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과 신학
이 글에서는 기독교 교육과 신학의 관계를 세밀하게 살피고자 한다.
리틀(Sara Little)은 그의 글에서 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관계를 다섯 가지의 접근 방법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1)
(1) 가르쳐질 내용으로서의 신학(Theology as content to be taught): 신학은 기독교 교육에서 가르칠 내용을 제공한다.
(2) 규범으로서의 신학(Theology as norm): 신학은 가르칠 것과 방법론을 위한 참고적(point of reference)을 제공하고
기독교 교육의 분석과 평가(비판적 작업)를 위한 규범으로 기능한다.
(3) 부적절한 것으로서의 신학(Theology as irrelevant): 신학은 기독교 교육의 과제에 부적합하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자율적이다.
(4) 가르치는 것으로서의 진학함(‘Doing’ theology as educating): 진학함(doing theology, theolizing)은 신앙과 계시의 빛
안에서 현재의 경험과 관점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교육이다. 이 역도 성립한다.
(5) 신학과의 대화로서의 교육(Education in dialogue with theology): 신학과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켜나감에
있어서 함께 그리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분리된 학문이다.
리틀은 어느 하나의 대안도 기독교 교육과 신학을 관련시키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하나를 고집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의식하면서 각각이 지니고 있는 신학에 대한 함축을 철저하게 탐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파츠 미뇨(R. Pazmiño)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접근에 긍정적이며, 세 번째 접근은 복음주의적 기독교
교육자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관점으로 본다. 동시에 그는 Little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관점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3) 필자는 파츠 미요의 논의를 기초로 기독교 교육과 신학의 관련성을 좀 더 확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1. 논의
첫째 접근은 신학을 기독교 교육의 내용(content)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파츠 미요의 지적과 같이 믿음과 행함을 위한 ‘본질적인 진리들’은 가르쳐져야 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르침은
정통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unorthodox).(4) 물론 본질적인 진리들은 성경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신학적 과정을 거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교육의 학문성에 대한 논의와 관계하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내용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교육은 신학이 제공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접근이 응용 신학적인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어떤 면에서 신학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 단지 내용에만 영향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두 번째 대안이 훨씬 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접근은 신학은 기독교 교육의 규범(norm)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관계를 논의함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을 보여준다.
신학은 기독교 교육의 내용만이 아니라 방법이나 평가에도 관여하며 목적 설정 등에 요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다른 사회과학이나 학문으로부터 온 기여들은 신학적 전제들을 참조 틀로 하여 걸러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점은 둘째 접근도 첫째 접근과 마찬가지로 신학에서 기독교 교육 쪽으로의 일방통행적인
영향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런 접근은 넷째와 다섯째 접근에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접근인 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과제를 위해서 부적합하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더욱이 이를 통해서 기독교 교육학의 자율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부적절하다. 신학과 관계를 갖지 않는 기독교 교육의 자
율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신학과 관련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이나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기독교 교육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학문의 자율성 혹은 독립성이란 신학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확대된 의미에서 기독교 교육의 학문적인 독립성을 이야기할 때, 기독교 교육학이 다른 학문들과 연관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어느 학문도 다른 학문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될 수 없으며 모든 학문은 서로 연결되어 간 학문적
접근(interdisciplinary approach)이 보편화되고 있다. 모든 만물의 주인 되신 주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전달되는
신앙의 의미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독교 교육에서 신학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은 기독교 교육의 과제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5)
넷째 접근은 ‘진학함(doing theology, theolizing)이 곧 기독교 교육’이라는 접근은 대단히 큰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기독교 교육의 과제가 결국은 신앙과 계시의 빛 안에서 현재의 경험과 관점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면, 신학의 과제가
그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파츠 미요는 현재적 경험을 숙고하기 위해 신앙을 사용하거나, 신앙의 성찰을 위해서 현재적 경험을
숙고하는 일에 더 나은 기술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성찰은 오늘의 현실과 문제들과 대면함에 있어서 적합하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분별하고 전수된
종교적 개념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학 한다는 것은 이러한 반성의 과정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오늘의 상황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6)
여기서 우리는 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교육의 과제는 신학의 과제와 그 본질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1) 신학의 다른 분야들이 현재적 경험(현장)을 얼마나 다루고 있는가 하는 의문점,
2) 실천신학과 다른 신학 분야와의 어떤 상보성을 통한 신학의 본질 회복의 문제,
3) 기독교 교육의 실천신학에서의 기여 가능성,
4) 나아가서는 기독교 교육의 신학 전반에 대한 기여 가능성 등이 논의될 수 있다고 믿는다.
5) 결국 신학과 기독교 교육은 종속의 관계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교육이 상당한 기여를 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는 리틀이 정리한 다섯 번째 논의와도 연관된다. 리틀은 윌리엄스(Williams)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교회에서 신학은 기독교적 믿음과 삶의 방식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모든 사람은
신학자가 된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자는 교회의 전통과 사상에 의해 제공되는 신학적 통찰력을 끌어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신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자료들(body of materials)과 성찰적인 비판을 창조하는 일을 도와준다.”(7) 이러한 접근법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가르치는 과정은 교육할 뿐 아니라 교회의 신학적 형성에 본질적인 기여를 발전시킬 것이다.
다섯째 접근은 신학과 기독교 교육은 함께 그리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분리된 학문이다.
신학과 기독교 교육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은 단순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는 신학이 기독교 교육에 필요하며 그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강조했으나, 여기서 연구자는 기독교 교육이 신학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하고자 한다. 파츠 미요는 그름(Thomas Groome)과 그 이전에 와 이 코 푸(D. C. Wyckoff)에 의해서
제기된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질문이 다시 신학적 성찰을 자극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름의 질문들은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인간론, 기독론, 그리고 신론 등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게 한다는 것이다.(8) 또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인간의 형성의 과정에서의 신학의 위치를 탐구하게 한다.(9)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 단순히 규범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파츠 미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교육이 신학의 과제에 기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신학도 기독교 교육에 기여할 수 있다.
신학 역시 기독교 교육의 사상과 실천의 성찰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신학은 성경적 가치관과의 관계에서 일치성에 관련되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교육의 신실한 실천에 정보를 주게 된다(inform). 분리된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변증법적 상호 관계가 세워짐으로써 이 두 학문은 교회와 세상 속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 준다. 따라서 협력적인 대화는 각각의 학문의 효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강화한다.”(10)
2. 보충 논의
여기서 한 가지 더 논의 가능한 것은 신학과 기독교 교육을 완전히 분리된 학문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의 발전 방향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완전한 분리나 독립은 기독교 교육의 학문적 발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은 교회적 학문, 현장성을 가진 학문, 다른 신학을 위해서 기여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학을 신학(실천신학)으로부터 독립된 학문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실천신학 속에 위치를
지움이 옳은 것이다. 실제로 신학에 속한 다양한 분과들은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편의상 분류되어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분과가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종속된다는 의미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본다.
그리고 실천신학으로서의 기독교 교육학이 실천신학이냐 아니면 독자적이냐 하는 문제는 다른 신학 분야와 밀착된 위치에서
상호작용을 하느냐 아니면 느슨한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느냐의 문제 이상은 아니라고 본다.(11)
어느 쪽이든 기독교 교육학은 실천신학적이다.(12) 이점에 관해서는 최근에 파울러(J. Fowler)에 의해서 제안된 실천신학의
개념과 실천신학적 속성을 지닌 기독교 교육학의 구성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본다.(13)
출처 : https : // blog. naver. com / wwkr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