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목회상담의 접점 (1)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예배의 갱신은 끝없는 관심이며 화두가 되고 있다.
바르게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갖게 되는 기본자세가 아닐까?
특히 예배를 구상하고 준비하며 인도하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이 보다 더 큰 과제가 없을 만큼
중요한 과업임에 틀림이 없다.
예배와 목회상담을 연결해 보려는 시도는 연구물의 수에 있어서도 희귀할 뿐 아니라, 접근하기에 그리 용이한
주제는 아닌 듯하다. 물론 예배의 중심에 있는 설교와 상담을 연결시키는 작업은 꽤 오래 진행되어 왔으며
그 연구물도 많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담설교’라는 용어가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으나, ‘상담설교’라는 용어는
이제 낮설은 용어가 아니며 설교가 성도들의 삶의 내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그 연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 같다.
이 연구는 예배와 목회상담의 연결점을 찾아보고, 느슨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 연결점을 분명히 드러냄과 동시에 예배가 목회상담에 기여하고 목회상담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들을 탐구해 보려는 것이다.
목회상담은 지나치게 좁은 주제와 일대일의 관계에만 한정됨으로 인해 큰 안목을 잃을 가능성이 있고,
예배는 성도 개개인의 신앙적 돌봄의 차원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예배와 목회상담의 연관성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연구자는 목회의 다른 차원인 목회사역, 목회돌봄, 목회상담의 개념을 논의하고 목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치유,
지탱, 인도, 화해의 사역을 매개로 통전적 예배를 구상하고자 한다.
이 논제와 연관된 연구는 매우 희귀하다. 관련 연구 중에서 세 가지만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하나는 김순환의 “예배와 상담의 만남”이다.
(1) 이 연구는 상담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가지고 상담이 강조하는 원리를 예배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예배에 상담적 방법론을 고려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논하면서 상담의 필요성이 급증하고 있고 영혼돌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즉 일대일의 돌봄으로는 많은 신자들을 돌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와 목회상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제시한 후에 예배 인도자의 상담적 자질과 상담의 방법론 중 레포,
진정성, 수용, 표현 등을 예배에 적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통하여 예배와 목회상담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다른 연구는 전요섭의 “기독교상담과 예배”이다.
(2) 그는 예배의 정의를 기초로 예배의 개념을 다루고, 예배 구성요소들의 치료적 효과를 찬송, 기도, 말씀, 봉헌,
축도 등의 요소를 통해서 다룬 후, 예배의 기능을 교육적 기능, 친교의 기능, 축제적 기능, 치유적 기능으로
서술하고 있다. 전요섭은 단지 치유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옳지 않음을 말하면서 2차적인 기능으로서의
치유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제와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연구로 이돈규의 “목회상담과 교회 기능의 상호작용”이 있다.
(3) 그는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목회상담과 교회의 기능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 교회의 주요 기능인 예배,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디다케와 목회상담의
연관성을 논의하였다. 예배를 교회의 기능 중 하나로 다루기는 하였지만 예배 속에는 교회의 다른 기능들이
필연적으로 함께 포함된다고 볼 때 이 연구는 연구자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된다고 본다.
이돈규는 목회상담과 목회상담 교육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교회의 기능들을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연구를 비교해 보면 김순환의 접근은 예배에 상담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전요섭의 접근은 예배의 치유적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돈규의 예배와 상담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명확하지는 않아도 예배를 통한 치유를 강조함과 동시에
목회상담을 통하여 온전한 예배자로 나아가게 하는 일을 동시에 고려함으로 이 두 요소가 상보적 관계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4)
이상과 같은 선행연구를 검토해 볼 때 예배와 목회상담의 밀접한 연관성이 잘 드러난다.
목회상담의 원리는 예배에 적용될 수 있고 예배는 그 자체가 거시적인 의미에서 목회상담의 현장이 되며
목회상담이 효과적으로 될 수 있도록 기여함을 볼 수 있다.
II. 예배의 정의에 대한 논의
예배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일이며 교회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부르고 교회에 가는 것을 ‘예배보러 간다’고 말한다.
