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존재에 대한 묵상-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
(Proslogion)을 통하여
전 원래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한글 초록>
오늘날 ‘신 존재 증명’은 신앙인들에게 어렵고 복잡하고 우리의 신앙적 일상과는 무관해 보인다.
이는 신 존재 증명이 거대 담론의 체계에 따라 객관적 언어로 신을 정의하는 까닭이다.
신자들에게 이들 담론은 믿음과 신앙고백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분리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담론이 신앙적 삶과 괴리되고 체계적이고 객관적 지식이 되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거대 담론을 이해해야 하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안 셀 무스에게 ‘신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이성적 일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적이다.
즉 신존재에 대한 성찰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신앙적 겸손과 기쁨,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대한 찬양을 낳았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신앙적 측면 역시 충분히 사유할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묵상은 더 풍성해지고, 신앙인의 신앙은 더 강화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충만함을 고대하게 할 것이다.
I. 들어가며
신은 존재하는가? 신자들에게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수용하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의심 혹은
불신으로 여겨지기 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수많은 신앙적 담론의 출발이다.
수많은 교부들과 사상가들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하며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교회사적으로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상세 한 이성적 탐구는 나타하지 않았다.
2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이성적 성찰이 시작된 것은 11세기의 안 셀 무스부터였다.
3 이후로 수많은 신존재에 대한 성찰들이 나타났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르네 데카르트(R. Decartes), 라이프니츠(Leibniz), 칸트
(Kant), 셀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 등.
4 다양한 신 존재에 대한 성찰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은 『문화의 가치』(Culture and Value)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 존재 증명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 시 켜줄 수 있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러한 증명을 주장한 신자들이 하려고 했던 일은, 그들 자신이 이러한 증명의 결과로 믿게 된 것이 아닌데도,
자기네 믿음에다 지적인 토대와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 비트겐슈타인은 신자들에게 있어 신 존재 증명은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에 대한 지적인 근거와 분석을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안 셀 무스에게서 나타나는 ‘믿고 사랑하는 주님을 이해할 기를 원한다’(credo ut intelligam)
신자들의 신존재에 대한 증명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다. 11세기에 안셀무스는 자신의 신앙의 내용인 하나님의 존재하심 을
이성적 성찰을 통해 증명하려 시도하였다.
필자의 견해로 안셀무스를 비롯한 서방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 고찰은 이중적인 목적을 지닌다.
첫째는 신의 존재가 모든 신학[사상] 적 담론의 출발 혹은 결론으로서 자리한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토마스의 기본적인 사유는 “그것은 존재하는가”(an sit)에서, “그것은
무엇인가”(Quod/quis sit)로, 다시 여기서 그것은 “어떤 종류인 가(Qualis sit)로 전개되는 특성을 지닌다. 7
신의 존재에서 토마스의 모든 신학적 사유는 출발한다. 칼빈에게서도 하나님에 대한 앎은 신학의 출발이다. 8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각자의 거대한 사상적 담론의 토대이자 출발이다.
둘째로는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 님에 존재에 대한 사유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자
송영(doxology)이다.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담고 있다는 대표성으로 인해,
이 저술은 현대의 신학적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9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논증으로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이 저술이 합리적인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기보다는 신학적 명상으로 보기도 한다. 10
즉 안 셀 무스에 게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기도 그리고 송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역사적으로 신존재에 대한 성찰은 첫째의 목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나, 필자는 안 셀 무스의 신학에서 이 두 번째의 요소를
주목하여 고찰하려 시도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성찰이 치밀한 신학적 토대/사상적 체계를 구축함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수고임을 드러내고, 현대인들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본 연구는, 우선적으로 몇 인물들의 신존재에 관한 성찰을 살펴보려 한다.
특히 신학대전에서 인간에 관한 논의가 바로 이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박승 창연 안 셀 무스의 두 저서에 대한 번역과 더불어 상세한 해제를 더하였다.
아래에서 Anselmus, 『모놀로 기온 & 프로 슬로 기온』과 페이지로 된 언급은 백승 창의 해제에 대한 부분이며,
Anselmus, 저 서명, 장(chapter) 그리고 백승 창의 번역본 페이지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신 존재 증명을 깊이 있게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 신존재에 대한 이해가 각각의 사상적
체계에서 차지하는 의의만을 살펴본다. 따라서 각 인물들이 신존재에 대하여 탐구를 하는 의의와 목적을 간략하게 제시하고(II),
안 셀 무스의 신앙의 합리성의 추구와 『모놀로그 온』에 대하여(III-1,2),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에서 제시하는
실존 재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서의 송영(III-3), 그리고 결론적으로 신 존재의 성찰에 대한 더 많은 필요성(IV)으로 마무리한다.
