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홍의 나쁜 생각 1460 - 그녀의 성공
그녀의 남편은 부지런히 박봉이나마 벌어다 주었다. 남편의 무능은 사십 대 후반쯤 되자 바닥이 드러나고 예정된 수순대로 실직했다. 한번도 가정주부 외에 꿈이 없었던 그녀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녀의 내면에 숨어있던 재능은 그녀의 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하는 일마다 성공해서 지금 직원 백여 명을 거느린 식품 제조업체 사장이 되었다. 그녀는 성공한 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슬그머니 한 눈 팔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녀의 남편은 이혼 후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 예정된 수순이라고 한다. 간혹 인생은 납득이 안 되는 일로 필자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필자 생각의 한 모퉁이를 짙게 적시는 것은 인생은 대체로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피어라 돼지 / 김혜순 시집 (16)
우기
1. 줄무늬 옷을 입은 여자
술이 깨면 가
비가 그치면 가
옷이 마르면 가
그는 장대 같은 여인을 끌어안고 쓰레기통 곁에서 울었다
상실을 얼굴에 칠하고 온 여자였다
마멸을 얼굴에 바르고 온 여자였다
하루 종일 차르르 차르르 문밖에서 샤워만 하는 여자였다
지붕 위로 목이 쑥 나오도록 키가 큰 여자였다
너무 길어서 지붕들만 내려다보는 여자
그렇지만 아기처럼 날마다 길어지는 여자
톡 톡 톡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는
줄무늬 옷을 입은 여자
줄무늬들이 몸을 흔들며 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면 작은 물결이 이는 머리칼
이렇듯 황홀, 게으른
2. 쏟아진 여자
땅속에 쇠사슬 철렁거리는 소리
무릎을 지하 감옥에 가두는 소리
잠시 후 발끝에서 솟구치더니 방을 적시고
이불을 적시고
스탠드를 적시더니
쏟아져버린 여자
그 여자가 바로 나예요
(내가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하수도를 지났는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강물에 섞여 흐를 때 바위에 부딪히면 비명을 질렀다는 것
자갈밭을 지날 땐 기침이 쏟아졌다는 것
낮은 계곡을 지날 땐 하늘에서 회초리들이 내려왔다는 것
작은 물고기들을 숨길 수 없을 땐 죽고 싶었다는 것)
3. 키 큰 여자
설탕 탑이 녹아내리듯
차곡차곡 선반에 엎어놓은 흙으로 빚은 그릇들이 녹아내리듯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들이 녹아내리듯
물기둥들이 녹아내리는 주랑을 걸어갔습니다
비의 뿌리가 모두 뽑히는 보도를 걸어갔습니다
재판받으러 가는 물기둥들이
줄무늬 옷을 입은 물기둥들이
늘어선 주랑을 평생 걸었습니다
몸이 너무 길어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게 된
여자의 발밑을 우산을 쓰고 지나갔습니다
하반신이 물인 여자를 지나갔습니다
나의 긴 곳과 여자의 긴 곳이 맞닿는 주랑을 걸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