교회마다 수없이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예배 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다 아우르는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또한 많은 교파적 전통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예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전통 속에는 예배와 예배에 포함된 각 요소들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예배에 대한 정의는 부분적일 가능성이 많으며, 예배를 정의한다는 그 자체가 예배를 제한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배를 정의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5)
수많은 정의들을 다음 몇 가지로 유형화하여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묘사적 서술이다. 이러한 정의는 예배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배를 응답이나 만남,
혹은 대화로 묘사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예배를 응답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레이몬드 압바(Raymond Abba)는 예배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을 돌려드리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응답인바 곧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과 그가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이다.”(6)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예배를 “영원자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라고 하였다.(7)
후랭클린 지글러(Franklin M. Segler)도 “기독교 예배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8) 로버트 베버(Robert Webber)는 예배를 만남으로, 존 헉스터불(John Huxtable)은 예배를 대화로 묘사한다.(9)
둘째, 해석적 서술이다. 예배의 개념을 묘사적인 차원을 넘어서 그것의 본질을 해석하는 형태의 정의들이다.
예를 들면 리처드 존스(Richard G. Jones)는 예배를 축하(celebration)로 파악한다.(10)
폰 알멘(J.-J. von Allmen)은 예배를 구원사의 요약(recapitulation), 교회의 자기표현, 그리고 세상의 종말과
미래를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한다.(11) 이것은 다분히 예배의 내용, 교회의 정체성과 같은 신학적 내용을 다루는
정의로 보인다. 폴 훈(Paul Hoon)은 “기독교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응답적 행위에 근거한다.”(12)고 하면서 기독론적인 경향성을 보인다.
그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 개념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으로 보았고, 이 양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으로 보았다.
셋째, 목적적 서술이다. 이것은 예배의 정의를 응답하는 것에 두면서도 구체적으로 목적 중심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Robert Rayburn)은 다음과 같이 예배를 정의하였다.
“예배는 신자의 새 생명의 활동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신격(Godhead)의 충만과 그의 강력한
구속의 행위를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에게 합당한 영광, 존귀, 순종을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노력하는 것이다.”(13) 죤 멕아더(John McArthur)는 “예배는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14)
넷째, 당위적 서술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정의들은 “예배는 삶의 예배이다.”와 같은 형태이다.
일리온 존스(Ilion T. Jones)는 “복음주의 예배는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는 예배이다.” 그가 말하는 복음주의 예배는 말씀이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일치하는
예배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15)
이 연구에서 수행할 방향과 관련하여 이러한 정의들이 가지는 함의점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모습을 가진 예배의 공통적 정의는 추상적이고 현상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인간의 응답행위임이 분명하지만 예배자의 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거의 표현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삶이 따르는 예배에 대한 표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넷째, 목회의 과제로서의 예배를 다루기 위한 관점이 부족하다. 목양에 초점을 둔 예배 정의는 매우 희소하다.
다섯째, 예배의 정의가 매우 다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예배 자체가 매우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종합사역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16) 통전적 예배의 구상에 대한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예배의 통전성을 기초로한 정의가 필요하다.(17)
연구자가 제안하는 것은 예배의 정의를 가능한 목회적으로 그리고 통전적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통전적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예배자에게는 참된 변화의 역사가 동반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III. 목회사역, 목회돌봄, 목회상담의 상호관계
일반적으로 목회상담은 목사와 교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한 구조적인 조력의 과정을 지칭한다.
베너(D. Benner)는 목회상담을 규정하면서 목회사역(pastoral ministry) 속에 목회돌봄(pastoral care)이 있으며, 목회상담(pastoral counseling)은 목회돌봄의 한 영역으로 본다.
목회사역에는 설교, 예배인도, 행정, 목회돌봄, 심방 등이 포함된다.
목회돌봄은 목사와 교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목사가 교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만남을 갖게 되는
모든 일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목회상담은 전반적인 목회사역과 목회돌봄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18) 동시에 그는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19)
첫째, 목회돌봄은 목사가 솔선하여 관계를 설정하지만, 목회상담은 보통 교인이 솔선하여 설정한다.
