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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역사

고고학이 성경을 증명하는가?

작성자서머나|작성시간26.06.21|조회수29 목록 댓글 0

고고학이 성경을 증명하는가?

부제: 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45)/성경 해석 난제(1)

요즘 이스라엘에서 고대 근동학을 배우고 있다. 신학원에서 듣기만 했던 학문을 접하고 있다.

고대 토판들인 에누마 엘리쉬, 길가메쉬와 우가리트의 번역물을 읽었다. 마르둑, 홍수와 바알에 관련된 신화를 배웠다.

구약을 좀 더 잘 알도록 돕기에 매우 흥미롭다.

고대 근동학은 인류 역사의 뿌리를 알게 하면서 동시에 구약과 중간사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주전 3천 년부터 출발하는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인류 역사가 홍수 전후(前後)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고고학적 증거가 성경 기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증명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가 성경 기록과 다를 수 있다.

이 때 당황스럽다. 성경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사이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울러 성경 기록 방식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생각해야 할 바가 있다. 성경 저자는 둘로 나뉜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인간 저자와 그로 하여금 계시를 받아 기록하게 한 성령 하나님. 결국 성경은 이들의 합작품이다.

인간 저자는 상황의 산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섭리자이며 그의 뜻, 의지와 계획은 변함이 없다.

당연히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저자의 인격과 삶과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사를 인간 저자가 사는 역사에서 진행시키고 이를 위해 그를 통해 자신의 시대적 경륜을 먼저 계시한다

(암3:7절).

인간 저자도 자신이 사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도움 없이 성경을 기록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읽는 독자들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이 점에서 성경 기록은 시대 산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성경의 계시도 당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문화 공유는 반드시 사상, 철학과 종교의 공유를 뜻하지 않는다.

당시 문화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구속사와 세속사를 분리시킨다. 논리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들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는 인류 사회의 세속사(世俗史: secular history) 중에 항상 진행한다.

고대 근동학 자체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잘 증거한다.

때때로 성경 기록과 고대근동학 사이 불일치가 발견된다. 이 때 성경 기록과 고고학 사이 동질성와 이질성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과 고고학은 모두 역사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다면 고고학은 과거 역사

자체만 본다. 성경은 믿음으로 그러나 고고학은 이성으로 각각 접근한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인류 역사(과거, 현재와 미래)의 섭리자인 하나님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학은 발굴 현장에서 나온 고고학적 증거물에 근거를 두고 과거를 역으로 추측한다.

성경은 과거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 기록이라면 고고학은 발굴물에 근거를 두고 과거를 추측한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진보적 학자들은 성경의 초월성(이질성)을 부정하고 내재성(동질성)만 주장한다.

성경 저자가 불완전한 인간이란 점에서 이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수많은 인간 저자들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계시가 기록되고 그 결과 성경 기록 사이 차이가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 임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물에 근거를 둔 학자들의 추측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은 1/10 도 안된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아직도 훨씬 더 많이 발굴해야 한다.

고대 근동학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굴에 근거를 두고 아무르(성경에선 아모리)와 아카드 족(성경에선 악갓)의 조상은 셈이고 히타이트(성경에선 헷)와 블레셋의 조상은 야벳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세기 10장은 이들이 모두 노아의 차남인 함 족속에 속한다고 기록한다. 성경 기록과 고고학 사이 큰 차이가 보인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 (이는 큰 성이라) 을 건축하였으며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0: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창10:8-18절)

그리고 가나안의 후손의 거주지가 이렇게 기록된다.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창10:19절)

고고학적 발굴은 이를 부정한다. 아무르 인은 메소포타미야 상류의 서쪽에 그리고 아카드는 그 동쪽에 살았다.

히타이트는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에 살았다. 그리고 블레셋은 지금의 사이프러스 섬에 살았다.

이런 곳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물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이들이 모두 함 족속이 아닌 야벳이나 셈 족에 속한다고 증언한다.

성경도 야벳의 후손이 북쪽 해안지역에 살았다고 기록한다(창10:2-5절).

성경 기록과 고고학 사이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차이는 이들이 역사와 문화를 대하는 방법에 기인한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인 하나님은 과거를 분명히 알면서 기록한다.

그러나 고고학은 현장 위주 즉 발굴된 장소라는 현재에 기준을 두고 과거를 추측한다.

성경은 과거에 근거를 둔 본문 해석을 요구한다면 고고학은 발굴 현장을 기준하여 거꾸로 과거를 해석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성경은 스스로 자신을 증언한다. 홍수 후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 즉 지금의 아나톨리아에 머물렀다.

이곳으로부터 인류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로 내려갔다.

산악 지대에서 평야 지대로, 유목 시대에서 농업 시대로 그리고 비정착 사회에서 정착 사회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곳에서 시날 평지를 만났고 홍수 후 100년 만에 그곳에서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인류는 이곳으로부터 세계 각 곳으로 흩어졌다(창10-11장).