II. 신 존재 증명의 목적과 그 의의
본 단락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르네 데카르트,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의 신 존재에 대한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신존재 증명이 각각의 사상적 체계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다.
1.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에서 신 존재 증명의 목적과 의의 안셀무스는 『모놀로 기온』(Monologion)에서의 자신의
작업이 여러 논증 들을 한데 묶어놓았음을 말한 다음, 이들 논쟁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증명을 찾기 위해 묵상하기 시작한다.
즉 그것은 논리적으로 자족적 이어 서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믿음’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11 그러나 안셀무스는 이러한 연구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였고, 절망적으로 보여, 스스로 포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단하지 않고 찾던 그에게 찾아온 논증이 이다.
그는 자신의 증명이 읽는 독자들에 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여기고 책으로 저술하였다.
안 셀 무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기쁨”을 낳는다. 13
마지막 장인 26장의 마지막 구절은 “내가 나의 주님의 기쁨에 들어가, 그 주님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때까지,
아멘”이다. 결국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성찰은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송영(doxology)로 승화되고 있다.
안 셀 무스의 독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명상하기 위해 정신을 드높이려고 애를 쓰면서, 자신이 믿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자들이다. 안셀무스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성찰하는 목적을 제2장에서 보다 명확히 표현한다.
스스로 믿고 사랑하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aliquatenus)까지 내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을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기 위해 앎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즉, 나는 먼저 믿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 (Proslogion, c. 2.) 그러나 안셀무스가 생각한 독자들은 믿는 것을 알기 위해 수고하는 자들, 즉 신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안셀무스는 『프로 슬로 기온』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 신앙인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비신앙)를 논의의 주인공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신앙인과 비 신앙인 모두를 대화 상대자로 12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존재론적 증명(ontologischer Gottesbeweis)라 명한 이는 칸트에 이르러서이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을 통해 신앙인이라 면 하나님에 관한 신비로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또 비신앙인이라도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고 그 실존을 이해함으로써 믿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기를 원했다. 15
안셀무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길을 열어놓은 후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담론에서 이성적인 논증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되었다. 16
현대에 이르러 철학자들은 안 셀 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옹호하는 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논증의 철학적으로 잘 된 증명인지를 질문하기보다는, 이 논증이
순수한 철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대해 의문을 가지려 한다. 17
이러한 갈등의 요소에는 안 셀 무스의 논증을 순수하게 이성적 담론으로만 이해하려 하고, 그에 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묵상이 낳는 기쁨과 송영’에 대한 요소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프로 슬로 기온』의 전체적인 흐름은 안 셀 무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이해만 큼이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묵상은 중요하다. 18 2.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이 신 존재 증명의 목적 본 단락에서는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이 그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혹은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목적에 대한 간략하게 제시한다.
신 존재 증명을 논하는 『신학대전』에서 토마스에게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학적인 내용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기준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한 행위들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행위의 근원이며 목적이다. 즉 토마스는 신학의 모든 내용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찰하며,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신학의 중심 내용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은 모든 내용들을 다스리고 통합하는 중심 주제이다(sub ratione Dei).
즉, 신학은 하나님 그 자체와, 혹은 하나님을 자신의 근원과 그 목적으로 관련을 맺는 한에서 사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ordinem ad Deum).19 이처럼 토마스의 신학의 내적인 원리들과 신학의 전체적 내용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다루어진다.
이를 통해서 토마스는 학문으로 서의 신학의 통일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실상 토마스는 3부로 이루어진 『신학대전』에서 그 구성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에 관하여(1 부), 이성적 피조물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 (2부)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길로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3부).20 이처럼 신학의 모든 내용이 신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가 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21, 토마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이후의 모든 신학적 논의의 기초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이다. 22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소위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kosmo logischer Gottesbeweis)은 현실 세계에 대한 성찰에서
신적 진리에로의 고양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토마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의 출발은 현실적 경험이다.
운동, 인과관계, 가능성과 필연성, 완전성의 정도, 질서 등의 경험에서 신적인 진리에로 옮아간다.
즉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진 결과를 통해 논증하려 시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논증을 시도하는 이유는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학문적 논증은 두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첫째는 “원인이 이러하므로”(proter quid)이고,
둘째는 “결과가 이러하므로”(quia)이다. 23 이러한 이성적 논증의 형식을 취할 수 있어야지만, 토마스에게 그 내용들에 하나의
체계적인 질서를 부여할 수 있고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재(esse)에서 본성(nature), 본성에서 능력(ability)으로 전개되는 스콜라적인 학문 방법론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신학대 전』에서 토마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려는 것은 그의 모든 신앙의 내용과 학문적
체계의 토대를 구축하려 함이다. 3. 데카르트에서의 신존재의 의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5-1650)는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사유를 전개한다. 그는 전통적인[종교적] 권위에 맞서며 인식에 관한 탐구를 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서
기초를 놓으려 했다. 24 즉 데카르트는 자신의 목표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참된 방법"25로, 모든 것에 대한 회의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세계론』을 싣고 있다. 아래의 데카르트의 저서는 이 번역의 페이지에 기초하였다.
