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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사회정의

작성자안디옥.|작성시간26.06.08|조회수59 목록 댓글 0

기독교와 사회정의

Ⅰ. 복음적 가치를 향하여

 

1. 공동선을 향한 복음정신

근세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곡해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종교는 정치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종교는 개인윤리적인 부분, 곧 낙태문제라든지 성윤리 문제, 혹은 개인적인 선행 같은 것에만 관심을 가질 일이지, 국가정책이나

중요한 사회적 이슈 같은 것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참여는 중세시대 교황권의 폐해와 같은 신정정치적 개입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위배된다는 인식이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 깔려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심각한 잘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공동체와 사회를 향한 공적 영역에 대한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 전통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외면상 개인영성을 지향하는 것 같은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공적 영역을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정치적

구조 안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개입이 되셨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개개인에게 깊고 친밀하게 향하고 계시지만 이것이 사적 영역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개인적 영역과 공공의 영역을 한 데 아우르시며 모든 인간이 고루 잘 되기를 원하신다.

인류공동선을 지향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회의 공동선을 향한 비전을 토대로 세상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사회정의에 대한 선지자적 비판과 저항, 나아가 적절한 대안의 제시는 기독교의 본질적 사역(케리그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본회퍼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정신 나간 운전수가 버스를 몰고 행인들을 수없이 치고 가는데, 버스 뒤에서 다친 사람들만 돌보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

그 정신 나간 운전수를 적절히 제재하여 버스를 멈추고 도로사정이 정상적인 흐름이 되도록 하는 근본적인 조처가 필요하다.

구조적 악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하며 그 구조적 악의 피해자들만 치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구조악과 선의의 피해자들의 치유가 종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와 같다.

가령 밥퍼나눔운동이 오직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의 한 끼 식사를 공급하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불완전한 것이다.

노숙자들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 독거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선의의 이웃들과 힘을 모아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마땅하다. 밥 굶는 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달려가 밥을 나누는 것이 밥퍼정신이기도 하지만, 밥 굶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세상을 향해 선의의 이웃들과 함께 노력하는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온전한 형태의 밥퍼정신이 되는 것이다.

 

2. 본질적 가치에 주목하라 : 하나님은 한나라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니다

교회의 예언자적 전통은 그러므로 시대를 달리하더라도 끊어지지 않을 중요한 유산이다.

그런데 또한 일부에서는 성경의 근본적 가르침을 왜곡한 채 정치선동적 거수기로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적 가치관 보다는 세속적인 기대에 몰입하게 하여 왜곡된 종교이념으로 세뇌시킨 성도들을 특정 정파나 정권의 힘을

과시하는데 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념화된 종교는 차라리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 몇몇 성경구절을 자의적, 문자적으로 내세워서

대중들의 식별력을 흐리게 하는 기독교근본주의는 오늘날 또 하나의 큰 사회적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오늘의 성도들은 다변화된 세상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에 시달리며 교회가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길

바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적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정권안보나 특정 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와 같은 행태로

전락하면, 이것은 위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행하곤 하는 선동적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일은 비단 정치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난 미국대선과정에서 보여준 미국 보수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바 있다.

물론 교회는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을 제시할 책임이 있지만, 정당의 지지문제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분에 속한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당시 하였다는 기도는 당시에 남군 지도자였던 리 장군의 기도와 대조되면서 많이 인용되곤 한다.

두 사람 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전쟁 한 복판에서도 열심히 기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리 장군의 기도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형태의 것이었지만, 링컨은 언제나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즉, 우리의 질문이 ‘하나님은 어느 당의 편인가?’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질문하여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민노당도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신다.

어느 당이든 하나님을 정치화하거나 종교계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종교는 이념이나 당익에 얽매이지 않을 때 진정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어느 당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기독교의 예언자적 소리를 들어야 하며, 기독교는 특정 당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여야 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일관된 도덕적 기반에 따라 우파와 좌파 모두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사회정의 문제를 생각할 때 ‘기독교는 세계의 양심역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하고 질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마땅하다. 국가적·인종적·경제적·문화적 이기주의를 벗어던지고,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의 창조적인 다양성을 어떻게 원래의 질서대로 회복시키며 조화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이다.

