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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

작성자예닮,|작성시간26.06.13|조회수21 목록 댓글 0

유아세례, 다시 개혁신학의 자리에서

이남규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합심) 조직신학 / 기독교 개혁 신보 (2025.8.16)

도전 앞에 선 유아세례

오늘날 유아세례는 여러 도전 앞에 서 있다. 2019년 예장 통합 측은 유아세례 받은 유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이에 따라 같은 초등부 안에 성찬에 참여하는 아이와 참여하지 않는 아이가 분리되자 2021년 유아세례 연령을 6세까지로 늘리고

7세에서 12세까지 어린이에게 ‘아동 세례’를 주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앞서 예장 합동 측은 2017년 어린이 세례를 도입하여 만 6세가 지는 유아세례를, 이후 13세까지는 어린이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아 및 어린이에게 성찬을 허용한 통합 측과 달리 합동 측은 유아 및 어린이 성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유아세례를 베풀 것인가?”라는 유아세례의 정당성 질문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세례 받은 아이가 왜 성찬에서 제외되 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

“어린이가 믿고 있다면 왜 세례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등의 신학적으로 복합적인 여러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려고 한다. 여기서는 현재 우리 앞에 있는 네 가지 주요 쟁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아세례에 관한 네 가지 주요 쟁점

첫째,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재세례파는 수사자의 믿음 확인 없이 주어지는 유아세례를 반대했으며, 개혁신학자들은 이 반대에 언약의

통일성에 근거해서 답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와 너 및 대대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창 17:7)이라고 하신다면,

언약의 통일성 아래서 새 언약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언약이 적용되므로 현재 신자의 자녀도 언약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쟁점에서 나타난 중요 질문은 이것이다. 언약의 권리는 신자에게만 주어지는가? 아니면 신자의 자녀에게도 주어지는가?

 

둘째, 19세기 개혁교회 안에서 발발한 유아세례의 근거 논쟁이다. 19세기 후반 아브라함 카이퍼는 교회가 신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줄 때 신자의 자녀가 선택받은 자로서 중생했다고 간주하고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다. 카이퍼에 대한 신뢰 문제로 ‘분리파’(Afscheiding)와 ‘애통 파’(Doleante) 사이의 긴장이 있었으나 1905년 우트 리히트 총회에서 봉합된 듯보였다.

그러나 결국 여러 교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에 합류하지 않고 ‘기독개혁교회’

(Christelijk Gereformeerde Kerken) 교단으로 남았다.

통합된 교단 내에서도 긴장이 계속되다가 1944년에는 끄라스 스킬 더 (Klass Schild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Gereformerde Kerken in Nederland, vrijgemaakt)라는 교단이 분리되었다.

이 논쟁에서 나타난 질문은 이것이다. 언약과 선택은 일치하는가? 아니면 불일치하는가? 언약과 선택은 어떤 관계인가?

 

셋째 쟁점은 유아 성찬에 관한 질문이다.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행사인 입교 전이라도 신자의 자녀가 이미 언약의 권리를 갖고 세례를 받았다면 성찬에도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대에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합심 충청노회가 유아 성찬에 관한 질의를 하였고, 작년 109회 총회는 신학연구

위원회의 연구 보고를 받게 되었다. 총회 보고서는, 신자의 자녀가 가진 언약의 권리를 인정하여 세례를 베풀었다면 당연히

성찬에도 참여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찬 참여는 믿음을 고백하는 자에게 해당한 다는 개혁교회의 전통적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성찬 참여 조건은 언약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넷째, ‘아동 세례’ 또는 ‘어린이 세례’의 허용에 관한 질문이다. 통합 측은 7세부터 12세까지 ‘아동 세례’를, 합동 측은 7세부터

13까지 ‘어린이 세례’를 허용하는데, 두 교단 사이에 그 유효성에 대한 인정에 차이가 있다.

통합 측에서 아동 세례를 받은 교인은 성찬에 바로 참여하고 나중에 입교가 따로 필요가 없지만

유아세례교인에게는 입교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같은 7세의 어린이가 성찬에 참여해도 아동 세례를 받은 아이는 공적으로 인정받은 세례교인으로 참여하나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아직 신앙고백을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로 참여하는 것이다.

합동 측에서는 어린이 세례를 인정할지라도 만 14세가 되어 입교 후에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어린이 신앙고백의 유효성을 세례를 베풀 정도로는 인정하나 성찬에 참여할 만큼의 수준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공적 신앙고백의 유효성은 어떤 연령부터 인정되는가?

세례와 성찬에 요구되는 신앙고백의 수준은 동일한가?

