머지 원주민을 위해서는 교회와 학교도 세우고 우물도 파주며 열심을 다하지만,
정작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자녀들에게는 말씀 전수를 소흘히 하여 자녀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고 가문이 망하는 경우가 많다.
선교사 자녀들이 한국인인지 원주민인지 제3세계인인지 어정쩡하다. 정체성(Identity)이 없다. 민족적 소속감(Belongness)이 없다.
부모에게나 자녀에게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 결과 한국인 선교지의 이방 선교는 당대에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여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많이 하는 것이 흠이다.
따라서 해외 선교사라 하여도 먼저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나머지 여력으로 이방 선교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만약 1세 선교사 부부가 4명의 자녀를 두었다면 아버지 대를 이어 4명의 2대 원주민 선교사를 양육할 수 있다.
2대 원주민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1대 아버지보다도 더 좋은 자격을 갖춘 선교사가 될 수 있다.
하나님 편에서도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따라서 우리의 말씀 전수(전도)의 우선 대상은 수평적 이방인 즉, 이웃이나 세계 선교 이전에 수직적인 내 가정에 있는 내 자녀들
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남은 전도하면서 우리 집 아이는 세속 문화에 빼앗긴다면 어떻게 주님의 책망을 면하겠는가?
영원한 천국에 가서 이산가족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리고 자녀 교육에 실패하면 먼 훗날 이웃 전도도 세계 선교도 있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 정통파 유대인은 어떻게 수평문화를 차단하는가?
첫째, 가정에 TV가 없다. 새벽부터 잠잘 때까지 철저하게 세속과 구별되게 사는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한다.
2. 그나마 남은 10% 2세도 한인교회를 떠나는 원인은?
이유 :
1. 미주 한인
1세와 2세의 신앙 생활 사이에 심한 세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2. 미주 한인 1세들이 2세들에게 10%라도 복음을 전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한국인으로 키우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분석 : 10% 정도라도 2세들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부모 교회를 싫어한다.
타민족 기독교인처럼 여겨진다. 어떤 경우에는 타민족 기독교인들보다 더 비판적이고 냉정하다.
왜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데도 미주 한인 1세와 2세의 신앙 생활 사이에 심한 세대 차이가 나는가?
그 이유는 미주 한인 1세들이 2세들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데에는 성공했더라도 한국인으로 키우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한국인 기독교인이 아니고 미국인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왜 한국인 1세가 2세를 한국인 기독교인으로 키우는 데 실패했는가?
한국인 부모 문화를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전수는 10%라도 했는데 문화전수는 거의 실패했다는 말이다.
즉 한국인 2세들이 한국인 1세가 사용하는 한국어와 한국인의 전통을 먼저 배워 성숙한 한국인이 된 다음 예수님을 믿어야
성숙한 한국인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한국인으로 키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자녀 세대와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안 :
효도교육과 한국인의 수직문화 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효도교육은 부모세대에 순종하고 존경하게 하는 교육이고, 수직문화는 한국인을 더욱 한국인답게 해준다.
그리고 교육의 방법도 교회나 한인커뮤니티 행사에 3대가 함께 참석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1) 왜 한국인의 정체성이 약하면 내면적 종교성(Intrinsic Religiosity)이 약해지는가?
1세 부모들은 자녀를 한국인으로 만들지 못함으로 두 가지를 잃었다.
첫째,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2세 중 90% 이상이 대학을 졸업하면 교회를 떠난다.
그 이유는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의 정체성이 약하면 내면적 종교성(Intrinsic Religiosity)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2세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이 약하면 복음화율도 약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헌신도도 약하다(현용수, 문화와 종교교육,
둘째, 설사 2세 중 10% 정도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인교회를 떠난다. 얼마나 큰 손실인가?
유대인은 어떻게 자자손손 토라를 전수하는 데, 그리고 자신의 회당을 지키는 데 성공했는가?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먼저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역사를 가르쳐 유대인으로 키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만 잘 믿으면 그만이지 왜 민족의 문화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세대 차이 없는 부모세대의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전통의 전수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문화는 복음이란 교육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각자 개성이나 은사를 주신 것처럼 각자 혹은 민족의 문화가 다르다(고전 12장).