따라서 이 다변화 시대에 우리는 ‘성경적 화해의 길, 평화의 길은 무엇인가?

정치적 성향을 초월해서 생명의 신성함을 뒷받침해주는 일관된 윤리는 무엇인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세상에 제시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기독교와 사회정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처럼 근본적인 가치에 대하여 숙고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근본적 가치는 ‘

하나님의 나라(통치)’라는 예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어떤 지엽적인 상황에서도 공동선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고, 공동선이 지향하는 가치는 생명, 평화, 평등 등과

같은 변형불가한 원초적 가치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편협된 종교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진리편에 당당히 서서 예언자적 소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게 될 것이다.

 

3. 예수복음의 통합적인 영성

많은 기독인들은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과 영적 가치를 갈망하는 것이 좀처럼 통합되기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한국교회현대사를 보면 교회 안에서 ‘정의’와 ‘영성’은 분리되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의를 향한 몸부림들이 ‘기도합시다’라는 요구와 조화되지 않음으로써, 교회가 분열되고 신학교가 분열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결합할 수 있으며 결합되어야 한다.

사회정의와 개인영성은 서로 외면되거나 교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야 될 신앙의 주제이다.

공적 삶을 외면하는 사적 영성과 영적관심을 경멸하는 세속적인 정치지향성은 둘 다 문제가 된다.

사회적 영향력 없는 영성이나, 영혼 없는 정치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을 거꾸로 표현하면 올바른 영성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바른 정치는 깊은 영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과 정의의 문제는 별개가 아니라 통전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이며, 내면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영성이다.

예수의 영성이 우리에게 강력한 모범이 되는 이유도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조화로운 영성의 온전함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운동을 통해 인간 본연의 가치와 관계 회복을 도모하셨지만 이를 위해 사회의

불의나 종교적 억압을 지나치지 않았다. 육화된 영성인 나사렛 예수의 영성은 통전적인 영성이다.

골방 안의 기도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영성이며, 저자거리에서의 분주함이 골방기도로 연결되는 영성이다.

예수복음에 있어서 개인 개인을 향한 가르침은 공적영역의 구조적 모순을 향한 가르침과 통합되는 진리이다.

우리가 예수께 집중하고 우리의 행동 모든 것을 예수로부터 배우고 시작하려 한다면, 기독교인의 사회정의에 대한 태도를

살필 때 예수님의 이 통합적인 면모를 먼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지자 미가가 적시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바라시는 참된 제사, 곧 예배자로서 올바른 삶의 태도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에 있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 간개인적(間個人的) 영역에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조용히

대화하는 것이 균형있게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미 6:8).

이들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고 서로를 완성한다.

나와 하나님, 나와 일상 안에서 만나는 이들, 나와 전체 사회와의 관계는 각기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긴밀하게

엮여져 있는 그물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적 영성은 이들 세 영역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이 통합적인 가치들로 우리 삶의 영역을

바꿔나가는 영성이다. 다변화되고 있는 시대일수록 통합적이고 통전적인 영성이 필요한 법이다.

정의에 함몰되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사사로운 관계에 짓눌려서 구조악을 외면하게 되거나,

분주한 일정에 끌려가다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예수복음에 다시 주목해야 옳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것들이 통전적으로, 옹골지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개인성화와 사회성화는 별개의 일이 아니다.

 

Ⅱ.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본질적 가치들

 

예언자적인 영성과 사회정의를 위한 노력은 사실 예수님의 복음에 잘 제시되어있다고 했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엽적인 것

이면에 있는 본질적 가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기독교가 사회정의와 관련하여 품어야 할 그 본질적 가치에 대하여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에 비추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복음적 가치대로 살기란 무엇인지 몇 가지 중요한 범위 안에서

정리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본질적 가치들을 ‘생명과 인권’, ‘평화’, ‘경제정의’, ‘정치정의’, ‘생태정의’라는 다섯 가지

범주로 상정해 본다. 물론 여기에서 노동의 문제나 국제관계 문제 등이 파생될 수 있겠지만 가능한 한 범위를 줄여서 생각해

보려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사회정의로 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보다 명확하게 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래에 생각해보는 다섯 가지의 가치들은 매우 근원적인 것이기에 손상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하한 경우에도 이것들은 우리 삶 안에서 손상됨 없이 추구되어야 할 진리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냐 맘몬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셨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다섯 범주의 것을 붙잡느냐 포기하느냐

양자택일의 길에 서 있다.