둘째, 목회상담은 전형적으로 신자가 가지고 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즉 삶의 경험 속에서 문제가 있어서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목회돌봄 역시 어려운 삶의 경험을 다루는 것이지만, 이것은 해결하기 위한 문제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깨닫고 직면하여야 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목회돌봄에서는 목사가 적절한 성구를 즉시 적용하지만, 목회상담에서는 교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성구를 바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베너의 견해를 약간 수정 보완하면서 연구자는 위의 세 가지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연구자는 세 개념의 포함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구분을 뚜렷한 선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느슨한 점선으로
포함관계를 그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연구자는 목회의 세 차원인 목회사역으로부터 목회돌봄으로,
그리고 다시 목회상담으로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원리의 제시나 선포’에서 ‘적용과 확인’으로,
- ‘일대 다수의 집단적인 행위’에서 ‘소집단’(가정심방, 다양한 형태의 만남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거쳐
‘일대일의 개인’으로,
- ‘일방통행적 접근’으로부터 중간단계를 거쳐 ‘쌍방적이며 상호이해’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돌봄은 신자들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상황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통과의례와 관련된 것(출생, 결혼, 장례)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위기적 문제들(질병, 은퇴, 슬픔, 실패 등)과 연관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상황들은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도 포함된다
(입학, 합격, 취직, 세례, 입교 등). 반면에 목회상담의 주제는 해결해야할 더 구체적인 문제가 초점이 된다.
둘째, 일반적으로 목회돌봄은 목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관례이나, 목회상담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의식한 성도가 주도권을 가지고 상담을 요청하게 된다.
셋째, 베너가 성경사용을 가지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접근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목회돌봄의 상황에서는 각 상황에 맞는 준비되어 있는 보편적인 성경말씀을 가지고 권면, 위로,
충고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목회상담에서의 성경사용은 보다 더 신중해야 한다.
목회상담에서 목사는 단순한 상식적 차원에서 내담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중하게 귀를 기우려야하고 보다 깊은 내담자의 내면적 상황까지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돌봄이 일반적 관심이라면, 목회상담은 보다 깊은 상황에 대한 통찰과 공감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넷째, 목회돌봄은 주로 개인적이며 동시에 가족 단위로 접근하지만 목회상담은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과 같은 논의로부터 목회사역의 한 부분인 예배는 목회돌봄과 목회상담과의 필연적인 관련성을 가진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예배의 구상 역시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한다면 예배와 목회상담이
상보적인 작용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제반 목회활동이 더욱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IV. 목양(shepherding)의 구성요소와 통전적 인간이해
1. 목양의 구성요소
힐트너(S. Hiltner)는 목회사역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것은 복음전파, 목양 및 친교이다.
힐트너는 목회신학을 소위 ‘양떼를 돌보는 일’, 즉 목양의 의미를 탐구하는 분야로 보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목양의 분야인 훈련(discipline), 위로(comfort), 교화(edification)를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로 정리하였다.(20)
힐트너는 목양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연관성에서 ‘치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처를 싸매주는 일을
의미한다. ‘지탱’은 ‘용기를 가지고’라는 본래의 의미의 위로하는 일, 또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태도를
변경할 수는 있어도 그 상황은 변경될 수 없을 때,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지지하고 곁에 함께 서 주는 것이다.
목양의 관점에서 ‘인도’는 도움을 찾고 있을 때 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인도라는 개념이 교회를 보호한다는 주된 관점으로부터만 수행된다면
(그것은 합법적이고 또 필요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목양이라기 보다는 조직(organizing)이라는
범주 아래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치유하는 일이나 지탱하는 일이나 인도하는 일은 다 부분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목양이라는 관점의 모든 차원들을 정당하게 채워나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21)
이제 연구자는 힐트너의 세 가지 요소에 클랩쉬와 재클(Clebsch & Jaekle)이 제시한 화해(reconciling)을
추가하여 목양의 요소에 대해 더 살펴보고자 한다.
1) 치유(healing)
힐트너는 치유에 대한 형식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방향이나 스케줄 상 손상을 입었던 기능적 온전성(functional wholeness)의 회복이다.”(22)
또한 그는 치유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생성하는 요인을 네 가지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결함(defect), 침해(invasion), 왜곡(distortion), 그리고 결심(decision)이다.(23)
또한 치유는 단지 일대일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종교교육, 그룹사역에서도 발생한다.
힐트너의 치유가 보여주는 특징은 분명히 전인적이며 일대일의 사역을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예배와 목회상담의 연결선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 지탱(sustaining)
지탱은 ‘곁에 서주는 일’을 강조한다.