그 뿐 아니라 동일한 기독교 신앙 생활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독교 문화가 교단끼리 혹은 민족끼리 서로 다르다.
똑 같은 예수님을 믿는데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그리고 순복음 교단의 문화가 다르다.
건축 양식, 예전 및 조직과 명칭 및 교단법도 다르다.
한국민족 내에서의 기독교 문화들이 이렇게 다른데 다른 민족의 기독교문화는 얼마나 다르겠는가?
문제는 어느 문화가 제일 좋다는 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고 각자 자신들의 신앙을 전수하는 방법, 형식 즉, 그릇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자 1세들이 가진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자신들의 문화에 담아 전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복음을 담는 문화라는 그릇 없이 대를 잇는 신앙전수는 불가능하다.
문화라는 그릇이 유대인처럼 더 조직적이고 구체적일수록 복음을 담는 데 더 효과적이고 더 크게 더 넓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2세에게 신앙이란 내용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미주 한인 2세들이 부모교회를 전수받기 위해서는 부모 세대의 문화에 세대차이 없이 젖어 있어야 한다.
‘부모 세대의 문화’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잘 다듬어지지 않은 한국 문화와 둘째, 잘 다듬어진 한국 문화 즉, 한국인의 인성 교육인 신언서판(身言書判) 문화다.
먼저 한국인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나 이왕이면 잘 다듬어진 한국인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인이라고 다 좋은 한국인이 아니고 사람다운 한국인이 더 좋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도 유대인이라고 다 좋은 유대인이 아니고 사람다운 유대인이 더 좋은 유대인이다.
예를 들면, 한국어, 한국인의 예의범절, 효사상, 족보 이야기 및 한국 역사 등.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사는 부모들. 남 보는 데서 키스는커녕 포옹한번 안 해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사는 부모들. 그들의 문화는 무엇인가?
한국의 신언서판 문화다. 왜 2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고 남 보는 데서 키스를 많이 해도 부모세대보다
이혼율이 높은가? 신언서판 문화를 안받았기 때문이다.
한인 2세들이 왜 한국 부모와 부모의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가?
그들에 의하면, 1세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리고 한국의 것만 너무 고집하기 때문에 등으로 답변한다.
그들이 왜 상처를 많이 받았는가? 물론 1세들의 잘못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 문화에 물든 2세들이 한국 1세들의 강한 문화와
충돌 할 때 받은 아픈 상처들이다. 만약 2세들이 부모의 문화에 온전히 동화되었다면 부모로부터 상처도 없거니와 부모나 부모의
교회를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 부모는 자녀를 기독교인 이전에 먼저 좋은 한국인으로 키워야 한다.
결론은 무엇인가? 한국인 1세 기독교인이 피땀 흘려 가꾼 교회를 2세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들이 철들기 전부터
한국인다운 예절 바른 한국인으로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성이 발달하여 철든 후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한국인의
신언서판식 인성 교육을 병행하며 키워야 한다. (물론 성장한 자녀에게는 복음이 먼저 들어가면 교육이 더 쉬워질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복음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제자 삼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2) 한국인 기독교인은 왜 자녀에게 족보도 가르쳐야 하는가?
자녀를 한국인으로 키우기 위하여 한국의 수직문화를 소개하면 한국의 전통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무리가 없지만 한국인의 역사는
비기독교적 역사와 전통인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가르쳐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유대인은 자기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우상 만드는 사업을 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역사도 가르친다. 즉 비기독교적 뿌리의 역사도 가르친다.
둘째, 예수님도 분명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의 육적 족보가 있다. 마
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로 소개하지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서
시작하여 누구 이상은 누구요, 누구 이상은 누구요 등으로 아담과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즉 불신자의 족보까지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녀인 한국인 기독교인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육적 족보(뿌리)는
우상 섬기던 조상들의 뿌리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누구냐 하는
육적 뿌리가 확실하고 뚜렷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뚜렷하게 믿을 수 있다. 수직문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한국인의 인성교육의 교본이 왜 2세들에게도 필요한가?