이 가치들을 지켜내는데 있어서 적당한 절충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인권과 생명 :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권리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 18:10)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으신다.(행 10:34, 롬 2:11, 갈 2:6, 엡 6:9 등)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만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성육신사건은 이처럼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다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 3:28, 롬 10:12, 고전 12:13, 골 3:11)

하나님의 영광이 사실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비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가지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평등과 우애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사회생활 안에서 주목해야 될

하나의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생명’이며,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권리, 곧 ‘인권’이다.

인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최소한의 권리이다.

그것은 억울한 죽음, 고문이나 억압, 굶주림에서 벗어나야 할 생존의 권리이며, 어떤 이유로도 비인격적인 차별을 받거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손상받을 수 없다는 정신적·정서적 권리이다.

인권은 인간존엄성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고, 물질적 정신적 면에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의 권리들은 인생의 모든 단계와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태 속에 있는 생명의 인권이 태어난 아기의 인권과 다르지 않고, 어린이의 인권이 어른의 인권과 다르지 않으며, 여자의

인권이 남자의 인권과 다르지 않고, 백인과 흑인, 동양인과 아시아인의 인권이 서로 다르지 않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인권이 다르지 않고, 경영자와 노동자의 인권이 다르지 않으며, 목사와 성도의 인권이 다르지 않다.

통령의 인권이나 새벽길을 청소하는 미화원의 인권이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와 같은 인권에 대한 장엄한 선포는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과 지극히 모순된다.

곧, 전쟁과 각종 폭력을 비롯한 집단 학살과 집단 추방, 인신매매, 소년소녀징병, 노동착취, 마약거래, 매매춘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소위 선진국이라 하는 나라들에서도 인종차별, 계급차별이 엄존함으로써 그런 권리들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중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권은 그저 형식적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정권유지를 위한 편의적 발상에서 나오는 인권유린은

교묘히 위장되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우리가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잘 관찰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정의를 갈구하는 우리는 과연 인권사각지대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인권회복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늘 성찰해 보아야 한다. 정치적 음모로부터 출발된 각종 공안사건, 사형제도와 고문, 인종차별, 굶주림,

가정폭력, 노인무시, 노동운동탄압, 아동학대,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될 본질적인 가치가 ‘인권’에 있다면 ‘인권’을 전제하고 세상을 읽어야 함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가르침처럼 그러한 권리를 누리는데 외부의 제약을 받기 쉬운 태아, 노약자, 장애인, 어린이, 여성, 이주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힘없는 이들의 인권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예수님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존엄성을 손상받기 쉬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사는 사람, 더 자극적인 그 무엇을 좇아 헤매는 시대의 조류를 거부하고, 우리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데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성화와 더불어 사회성화에 힘써야 될 기독인으로서 의당 하여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고, 우리사회에서 인권을 조금이라도 더 신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존귀한 생명과 인권이라는 가치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모두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래는 그 결단과 실천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실천구상이다.

오늘 이 시간에 나의 실천지침으로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하도록 결단할 것들을 목록화 해 보자.

 

<개인적 실천구상 : 인권을 살리는 일>

- 세계인권선언을 깊이 묵상한다.

- 가정이나 회사 혹은 교회에서 여성이나 아이들, 혹은 경제적 심리적 약자에게 모욕을 주는 일은 없는지 살펴본다.

- 태아의 생명권에 대하여 자세히 공부하고 낙태반대 캠페인에 동참한다.

- 사형제도 폐지운동에 동참한다.

- 주변의 제3세계 노동자들을 친구처럼 대하며, 외국인노동자센터 등 인권단체에 지속적인 물질적 도움을 준다.

- 밥퍼나눔운동본부에 가서 봉사하며 노숙자·독거노인들의 삶을 체험한다.

- 비정규직노동자문제, 양심수 현황과 실태에 대하여 공부하고 ‘인권영화제’에 참여하여 본다.