. 이것이 데카르트에게 학문을 위한 확실하고 자명한 출발점이다. 27 그러나 데카르트는 곧 다른 문제에 부딪친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타고난 관념”(ideae innate, eingeborne Ideen)이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여기에
속한다. 28 데카르트에게는 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나 이외의 사물에 대한 긍정을 담보한다. 사물 세계의 확실성에 대한 맨 마지막 근거 역시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다.
즉 하나님의 실재성을 통해 사물의 실제성을 확신할 수 있다. 29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이 자아를 넘어설 수 있는 장치로서 여겨진다. 그렇지만 데카르트에게 신지식은 수동적이다.
타고난 것이며 주어진 것이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외견상 자아와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타자로 서의 신을 도입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스스로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인간의 정신에 일정한 한계를 부여한다. 30
데카르트에게서 자존성을 지닌 하나님은 <코기토>(cogito)의 주관성을 극복하는 개념이다.
즉 신이야말로 그에게 주관을 넘어서는 첫걸음이다. 31 그러므로 데카르 트에게 중요한 것은 신적 본성에 관한 성찰이며,
안 셀 무스의 연역적인 신 이해는 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안셀무스가 신에 대한 존재와 본성에
대한 믿음의 내용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데카르트에게 신의 본성은 자신의 사고체계의 외연 확장을 위한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 방법인 신의 존재에서 본성으로, 그리고 행위로 전개하는 사유 과정을 뒤집었다.
데카르트는 “신의 확실성으로부터 자아의 확실 성으로 건너가던 중세적 추론 방식이 근대적인 방법으로 교체된 것이다.
자아의 확실성으로부터 신의 확실성으로 건너가는 것이다.”32 데카르트의 특유한 신 존재 증명, 그것은 우주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인간 주체로부터, 인간 의식으로부터 도출하였다. 신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전체를 규정하는 데카르트의 인식 체계 속에 함유되었다. 33 그리고 신은 데카르트의 확실하고 자명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보장의 역할을 감당한다. 4.
임마누엘 칸트(Immanul Kant, 1724-1904)에서의 신존재의 의미 신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칸트만큼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칸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이다. 동시에 이 지식은 이성을 통해 검토되어야 하고, 비판되어야 한다. 34
칸트에게 경험의 영역 바깥에 서, 인과성의 원리는 사용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리들은
오직 내재적이고 즉 현상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지 만,
그것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35 이 같은 주장에 따라 우리 내부에는 가장 실제적이고, 자충 족적이며 영원하고 단순한
최고의 실재를 표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 개념은 개념일 뿐이다. 36
이렇게 칸트에게 신의 본성에 대한 데카르트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칸트는 신은 하나의 개념이며 37, 이 신에 관한 개념의 배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신 존재에 관한 전통적인 논의를 검토하며, 신존재 증명 은 세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38 이 셋 모두 그에게는 가치가 없다.
그에게 본체론적 신 존재 증명은 실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순히 개념의 영역 안에 갇혀 있으며, 명사를 설명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39
더불어 현상의 경험으로부터 출발시키는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은 현상의 세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제를 현상계를 넘어서서 적용하고 있으므로 이는 부당한 추리(ignoratio elenchi)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칸트의 순수이성의 영역에 신의 존재는 설자리가 없다. 40
그러나 1788년 『실천이성 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통해 칸트는 죽지 않음, 자유, 그리고 신을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으로 제시한다. 소위 “윤리적인 신 존재 증명”(moral ischer Gottesbeweis)라고 불리는 이 논증은,
“신과 미래의 삶은, 순수이 성이 우리들에게 지워 준 책무로부터-바로 그와 똑같은 이성의 여러 원리들에 따라- 떼어낼 수 없는
두 가지의 전제들이다. 이런 도덕적인 신 증명이야말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신 증명이다.”41
칸트에 게는 하나님에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확신은 없지만,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윤리적, 실천적 확신은 있다.
칸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행위의 필수적인 전제로서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칸트 신학은 논리적으로 볼 때 윤리학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에 의존하고 있다.
신을 완벽한 도덕적 행위자로서, 미덕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주는 자 등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신학이 윤리학에 우선하며, 도덕적 명령은 신의 명령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거꾸로 뒤집힌다. 42
칸트의 순수이성의 체계 속에 신존재는 없다. 신 존재는 윤리적 행위의 전제로서 요청될 뿐이다. 5.