어떤 상실이 생겼을 때 그 상실을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불가능한 상황, 즉 환경이 치유를 방해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현상을 유지하도록 지지해 주면서 동시에 아직도 남아있는 자원들을 살펴보고
재구성하여 치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을 통한 아픈 상실을 경험하면서 즉각적으로 기능적 온전성의 회복이 불가능할 때,
목양은 지탱이나 위로나 용기를 주는 형태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탱의 사역이 치유를 향하여 나가는 것이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치유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본다.(24)
클랩쉬와 재클은 지탱의 사역은 네 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개인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손실과 과도한 후퇴에 대항하여 물러서지 않고 위치를 고수하도록
돕는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지지와 소망의 느낌으로 그들을 감싸 줌으로 그들이 느끼는 비참함의 느낌을 감소시키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는 강화(consolidation)의 단계로 재정립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활용가능한 자원들을 그들이
사용하도록 격려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구속(redemption)의 과제로 개인들로 하여금 미래를 직면하게
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서 다시 성취를 추구하는 지속적인 삶을 정립하게 하는 것이다.(25)
3) 인도(guiding)
인도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것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과 결단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으로서 결단하는 이가
삶의 의미나 방향에 대한 유용한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
이 과정은 강요나 설득이 아니라 동기를 유발하고 자각의 환경을 조성시켜줌으로 스스로 적합한 결단을
내리도록 돕는 일이다.
인도에 대한 접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자원들로부터 해답을 끌어내거나 혹은 다른 외부의 고려점이나 자원들과의 직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는 귀납적인 인도(inductive guiding)이며
다른 하나는 이끌어내는 인도(eductive guiding)이다.
귀납적 인도는 선험적(a priori)인 원리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며, 이끌어내는 인도는 내부로부터
의사결정을 위한 개인의 방향감각과 자원을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힐트너는 이 두 가지 접근 중에서 이끌어내는 인도의 측면을 강조하였다.(26)
힐트너는 인도를 노스 우즈(North Woods)에서의 인도자의 비유로 설명을 한다.
인도자는 여행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여행자는 인도자가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인도자가 여행자의 목적과 방향감각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의무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행자에게 있어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에 대한 인도자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27)
인도의 개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지시적인 면이 있다는 이유로 무시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가족치료,
감수성 훈련, 권면적 상담, 영성지도 등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4) 화해(reconciling)
화해는 소원해진 사람들을 함께 묶어주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화해는 다른 사람의 세계, 운명, 그리고 그 자신과의 조화로움을 정립하는 것이다.
클랩쉬와 재클은 이것을 하나님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파괴된 관계의 재수립을 추구하는” 목회돌봄의
기능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화해는 가장 전망이 밝은 목회기능으로 여겨진다.
화해는 용서와 훈련을 통하여 작용한다.
용서는 선포와 고백-죄사함을 통하여 관계를 회복시키고, 훈련은 행동을 검토하며 사람들을 회복된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목양의 요소로 인정되던 것이었지만 힐트너가 억압적인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배제를 하였으나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회복을 위한 화해와 용서의 사역은
목양의 관점에서 볼 때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28)
2. 목양의 구성요소와 목회상담에서의 통전적 인간이해
목회상담은 인간이해에 있어서의 통전성을 요구한다.
이미 김미숙은 기독교(목회)상담에서의 인간이해의 세 가지 측면을 전인적, 관계적, 시간적 통전성으로
정리한 바 있다.(29) 연구자는 여기에 더하여 공간적 통전성을 추가하여 예배의 통전적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예배와 목회상담은 목양의 과제와 통전성의 추구라는 점에서 만나게 된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통전적 예배의 성격이 드러나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하지만 네 가지 예배의 통전성에 대한
접근이 목양의 네 가지 요소와 상호관련 됨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목양의 네 요소는 뚜렷한 경계선으로 서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부분들이 서로 겹치고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특성상 주된 기능을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지탱은 시간적 통전성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지탱을 위로와 격려의 사역으로 본다면, 이는 소망의 사역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적 위로의 근거는 그리스도시며, 그는 미래의 소망의 근거가 되신다.
예배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며, 그 핵심개념은 종말론적 예배에서 드러나게 된다.
둘째, 치유는 부서지고 깨어진 것의 회복을 말하는데, 이것은 전인적 통전성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인간의 진정한 치유는 전인적인 것이며, 치유사역에서 핵심을 이루는 회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말씀을 기초로한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셋째, 화해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바로 관계적 통전성과 연결된다.