명심보감이나 대학에 나오는 내용은 종교가 아니라 동양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어부지리(漁父之利), 온고지신(溫故知新) 등의 고사성어(古事成語)는
인생을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성경으로 얘기하면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책이다.
하나님은 동양에도 특수계시인 성경이 전해지기 전에 일반적인 선악을 구별하게 하는 양심과 보편적 지혜를 주셨다(롬 1:19-20, 2:14-15). 예를 들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고사 성어는 “많이 아는 자가 근심도 많다”라는 뜻이다.
이는 전도서 1장18절의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한다.”와 비슷하다.
현재 옛날 어머니들이 초등학교도 안 다녔지만 대학 나온 신세대 며느리보다 더 지혜로운 이유도 그들이 한자 문화권 속에서
익힌 지혜교육 덕분이다. 따라서 한자 교육은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부족한 시대에 자녀가 선악을 구별하고 삶의 지혜를
얻게 하는 인성교육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넷째, 한국인 기독교인에게 우상 숭배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도 기독교역사가 100년이 지났다.
따라서 한국인 기독교인 1세는 서양의 기독교역사나 서양의 위인만 가르칠 것이 아니고 먼저 한국기독교역사를 2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위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순교의 열정으로 신앙을 지켰던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 그리고
박윤선 박사, 박형룡 박사 그리고 한경직 목사의 선비적 양반 한국인 기독교인의 기품을 가르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초기 한국인 선교사들이 업적을 연구하여 그들의 고난과 위업도 2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발굴하면 얼마든지 많다.
3. 미 주류 신학교의 한인학생들이 졸업 후 대부분 목회 사역을 포기 하는데 그 원인과 대책은 무엇인가?
이유 : 1. 참을성이 약하고 도전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2.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부르심(call)에 대한 사명감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 지도력과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석: 참을성이 약하고 도전의식이 약한 이유는 한국인의 수직 문화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수직 문화가 약하면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부르심(call)에 대한 사명감도 약하게 된다
(Biola University, 1990).
대안 : 수직 문화를 철저히 가르쳐 참을성이 강하고 도전의식이 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수직 문화가 강하면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부르심(call)에 대한 사명감도 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큰 그릇으로 만들어 지도력이 발달되고 지혜가 많아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한인 1세 목회자들이 다른 민족 사람들보다 목회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인 특유의 끈기 근성이다.
그리고 지혜와 리더십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그들이 받았던 철저한 한국인의 수직문화 교육과 고난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2세 지도자들은 1세 지도자들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웅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나를 겸손히
배워야 한다. 한국인에게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점이 더 많다.
세계 기독교인은 한국 교회로부터 배우려고 하는데 왜 2세들은 1세 교회를 비판만 하고 떠나려 하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4. 미 주류신학교의 한인 신학생들이 30% 이상인데 왜 그들이 한인1세 교회 사역을 기피하는가?
이유 : 1세와 2세와의 세대차이가 심하기 때문이다. 즉 2세들은 1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한인교회의 2세 목장을 한국인을 사랑하는 선교사적 마음으로 사역하지도 않는다.
분석: 이 문제는 한국인 1세의 잘못을 들추기 보다는 먼저 1세와 2세와의 세대차이 측면에서 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는 한국교회는 2세 목회자가 1세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문제가 없는데 왜 미국에서는 안 되는가?
또한 같은 미국인데도 유대인은 1세들의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1세들을 존경하고 한 회당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한국인
2세들은 한국인 교회를 떠나는가? 따라서 한국인 2세 사역자들은 왜 부모세대를 싫어하는가에 대한 답을 써야 한다.
그 첫째 이유는, 한국인 1세가 2세를 한국인으로 키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역사의식 교육을 안 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효도교육을 안 시켰기 때문이다.
대안 :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의 수직문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 수직문화 교육 속에 역사의식 교육과 민족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효도교육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한국인 1세는 2세들에게 한국인 부모를 존경하고 후대를 사랑하는 민족의식 있는 자녀들로 키워야 한다.
