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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역사방

궁중용어 / 펌

작성자智月常現|작성시간22.06.08|조회수247 목록 댓글 0

조선의 왕실 존칭, '마마'와 '마노라'

'마마'는 많이 들어봤지만, '마노라'는 생소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요즘들어 사극 드라마나 소설에 조금씩 '마노라' 경칭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퍼져있기에 정확한 용례와 사용 대상을 정리해놓고자 한다.

+ 모든 한문 문헌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해석하였으며, 더 나은 연구자의 해석이 있으면 이를 인용하였음

더 나은 해석이나 오류, 추가 용례, 수정할 점 등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견 환영합니다.

왕실 극존칭 마노라(抹樓下), 마마(媽媽)
왕실에서 '자가' 윗급의 경칭으로, 불릴 수 있는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참고로 궁중에서 사용할 때 그렇다는 뜻. 민간에서도 널리 쓰인 말이다.)

대상을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다.

- 마마 : 왕, 중전, 대비, 동궁(세자,세제,세손), 빈궁(세자빈, 세제빈, 세손빈)

- 마노라 : 왕, 중전, 대비, 동궁(세자,세제,세손), 빈궁(세자빈, 세제빈, 세손빈), 무품빈, 강등빈

사실상 마마=마노라 동급이었다고 보면 된다.

또, 드라마와 소설에서 툭하면 '마마!'를 남발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마노라'라 부른 기록이 훨씬 많다.

아무래도 근현대 들어서 '마노라(마누라)'가 아내를 낮잡아 부르는 말로 바뀌었다 보니, 어감때문에 제작자와 작가들이 꺼리게 되어 그런 것 아닐까 한다.

목차

1.마노라, 마마의 유래

2.사용 예 - 마노라 :왕, 왕비, 대비, 무품빈, 동궁과 빈궁

3. 사용 예 - 마마 :왕과 왕비, 대비와 왕대비, 동궁과 빈궁

4. 정리

1.마노라, 마마의 유래

1) 마노라의 유래

[ 마노라 今呼抹樓下 ] 마노라는 오늘날 抹樓下라 부른다. -이재난고 권21

이재난고에 抹樓下 표기가 한글 '마노라'임을 말하는 기록이 있다.

마노라의 어원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른 호칭들처럼 섬돌/집+아래 조합으로 '마루(抹樓)+아래에서 윗전에게 고한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고려 후기 원간섭기때 몽골에서 들어왔다는 설, 마립간에서 파생되었다는 설 등.

어쨌든 확인되는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자가와 비슷한 시기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2) 마마의 유래
마마(媽媽)는 중국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마노라에서 파생된 우리말이다, 중국에서 비롯된 말이다 등 설이 분분했으나, 승정원일기에서 이런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 998책 영조22년 (1746) 2월 18일

동궁의 낙선당에 있는 덕성합에 영조가 들어 신하들과 한글과 관련된 주고받는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上曰, 然則叶於正音耶? 錫憲曰, 以方言叶於正音, 故通用而無礙, 是以妙矣。英廟病方言之不適華語, 創爲諺文。國中行語, 皆以華語敎之, 民情多有不便, 故光廟登極, 卽命罷之。然行之亦且十數年, 至今謠俗之間, 尙有餘習, 或有循用華語者矣。上曰, 然矣。卽今宮中, 稱母爲媽媽者, 亦是華語也。

해석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정음(正音)에 부합하는가?" 하자 석현이 아뢰기를, "말이 정음에 부합하여 막힘없이 통용되니, 이때문에 묘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지금 말이 화어(중국어)와 맞지 않는 것을 근심으로 여겨 한글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라 안에서 말을 가르칠때 모두 중국어를 가르쳤는데, 백성의 사정과 형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세조께서 등극하신 후 이를 혁파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한지 또한 십수 년이 되었으나, 오늘날 풍속 중에 버릇이 남아 간혹 중국어를 쓰는 자도 있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지금 궁중(宮中)에서 어머니를 마마(媽媽)라고 하는 것도 역시 중국어(華語)이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나타난 궁중의 '마마' 경칭이 중국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해당 상황 이전에 영조가 신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근래 한가할 적에 언문(한글)을 상세히 보니, 이른바 반절(反切-다른 두 음을 따서 합치는 것, 한글)이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전에도 언문과 같은 것이 있었는가?"

하자 임석헌은 "세종대왕께서 성인의 지혜로서 창조하셨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요동에서 귀양살이하여 성삼문으로 하여금 열 두번을 오가게 하였습니다." 라고 말한다.

문맥으로 볼 때, 임석헌이 '세종대왕님께서 한글을 창제하셨는데도 아직까지 습관처럼 중국글자를 쓰는 자들이 남아있다' 라는 말에 영조가 '맞아. 궁중에서 말하는 마마 그거도 중국어잖아.' 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무슨 청와대에서 영부인한테 영부인 마더~ 이러는거 아냐..?ㅋㅋㅋ)

2. 사용 예 - 마노라 (=마누라, 말루하)

1) 왕

보통 임금은 '상감 마노라', '대전 마노라'라고 부르며, 돌아가신 임금에 대해서는 묘호를 따와 'OO 마노라'라고 불렀다.