- ‘인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요즘의 뉴스내용을 새롭게 평가해본다.

 

<공동체적 실천구상 : 이하 다른 주제에도 적용됨>

- 각 소그룹에서 사회정의와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성경공부 한다.

- 평화인권연구소나 각종 전문 NGO를 통하여 전 교우들에 대한 ‘진실 알리기’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 선의의 시민사회단체와 협력할 수 있는 실천 사항에 대하여 공동체적으로 연대하며 함께 행동한다.

- 긴박한 행동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공동체 명의의 성명서를 내거나 공동예배나 공동금식 등

비폭력적 방법에 의한 공동저항 방법을 모색하여 대응한다.

 

2. 평화 :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엡 2:14)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무질서(카오스)를 질서(코스모스)로 바꾸신 것이었고 근본적으로 샬롬의 세계였다.

그 온전한 평화가 깨진 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될 또 하나의 본질적 가치는 그러므로 평화이다.

하나님의 샬롬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식별해내고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이는 하나님 나라의 주역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마 5:9).

하나님의 샬롬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적·외면적 폭력 모두를 일컫는다.

그것은 상해요, 살인이요, 전쟁일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권력에서 나오는 압제, 욕설과 폭언, 화내고 앙심을 품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평화 만들기’라는 차원에서 반대하고 제거해야 될 것은 이 모든 종류의 내적·외적 폭력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폭력은 폭력을 조장할 수밖에 없으니(마 26:52), 어떤 형태가 되든 폭력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도록

그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버릴 것을 요구하신다(마 5:38~42).

전형적인 폭력인 전쟁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인간이라면 누구든 살인이나 가정파괴와 같은 작은 전쟁에 대하여는 잘못된 일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실제 대량살상으로 이어지는 전쟁에 대하여는 어쩌면 관대하기조차 하다. 살인·살상과 가정파괴와 온갖 종류의

비극을 생산해내는 전쟁이 오늘의 인간세계에서 암묵적으로 용납되고 있고, 심지어 조장되기조차 하고 있다.

테러가 더 큰 테러를 낳고 전쟁이 더 큰 전쟁을 부르고 있는 폭력의 악순환은 점점 심화되어가는 형국이다.

전쟁의 참상은 우리 모두가 직·간접으로 경험하여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인간들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원을 낭비한다. 2005년 기준 전 세계의 군사비 지출은 1조 1,180억 달러에 달했다(한국일보 2006. 6. 1.).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50년간 군비경쟁 비용이 196조원에 이른다(한겨레 2002. 12. 31).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거기에 더하여 인류를 멸절시키고도 남을 가공할 무기인 핵은 전 세계 몇몇 나라들만 소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그것을 무장해제하지 않은 채 다른 나라들만 핵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어이없고 모순된 이야기인가!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파괴하는 잔인한 폭력이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되는 살상무기들은 그 존재 자체로도 엄청난 폭력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표방하든 우방국의 도움 요청 때문이든 그 구실이 어떠하든 전쟁과 전쟁준비, 군비경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평화의 적이다.

한편, 전쟁에 버금가는 폭력은 우리 일상 가운데에서도 수없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직접적인 외상이 있지 않다하여 폭력에 대하여 무죄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회법에서조차 폭력에 대한 규정은 언어,

심리적 영역의 폭력에까지 이르도록 광범위하다. 모든 형태의 권력에서 나오는 횡포는 모두 폭력이다.

위정자들의 폭정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직장 안에서의 권위남용에 의한 굴종의 강요나 가정 안에서의 압제적 횡포, 나아가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서열과 계급적 우위감에서 나오는 강압적 요구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폭력의 형태는 다양하다.

우리가 사회정의를 회복하려는 기독교인이라면 이처럼 일상 가운데 만연한 폭력의 고리들을 차단하는 선봉에 서야 한다.

아울러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야기시키는 내 마음의 폭력성 또한 동일한 무게로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계에 엄존하는 전쟁은 나의 탐욕과 폭력성을 등에 업고 진행된다.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은 나의 폭력성의 거울이라는 것을 주님은 가르치신다.