복음만 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예를 들면서 한국민족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자녀들로 키우면서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에 모세, 다윗, 예레미아, 예수님 및 바울 등 애국자가 얼마나 많은가? (더 자세한 내용은 2번 질문의 분석 및 대안 참조)
어떤 이는 다문화권에서 살면서 민족주의는 타민족과 함께 사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혼동해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적 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을 다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의 순서가 먼저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타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이고, 국수주의는 자기 민족만이 최고라는 자만심 때문에 타민족을 업신여기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 예로 과거 독일이나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세계 1, 2차 전쟁을 일으켜 이웃 나라에 커다란 아픔을 주었다.
따라서 한국인 기독교인은 바울처럼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따르고 국수주의는 피해야 한다.
5. 한국어 목회(KM)와 영어 목회(EM)가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이유: 한국어 목회(KM)와 영어 목회(EM)의 목적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동일하지만 한국 민족 공동체로서 한국인 교회라는 데는
서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 목회(EM)가 한국인 기독교인임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한국 커뮤니티에 공헌하려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KM과 EM의 문화 및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의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분석 및 대안: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2세에게 어느 언어, 한국어 혹은 영어로 설교를 해야 하나?”란 질문에 답해야 한다.
미주 한국인 2세가 한국말을 잘해서 모두 한국말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어에는 그 민족의
철학과 문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통파 유대인은 언어뿐만 아니라 전통 및 성경 교육에 세대차이가 없다. 이것이 이상형이다.
그러나 미주 한인의 현실은 한국어를 모르고 영어만 하는 자녀들이 많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복음을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적 측면에서 풀어야 한다. 복음 전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수단을 사용하셨다. 유대인에게 히브리어를 사용하셨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사용하는 동일한 언어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업을 예로 들면서 복음을 설명하셨다.
어부인 베드로에게는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에게는 “생수" 란 말씀을 사용하여 피전도자가 이해하기
쉬운 교육방법들을 사용하셨다. 우리의 영어권 2세 교육도 선교적 차원에서 그들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처음에 꼭 영어 목회를 권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영어권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 한국의 뿌리를 모른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된다.
또한 영어로는 한국 문화를 가르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심지어 백인들도 한국어를 사랑하고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뉴저지에서 집회할 때 만난 국제 결혼한 가족이 있다. 여자는 한국인이고 남자는 희랍계 미국인이다.
두 사람 사이에 7살 난 백인처럼 생긴 예쁜 딸이 있었다. 어머니가 이사를 와서 현제 다니고 있는 한국 교회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한국계 2세들이 영어로 “You are American. Why don't you go to American Church. This is Korean Church
.(너는 미국인인데 미국교회를 가야지. 여기는 한국교회야.)" 그 때 이 아이는 한국말로 이렇게 대꾸했다. “너희들 한국말 할 줄 아니?
너희는 한국말도 못하면서 한국인이라고 하니? 나는 한국말 잘 한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나 미국교회에 가라!”
가장 큰 문제는 언어지만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2세들에게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효자로 키우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한국민족이나 전통을 싫어하면 소용없다.
필자는 미국에서 평상시 생활 한복을 입는다.
오하이오에서 집회 시 교육부흥회는 절기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한국의 절기 때 입는 한복을 입도록 권했다.
그런데 한국인보다도 먼저 한복을 입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국제 결혼한 백인이었다. 그리고 한국말로 인사했다.
그는 한국인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강원도 예수원에서 일평생 선교를 하다가 작년(2002년)에 작고한 미국인
대천덕(Toray) 신부님도 평생 한복을 입고 설교하셨다.
문제는 영어냐 한국말이냐 하는 의사 전달의 형식(form)이나 수단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형식 속에 담겨진 내용(contents)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히브리어나 희랍말을 유대인이나 희랍사람들보다 모르고도 한국말만 사용하여 유대 역사나
바울의 희랍문화 배경을 잘 안다. 또한 그들이 섬겼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내용에 대한 뚜렷한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1세들이 2세들에게 영어를 사용한다 해도 뿌리를 강조하는 즉, 절기마다 3.1운동이나 광복절 절기 등의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민족적 정신적 아이덴티티 교육을 시키며 이와 함께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비록 한국말의 메시지가 아닐지라도 그들의 혼적 아이덴티티의 그릇 속에 복음의 진리가 깊고 넓게 수용될 수 있다.