소결론 네 사람의 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이성적 노력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성찰하는 방법과 목적은 전혀 다르다.
안 센 무스에게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사실이며, 이성적 성찰의 대상이고, 그 하나님은 자신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안 셀 무스에게 기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그의 거대한 신학적 담론의 출발이자 목표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하여 증명 함에 실패한다면 그의 거대한 체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면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존재는 참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에서 마지막에 위치한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방법의 한 단계에 위치하며, 그의 사상적 체계를 담보하는 역할로 자리한다.
칸트에게 하나님은 그의 순수 이성적 체계 속에는 설자리가 없다.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위해 요청될 뿐이다.
하나님은 인식의 체계에서도 밀려나고 주변이 되었다. 이처럼 후대로 갈수록 하나님은 성찰 자와 무관한 제 삼자가 되어 간다.
이러한 경향을 이 경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간주되던 사고방식에서,
진리를 말하는데 왜 신의 존재까지 말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고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43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진리와 학문의 토대를 놓던 시대에서, 어떻게 진리와 학문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으로 변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학문의 추가 옮겨지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사유는 주변이 되었다.
III. 안 셀 무스의 신존재에 대한 성찰
1. 안 셀 무스의 신앙의 합리성 안셀무스는 1033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서부를 구분하는 지경의 이탈리 아 피에몬테 지방의
아오스타(Aosta) 태어났다. 그는 청년이 되어 노르만 계열의 르 베크(Bec) 대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당시
그의 유명한 동향인 란 프랑 쿠스(Lanfrancus)가 지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란 프랑 쿠스는 성경연구와 더불어, 고전 논리학과 수사학을 강의했다. 44
당시 베크에서 란 프랑 쿠스는 혁신적인 성격의 학교를 설립했다.
현지 귀족의 자제들도 참여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개방된’ 수도원 학교였다. 45
이는 교육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서의 신앙의 내용의 전달 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설명, 이해시키고, 논증의 필요성이
요청되어 음을 의미한다. 란 프랑 쿠스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성경과 교부들을 근거로 43 이 경재.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판으로 본 스콜라 사상의 두 흐름,”권위에 의한 증명을 시도하였지만, 안셀무스는 바로 이 권위에 의한
증명을 원칙적으로 포기하였다. 46 오히려 안셀무스는 성찬논쟁에서 란 프랑 쿠스의 적수였던 베렝가리우스의 요청인
“신앙의 합리적 근 거”(ratio fidei)를 수용하며, 47 사유의 필연성과 신앙의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48
학문적 성찰에서 안 셀 무스의 중요한 전제는, ‘성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이성을 수단으로 해서,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49 이런 점에서 요셉 피퍼(J. Pieper)는 안 셀 무스야말로 중세인들 중 “이성에 대한 무한정한 신뢰”를 보인 인물로
평가한다. 50 하지만 안셀무스를 이성에 사로잡힌 인물로 제한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 셀 무스의 논증이 신앙의 내용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신앙의 확실성”(fidei certitudi nem)을
덜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51 오히려 안 셀 무스에게는 자신의 증명이 신앙의 논증이기는 하지만, 비 신앙인들까지 설득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K. 플래시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안셀무스는 이성의 길을 통해 비신앙인들과도 통하고, 내용적으로는
교리에도 상응하는 이성적 통찰에 도달하기 위해 신앙의 교리 내용을 방법적으로 괄호 속에 넣으려고 했다.”로 평가한다.
실제로 안셀무스는 존재하는 비기독교도인 유대인과 아라비아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나아가 극복해야 할 불신앙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말하고 개별적인 탐구를 통해 얻어지는 결론이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이든지 명확한 형식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증, 단순한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필연성을 간결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필연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개방된 수도원 학교에서 안 셀 무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강론의 주제는 하나님에 대하여 설득하는 것이었다. 53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며, 선하고 옳으며, 또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또한 사유하고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상(imago dei)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54
하나님의 존재가 안 셀 무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증명이 문제였다.
즉 “권위에 따른 논증”이 아니라 “이성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어야 했다. 55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사유는 오랫동안 그의 관심사였음을 『모놀로 기온』(Monologion) 은 잘 드러난다.
안 셀 무스의 신에 대한 성찰은 『프로 슬로 기온』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안 셀 무스의 이 두 저서는 서로 상호보완의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모놀로 기온』의 신에 대한 성찰이 선, 존재 같은 완전성 하나하나로부터의 논증인데 반해, 『프로 슬로 기온』의
논증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56 즉 전자에서는 신앙의 신비[하나님] 그 자체가 우리의 이성 속에 드러나고,
이성을 통해 해명해 가는 과정이라면, 57 이를 바탕으로 후자에서는 그 신비가 우리 신앙의 대상이며, 얼마나 우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가를 드러낸다. 따라서 안 셀 무스의 신의 존재에 대한 고찰은 먼저 『모놀로 기온』에 대하여 간락 하게 제시해야 한다.
