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효과
기도하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따져 봅시다.
기도 효과에 대한 연구는 사실 꽤 오래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캘리포니아 래드랜즈 대학교(William R. Parker 교수)에선 ‘기도치료 집단’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실험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여러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소그룹으로 나눈 다음, 치료에 기도를 사용한 그룹과 사용하지 않은 그룹의 변화를
추적하는 실험이었습니다.
결과는 기도사용 그룹이 반대 그룹에 비해 지표상 유의미한 치료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 때 연구책임자였던 파커 교수는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기도는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Prayer Can Change Your Life)라는
책을 1950년대에 출판하게 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좀 특이한 책이구나 하는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부터 의학지 및 기타 전문지에 기도의 치료효과에 대한 연구논문이 130여 편 넘게 발표되었고,
이들 모두 철저한 과학적 통제와 통계로 기도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발표는 1988년 샌프란시스코 의대의 랜돌프 버드(Randolph Byrd)의 연구인데, 심장 발작 병력이 있거나
증상이 심한 393명의 심장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들 중 어떤 환자는 기도를 받는 사람들이고, 어떤 환자는 기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료진이나 환자 모두 자기가 기도를 받는지 아닌지 모르게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결과는 당시 미국 주요방송과 신문에서 상세하게 보도할 만큼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기도 받은 환자 그룹은 사망자도 훨씬 적었고, 독성이 강한 약을 사용해야하는 확률도 현저히 낮았으며,
더욱이 생명 유지 장치를 부착해야 하는 경우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병 치료만을 위한 실험만 아니라 식물의 성장, 씨앗의 발아, 박테리아 활동 억제 같은 일에도 기도가 효과가 있다는 것이
학계에 숱하게 보고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가까운 곳이나 지구 반대편이나 거리에 상관없이 그 효능은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과학실험 결과를 곧바로 기독교 신앙과 연결시키는 게 얼마나 많은 문제가 숨어있는지를 저는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기도는 우리가 아는 인과응보라는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는
분명한 힘과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효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의 대상>
물론 이런 과학 실험이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기도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과학이나 의학은 그 특성상, 건강에 유익한 자원이라면 무엇이든 사용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도 대상이 기독교의 하나님이건
미아리 무당집 강감찬 장군이건, 사실 관심 없습니다.
과학은 그 특성상 기도의 대상보다도 실험을 통한 나오는 결과와 반복적 효능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내 기도가 바른 기도인지, 거기에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루터가 대교리문답서 십계명 제1계명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심장이 걸려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네 하나님이다.’
이 말을 풀어 말하면,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 즉 ‘내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절대가치가 바로 신(神), 곧 내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따져 보면,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일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 신앙의 대상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루터의 설명은 특별합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종교인과 똑같이 믿음의 대상인 신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른 신을 바르게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요, 그것이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이 있다’라고 믿고 말하는 것,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무당도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단계를 넘어, 그 신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기도의 분명한 대상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의 방법>
이제 생각해 볼 것은 기도의 방법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일까요? 사람마다 다양하게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체험한 방법을 따라, 또는 세상과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기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에 조용히 묵상하는 것을 좋은 기도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석양 무렵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가까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을 떠나 산 위에 올라가 소나무 뿌리 몇 개는 뽑아야 좋은 기도라고 합니다.
도미니크 수도회 같은 곳에서는 기도할 때 몸의 자세를 아홉 가지로 추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는 어떤 시간이나 형식, 자세의 문제는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신학교 때, 무의탁 아동들을 돌보던 한 분을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인터뷰가 다 끝난 다음 ‘기도 제목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자 그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그런 기도 안 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그런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몸으로 해야 진짜 기도입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로 유명한 도로테 죌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기도는 아침마다 조간신문을 읽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문 속에서 세상을 만나고, 그 사건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기도의 종류? 이렇듯 다양합니다. ‘기도의 정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도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도에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평범 속에 비범: 유대인의 기도전통과 주기도>
본문(눅 11:1-13)의 내용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역시 우리 예수님은 대단하다?’,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시구나?’
제자들의 반응? 제 생각에, 제자들은 시큰둥했을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기도전통을 보면 주기도문과 아주 흡사한 내용의 카디쉬라고 하는 기도와 18번의 축복이라는 뜻의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전통은 예수님 시대보다 조금 뒤에 기록된 것이긴 하지만, 그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기도가 아주 널리 통용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카디쉬는 회당예배 때 하는 공동기도문이고, 세모네 에스레는 매일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길을 가다가도 선 채로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에게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좀 특별한 기도를 원했던 제자들은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 생각에 주님이 유대인의 기도를 그냥 요약정리해서 들려준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평범 속에 비범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모두 말씀드리기에는 제게 시간이 너무 벅찹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두 가지만 언급하려합니다.
<아바>
첫째는 호칭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에 나온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호칭을 통해 관계의 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호칭은 부르는 사람과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제 형제뿐입니다. 우리 형제 외에는 그렇게 부르지도 않거니와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 관계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기도인 카디쉬에 나오는 호칭은 남들도 부를 수 있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하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오직 자녀만 부를 수 있는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 만큼 우리의 기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관계로 묶어놓습니다.
한글 성경은 좀 공손하게 ‘아버지’라고 번역했지만 예수님은 당시에 원어로 ‘아바’라고 부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에게 이 단어는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믿고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아이들은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힘센 사람으로 압니다. 제 딸 슬기가 그렇습니다.