넷째, 인도의 개념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통찰과 지혜로운 판단이 주된 개념이므로
‘삶의 예배’를 강조하는 공간적 통전성과 관련된다.
예배와 목회상담의 접점 (2)
V. 목회의 과제를 위한 통전적 예배의 구상
앞에서 목회상담이 추구하는 통전성의 추구가 목양의 네 가지 요소와 깊이 연관됨을 이야기 하였다.
다시 정리해 보면 지탱은 시간적 통전성과, 치유는 전인적 통전성과, 화해는 관계적 통전성과, 그리고 인도는
공간적 통전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제 목회의 과제로서의 통전적 예배를 시론적인 차원에서 전개할 것이다. 이러한 통전성의 몇 가지 측면들을 고려함으로써 예배는 보다 치유적이고 목양적인 과제를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전인적 통전성을 추구하는 예배
목회상담은 전인적 통전성에 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연구자는 인간의 전인적 통전성의 탐구를 위해서는 기독교인간학이 강조하는 전인적 인간본성에 대한 강조와
아울러, 인간의 다차원적 성격 속에서 드러나는 통전적 성격을 함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바른 인간 이해야말로 파편화된 인간 이해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관(crown)인 인간에 대한
보다 풍성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전인적 통전성을 추구하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일단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 될 수 있다.
하나는 전인적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또 하나는 전인적 변화를 추구하는 예배라는 의미일 것이다.
전인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이 지정의가 구비된 예배일 것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동원되는 예배일 것이다.
생각, 감정, 행동의 연관관계에 대한 논의는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단순하게 접근하기는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우선 사람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 행동변화의 관건이라고 본다.
합리적정서적치료나 인지치료는 생각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다.
반면에 감정이나 느낌에 무게를 두는 접근법도 있다.
사람들은 발생한 어떤 사건보다도 그것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형태치료는 이 점을 강조한다. 현실치료자들의 접근법은 아주 특이하다.
현실치료의 창시자 글래서(W. Glasser)는 사람의 생각, 감정, 생리작용, 그리고 행동 중에서 가장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행동이라고 본다. 실제로 생각을 바꾼다거나 감정을 바꾼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으로부터 시작할 때, 그것으로부터 생각이나 감정이 변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예배 분석가들은 오늘날의 예배의 흐름을 지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감성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은 내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유연성 있게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강조하는 측면이 다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성격 연구가들도 성격의 인지적 요소를 강조하기도하고, 성격의 정서 및 동기요소를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상담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문제의 상황에 따라서 우선적으로 취급해야할 것을 판단해야 하되,
다른 측면들을 빠짐없이 고려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전인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예배를 구상함에 있어서 목회자는 이러한 인간의 측면이 예배의 큰 틀 속에서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배를 통한 전인적 회복의 과제는 중요한 과제이다.(1)
2. 시간적 통전성을 추구하는 예배
시간적 통전성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며, 인간은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사는 제한적 존재이기에 이 표현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하시며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으로 통전적 시간성을 지니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도예베르트는 인간의 마음을 초현세적인 것으로 인간의 몸을 현세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은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2) 시간적 통전성에 대한 연구자의 생각은 과거, 현재, 미래를 분리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긴장과 균형 속에서 함께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상담은 시간적 통전성을 중요시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이란 그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언제나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 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담을 수행하는 현장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기 보다는 통전적 관점으로 그것들의
상호관련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미래적 지평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므로 시간을 통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기초가 된다.
또한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기도 하며, 그가 가진 미래에 대한 소망이 반영된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와 미래를 전개해 나가는 일을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된다.
기독교적인 종말론적 시간 이해는 목회상담에서 아주 진지하게 다루어져 왔다.
이것은 미래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는 시각을 강조함으로써 시간의 통전성을 취급하는
다른 예를 보여주고 있다.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행위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오늘을 힘 있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3)
예배를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배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고, 미래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예상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구속사를 회상하며(anamnesis) 미래의 구속사를 예상(prolepsis)하는 것이 예배의
현재화이다.(4)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 전개를 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현시켜 나가는 일이다.