2. 『모놀로 기온』(Monologion)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고찰 안셀무스는 『모놀로 기온』의 첫 번째 판을 자신의
스승인 란 프랑 쿠스에 게 보내어 이 작품의 제목을 붙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란크랑쿠스로부터 답을 얻지 못하였고, 안셀무스 스스로 생각했던 제목은 Exemplum meditandi de ratione fidei
(신앙의 근거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예)였다. 주로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대한 오랫동안의 연구 끝에 나온
저술인 이 책에서, 안셀무스는 신적 존재에 대한 하나의 명상으로 묘사한다.
또한 자신의 통찰의 결과들은 명백히 아우구스티노 시적이라고 주장하였다. 58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숙고해 보았지만,
나는 여기에서 가톨릭 교부들, 그리고 특별히 복된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작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은 무엇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를 새로운 것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거나 거짓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곧바로 마구 비난하지 말고,
먼저 이미 설명한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삼위일체 론』(De Trinitate)을 주의 깊게 통할한 다음 그것에 따라 나의 작품을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Monologion, prooem.) 59 란 프랑 쿠스 역시 안셀무스가 말한 것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부합되지 않는 것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그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어서 란 프랑 쿠스는 안셀무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거를 인용해야 하며, 원전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60
하지만 안셀무스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제시될 때, 합리적인 사람[일반인]이 라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61 때문에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에서 성서의 역할을 배제하고 이성적 논증을 시도한다.
이는 믿음의 내용이 [교회적] 권위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논증에 의해 설득력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핵심 원리인 “오직 이성으로만”(sola ratione)는 그가 결코 성서를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이성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62
안 셀 무스의 방법은 수사들이 선에 관해 알고 있는 바로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나아간다.
출발은 하나님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한 존재, 스스로 존재’하는이라는 보편적 인식이다. 63
화덕형은 『모놀로 기온』은 안 셀 무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성찰인데, 그 내용을
i) 존재의 근원으로서 완전한 존재이신 성부 하나님[1-26], ii) 사물의 이해의 근원인 말씀으로서 성자 하나님[29-48장], iii)
사물의 실현의 근원이신 사랑으로서의 성령 하나님[49-59장]으로 제시한다. 64
그러나 『모놀로 기온』에서 안셀 무스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것에 항상 성공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그 한계도 지적되는데, 안셀무스는 합리적 논증이 신앙의 내용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곧바로 “신앙의 확실성”(fidei certitudi nem)을 덜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65
이러한 유보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가 『모놀로 기온』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신비에 대한 이성적 성찰의
필요성”(fides quaerens intellectus)이며, 이는 곧이어 는 신의 존재하심 대한 고찰인
『프로 슬로 기온』의 부제(副題))이기도 하다.
3. 『프로 슬로 기온』(Proslogion)에서의 신 존재에 대한 성찰
‘수많은 논증의 연쇄’를 구축했으나, 여전히 “충분한 단 하나의 증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안셀무스는 지속적인 사유를 통해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거의 절망과 포기의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그에게 다가온 것이 소위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이었다. 66
이러한 발견을 G. R. 에번스는 “유레카”의 순간으로 설명한다. 67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 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논증으로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이 저술에 대한
가장 많은 질문은 <『프로 슬로 기온』의 담론이 신학적인가 아니면 철학적인가> 와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철학적으로
성공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나타났다. 68 스토 로즈(A. Stolz)는 이 『프로 슬로 기온』은 “신비주의 신학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69 피퍼 역시 『프로 슬로 기온』의 논증은 순수 합리적 논증 같지만, 그것이 기도 안에 들어가 있으며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록 끝맺는다고 말한다. 70 맥그래스 역시 『프로 슬로 기온』은 참으로 “논리적인 증명의 책이 아니라 명상의 책”
이라고 주장한다. 71 더불어 맥그래스는 안 셀 무스의 명상이 갖는 의도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어떻게
그의 실재에 대한 신앙을 강화시키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증명”은 신앙의 컨텍스트를 떠나서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72
따라서 안 셀 무스의 신학적 방법론인 ‘신앙의 합리성’은 단순히 현대적인 이성적 인과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안셀무스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반드시 필연적 이유들(rationes necessariae)만이 아니라, 적합한 이유들(rationes convenienstes)을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것이 된다. 73 이는 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성격이 조금 더 분명해질 것이라고 여겨진다. 『프로 슬로 기온』의 내용은 크게 1-4장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과
5-26장의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나누어진다.
1) 1-4장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 안셀무스가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로 고민한 적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강력하게 권고하며
『프로 슬로 기온』을 시작한다. 일상의 번잡함을 피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요청한다. ...