그 후 그들의 믿음이 자라면서 그들 스스로 영적 뿌리 뿐 아니라 육적 뿌리도 찾게 된다.
이때에 그들은 한국말도 배우고 싶고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싹틀 것이다.
이때에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을 잘 지도하여 한국말도 배우게 하고 한국문화를 가르쳐 한국적 기독교인으로 양육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오히려 복음이 들어가기 전부터 한국말을 강요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쉽다.
문제는 영어냐 한국어냐는 커뮤니케이션의 매체(form)보다도, 영어권의 목회자들 스스로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한국적인
아이덴티티 의식과 복음적 그리고 민족적 사명감이 있느냐(contents) 하는 것이 우선이고 언어는 2차적인 요구이다.
그런 면에서 2세 목회자들의 새로운 목회철학과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문화는 몇 달 만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며 전이 되는 과정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2세들만의 단독 목회 뿐 아니라 1세 목회 내에서의 2세 영어 목회(교육부)에서도 2세 종교 교육을 처음에는
그들이 알아듣는 영어로 시작하여 몇 년 후에는 한국말 예배도 참석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세대차이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처음 유아 때부터 한국말로 교육하면 장차
이러한 수고를 덜 수도 있기 때문에 더 권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 가정에서 두 가지 문화 즉,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가 섞이지 못하면 평행선으로 가다가 아이들이 성장한 후 갈라지게
된다(한국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비슷한 세대차이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들 내에서도 한 지붕 아래 두 문화권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교육 목적을 갖고 평행선을 가다가 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보면서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두 문화를 동시에 수용하며 종교 교육을 동시에 시작하지만, 점점 하나의 뿌리를 바탕으로 한 문화권의 한 목적의
합일점을 찾도록 노력하면서, 미주한국교계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1세 목회자들이 넓은 아량과 인내를 갖고 선교적 차원에서 2세 목회자들을 양성하며 그들을 품에 안고 격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이어 받을 내일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의 수직문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 수직문화 교육 속에 역사의식 교육과 민족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효도교육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한국인 1세는 2세들에게 한국인 부모를 존경하고 후대를 사랑하는 민족의식 있는 자녀들로 키워야 한다.
복음만 전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한국민족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자녀들로 키워야 한다.
6. 왜 많이 배우고 똑똑한 2세 지도자들이 많이 있는데도 2세 교회들이 성장하는데 문제가 있는가?
이유 : 그것은 1세들이 갖고 있는 영성과 끈기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2세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IQ교육은 수직문화가 아니고 수평문화다. IQ교육은 똑똑이는 만드는데 지혜자는 못 만든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웠던 수직 문화가 약하면 신앙을 담는 그릇이 크고 튼튼하지 못하다.
여기에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교육방법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 한국인 1세들이 큰 교회를 이루는 이유는 그들이 영어와 학벌은
2세만 못하여도 강한 수직문화 교육과 고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강한 영성과 끈기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지혜가 있다.
분석 : 수평문화에 물들면 모래알처럼 모이기도 힘들지만 모여도 끈끈하게 결속시키는 단결력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수평문화는 인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1세 교회들이 싸움은 많이 하면서도 교회에서 서로 단결력이 세고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수직문화가 강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싸우고 분열한다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애정과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2세들의 특성은 부부 생활을 하다가도 조그만 문제만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Leave me alone, Please!"한다.
그리고 이혼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금식을 하던 서로 밤새워 다퉈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열성이 적다.
한국인이 아시아권에서 30대의 이혼율이 가장 높은 이유가 여기 있다.