저를 보고 축구도 잘하고, 노래도 제일 잘하고, 거인도 이기고, 하마보다 많이 먹고, 빨래줄 위도 잘 걸어 다니고,
하늘도 날 수 있는 줄 압니다. 또 자기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척척 들어주는 사람으로 압니다. 이것이 아빠를 향한 슬기 마음입니다.
어디 슬기뿐입니까? 아이는 엄마 아빠를 보고 무조건 달려듭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재잘 거립니다. 예의와 격식 따위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제 말하기 시작한 아이가 예절을 다 갖추고 아빠에게 어른처럼 격식 차리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 정직한 마음, 엄마 아빠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기도 다음에 나오는 두 개의 기도 비유도 모두 똑같습니다. 아빠에게 하듯 순수한 마음으로
매달리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가장 큰 선물인 성령도 아끼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평범한 기도, 순수한 일상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훌륭한 기도, 멋진 기도를 꿈꿉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보다 멋진 기도가 아니라 내가 하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기도, 그러나 아이처럼 순수한 목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권면>
이 대목에서 “소명 받고 안수 받은 말씀의 종인 나는”, 성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권면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주변에 기도 잘 한다고 하시는 분, 기도 능력이 있다고 하는 분을 발 벗고 찾아다니시는 분 있다면 얼른 그 일 그만 두십시오.
그런 건 쓸데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시간낭비 돈 낭비 일 뿐입니다.
주님은 남이 대신 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자세요, 기도 방법입니다.
<일용할 양식>
두 번째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중간에 나오는 ‘일용할’이라고 하는 한 단어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 말 그대로 하면, 하루살기에 족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우린 가끔 오해합니다.
여기 나온 일용할 양식이란 문구 때문에 내일 살 것을 걱정하는 사람을 향해 ‘신앙없다’고 판단하고, 불행이 닥쳐도
'내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고 사는 것을 신앙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뜻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루먹을 것에만 만족하면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욕심부리며 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코이네 헬라어로 ‘에피-우시아’(επιουσια)입니다.
특이한 것은 성경에서 주기도 외에는 다른 용례를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최소한 3세기가 될 때 까지 고대 헬라 문화권의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어가 여기 나오는 ‘에피우시아’,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참 희한한 단어입니다.
오로지 '주기도'에서만 사용되는데, 단어를 풀어보면 두 개의 단어, ‘에피’라는 접두어와 ‘우시아’라는 명사가 합성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좀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접두어 ‘에피’는 한자로 바꾸면 ‘뛰어 넘다’라는 뜻의 ‘초’(超)가 됩니다.
그리고 명사 ‘우시아’는 아주 단순히 번역하면 ‘실체’, 또는 ‘본질’이란 말입니다.
참고로, 예수님 시대가 로마 문화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우시아’라는 말은 고급단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라는 책에 보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우시아는 세상을 창조한 신
데미우르고스의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문화권에서 우시아란 ‘모든 만물의 근원’이란 뜻이 됩니다.
여기서 ‘에피+우시아’라는 보도 듣도 못했던 단어의 뜻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제 식을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을 뛰어넘는 어떤 것’, 그것이 ‘에피우시아.’, 즉 일용할 양식입니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봅시다. 헬라어를 공부하다보면 ‘뛰어넘다’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가 ‘에피’ 말고도 또 있는데,
‘메타’(meta)라는 녀석입니다. 메타와 에피를 비교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비유로 하자면, 메타는 뛰는 놈이고,
에피는 나는 놈입니다. 담을 뛰어넘는 걸 메타라고 하면, '에피', 욘석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초월, 초극에 해당합니다.
자, 이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이란 말을 다시 풀어 엮어봅시다.
주님이 가르치신 '일용할' 양식은 하루살이처럼 살라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루하루 근근이 생명 연장하며 살다가
불행이 닥치면 신앙의 이름으로 곧 바로 포기하며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일용할 양식’은 만물이 살아가기 위해 오늘 먹을 양식 뿐만 아니라 내일도 필요한 양식, 보이는 육체를 위한 양식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을 위한 양식까지도 포함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평범하게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눈에 보이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계명이며 동시에 약속이다.>
루터의 말대로 하자면, “기도는 주님의 계명이고 약속”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는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기도가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내 작은 기도가 주님의 계명과 약속 위에
올려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마음과 입을 열고, 내 탄식을 계명 위에 올려놓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 자체로 이미 가치 있고, 위대하며 거룩합니다. 열두 사도의 기도나 바울의 기도보다 우리의 기도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보시는 것은 당신의 계명 그 자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이란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에 자신을 묶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약속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 ‘오늘 뿐만 아니라 내일을 위한 양식’, ‘육체뿐만 아니라 영을 위한 양식’,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살기 어렵다고 미리부터 포기하거나 쫄지 마십시오. 풍성한 생명을 위해 더욱 치열하게 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배고픈 것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두고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불의한 것 앞에서 담대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은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계명 위에 세운 약속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작은 불쏘시개와 같다.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 그 작은 불은 옮겨 붙어 모든 것을 태우는 큰 불이 되고, 결국엔 강철도 녹이게 된다.”
(루터의 대교리문답서, “주기도해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기도가 강철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
(교회력설교)20160724성령강림절 후 열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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