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세계
원래 우리들의 마음은 맑은 샘처럼 청정한 상태에 있었다. 다만 거기에 온갖 때가 묻어 마음이 오염되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오염된 때를 닦아내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면 그것을 부처의 마음이라 한다. ꡔ화엄경ꡕ에서는 마음의 이런 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은 마치 뛰어난 화가와 같아서 心如工畵師
갖가지 사물을 그려낸다. 畵種種五蘊
일체 세계의 모든 존재는 一切世界中
다 이와 같이 이루어졌다. 無法而不造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며 如心佛亦爾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如佛衆生然
마음과 부처와 중생 心佛及衆生
이 세 가지에는 차별이 없다. 是三無差別
이것을 유심게라 한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중생이라는 얘긴데, 중요한 점은 나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처의 마음이 나의 마음으로 옮겨와서 나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부처의 마음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처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
흔히 마음을 비우라 한다. 무심無心해지라는 말이다. 무심은 멍청하게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디 한 점에 정신을 집중하되 그 마음을 어디에도 가두지 않는 것이다. 딴전을 피우지 않고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만 거기에 마음이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허공 속에 꽉 채우는 것과 진배없다.
우리는 날마다 그 무엇엔가 마음을 두고 있다. 돈이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거기에 마음이 끄달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걱정을 그만두는 게 무심이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공으로 돌려 편견 없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조작과 시비 없이 세상을 본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 그것이 부처의 마음이다. 그때의 기분을 표현해 보자면,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보는 느낌, 산속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느낌, 해맑은 어린아이의 함박웃음을 바라보는 느낌이라 할까? 아무튼 그것은 최고로 좋은 기분이요 느낌이리라.
그러한 상태에 이르려면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관리해야 된다. 하나하나의 말투라든가 행동 양식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리 나타나므로, 마음을 잘 관리하여 말과 행동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같이 호응해 줄 때 기쁨이 넘쳐흐르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그 마음에서 모든 욕구를 놓아버릴 때, 모든 집착을 버릴 때 지극히 평화로운 기쁨에 싸이게 된다. 욕구를 놓고 탁 트인 상태에서 사물을 보고 그 사물과 하나가 되어 걸림이 없기 때문에 그저 자유로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서양의 유물론과 대비되는 유심론이라든가 경험론과 대비되는 관념론의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러니까 객관과 분리된 관념으로서의 마음, 생각만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세계가 모두 들어와 있는 마음이다. 아니 주와 객, 나와 자연이 일체가 된 마음을 말한다. 보는 주관도 없고 보이는 객관도 없다. 마치 우리들이 아름답고 오묘한 음악에 마음을 빼앗겨 대상과 나를 잊고 오직 그윽한 음률밖에 듣지 못하듯이, 이 찰나에 이른바 진실재眞實在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 마치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처럼 확 다가선다. 그것을 ‘만상지중독로신萬像之中獨露身’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