시간적 통전성을 논의하면서 예배의 종말론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5)
예배는 과거에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찬양함과 동시에 미래에 이루실 완전한 성취를 소망하면서 오늘을
이겨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이란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교리’였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종말론은 신학적 사고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어떤 신앙적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소망의 목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중심이 되는 일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어떤 점에서 종말은 이미 일어났지만 인간 존재 가운데 그것의 마지막 성취는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으면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역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종말론 사상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세상 끝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난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믿고 그 성취를 나의 것으로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예배를 시간과 관련하여 논의해 본다. 어떤 특정한 날이나 시간을 예배의 시간으로 보는 것과 모든 시간을 종말론적 시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특정한 시간의 예배는 중요한 것이나,
모든 순간이 귀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일상의 시간도
포함해야 한다. 그래서 종말론적 예배는 매순간 연속되어야지 어느 특정하게 지정된 시간 속에서만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지는 예배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예배의 시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동시에 포함하면서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한다.”(6)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 기도와 거룩한 성만찬을 나누는 일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 표징이며, 세례의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만찬 역시 주님의 오실 때까지 이 잔치를 즐기는 성취와 소망의 예전인 것이다.
3. 관계적 통전성을 추구하는 예배
목회상담은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며 인간회복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내적인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월터스톨프(N. Wolterstorff)는 샬롬이라는 개념으로 이 관계들을 묶어주고 있다.
그는 샬롬을 하나님, 다른 사람들, 세상(환경),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네 가지 관계에서 올바르고
화목한 관계를 가지며, 그 관계 속에서 즐기는 삶을 의미한다고 말한다.(7)
예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임이 자명하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별을 강화한다.
그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 이것은 자기확신과 독단을 제어하고 우리를 겸손과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것이다.(8)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진정한 예배란 성경을 따라야 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에 따라야한다는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의 관계를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면 인간관계는 저절로 잘된다고 생각해도 잘못이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반영이 되어야 한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관계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예배는 함께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창조된 만물에
대한 인식까지 예배의 주제 속에 포함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세계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결코 제외하지 않았다.
만약 예배를 창조세계를 제외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차원에서만 정의한다면 우주론적 예배의 성격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가 창조를 중요한 핵심으로 삼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창조하시고 창조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9)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인간 역시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건이며 장소임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 공동체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함께 들어 있는 우주적
사건이요 구원의 축제, 곧 종말론적 예배였다.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 다름 아닌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인한
축제였고 예배의 참여자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였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초대교회가 중시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주제로 다루어야 한다.”(10)
예배는 본질적으로 교제와 화해의 사역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배의 본질이며, 그것은 자연히 믿음의 백성들의 친교의 공동체의 예배이다.
특히 말씀과 성찬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수직적인 교제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한 형제됨을
확인하는 백성들의 교제가 된다. 특히 목회상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정립을 중시한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은
예배만이 제공할 수 있는 큰 자원이다.
“선포되는 말씀으로서의 설교와 가시적 말씀으로서의 성찬은 신적 교제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성찬을 통해 친히 불러 모으신 자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말씀과 성찬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이 만나는 화해와 교제의 장이다...
이 수직적 교제는 반드시 수평적 교제,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를 머리로 모신 모든 지체 상호간의 교제를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되 그리스도의 몸에로 불러 모으시고 그들과 교제하시는
것이다. 성도들 간의 수평적 교제는 바로 이 수직적 교제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전자는 항상 후자에 의존적이다.”(11)
4. 공간적 통전성을 추구하는 예배
공간적 통전성이라는 표현은 다소 어색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배의 논의 속에는 예배의 공간에 대한 중요한 주제가 있으며, 구약의 예배 처소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의미가 변화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구약의 지정된 장소의 개념을
뛰어 넘어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리스도 중심 예배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개념의 변화는 곧 바로 예배와 삶의 연관성, ‘산 예배’, 혹은 ‘생활예배’ 등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있어서의 공간적 통전성은 예배와 삶의 통전성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삶으로서의 예배란 삶의 모든 영역이 예배의 장소가 됨과 동시에 모든 영역의 삶이 다시 예배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와 그 속에서의 생활은 예배가 비로소 통전적으로 완성되는 현장”(12)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송인규는 생활예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생활예배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과 활동 가운데 하나님을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인정하고,
삶의 현장을 통하여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 자세이다.”(13)
여기서 그는 네 가지 점을 강조한다.(14)
첫째, 생활예배 역시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둘째, 생활예배에서도 예배정신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높이는 자세’이다.