네 영혼의 <골방에 들어가라>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라, 그리고 그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그리고 문을 닫고 그를
찾아라. 내 온 마음아, 이제 말하라, 이제 하나님께 말하라: <제가 당신 얼굴을 찾습니다. 주님, 당신 얼굴을 제가 찾습니다....
하나님에 존재를 발견하려는 성찰에 몰두하면서도 안셀무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어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근거들과 그리고 그 장애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어둠과 죽음, 비참함과 눈멂, 고통과 슬픔 가운데 빛을 찾아 발견하고 사랑하려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이해와 더불어 안셀무스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memini), 알고(cogitare), 사랑(amare) 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주님, 저는 고백하며 당신께서 제 안에 당신의 모상을 창조하셨기에 감사드리나이다.
그로부터 저는 당신을 기억하며,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75
그러나 어둠과 고통과 죽음에 사로잡혔으며, 당신의 얼굴로부터 멀리 내던져진 인간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고(renovare) 수정하지
않으면 (reformare), 원래 하도록 만들어진 당신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는 것을 할 수 없다. 76
때문에 안 셀 무스의 간구는 자신에게 허락된 정도까지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진리를 이해하고 싶다는 기대와 열망을 표현한다.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aliquatenus)까지 내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기 위해 앎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안셀무스가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성찰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주시는 주님’(Ergo Domine, qui das fidei intellectum)에 대한 신뢰에서 가능하다. 믿는 바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존재하시는 것을 이해하게 해 주신다. 78
제2장에서 안 셀 무스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하나의 명제를 탄생시킨다. 신은 “그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
이다. 이와 같은 신의 정의를 따를 때 ‘신은 사고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안셀무스는 이 정의야말로 『모놀로 기온』에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탐구했던 모든 하나님의 술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안셀무스를 환호하게 했던 논증이다.
우리가 당신에 고백하는 것은, '당신은 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aliquid quo nihil maius cogitari possit)입니다....
실상 '그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사고에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고에만 존재한다면, 사람은 그보다 큰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고에서의 '그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그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그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사고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존재합니다(et in intellectu et in re).79 안 셀 무스의 이하니 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 엄밀한 이성적 법칙에 합치하는가?
혹은 신의 정의가 적절한가 하는 질문은 논의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안셀무스는 이 증명의 문제를 지적하는 가우 니로의 논박에 신에 대한 정의를 전제로서 인정할 때,
결론에 오류가 없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80 제3장은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안 셀 무스와의 관계에 대하여 제시한다.
이성적으로 모든 하나님에 대한 술어를 충족시키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존재하심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존재가 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Et hoc es tu, domine deus noster).
또한 주 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시며, 당신의 존재하지 않음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81
이 주장은 일반 사상가들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과 성찰에서 가장 난감한 부분이다. 즉 안 셀 무스의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성찰하는 자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앞에서 거론한 신 존재 증명에 관한 성찰을 제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나는 서로 독립적으로 선다.
예를 들면 힐스 베르거는 ‘관여’(Teilhabe)의 개념을 통해 칸트 신 존재 증명의 가장 약점이 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82
그런데 안셀무스는 제4장을 후대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다.
그것은 개념에서 사물의 존재를 생각하는 방법과(enim cogitar res, cum vox eam significan
s cotitatur), 사물 자체의 이해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것(cum id ipsum, quod res est, intelligitur)이다.
전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두 번째 의미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83 후자의 방식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 한다고 주장하는 데카르트와 하나님을
개념(vox)으로 이해하고 존재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음을 역설하는 칸트의 논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안 셀 무스에게 이러한 논쟁은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있을 뿐이다. 자비로우신 주여,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은혜로 믿었던 것을 이제 당신께서 비추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를 거절하더라도 나는 그것(당신의 존재)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4
박승 창연 이 문장에서 마침내 안 셀 무스의 방법론적 요구가 다시 한번 뚜렷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신적 본성의 의심할 수 없는 실제 존재를 필연적으로 증명하고, 비록 신앙이 이 이성적인 지식 뒤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 논증의 결과를 혼란 없이 고수하는 것이란 신앙이 아니라 이성이다. 85
반면에 맥그래스는 안 셀 무스의 명상 이 갖는 의도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어떻게 그의 실재에 대한
신앙을 강화시키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신앙의 컨텍스트를 떠나서는 아무 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86 그러나 이 첫 번째 부분인 1-4장은 분명히 이성적 논증이 우세하다.
그 중심이 제2장의 논증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첫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함으로 이어지는 묵상과 신앙적 성격을 예고한다.
5-26에 이르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안 셀 무스의 신존재에 대한 이성적 논증은 사실상 제4장에서 종결된다.
