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홍의 나쁜 생각 1452 - 화에 대해
화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분명 장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는 몸도 심각하게 갉아 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엔 거룩한 분노도 있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토해내셨던 분노, 이 부분이 필자는 성경 중에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필자 같은 범인이 거룩한 분노를 언감생신 입에 담겠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일상에서 만나는 무수한 화들의 먹이가 되어 좌충우돌했던 필자의 초상이 오늘 유독 민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화도 힘이 있을 때 느끼는 것이라는 걸, 건강을 잃고 뼈저리게 확인했고, 그 뒷맛은 허망하다는 것이 지금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화에 시달리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지가 필자의 화두가 되었다.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랜 시간을 기타 하나 들고 여기저기 노래하러 다녔다. 그냥 노래하기를 좋아했고,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를 아는 사람들은 필자가 노래할 때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들 한다. 나는 노래하는 것이 즐겁다. 그러다 보니, 음악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건, 아니건, 언제부턴가 내 주변에서 노래하는 내 나이 또래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까 필자는 직업도 아닌데 철없이 기타나 들고 다니는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반주기(MR)를 틀고 노래하는 것은 라이브라고 필자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반주기 문화가 생긴 이래로 사람들은 라이브 바에 와도 남의 노래는 듣지 않고 반주기에 맞추어 자기들이 노래하고 떠들기 바쁘다. 허긴, 자신들이 돈 내고 와서 술 먹고 노래하고 떠들겠다는데 별 할 말은 없지만, 가끔 심한 갈등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술꾼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니 별로 오라는 곳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서 시작한 음악이 소통되지 않았을 때 오는 자괴감을 구태여 맛볼 필요야 없겠지. 그렇다고 지금 필자가 어수선한 관객들에게 분노를 느낀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일에 화가 났던 내 속의 은밀한 쓸쓸함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런 화도 놓아 줄 생각이다. 그렇다고 쓸쓸함 마저 놓아 줄 자신이 생겼다는 말은 아니지만.
피어라 돼지 / 김혜순 시집 (12)
4월이 오면
내 뒤통수는 서른 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알 서른 개를 순서대로 살살 쓰다듬습니다
나는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알 짖을 겁니다
총알이 따뜻해질 때까지
단감이 홍시가 될 때까지
밤하늘 별이 녹을 때까지
암탉이 질병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죽음을 낳고 있습니다
암탉이 귀신을 낳고 있습니다
옷을 벗기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서른 명의 신생아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알은 닭이 되고 닭은 튀김이 되고
그 누가 이 알들의 앞날을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자정 너머 헤아려보는 양 떼보다
빨리 사라지는 계란 한 판
그리고 6월 9월 11월
4월 17일 목요일 수업에 들어온
열다섯 명의 A반 학생들이 신생아실의 간호원들 처럼
서른 개의 눈을 뜨고 나를 낱낱이 훑어보고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바람 분다. 바람 속에서 째지는 양아치 목소리. 오늘밤 수태하리니. 아이고 천사님, 나는 백 살이 넘었습니다. 바람 분다. 바람 속에서 양은대야 굴러가는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 오늘 밤 아기를 수태하리니, 그 이름을 왕이라 하라. 아이고 천사님, 나는 백발이 삼천 척. 농담할머니 백발 휘날리며 중얼중얼 걸어간다. 바람 분다. 할머니 고개를 절래절래 걸어간다.
바람 분다. 바람 속에서 담배를 팍팍 빠는 의붓엄마 같은 허스키 목소리. 오늘 밤 내가 네 아들을 데려가리니. 아이고 천사님, 백발이 바람에 날린다. 미풍이 냄새나는 치맛자락을 걷어올린다. 바람 속에서 담배꽁초처럼 떨어지는 말씀. 변기처럼 입 벌린 말씀. 물 내려도 안 내려가는 말씀. 오늘 밤 내가 네 아들에게 죽음의 세례를 주리니. 할머니 귓구멍으로 의붓엄마 손가락이 들어온다. 아이고 천사님, 우리 아들 죽은 지가 언젠데. 텔레파시 능력자 할머니 백발 헝클어지며 바람 분다.
바람 분다. 방방곡곡 라디오가 한 채널에 맞춰진 것 같은 소리, 큰 소리, 오늘 밤 너 죽는 거 나 보러 가리니. 아이고 천사님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바람 분다. 바람 속에서 천사들이 붐빈다. 무릎이 깨진 천사, 싸우는 천사, 엉겨 붙은 천사, 소리 지르는 천사, 따귀를 갈기는 천사, 오토바이 천사, 가방을 낚아채는 천사, 전염병 창궐 천사, 회오리바람 분다. 이 몸의 백골이 진토된 게 그 언젠데, 천사님 천사님, 머리를 절래절래 길바닥에 백발 삼천 척, 풍향계처럼 흔들흔들 할머니 마음, 바람 또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