매일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분쟁이 발생하면 완력으로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하고, 크든 작든 권력을 손에

쥐면 힘없는 이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 한다면, 이는 단연코 눈에 보이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하여 스스로

공범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인이라면 폭력을 부추기고 폭력을 일삼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한다.

나아가 그 모든 폭력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내 마음의 폭력성과 공격성에도 끊임없이 반대하여야 한다.

그것이 예수 가르침의 중요한 한 주제이다. 평화 만들기는 이처럼 일상 안의 폭력에서부터 전쟁이라는 가공할 폭력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종류의 폭력을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공동선을 향한 기독교 사회정의와 그 행동은 이처럼 단순하다.

여하한 국면에서도 ‘평화’라는 절대 가치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단순한 행동지침을 통하여 우리의 일상사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이 도출되어야 옳다.

제1항에서와 같이 우리는 아래 몇 가지 실천적인 구상을 제안해 본다.

 

<개인적 실천구상 : 평화를 만드는 길>

- 아침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천천히 묵상하며 기도한다.

- 느리게 걸음으로써 거칠어지기 쉬운 마음을 다스린다.

- 하고싶은 일이 있으면 3분 동안 생각해본 다음 실행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행한다.

- 나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 명령과 복종 등 우리 공동체생활 속에 군사문화가 남아있는지 성찰한다.

- 핵개발의 위험성에 대하여 공부하고 핵무기 보유국들의 핵포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 어떠한 명분을 가진 전쟁이든지 단호하게 반대한다.

- 전쟁도발, 파병 등 전쟁을 옹호하는 정당과 정권 혹은 나라를 반대한다.

- 흡수통일노선이 아닌 평화통일운동에 동참한다.

 

3. 경제정의 : 예수님의 경제논리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사 58:10)

 

세상을 살다보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부분이 경제적인 분야이다.

현대에 있어 정치의 가장 큰 화두가 경제로 된 것은 이런 직접성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살리기라는 명목 때문에 도덕적·정치적 기준을 무시해버려도 좋다는 생각을

온 천하에 드러낸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를 ‘자기 생활의 상대적 불편’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려 한다.

그 결과 경제정의라는 근본적인 가치보다는, 자기 이익에 함몰된 채 정치나 사회적 기조를 판단·정죄하곤 한다.

그래서 벌써 요즘의 경기악화를 토대로 현 정부에 대하여 다시 화살을 돌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비 복음적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경제현실을 보려한다면 이러한 태도에서 먼저 해방되어야 한다.

부에 눈이 멀어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필요와 질서를 외면한다면 복음을 팽개치고 맘몬을 좇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마 6:24).

물론 부나 사치가 아닌 풍요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구약의 지혜전승에서 ‘가난’은 게으름과 근면성 부족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로 묘사되거나(잠 10:4) 타고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잠 22:2). 다른 한편 물질 재화와 경제적 부는 그 자체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 사용했을 때 비난받았음을 생각할 수

있다. 예언서 전승은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기와 고리대금업, 착취와 커다란 불의를 단죄한다

(사 58:3~11, 호 4:1~2, 암 2:6~7, 미 2:1~2 등).

구약시대에는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라는 예언자의 윤리적 외침이 있었지만, 가난 자체를

이상화하거나 부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가르침은 달라진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복을 말씀하셨고(눅 6:20~21),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셨으며(마 6:24),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는 말씀도 하셨다.

또한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떠돌이의 삶,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경제논리는 공동선을 이룰 수 있는 나눔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난의 경제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도 가난의 이상을 따랐음이 분명하므로 가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기독교의 존재양식, 기독교적 실존, 영성 자체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선택하는 가난의 의미는 영적인 가난에서 출발한다.

물질적인 풍요의 포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기꺼이 내어놓는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기독교인이 선택하는 주요한 삶의 자세 중 하나였다. 특히 수도공동체들은 가난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가난을 이해하고 실천했다. 우선 가난하게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의미에서의 가난,

즉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는 물질적인 가난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헌신으로서의 가난이다.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같이 살려는 의지로서의 가난이다. 대체로 수도원 전통은 이런 것들을 지켜왔다. 이것은 가난, 겸손, 경건, 사랑의 실천이 기독교 전통에서 소중하게 살려 나가야 할 덕목들임을 시사한다.