필자의 견해로 이어지는 제26장까지의 내용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들에 대한 묵상과 그로 인한 기쁨이며, 또한
그 하나님께 드려지는 안 셀 무스의 송영(doxology)이다. 박승 창연 후반부 역시 첫 부분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여긴다. 87
이 후반부에서 고찰하는 내용 들은 모두 신존재의 정의에 종속적이라는 점에서 첫째 부분의 중요성을 강화하는 것 같다. 88
그러나 이 둘째 부분은 신존재의 정의에 따른 신자들의 다양한 질문과 기도, 찬양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설정을
잘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묵상과 신앙적 속성도 명백히 드러낸다.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에서 “그 실재가 우리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3장의 결론은 중요한 전제로 자리한다.
따라서 이 후반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안셀무스 개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안셀무 스는 제9장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성찰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1인칭 자신을 직접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묵상인 후반부에서 1인칭으로 표현된 부분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안셀무스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묵상에서 5-8장까지의 내용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전능하심 등에 87 Anselmus, 『모놀로 기온 & 프로 슬로 기온』, 394. 88 안셀무스는 무로부터의 창조(5장),
빗물 체적이면서도 감각적임(6장), 전능하심(7장), 자비 로 유심(8-11장), 생명(12장), 시간과 공간의 무제한성(13),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통찰의 불가능성(14장),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음(15장), 신적인 빛의 도달 불가능성(16장),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방식(17장), 나누어지지 않으심(18장), 시간과 공간을 벗어남(19장), 영원보다 앞서고 영원을 넘어섬(20 장),
영원하심(21장),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심(22장), 삼위일체로서의 최고선(23장), 인간의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최고선(24-26장)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다. 신존재에 대한 묵상-안 셀 무스의 『프로 슬로 기온』(Proslogion)을 통하여 / 전 원래 329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정의에 대해 질문하며, 이 사실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특히 9장부터 11장까지 안셀무스가 곤란해하는 부분은 죄인에 대한 용서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베푸는 악인에 대한 자비는 안셀무스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면서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한다. ...
당신은 최고로 의로우시므로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저를 도우소서, 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의 빛을 제가 찾고 있사오니,
저를 도우소서, 제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89 또 한 가지 안셀무스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하나님] 당신처럼(sicut es)” 보지 못하는 현실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발견했다면 왜 하나님을 확실하고 참되게 느끼지 못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다. 여기에 대한 안 셀 무스의 묵상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까지만’ 이해하고 인식하지만, ‘하나님처럼’(sicut es)
이해하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피조물의 이해할 수 있는바를 훨씬 능가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어떤 것’(quiddam maius cogitari possit)이기 때문이다. 90
그러므로 안셀무스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그것(내 영혼)이 바라본 것이
빛과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당신을 보지 못한 것은 당신을 어느 정도까지는 보지만, 바로 당신인 것처럼(sicut es)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 나의 주 하나님, 나의 창조주이시며 새롭게 하시는 이여, 갈망하고 있는 것을 순수하게 볼 수 있도록,... 91
또한 안셀무스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함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무수한 노력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 조화, 향기, 맛 그리고 부드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감각들이
죄로 얼어붙고, 마비되고 그리고 무뎌졌기 때문이다. 92 ... 당신께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나로부터 당신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십니까? 이렇게 당신의 시야 안에 현존하고 있는 나의 시야로부터 당신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십니까?
어디든지 당신은 온전히 현존하고 계시지만-나는 신을 보지 못합니다. 제가 당신 안에서 움직이고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지만-나는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다. 93
하나님에 존재에 대한 묵상은 인간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낳는다. 죄로 인한 추락으로 기인한 이러한 간극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안셀무스는 겸손히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있도록 다시금 간청을 드린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씻고, 회복 시 키시고, 날카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고양시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바라볼 수도 없다.
칼빈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는”94 것처럼 하나님에 깊은 성찰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도록
이끈다. 저를 도우소서, 당신이여, 주님, 당신의 선하심 때문에 내가 당신의 얼굴을 찾았고, 당신의 얼굴을, 주님 내가 찾고 있습니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당신께로 들어 올리소서. 내 영혼의 눈을 씻으셔서 낫게 하소서, 날카롭게 하소서 비추소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내 영혼이 자기 힘을 다시 모을 수 있게 하시고, 온전한 지성으로 당신을 다시금 바라보도록 하소서,
주님! 95 결국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찰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안셀무스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성찰은 인간 스스로 죄와 한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인식을 낳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찰하는 자[신학자]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자다.
에바 그리 스위스의 표현을 따라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야말로 신학자이다.
