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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의 詩와 산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요

작성자폴쎄|작성시간26.06.16|조회수24 목록 댓글 0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요


아침 인사를 나누며
굿모닝이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아직 잠이 덜 깬 공기 속에서
은근히 안개 같은 온기를 남긴다.


오늘은 위·대장 내시경 접수를 하러 간다.
다음 주 월요일, 몸 안쪽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약속 예정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때때로 멈춰 서서 자신을 점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책임이라는 무게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의 상태를 살피는 일로
삶은 조용히 모양을 바꿔 간다.


번거롭다.
내시경을 준비하는 과정은 분명 귀찮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불편함조차
내가 아직 여기 살아 있다는 징후처럼
조용히 몸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심심한 게 제일 고급스럽다”는 말을 떠올린다.
고현정이 말했다는 그 문장은
희미한 잔상처럼 오래 남는다.


젊은 날에는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채우려 했지만
이제는 비어 있는 하루가
얼마나 깊은 숨을 주는지 알게 된다.
아프지 않고, 급한 일 없이,
그저 흘러가는 하루.
그것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풍요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누군가와 짧게 말을 나눈다.
그 짧음 속에도
사람의 결이 닿아 있다는 것이
가끔은 오래된 기둥처럼 하루를 받쳐 준다.


오늘도
큰 흔들림 없이 흘러가기를 바란다.
심심하고, 조용하고,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그런 하루가
결국 우리가 오래도록
가장 깊이 바라게 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배운다.




산다는 게 참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가볍게 웃어 보이지만,
그 뒤에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지나온 시간들이 조용히 겹쳐 있다.


산다는 게 원래 대단한 일이라기보다,
별일 없는 하루를 유지하는 쪽에 더 가까운데도
그게 또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날이 많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요”라는 말이
오히려 더 현실에 가까운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처럼 내시경 접수 같은 사소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도 그렇고,
몸을 살피고 하루를 정리하는 과정도 결국은 살아 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번거롭지만 그 자체가 삶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쉽지 않다”는 말이 꼭 무겁게만 들을 필요는 없다.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아직 삶을 놓지 않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정도로만,
심심하게, 크게 흔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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