어쩌면 기독교에서 가난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의 과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과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본래 하나님나라를 향한 ‘길의 종교’이다. 즉, 도상의 종교, 순례자들의 여행하는 종교인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안 된다. 재산이라는 것은 사람이 현실에 정착하고 안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를 묶어두는 것이다. 소유와 재산은 사회구조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유재산은 현실 안주의 정신성을

대표하는 것이니, 재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가난을 종교적 태도로 구하고 받아들일 때, 가난은 창조질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준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가 될 때, 가난은 도덕적 가치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태도를 지닐 때 사람들은 비로소 경제적 재화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관리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재화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기독교인의 시각에는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화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보편적 목적을 지닌다.

즉, 재화는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야 된다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게 된다.

반대로,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부를 인생 제일의 과제로 여기는 사람(혹은 부유한 사람)은 종국에 청지기적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된다(막 10:22). 부를 필요한 곳으로 분배하는 데 보다는 자기 손 안에 움켜쥐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형태의 부정축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재화에 부여하신 보편적 목적에 공공연히 위배됨은 당연하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인간해방이다. 그런데 이는 결핍뿐만 아니라 소유에서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경제정의의 실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교회교부들은 그 시대의 사회정치구조를 바꿀 필요성보다는 신자들의 마음의 회개와 변화를 더욱 강조하며, 경제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재화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화의 청지기로 인식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딤전 6:10)

그러므로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지상주의는 기독교적 사회정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복음의 전형이다.

복음을 떠나서 세상의 상식적 논리에 따르더라도 부의 성장과 이들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요구는 지극히 도덕적인 것이며,

인간들과 사회전체의 연대 또한 근본적인 덕목이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경유착, 족벌경영, 사회적 무책임 등이 손꼽힌다.

이는 오직 돈만 잘 벌면 된다는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간 존엄을 구체적으로 존중하는 것 등

공동선에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도 늘 함께 생각해야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돈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는 한 나만의 소비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소비사회의 도덕적 의무를 망각하기 쉽다.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 따르기’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회정의적 과제이다.

우리는 복음의 정신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경제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개인 차원의 회심을 통하여 소유 중심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고, 교회나 공동체 차원에서 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도덕한 경제의 흐름을 감시하고 조율할 수 있다. 우리의 경제생활을 복음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은 아주 가까운 데 있다.

 

<개인적 실천구상 : 경제정의로 나아가는 길>

-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매입하지 않는다.

-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소유하지 않는다.

- 생계와 상관없이 자기 욕심 때문에 과로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한다.

-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실용성을 따져 상품을 구입한다.

- 제조사의 사회공헌도를 고려하여 상품을 구입한다.

- 경영주의 입장보다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인다.

4. 정치권력과 정의 : 예수님의 정치논리

 

“하나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왕자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시 72:1~4)

 

정치생활은 ‘공동선을 위하여 정치권력이 행사되고, 법과 정의가 제대로 세워져서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 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정치생활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이며, 정치환경은 인간의 삶에 폭넓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정치권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국민들은 정당과 의회 등 정치권을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꼽았다

(CBS 노컷뉴스 2005. 12. 9). 그리고 권력과 언론의 유착은 국민을 그릇된 정보로 기만하여 더 큰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복음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인지, 시민사회가 정치질서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등에 대하여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 사회정의를 이루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긴요한 일이 된다.

경제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가난의 정신이었다면, 권력 혹은 정치생활에 대한 기독교적 기본정신은

섬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주님께서 선택하시고(시 17:15, 삼상 9:16) 주님께서 기름부어 축성하시는(삼상 16:12~13)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며(시 2:7)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계획을 드러내야 한다(시 72편 참조).

그러므로 왕은 약한 이들의 수호자이며 백성을 위한 정의의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

성서에서 예언자들의 비난은 바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왕들에게 집중된다

(왕상 21장, 사 10:1~14, 암 2:6~8; 8,4~8, 미 3:1~4 등).