내 영혼아 일어나라, 그리고 너의 모든 지성을 가다듬어서, 네가 할 수 있는 한, 이 선이 어떤 종류이고 얼마나 큰 지에 대해 생각하라, 개별적인 선들이 즐겁게 해준다면, 모든 선의 유쾌함을 내포하고 있는 이 선이 얼마나 즐겁게 해줄지를 곰곰이 생각하라... 97
안셀무스는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성찰하는 인간들은 결국 그가 찾는 것, 그가 갈망하는 것,
그가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 하나님의 선하 심은 본 적도, 들은 적도 그리고 알아본 적도 없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은 우리의 모든 열망들을-아름다움, 배부름, 건강, 멜로디, 지혜, 우정, 화목, 능력, 영예, 참된 안전,...- 충족하고
배부르게 하는 것이다. 98 ...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내가 갈망하는 모든 것이 저기 있다.... ...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때, 배부르게 될 것이다. 취함이라면, 하나님의 집의 풍요로부터 취하게 될 것이다. ... 99
실제로 안셀무스 스스로는 참으로 충만한 기쁨을 발견했다. 마음이 가득 차고, 영혼이 가득 차고 온전한 인간이 가득 찰 정도로
기쁨이 충만해졌다. 하나님에 대한 성찰은 넘치는 기쁨을 가져온다. 나는 정말 충만함, 아니 충만함보다 더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그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차고, 정신이 가득 차고, 영혼이 가득 차고, 온전한 인간이 가득 차고 나서도 아직도 그릇이 넘치도록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100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찾는 자들에 충만한 기쁨을 허락할 것이라 고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자신이 발견한 그 충만한 기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기쁨인지를 질문한다.
동시에 안셀무스는 주님 약속하신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앎과 사랑은
종말론적인 충만으로 자라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 확실히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 정도만큼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 정도만큼, 사랑할 것입니다....
확실히 저세상에서 그들이 얼마나 당신을 알고 사랑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청하오니, 하나님, 제가 당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해
기뻐하도록,... 이곳에서는 내 안에서 당신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가고, 저곳에서는 충만하게 하소서. 당신께 대한 사랑을 키워 주소서. - 저곳에서는 충만하게 하소서. 이는 이곳에서 나의 기쁨이 희망으로 커지고, 저곳에서는 실제로 충만하기 위함입니다.... 101
마지막으로 안셀무스는 이 넘치는 기쁨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그 약속과 동일한 기쁨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묵상하고 온 존재를 통해서 갈망하기를 열망한다.
안 셀 무스의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묵상의 궁극적 결말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의 충만함이며, 더불어 영원한 기쁨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함을 낳는다. 그동안에 내 정신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바를] 묵상하고, 내 혀는 그것에 대해 말하게 하소서
내 마음을 그것을 사랑하고, 내 입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소서. 내 영혼은 그것에 주리고 내 육신은 목말라하게 하소서.
나의 전 실체(존재 substantia)가 갈망하게 하소서. 내가 나의 주님의 기쁨에 들어가, 그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때까지. 아멘. 102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로
이끌며, 『모놀로 기온』에서 고찰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게 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과의 인간의 간극에 대한 인식도 가져온다.
또한 하나님에 계심에 대한 성찰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며, 기도의 자리로 이끈다.
이어서 결국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응답과 그에 따른 기쁨의 충만함, 나아가 믿음, 소망, 사랑의 충만함까지도 고대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을 경험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낳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선다. 103 이처럼 안 셀 무스에게는 신앙의 내용들을 ‘받아들 이 지 않을 수 없는 근거들’104를 이성적 성찰을 통해 추구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무관한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그의 신 존재 증명에는 자신이 논증에 포함되어 있고, 결국 이는 이성적이면서도
신앙적인 측면을 지닌다. 따라서 그의 하나님에 존재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의 계심을 논증하지만 그 결과는 신앙적 겸손과 기쁨,
기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낳는다. V. 결론 신성형이 지적한 것처럼 과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우는가라는 질문이 현대에 이르러는 신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와 반응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신존재 증명을 자신을
포괄하는 존재론 적 이해가 아니라, 제 삼자의 객관적 언어로 신을 정의하려 한다. 105
안 셀 무스로부터 신존재에 대한 담론의 역사가 이를 드러내주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현대적인 신에 대한 담론을 개념이나 객관적 체계 속에 펼치려는 시도는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믿음과 신앙고백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분리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담론이 신앙적 삶과 괴리되고 체계적이고 객관적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은 거대 담론을 이해해야 하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 이 이성적이면서도 신앙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드러났다.
즉 실존 104 이 경재. “안 셀 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판으로 본 스콜라 사상의 두 흐름”,에 대한 성찰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신앙적 겸손과 기쁨,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대한 찬양을 낳았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신앙적 측면 역시 충분히 고려할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묵상은
더 풍성해지고, 신앙인의 신앙은 더 강화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충만함을 고대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