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되는 길은 대개 조용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다가 막히는 지점이 생긴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를 읽는데, 마음 한쪽에서 질문이 생긴다. 정말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대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가.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 왔던 사람도 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했다는 대체신학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어 온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혹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조명 속에서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보게 된다. 뉴스 속의 한 나라로만 보던 이스라엘이 성경의 언약과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사모하게 되고, 기회가 되면 그들을 섬기고 싶어진다.
그 자체는 귀한 일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원가지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고.
그러나 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빠지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적 뿌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율법적 짐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적 뿌리를 찾는 마음
히브리적 뿌리, 영어로는 Hebrew Roots라고 부른다.
그 출발점은 나쁘지 않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성경은 히브리적 배경 속에서 주어졌다. 구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경 역시 유대적 세계관과 절기와 성전과 회당과 율법의 배경을 알 때 더 깊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히브리적 배경을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유월절의 의미를 알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깊이 보인다. 초막절을 알면 요한복음 7장의 예수님의 외침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오순절을 알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더 놀랍게 다가온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도 회당에 갔고, 주일에도 모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히브리적 뿌리로 돌아가 토요일 안식일 예배와 주일 모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1세기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뿐 아니라 무교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일을 포함한 절기들을 지켰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배움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의무가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더 성경적이고, 절기를 지키는 사람이 더 영적이며, 코셔를 지키는 사람이 더 순전한 신앙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새 영적인 사대주의로 바뀐다.
유대적인 것은 더 원형에 가깝고, 이방인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히브리어를 알면 더 깊은 신자가 되고, 절기를 지키면 더 온전한 신앙으로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유대인들을 공경한다는 이름으로 반유대인화되거나,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이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서를 이용한다. 유대인 중심적인 가르침을 복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이방인 성도들에게 다시 짐을 지우려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려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할 때
실제로 이런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여기서 “주의 날”은 교회사적으로 주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은 그냥 안식일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요한이 안식일을 말하려 했다면, 당연히 안식일이라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세기 말부터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주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10년경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을 안식일로 가르친다.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히브리적 뿌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방인 신자들은 그 유산을 존중해야 하고, 그 유산을 소유한 유대인들을 더 높이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으로 간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 말씀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말씀을, 히브리적 뿌리를 회복하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끌고 가는 해석이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복음의 처음 감격이다. 주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이다.
성경의 그림자들은 중요하다. 절기, 안식일, 음식법, 성전 제도는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몸은 실체를 말한다.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림자 안에 담긴 의미를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오셨는데 그림자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절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의 참된 안식을 가리킨다.
코셔와 정결법은 거룩함과 구별됨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림자를 붙들고 실체를 놓치면 안 된다.
이방인에게 지우지 말아야 할 짐
이 문제에 대해 사도들이 이미 한 번 결정한 적이 있다.
사도행전 15장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의논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것이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이 결정은 입문자용 규칙이 아니다. 처음 믿는 이방인들에게 일단 가볍게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신앙이 자라면 코셔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안식일 준수와 절기 준수와 코셔가 모든 성도에게 필수였다면, 사도들이 이 가장 중요한 회의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았다.
성령과 사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복음 안에서 필요한 기본적 기준을 제시했지만, 유대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이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서 이어져 온 관습과 문화와 절기가 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관습을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한 뒤, “이제 너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설날에는 어른들에게 세배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배는 한국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복음의 일부처럼 만들고, 그렇게 해야 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치면 잘못이다.
유대인의 절기와 관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유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필수로 요구하면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유대인처럼 될 수는 있어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은 옳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또한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선교적 적응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인의 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중국 음식을 먹었던 것과 같다. 그는 중국인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절기와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식탁에 앉고, 그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의 역사적 상처를 존중해야 한다. 때로는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유가 중요하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 곁에 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성경적이기 때문에, 더 영적이기 때문에, 더 높은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위험하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대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복음의 자유를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는 히브리적 뿌리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의 궁극적인 뿌리는 유대교가 아니다.
히브리적 전통도 아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 안에서 세움을 받아야 한다. 그 안에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리고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
히브리적 배경은 우리를 성경 이해의 풍성함으로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한 새 사람을 향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한 새 사람이다.
에베소서 2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그리고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한 새 사람은 유대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방인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새 사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 서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메시아닉 유대인을 동경하여 유대인화되면, 오히려 한 새 사람은 왜곡된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없애고 이방인만 남기려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바꾸어 하나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신다.
다름을 지운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하나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해야 한다.
성경의 히브리적 배경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히브리어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절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은 안식일 준수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림자를 붙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표지판 앞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첫사랑이다.
절기보다 그리스도.
안식일보다 그리스도.
히브리적 뿌리보다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한 새 사람의 영광을 붙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하되, 복음의 자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적 뿌리를 배우되,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대체신학의 오류도 피하고, 히브리적 뿌리 운동의 함정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서는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