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9장1-11절 영광을 만나다 260613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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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메섹 도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만남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목적지에 가까워졌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그는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때 사울은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영적인 음성(영음)으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울이 누구인지 묻자 주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며 시내로 들어가 행할 일을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동행하던 이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해 넋을 잃었고,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앞을 보지 못하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후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이후 다메섹의 제자 아나니아가 주님의 환상 속 지시를 따라 사울을 찾아가게 됩니다.
2. 예수를 만나는 세 가지 경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때, 그것은 역사 속에서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과 군중들이 경험한 만남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을 올바르게 만났을 때, 중풍병자가 낫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등 수많은 치유와 이적의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제자들을 찾아오신 만남입니다. 이때 주님은 벽을 통과하시거나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시는 등 신비로운 면모를 보이셨으며,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부활의 역사성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신 영광의 주님과의 만남: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본래 성삼위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완전히 회복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을 만나는 영광의 체험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만남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는 태도: 예수의 보혈
죄인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그대로 마주하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만졌던 제사장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던 사건이 이를 증명합니다.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나며, 도리어 변화와 회복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구약 성막의 법궤 위 ‘시은좌(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어린양의 피를 부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보혈로 죄를 씻고 영광을 마주할 때, 그 영광은 심판이 아닌 놀라운 은혜와 회복의 선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4. 은사주의적 노력의 한계와 목회적 좌절
설교자는 과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쓰임 받고 싶어 기를 쓰고 노력했던 개인적 경험을 고백합니다. 유명한 영성 멘토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으며 은사가 나타나고 암 환자가 고침받는 역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이 나자 대구 시내의 여러 은사자들과 은사의 강약을 비교당하는 ‘영빨 경쟁’의 치유함 속에 놓이게 되었고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매일 밤새도록 철야 기도를 감행하고 방언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지하 예배당에서 밤낮이 바뀐 생활을 지속하면서 생활 리듬은 엉망이 되었고, 주변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밥 먹듯이 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할 수 없겠구나’라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영광의 종이 되고 싶었지만 육체적·환경적 한계에 부딪혀 개척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깊은 절망과 답답함을 겪었습니다.
5. 평범함 속에서 영광을 경험하는 세 가지 방법
그러던 중 룻 해플린의 저서 『영광』을 접하게 되면서 목회 노선의 일대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극단적인 철야나 금식, 신비주의적 종교 행위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평범한 목회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하고 확실한 세 가지 길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첫째, 내가 십자가 앞에 설 때: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믿음으로 용서할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 위로 끌어올리시어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은혜’를 주시며,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둘째, 육신의 죽음을 맞이할 때(임종할 때):
성도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임종의 순간은 완전한 영광을 마주하는 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듯이, 성도의 임종 시 주님은 영광 가운데 그들을 맞이하시며 천국에 들어갈 완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셋째, 인생의 주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릴 때:
내 삶과 당면한 문제의 주도권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겸손히 종의 자세로 서겠다고 고백할 때 주님은 영광으로 개입하십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이 임하여 주옵소서”라고 고백할 때, 사도행전적 이적과 기사, 회개의 역사가 일상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6. 살아있는 동안 미리 맛보는 영화(榮化)와 완전한 사랑
가톨릭에서는 영광이 임하여 영혼의 죄성이 태워지고 온전해지는 단계를 ‘완덕’이라 부르며, 개신교에서는 이를 ‘영화(榮化)’라고 일컫습니다. 대개 영화는 성도가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에 갈 때 입는 거룩한 은혜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도 회개와 용서, 주권의 이양을 통해 이 영광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천국을 가보았다며 신비체험을 과시하지만, 진정으로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천국을 경험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확실한 증거는 은사나 능력이 아닌 ‘완전한 사랑(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내면 가득히 엄청난 사랑이 밀려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다투지 않고, “지는 게 이기는 것”임을 알며 온유함으로 오래 참을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영광을 보았다고 하면서도 삶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에 불과합니다.
결론
모든 참된 성도는 임종의 순간에 주님의 영광을 마주하며 완전한 변화를 입어 환한 기쁨의 얼굴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놀라운 영화의 은혜를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의 태도(십자가, 주권 결단, 사랑)를 통해 먼저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오직 예수님께 속한 그 영광을 일상으로 누리며, 완전한 사랑 안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하며 설교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