예수께서는 민족의 통치자들이 휘두르는 압제와 전제의 권력을 거부하시고(막 10:42), 은인으로 행세하는 그들을 거부하시지만

(눅 22:25), 당대의 권위들을 송두리째 반대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가이사에게 바칠 세금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막 12:13~17)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단언하시는데, 이것은 세속의 권력을 하나님의 권력, 절대 권력으로 만들려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한 단죄와 같다. 예수님의 정치논리는 섬김이며 이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열려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부당한 법은 도덕적으로 올곧은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는바,

정치권력에 의해 사악한 행위에 협력하도록 요청받을 때 기독교인은 이를 거부하여야 마땅하다.

더불어 생각해 볼 문제는 언론에 대한 것이다. 정보는 민주적 참여를 위한 중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공동체의 상황이나,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한 진실, 그리고 제시된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을 모르고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복잡한 사회생활 영역에서 정보와 의사소통을 위한 여러 형태의 도구들(신문, 방송 등)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치권력의 의무이다. 정치권은 적절한 법률을 통해서 이들 도구들을 공평하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는 뉴스 미디어가 있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거기에 더하여 정치와 금융정보기관들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현재의 정보체계가 인간 삶의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는지 늘 고민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특정 집단에 의해서 왜곡되지는 않는지 상황을 꿰뚫어보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에 대하여 정의로운 비판을 할 수 있으려면 바른 정보를 얻으려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정보에만 노출되어 있는 것은 스스로를 악의 길로 내모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수구적 기조의 언론(가령 조·중·동)에서만 모든 정보를 취하는 습관을 길들인 어른들이나, 정치적인 부분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여성들의 경우 잘못된 정보에 예속될 가능성이 크다.

무릇 대부분의 정치권력은 대중들의 생각보다 훨씬 교활한 법이다.

사건의 진상이나 원인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우리는 거짓정보에 속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선거에 참여하여 좋은 정치가를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생활은 행정, 사법, 입법 기관뿐 아니라 파출소나 동사무소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일상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혁신하는 일도 중요한다. 그렇다면 정치생활을 복음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개인적 실천구상 : 정치적 정의를 향한 길>

- 나부터 촌지나 뇌물성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 사회 약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도록 돕는다.

- 인맥이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정책을 보고 정당을 지지한다.

- 올바른 정보를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 진보적 성향의 매체를 정기구독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 교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디서든 권력에 매이지 않고 섬기는 자세를 견지한다.

- 위정자들을 위하여 늘 기도한다.

 

5. 생태정의 : 창조질서 회복과 환경보존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롬 8:21~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 만한 환경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세상에 초대하셨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 환경을 보존하지 못하고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생존마저 스스로 위협하고 있다.

무분별한 자원의 낭비와 오염, 육식과 축산에 따른 환경파괴, 유전자조작에 의한 미지의 질병발생 등 자연을 파괴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의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환경이 맺는 관계는 무엇인지, 자연은 왜 하나님을 알아보는 성사(聖事)가

되는지, 자연환경을 회복하고 보존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보는 것은 사회정의적 차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믿음은 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실천되는 믿음이다.

이 세상을 적대적인 환경이나 해방되어야 할 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책임 있는

관리와 활동 아래 맡기신 장소이자 계획으로 인식하는 믿음이다. 보시기에 참 좋았던(창 1:31) 이 피조물의 정점에 하나님은 인간을 세우셨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7) 지어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책임에 맡기시고 인간에게 그것들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며 돌볼 임무를 맡기셨다(창 1:26~30).

따라서 인간이 동료 인간이나 환경과 맺는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온다.

기독교 문화는 언제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피조물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창조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르고 보살펴야 할

존재로 인정해 왔다. 프란치스코 영성은 특별히 인간이 환경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증언해 왔으며 인간에게 주변 세계의 모든

실재를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주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기독교사상을 지목한다.

그들의 출발이 잘못된 성서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를 보면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낸다.

하나님과 이루는 관계가 고려되지 않을 때, 자연은 그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황페해진다.

그러므로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인간이 자기 원대로만, 자기 경제적 필요에만 의거해서 사용하는 것은 공동선에 위배된다.

모든 존재는 창조주께서 세우신 우주의 질서 안에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므로 현재 생태위기에 대하여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숙고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환경보존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환경과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노력은 시민단체나 국가 혹은 국제 공동체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문제이기에,

우리가 먼저 우리의 생활양식을 환경 친화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게 된다.