반면 1세들은 아무리 다투고 싸워도 죽을 때까지 웬만해서는 이혼하지 않는다. 60대 이상 한국인이 아시아권에서 가장 이혼율이
적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2세들은 학교교육 위주로 생활해 왔다. 학교교육은 IQ교육이이다.
2세들이 잘하는 영어나 희랍어나 히브리어도 IQ교육에 속한다. 이 IQ교육은 수평문화이다.
수평문화에 속한 지식교육만으로는 지혜교육을 이길 수가 없다. 따라서 신학도 IQ교육 즉 수평문화라는 사고의 틀 속에서는
사명이 아닌 직업인으로 공부하기 쉽다. 그럴 경우 조건이 안 맞으면 오랫동안 견딜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상대하는 교인들 역시 그런 사고의 틀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1세들이 갖는 끈끈한 응집력이 약하다.
수평문화의 속성 중 하나가 쉽게 모이고 쉽게 헤어진다. 즉, 행동이 충동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다하더라도 극심한 고난 속에서 순교하는 신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3번 문제의 분석 및 대안 참조)
대안 :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민족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소속감이 든든해지고 자긍심이 높아져 내면적 자신감과 함께 끈기와 참을성이 생긴다.
수직문화를 잘 교육시키어 크고 튼튼한 그릇을 만든 후 성경 교육을 잘 시키어야 지혜가 발달하여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포기하기 보다는 기도와 인내로 이를 이겨낼 수 있다.
따라서 수직 문화는 인간의 내면적 그릇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교육의 형식은 인간의 외면적 그릇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간의 내면적 그릇은 그의 성품과 인격, 즉 내면적 질(質)을 말하고 인간의 외면적 그릇은 그의 모양 및 예의, 즉 외면적 형태를
말한다. 잘 준비된 크고, 흠없고, 아름답고, 튼튼한 그릇을 준비해야 성령을 받아도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다.
구약의 모세나 신약의 바울이 좋은 예이다. 그들은 수직문화교육이 잘 되어 있고,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의식이 있고 그릇이
다른 이들보다 더 컷기 때문에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교회교육의 문제점
1. 왜 한인 2세들이 1세들의 미주 이민 100주년 행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이유 : 한국인 1세와 2세와의 세대 차이 때문이다. 부모세대에 관심이 없다.
IQ교육과 수평문화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하게 한다. 이것은 한국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약하게 한다.
분석 : 왜 세대 차이가 나는가? 한국인 1세는 2세들을 한국인으로 키우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자녀들을 자자손손 세대 차이 없이 유대인으로 키우는데 성공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모님들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대안 : 효도교육과 수직문화 교육을 시켜 한국인 기독교인으로 키워야 한다.
효도교육은 부모세대에 순종하고 존경하게 하는 교육이고, 수직문화는 한국인을 더욱 한국인답게 해준다.
그리고 교육의 방법도 교회나 한인커뮤니티 행사에 3대가 함께 참석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미국의 한인 단체들이 3.1절이나 광복절 행사를 보면 점점 60대 이상들만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끝난다.
이제 그들이 돌아가시면 그 행사는 끝이다. 유대인은 어떻게 하여 자자손손 말씀과 전통 문화에 세대 차이가 없는가?
그들은 절기 때에 모든 생업을 중지하고 어린이에서 백발노인들까지 3대 혹은 4대가 함께 모여 행사를 치른다.
이런 전통은 가정에서 회당에서 혹은 커뮤니티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그들은 세대 차이가 없다. 우리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2. 왜 한인 2세들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결속력이 부족한가? 그리고 민족의식이 약한가?
이유 : 한인 2세가 미국의 주류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 기독교인으로 키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안 : 유대인처럼 효도교육과 수직문화 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그리고 한국민족의 고난의 역사교육을 많이 시키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갖게 하고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이 붕괴하는 경우를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1) 지도급의 창조적인 소수(the creative minority)가 창조의 힘(creative power)을 잃고 단순히 ‘민중 위에’ 군림하는 소수
(a merely dominant minority)가 되었을 때이다.
즉, 소수의 창조적인 리더들이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지 못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었을 때였다.