인류를 흩어지게 만든 바벨탑은 함의 장남 구스의 막내인 니므롯(창10:6-8절)의 주도로 세워졌다.

바벨탑은 그가 신적 존재에 가깝다고 증언한다. 다시 말해 배반 사건은 니므롯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함 족속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니므롯은 함의 막내였다. 그는 누구인가?

성경은 함을 이렇게 소개한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이다(창9:18절). 이 표현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이를 처음 본 가나안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배운 바대로 아버지 함에게 할아버지를 조롱하듯 보고했다.

이 때 차남 함은 자신만 알고 조용히 아버지의 수치를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를 조롱하듯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공개적으로 알렸다.

이 때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 치듯이 다가가 아비의 부끄러움을 가렸다(창9:20-29절). 행동은 사람 됨됨이를 증언한다.

노아는 가장(家長)이었고 당시 가장은 왕, 제사장과 선지자 같은 족장이었다.

자식들의 생사(生死)를 결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

더구나 노아는 앞으로 올 메시아의 혈통을 잇도록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을 받았다(창11:10-32절).

그런 노아를 조롱함은 그를 불러 택해 세운 하나님을 조롱함과 같았다.

아버지 노아는 세 아들들의 처신과 됨됨이 맞춰 이렇게 축복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4-27절)

함과 그의 가문은 노아의 세 아들들 중 불경건한 후손이었다. 당시 하나님의 대적자라 할 수 있는 니므롯은 이들에게서 나왔다.

원복음(창3:15절)에 따르면 하나의 인류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갈린다.

이들은 여인의 후손과 대적하는 뱀의 후손으로 드러났다.

함 족속은 그들의 영웅인 니므롯을 중심으로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세웠다.

셈과 야벳 후손은 이런 니므롯에 대해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함 족속이 통치하는 지역을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바벨탑 사건 이전부터 야벳은 시날의 북쪽에 있는 해안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셈 후손은 시날의 남쪽 메소포타미야 하류로 이동했을 것이다.

셈의 후예인 아브람이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떠났다(창11:31절). 셈의 후손이 하류에 많이 살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성경은 니므롯이 지배한 지역 이름들을 기록한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 (이는 큰 성이라) 을 건축하였으며” (창10:10-12절)

바벨탑 사건 전후 당시 지배 세력인 함의 후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상류로 진출해서 나라의 영역을 더 확장시켰다.

이 때 아무르, 아카드, 힛타이트와 블레셋도 북쪽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가나안 후손과 함께 서서히 레반트와 애굽으로 진출했다.

지배 세력답게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함 후손이 거의 지배했다.

바벨탑 사건 전후 함 족속의 후손인 니므롯이 세상을 지배했다는 성경의 기록(창10장)이 증언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이다.

시간이 지나며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야 하류로 이주하며 수메르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 뒤에 아무르가 세력을 확장하며 아카드 제국을 무너트렸고 아울러 레반트와 애굽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나중 힛타이트 제국과 불레셋이 서서히 레반트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 제국이 세워진 북쪽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굴이 나옴은 당연하다.

이들은 성경 기록을 전혀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잘 증언한다.

성경은 아무르, 아카드, 힛타이트와 블레셋이 함의 후손임을 분명히 기록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해석 원리에 잘 맞는다. 앞으로 고고학은 이를 더욱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성경을 반대하든지 아니면 증명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고고학은 성경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현상만 보고 판단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상 즉 나타난 것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이 말씀만이 현상을 하나님의 경륜에 맞춰 해석하도록 돕는다. 이 경륜이 무시된다면 믿음은 시대에 따라 흔들린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에게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피조물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나라 바벨론에세 패할 수 있는가?

현상학적으론 창조주가 분명히 패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을 알아야 한다(히11:3절).

신약 시대 아들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지상에서 사라져야 했다(선지서의 예언).

옛 것을 허물어야 새 것이 세워진다.

실로 성막도 이를 잘 증언한다. 언약 괘를 모시고 블레셋과 싸운 이스라엘은 대패했다(삼상4장).

이 때 하나님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유대 산지로 언약 괘를 이동시켰다.

어둡고 혼란한 사사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왕정 시대를 준비하기 위함이다(시78:60-72절).

하나님의 경륜은 얼마든지 현상과 다를 수 있다.

무엇으로 현상을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경륜적 계시이다. 계시만이 믿음을 세워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절) 왜 그런가?

말씀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다. 믿음의 근거를 항상 변하는 현상에 둘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말씀은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믿음에 근거를 두고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 이 때 신앙 삶의 적용이 비로소 가능하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또는 상식)를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가 잘 증언한다. 그는 유대 사회 말기 현상을 보며 한탄했다(합1:2-4절).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4번 논쟁했다(1:5-2:3절). 하나님은 일일이 그에게 응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최종적으로 계시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절)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시대적 경륜을 이해게 되었다.

하박국은 유대의 멸망(합3:1-16절)을 보면서 두렵고 떨렸지만 믿음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3:17-19절)

출처 : https : // blog. naver. com › 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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