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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의 샘터

[스크랩] [영성샘터]우리의 영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

작성자리브가|작성시간07.10.16|조회수6 목록 댓글 0
우리의 영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

현대는 영적이지 못하다. 매우 세속적이다. 세속주의의 홍수에 휩쓸리고 있다.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러다. 아예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바리새인들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영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영성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장애물들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현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의 밑바닥을 도도히 흐르는 세속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이며 영적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첫째는 자기사랑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살도록 피조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일을 훼방하고 있다.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선언적으로 말하고 있다(요일 2:15~17). 예수님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받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물론 건강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연히 집착하게 된다. 파스칼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 실존하는 빈공간(하나님이 계셨던 자리)이 무엇인가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데 사단처럼 허황된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사랑(자기가 아니다)으로부터 떠나는 길이야 말로 진정 자유를 아는 길이며 평화를 체험하는 길이며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길이다.

두 번째는 이기주의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이다.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망가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머무신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이 있는 현장을 주목하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혹은 사랑이 실천되고 있는 곳에 역사하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보다 더 영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되고 표현되어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느낌이나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해 왔다. 세속적인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내어주기보다는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느낌이나 감정만 있어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사랑이란 감정이 자연스럽게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타적인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의지가 발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계명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행위가 없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장이 어디든 사랑이 실천되고 자기를 나누어 주는 곳에서 우리는 영성을 더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쿠오스트의 시를 소개한다.

사랑은 아픔이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때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모든 것이 파국이 되고 만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와 만나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내성을 뒤로 하고
그 사람을 향해 그 사람을 위해 걸어가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다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잊고
그 사람을 위해 완전히 자기를 죽여야 한다

아들아 알겠느냐, 사랑은 아픔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 잘 들어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하여
내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하여 내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매우 의미 깊은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빌 2:6~9).
예수님에게 있어서 부활 전이나 부활한 후나 그 영성은 똑같은 완전하셨으나 적어도 표출되는 양상은 부활한 후의 영성이 훨씬 찬란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지 않으면 그 영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영광을 누리고자 아니하셨다. 육체로 오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빵처럼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자신이 조롱당하고 비난받는 것을 아시면서도 내주실 수 있었는지! 우리가 멋모르고 비난의 상황에 처할 수는 있지만 실로 그 고통을 알고서 비난과 조롱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진흙 수렁으로 뛰어드는 것도 부족해서 사람으로 섬기는 종이 되었고 마침내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형벌을 당하셨다. 자신의 전부를 내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자신을 철저히 내주는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셋째로 쾌락추구를 꼽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유흥거리가 너무나 많다. 인간은 유흥거리를 개발해서 점점 재미있고 황홀하게 만든다. 이런 유흥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간을 만나면서 얻었던 깊은 즐거움이 기계와의 만남을 통해 혹은 물질과의 만나을 통해 대체되는 것이다. 인격과의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즐거움이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 깊이가 깊다. 우리는 완전한 인격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 위해 금식을 해야 한다. 음식, 텔레비전, 정치, 돈, 스포츠, 섹스, 영화, 술, 화투 등으로부터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그것이 보기에 건전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옳다.

넷째는 분주함이다. 우리는 무척 바쁘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현대인들은 참지 못한다. 그래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 모든 것이 결과지향적이요 목적지향적이다. 영성조차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까 점점 더 바빠진 그런 상황속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조차 일종의 노동 행위가 될 수 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 성경을 읽는 것 자체도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모든 분주함을 과감하게 끊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확보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다섯째는 이원론적 사고이다. 19-20세기의 실패를 곱으라면 성과 속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높게 쌓아올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적인 개념을 왜곡시켰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쉐퍼 박사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싶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 개신교안에서는 영성에 대해 성서적이지 못한 관점이 생겨났다. 이것은 영성을 생활과 분리시키는 데서 출발했다. 영성은 평범한 것을 뛰어 넘어 개인의 생활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 영성은 종교적인 어떤 것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적인 진리를 생활속에 적용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져 버렸다. 영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목적이 되어 삶과 분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과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경계선은 영성이나 세속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총체적인 인간, 전 우주, 그리고 모든 현실과 존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그를 창조주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의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단지 어떤 정신적인 존배만을 창조하신 것이라면, 만일 그가 ‘주를 찬양합니다’라는 영성화된 감정만을 창조하신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도 아니며 스스로 계신 자도 아닌 것이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인 경험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명을 따라 세상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기어가 들어가지 않은 엔진처럼 요란한 소리에, 그 엔진의 화전속도에 감탄하면서 기뻐 소리를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처럼 영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로렌스 형제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는중세시대에 추앙을 받았던 수도사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공간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았던 것 같으나 실상은 매우 일치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빵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잡수신다’고 생각하며 만들었고 접시를 닦든 빨래를 하든 ‘하나님께서 입으시고 잡수신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하루 온종일 예배적 삶을 살았다. 그는 성과 속을 이분화 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삶을 예배로 승화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는 자였다. 하루 한 시간 예배드리는 자와 24시간을 예배하는 자의 영성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섯째,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당연히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릇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의지를 대항하기 때문이다. 영성의 길은 핍박을 받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박수를 받는 길이며 세상을 밝히는 길이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길이다. 복음을 전하라. 소금처럼 소리없이 전할 수도 있다. 빛처럼 어둠을 폭로하며 전할 수도 있다. 어둠은 빛에 자신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하기 이전에 돌을 던진다. 스데반은 핍박을 받을 때 천사처럼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게 될 때 거룩한 영성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미 윌슨 칼 마이클의 시를 소개해 본다.

하나님 내 자아와 싸우는데
나를 강하게 하소서
나는 애처로움 목소리를 가진 겁쟁이
편안함과 안식과 기쁨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내 자아는 내 자신에게
가장 큰 반역자
나의 가장 속빈 친구
나의 가장 무서운 적
내가 가장 모든 길을 가로 막는
나의 장애물


최재하/사랑의 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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