2) 다수 쪽의 충성심과 이와 유사한 지지 현상이 약화되었을 때 즉, 국민 다수가 갖고 있던 민족주의 혹은 애국심이 없어졌을 때이다.
3) 전체에 속한 사회의 사회적 결속력이 계속적으로 약화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토인비가 지적한, 멸망한 문명의 이 세 가지 특성들을 모두 배격하였다.
첫째, 유대인 다수를 지도하는 창조적인 소수 지도자들은 항상 창조의 힘이 넘쳤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항상 자기 민족에게 불멸의 꿈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을 지혜로 인도하지 결코 칼로 다스리지 않았다. 즉, 독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칼을 잡은 사람들이 아니고 신본주의 사상이 투철한 지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대인 다수 백성은 민족주의가 강하고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는 랍비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강하여
그들의 결정을 항상 따랐다.
셋째, 유대인 사회 전체는 항상 단결하는 결속력이 강하였다.
유대인은 어떻게 수천 년 동안 그들의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위의 세 가지 요인을 갖출 수 있었는가?
여기에서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지도자들의 창조적인 힘’이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 혹은 민족주의’ 그리고 ‘민족의 굳센
단결력’의 원천이 되는 그들의 토라(양피지에 붓으로 쓴 두루마리 성경)와 탈무드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상이 없는 민족은 일시적으로 흥할 수는 있더라도 곧 망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 개인이나 민족에게 정신적인 사상이 없으면 땅의 것을 잡을 수 있는 지구력이 약해진다.
사상으로 뭉친 민족이 애국심도 강하고 단결력도 강하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상의 ‘질과 양(quality and quantity)’도
문제가 된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제일주의 사상과 종말론적 메시아 사상은 그들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또 다른 문제점
왜 중국교회나 일본교회가 이민초창기에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퇴해 있는가?
이유 : 중국교회나 일본교회 모두 세대 차이를 극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분석 : 중국교회나 일본교회 모두 이민 초기에는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그럴지라도 양 커뮤니티 교회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양 커뮤니티 교회가 쇠퇴한 이유의 공통점은
첫째, 양 커뮤니티 모두 이민 초기의 고난이 없어지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잘못된 풍요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따라서 이를 풍요의 저주라고 한다.
둘째, 수평문화의 발달로 육의 수평문화에 물들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갔다.
차이점은 현재 중국교회는 일본교회에 비하여 더 수효가 많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교회는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수직문화를 가르쳐 중국인으로 키우는데 많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교회는 미국에 동화정책을 씀으로 2세 교회는 거의 없어졌다.
대안 : 한국인이 중국교회나 일본교회의 전철을 안 밟으려면 한국인 1세들은
첫째, 철저한 쉐마교육을 실천하여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말씀의 제자 삼는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한다.
둘째, 한국의 수직문화를 전수하여 좋은 한국인으로 키워야 한다.
셋째, 고난의 역사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넷째, 무조건 풍요로운 환경만 제공할 것이 아니고 가난하게 키워 고난을 경험하게 하여야 한다.
다섯째, 가정이나 교회 및 커뮤니티에서 기도회, 예배 및 절기 행사에 3대가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인간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는 수평문화를 차단해야 한다.
일곱째, 교회 교육이 쉐마교육을 돕는 위치로 가면서 더 말씀 중심과 기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고 도서
현 용수. (1999).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제1권). 서울: 조선일보
_______. (1999).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제2권). 서울: 조선일보
_______. (1999).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제3권). 서울: 조선일보
_______. (2001). 편역. 옷을 팔아 책을 사라. 서울: 아름다운세상
_______. (1993). 문화와 종교교육. 서울: 쿰란출판사
_______. (2002).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 서울: 아름다운세상
_______. (1992). 2세 종교교육의 방향 제시. 미국 LA: 쉐마교육연구원
_______. (1990). 문화가 종교성과 영적 만족감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미국 La Mirada CA: Biola University, Ph.D. 논문.
출처 : 쉐마 교육연구원
http://m.shemaiqeq.org/core/mobile/board/board.html?Mode=view&boardID=www11&num=90&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