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기념주일(1)
금년은 종교개혁 49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계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서(당시 34세)가 면죄부에 반박하는 내용의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임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의도하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르익은 시대 분위기로 인해 이 행동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행동이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해가는 역사 전개의 특징이요,
역사에 의해 확인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종교개혁의 3가지 명제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솔라 스크립 투라’(sola Scriptura). 라틴어로 ‘오직 성경’입니다.
개신교인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교회가 성경의 목록을 결정했기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보다 크다는 가톨릭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초대교회가 처음 형성되었을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자료를 수집하고 문서들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교회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기록된 문서들을 수집하였고 이 문서들이 경전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397년 제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 27권이 채택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수집과 평가 그리고 경전으로서의 결정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회가 성경보다 권위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신약성경은 약 100-150년경에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서 지금의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지역 등으로 확대되었고, 넓게 흩어진
각 교회 공동체는 각자 성경을 채택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정보교환이 어렵고, 성경 필사본을 구하기 어려운 때였기에 각 교회 공동체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성경을 선택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단지 이미 여러 도처에서 사용되던 성경의 숫자를 확인하고 공식화한 것입니다.
교류가 거의 없던 여러 지역의 공동체가 사용한 성경의 종류와 범위가 어떻게 놀랍게 일치를 보이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경전화는 교회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비록 모양새는 교회가 성경을 결정하는 과정(정경화)을 거쳤지만, 실제로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고 결정한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최종 권위를 확보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원래는 ‘오직 성경’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역사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역사적으로 흐름이 이해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2)
종교개혁의 3대 주제인 ‘솔라 스크립 투라’(오직 성경)의 정신을 오늘날에는 어떻게 되새겨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오직 성경’은 성경의 권위만 인정할 뿐,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조와 교리(사도신경과 삼위일체 교리 등), 교회 내의 예배 전통과 직위 등으로 표현되는 ‘교회의 권위’를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개혁가들은 교회 안에서의 권위가 공직자의 지위로부터 가 아니라 그들이 봉사하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전통적 가톨릭에서 주교의 권위는 그의 높은 직책 자체와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온다는 역사적 연속성에 있지만,
개혁가들은 목사의 권위는 성경에 충실한 지 여부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목사의 권위는 교계에서의 위치, 교회의 크기, 인간적 성품, 개인적 관계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성경에 충실 한가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을 주목하여 서로를 살펴보는 것이 ‘오직 성경’의 의미를 살리는 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성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 전통의 대립관계에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주장을 축자영감설에 기인한 문자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란 성경의 한자 한자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문자주의는 좋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신비를 믿지 않고, 자기의 전통과 선입관을 믿는 것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면, 문자주의에 의하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자 칼빈은 창조에 관한 성경 기사는 단순하고 소박한 고대인의 능력과 범위에 맞춰 ‘조절’되었다고 하며
문자 그대로 현실을 묘사한다고 강요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시인의 시를 기자의 신문 기사처럼 읽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문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오직 성경’ 정신을 살리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3)
오늘은 종교개혁의 두 번째 명제인 ‘솔라 비데’(sola Fide) 즉 ‘오직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즉,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가톨릭은 의로움(구원)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도 동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가톨릭의 주장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에 행위는 눈에 보이고 행위에서 그 믿음의 증거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도 실제의 삶(행위)으로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의 불일치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 이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루터는 ‘오직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루터는 인간의 의란 실제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의롭다고 칭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의인이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여전히 죄를 짓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주장은 인간이 행위로는 도저히 의로움을 얻을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수도사로서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불가능성하고 오직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의를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는 ‘오직 믿음’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함을 보다 깊이 인정하였기에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존재의 차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함이란 우리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께 그저
맡긴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애쓰기보다는, 그저 좋은 나무가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위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오직 믿음’의 재발견으로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신앙생활에 행위는 아무런 필요나 가치가 없다는 행위 무용론은 아닙니다.
청의론으로 표현될 수 있는 ‘오직 믿음’의 주장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구원)’에 대한 질문에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앙인은 당연히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행위로서 그 구원을 실증해 보여야 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4)
오늘은 종교개혁 49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서 종교개혁의 3대 명제를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솔라 그라티아이`(sola Gratia)
즉 ’오직 은혜(은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즘 은혜라는 단어는 모호한 의미의 일상적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받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설교가 좋았다는 뜻일 겁니다.
(실은 감동이 없었지만 예의상 그렇게 인사하기도 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좀 듣기가 거북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면
‘은혜가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또 회의 중에 다툼과 갈등이 생기면 ‘은혜롭게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너무 까다롭게 하지 말고 대충 넘어가자는 말일 겁니다.
때로는 올바른 일을 타협 없이 추진할 때도 ‘저 사람은 은혜가 없다’라고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주 냉정하고 삭막하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은혜라는 단어를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일상의 언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직 믿음’을 잘못 이해하면 믿음을 인간의 행위 또는 업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은총)에 근거하고,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하나님이 행하는 일방적인 것이고 언제나 인간의 노력에 앞서는 우선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이라 함은 인간의 행위가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우선적’이라 함은 은혜를 받기 위한 어떠한 선제적인 노력이나 자격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실은 은혜를 받기 위한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은혜는 인간의 책임성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인간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하면 그에 따른 소명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커다란 희생과 용기도 은혜를 깊이 체험함에서 나온 책임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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