셋째, 생활예배의 중심 장소는 ‘일상생활’ 혹은 ‘삶의 현장’이다.
넷째, 생활예배에서는 예배의 수단과 삶에서의 활동이 그 내용상 거의 일치한다.
즉 삶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수단으로 삶의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배의 목회적 과제와 관련하여 도출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예배에서 받은 감격과 깨달음이 일상의
삶에서 실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데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치명적인 결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15)
첫째, 예배가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 만남이 삶의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기 위해서는 예배를 통하여 영적공허가 채워지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서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예배가 삶의 가능한 모든 영역들(가정, 학교, 사회, 국가, 우주)과 관련을 맺으면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말씀과 삶의 현장이 순환적으로 영향을 받게 함으로써 예배와 삶의 연속성은 보장될 수 있다.
셋째, 세상에 대한 책임을 불러일으키는 예배로 나가야 한다.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이 예배 속에서 반영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초대교회 예배의 놀라운 예증을 알란 크라이더(Alan Kreider)는 논증하고 있다.
초대교회 예배를 전도가 없는 예배라고 지적하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삶 속에서의 신앙의 실천을 통하여
안 믿는 자들을 흡입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다는 것이다.(16)
또한 클라이더는 초대교회의 예배에서의 헌금은 “부의 축적이라는 중독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나눔’과
‘관대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한 어떤 특별한 예배 의식이었다.”(17)고 말한다.
넷째, 일상생활에 대한 가치의 인식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의 삶이 그렇게 신앙적으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신앙이란 소위 종교적 예전적 활동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함을 기억해야 한다.
“일상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신앙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훈련의 장”이다.(18)
다섯째, 예배에서 목회자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수동성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
물론 공예배는 앉아 있기만 해도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예배에서는 내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면 아예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회피적, 의존적 자세를 탈피하고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한다.
VI. 나오는 말
이 연구에서 연구자는 예배와 목회상담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예배의 치유적 속성을 강화하거나, 목회상담의 중요한 원리를 예배에 적용해 보는 시도는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포용하면서 연구자는 좀 더 조직적으로 양자 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목회사역, 목회돌봄, 목회상담의 상호관계를 논하였으며, 목양의 네 가지 요소인 치유, 지탱, 인도, 화해와
목회상담이 추구하는 통전적 인간이해와의 연결점을 찾아보았다.
또한 종합적 사역인 예배는 그 안에 선교, 봉사, 교제 및 교육의 기능을 포함하면서 이 기능들이 다시 목양의
요소들과 연결됨을 밝혔다. 무엇보다도 연구자는 목회의 과제라는 관점에서 예배를 이해하면서 통전적 예배로
나아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예배와 목회상담은 그 상보작용을 통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예배가 통전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전인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전인적 변화가 일어나는 예배이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축하하며, 완전하게 이루어질 구원의 성취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늘을 이기는 힘으로 삼는 예배이다.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현장이 되며, 그 분이 공급해주시는 힘을 체험하는 예배이다.
예배가 삶을 위한 힘이 되며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결국 통전적 예배란 균형 잡힌 영성을 체험하며 공급받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때에 예배는 다양한 측면에서 목회상담과 연결된다.
예배는 목회상담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 줄 것이며, 목회상담을 더욱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목회상담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고, 예배 자체가 목회상담이 실현되는 현장이 될 것이다.
실제로 목회상담은 좁은 주제와 일대일의 한정된 관계로 인해 보다 큰 안목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실제로 목회상담이 추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립과 치유를 향한 회개의 촉구와 기도,
목회상담의 중요한 기둥이며 자원인 영성, 목회상담이 추구하는 진정한 종말론적인 소망의 원천은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효과적인 목회상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소중한 자원이 공급되는 곳이다.
특별히 예배는 집단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목회돌봄이나 목회상담에 대한 이해와 고려점,
그리고 목양의 중요한 요소들을 예배에 반영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가 보다 자신들의
삶에 밀착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배 인도자는 나와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내가 고민하는 것을 고민하고 내가 고뇌하는 것을 고뇌하는
똑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며, 이것은 당연히 목회상담의 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19)
[출처] 예배와 목회상담의 접점 (2)|작성자 wwkr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