적게 소비하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법과 생활 속에서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는 일은 어떤 것인지 늘 연구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기독교 사회정의 구현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개인적 실천구상 : 창조질서 회복의 길>

-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10분 이내 거리는 걸어 다닌다.

-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기 위해 TV시청이나 대형마트 이용을 자제한다.

- 정기적으로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의 목록을 써보고 한 달 이상 사용하지 않고 쌓아둔 물건은 아름다운 가게 등에

내어놓는다.

- 육식이나 과도한 에너지 소비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환경을 파괴하는지 공부해 본다.

- 생태적 삶을 살기 위한 여러 운동 단체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활동을 도운다.

 

Ⅲ.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한 몸부림 : 부단한 개혁을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정의를 구축하는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 생각해 보았다.

즉, 기독인으로서 사회정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무슨 사안을 만나든지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근본적 가치, 절대적 가치에 주목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된다 하였다. 모든 창조세계는 공동선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지음 받았다.

유독 인간이 그 공동선의 길을 이탈하여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자행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이 들어있는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둠을 향하여 빛을 던져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제자된 이들은 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소금이요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마 5:13~16).

그러므로 산 위에 있는 마을로서 본을 보여야 하고(마 5:14), 주님의 정의를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한다(눅 12:3).

우리가 사회의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그 불의에 동조함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우리는 예언자적 소명, 곧 진실을 외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아울러 예언자적 활동과 영성생활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

미가 예언자의 탁월한 지적과 같이 우리는 나-하나님, 나-이웃, 나-사회와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정의를 향한 모든 변혁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설정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향하여서 하는 만큼 나를 향해서도, 세상을 향해서 하는 비중으로 교회를 향해서도 늘 깨어 바라보고 기도하며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니, 역사를 두고 볼 때 이 세 영역 중에서 교회는 개인 혹은 간개인적 영성보다 사회정의적 영성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거나 외면하였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균형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사회정의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과 적극적인 행동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할 때 공동선이라는 목표로 가는 기본적 가치가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 평화, 인권, 경제정의, 정치정의, 생태정의] 등이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라는 잣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거기에는 개인적 노력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노력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세상은 어두움에 묻혀있기에 우리의 이러한 태도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상의 역저항에 대하여는 순교자적 자세와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정의로 가는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행동단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태도는, 세상을 흘러가는 대로

살거나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공동체의 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치열하고 성실하며 진지하게

사회적 영역의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기독인들이 세 가지 단계의

행동원칙을 가져줄 것을 권한다. 즉,

①진실을 향한 열정과 정당한 관찰,

②복음적 진리의 빛으로써 개인 혹은 공동체적으로 판단하기,

③판단하고 결정한대로 즉시 행동하기 등의 단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찰 - 판단 - 행동의 세 단계에서 주요한 지침과 근거가 되는 것은 우리가 상정한 기본적 가치이다.

곧 생명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깃들어있는가 없는가(생명), 거기에 폭력성은 없는가(평화),

나눔의 정신이 있는가(경제정의), 섬김의 정신이 있는가(정치정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생태정의) 등의

가치기준으로 각 단계의 것을 수행해 내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향해서도, 교회를 향해서도, 나를 향해서도 적용되어야 할 기본가치이다.

특별히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행동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임을 생각하고, 기독교회 자체의 변혁에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향해 몸부림칠 때 비로소 세상으로 나가는 빛이 힘을 얻어 뻗어갈 수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름 그대로 ‘개혁교회’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종교 개혁가들이 기치로 내세웠던 표어를 이 시간 다시 한 번 생각해봄으로써, 기독교 사회정의의 내용이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까지 번져나가야 될 지 숙고하고 결단해 보고자 한다.

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정신이 기독교가 품고가야 할 정의의 정신이요, 우리가 품고 가야할 개혁정신 기조이다.

나의 개혁, 교회의 개혁, 세상의 개혁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제자도에서 우리는 늘 미완성의 상태이며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진다는 점을 기억하였듯이,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발길에도

완성은 없다는 정신으로 늘 개혁되는 우리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 https : // m. blog. naver. com / kiwon 255 / 50109616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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