 

이 쟁점들은 직접적으로는 언약의 통일성, 언약과 선택의 관계, 성찬 참여의 조건, 신앙고백의 유효성과 같은 문제로 드러나지만,

더 확장하면 성령의 역사 방식과 구원의 서정,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례, 교회 회원권과 언약 회원권의 경계, 그리고 언약의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과 공적 신앙고백의 기준 등 다양한 신학적 및 실천적 주제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관련 쟁점과 주제들을 개혁신학의 일관성 위에서 살펴보고 유에 세예의 실천적 의미를 되짚어 볼 것이다.

 

언약 안에 있는 자녀들 – 유아세례의 정당성

 

“왜 유아세례를 베푸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질문은 여전히 제기된다.

유아 세례가 우리 교회에서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적 근거나 정당성을 모른 채 유아세 례의 무익함을 말하거나 심지어

침례교회 등에서 행해지는 ‘헌 안식’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유아세례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장성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을 예로 든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유아세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성인 세례를 받은 이들도 후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외적 표징이 내적인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을 돈으로 사고자 하여 사도의 책망을 받았고, 데마는 바울의

동역 자로서 한때 복음 사역에 참여했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딤후 4:10).

이처럼 유아세례뿐 아니라 성인 세례에서도, 언약의 외적 실행과 내적 실행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예수 님께서 가라지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다(마 13:24-30).

주님께서는 이러한 불일치를 아시면서도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 은밀한 마음의 상태까지 판단할 권한이 우리의 게는 없다.

지상에서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명령에 따라 언약의 증거를 보고 세례를 베풀 뿐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로마 가톨릭처럼 소위 사요 적으로(ex opere operato), 즉 세례 행위 자체에 의해서

모든 죄가 사해지고 중생하고 의가 주입되기 때문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조산사 등에 의한 비상세례까지 허용하였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세례 이해를 개혁했으나 유아세례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개혁교회에서 성인에게는 입술의 신앙고백이 언약에 참여할 권리의 증거라면, 유아에 게는 신자의 자녀로 태어난 사실이 그 증거 다. 신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유아가 신앙고백 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믿음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를 준 것이 부당하지 않은가?

이 물음은 이미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가 던진 질문이었다. 개혁교회는 이 질문에 언약의 통일성으로 답했다.

개혁 교회가 언약론을 강조하게 된 계기가 유아세례 정당성 변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동일한 언약이기 때문에 할례가 유아들이 스스로 답할 수 있기 전에 행해졌듯이 할례를 대체한 세례도

그들이 스스로 답하기 전에 주어진다. 재세례파와 논쟁했던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 함의 후손들처럼 그리스도인의 유아가 똑같이 언약, 교회, 또는 계약 안에 있다.

지금 기독교회 안에 그들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 게서 언약의 표를 빼앗아야 하는가?”

하나 님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도 언약을 맺으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창 17:7).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아래서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동일한 약속을 받는다(롬 4:16).

 

구약에서 할례라는 외적 표가 가리키는 것은 내적 표, 곧 마음의 할례이다(신 30:6).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이다(롬 2:29).

할례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인치는 성례였다(롬 4:11). 구약의 할례를 대체한 것이 신약의 세례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아브라 함의 후손인 유아들이 언약의 표징(할례)을 받은 특권을 누렸듯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의 유아들에게서 언약의 표징(세례)을 뺏을 수 없다.

 

유아세례 반대자들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삼지만, 언약의 통일성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유아세례를 금지하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 그 사실이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강력히 증거한다.

나아가 신약에서 우리는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라는 구약의 표현을 만난다(행 2:39).

코르넬리우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에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약속을 받는다.

실제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는다(행 16:15, 16:33, 18:8, 고전 1:16).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면서 헌아식 (獻兒式)을 행한다.

헌 야식은 신자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성경은 믿는 부모에게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양육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권면을 받으며(웹 6:1) 성경을 배운다(딤후 3:15).

어떤 부모가 유신 론과 무신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녀를 중립적으로 교육하겠는가?

신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 어려서부터 양육 받는 특별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누리는 언약의 특권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부모들도 자녀를 가치 중립적으로 양육하지 않는다.

입술의 고백이 없다는 이유로 세례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녀들을 언약 밖에 둘 수 없다는 긴장이 헌 야식의 배경이다.

그 결과 자녀는 신앙고백이 없으므로 언약의 자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헌 야식을 통해 언약의 자녀로 대우받는 모호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 야식을 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약속을 인치 시는 유아세례라는 성례가 있는 상황에서, 헌아식으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성경의 언약적 관점에서 부당하다.

우리의 자녀는 헌 야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인치 시는 세례로 언약의 표를 받아야 한다.

출처 : 모든 기독교적 활동의 기초 다지기 - hisola. tistory.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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