가. 경종실록 8권, 1722년 5월 20일

김씨가 말하기를, ‘듣건대 우리 말루하(抹樓下)께서 파빈(破殯) 하기 전까지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친(私親)인 까닭에 말미암는다.’라고 하였는데, 말루하는 곧 대전(大殿)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듣고는 몹시 놀라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해석 출처 : 국역 조선왕조실록)

→ 현 주상을 '우리 말루하(마노라)'라고 부르고 있다.

나. 승정원일기 695책 1729년 10월 3일

臣曾爲光陵齋郞時, 有所謂奉先寺居僧, 言此是光陵抹樓下願堂。臣聞來極駭, 責其僧徒, 而佛法之肆行, 類多如此。

해석

신이 일찍이 광릉 참봉(光陵參奉)으로 있을 때 봉선사(奉先寺)에 산다고 하는 중이 이 절은 광릉마노라의 원당이라고 하기에, 신이 듣고 매우 놀라서 그 중을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멋대로 통행되는 것은 대부분 이런 따위들입니다. (해석 출처 : 국역 승정원일기)

→ 광릉은 세조의 묘이다. 세조를 '광릉 마노라' 라고 부르고 있다. 돌아가신 임금 역시 마노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승정원일기 1759년 12월 16일

應淳曰, 民聞減膳之令, 相告以爲, 上監抹樓下水剌不御, 臣民何敢犯禁云。

해석

윤순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감선(減膳)하라는 명을 듣고 서로 고하기를, "상감마노라께서 수라를 들지 못하시는데, 신민이 어찌 감힘 금령을 범하겠나이까."라고 하였다.

→ 백성들도 임금을 '상감 마노라'라고 불렀다.

2) 왕비

중전은 보통 '중전 마노라', '중궁 마노라' 라고 불렀으며, 왕비의 성을 따와서 'O중전 마노라'라고 하기도 했다. 'O씨 마노라'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가. 승정원일기 400책, 1701년 10월 1일

而祈祝說話段, 蓋以前日含怨之故, 中殿抹樓下, 何日昇遐, 而何時復爲中宮乎?

해석

기축하는 이야기로 이전에 원한을 품었으니, 중전마노라께서 어느날 승하하시니 또 언제 중궁을 세우겠는가?

→ 숙종조 무고의 옥 당시 기록으로, 중전마노라는 한달 승하한 인현왕후를 이르는 말이다.​

나. 승정원일기 400책 1702년 10월 3일

且成所願, 卽殺閔中殿是如, 祝願爲白乎旀, 在外太子房神堂段, 希載妾, 常在主張, 而上年十一月神祀時, 巫女, 着笠, 衣紅衣, 持弓矢, 起舞, 亂射四方曰, 吾當殺出閔氏抹樓下, 閔氏若死, 則豈不好哉?

해석​

또 소원은 민중전(인현왕후 민씨)을 죽이는 것으로 축원하는 바가 있어, 밖의 태자방신당에서 희재(장희빈의 오빠)의 첩이 늘 주장하였다. 지난해 11월 제사를 지낼 때 무녀가 갓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입고 일어나 춤을 추며 사방에 활을 난사하며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민씨마노라를 죽일 것이다, 민씨가 죽으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무고의 옥 당시 기록으로, 중전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를 '민중전(閔中殿)', '민씨마노라'라고 부르고 있다.​

다. 숙종실록 35권, 1702년 10월 2일

흰 머리의 늙은 궁인이 또 장 대장의 첩과 같이 와서 무녀의 집에 앉아 무녀와 더불어 같이 축원하기를, ‘우리 말루하주(抹樓下主-우리 마누라 주인님)는 태평하시고 태평하시며, 중전 말루하주(중전 마누라 주인님)는 마땅히 승하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해석 출처 : 국역 조선왕조실록)

이 외에도, 야승 신사 9월 27일 기록에는 무고의 옥 기록 중에 인현왕후를 '중궁 마노라(中宫抹樓下)'라 칭하기도 했고, 당시 다른 추국 기록들에도 인현왕후를 '중전 마노라', '민중전 마노라' 등으로 칭했다.

3) 대비

이재난고 권29 1779년 5월 7일

急探 尙儉曰 計非不密 奈金氏抹樓下 【卽大妃】 終無意思許肯何哉 一鏡乃去 地師旣托睡聞知 亟走尹家 因以轉報四大臣 四大臣始生意 以爲稟慈殿定策之地云

​이재난고에서 상검이라는 사람이 정순왕후 김씨를 '김씨 마노라 [즉, 대비]'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 사이 글은 황윤석이 주석을 단 것이다.

4) 무품빈 및 강등빈

특수 케이스다.

첫 번째, 정조때 원빈 홍씨의 무품빈 입궁을 이후로 몇몇 무품 빈들이 중전의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두 번째, 중전에 올랐던 장희빈이 강등당해 부대빈, 대빈궁 등으로 불릴 시기이다.

가. 야승, 신사년 9월 27일

韓尚宫張希載妾大水賜䓁同為祈祝曰殺今中殿禧嬪抹樓下復為中殿...

한상궁, 장희채의 첩이 축원하며 말하기를, 지금 중전을 죽이고 희빈마노라께서 다시 중전이 되셔야...

→ 장희빈을 '희빈 마노라'로 칭하고 있다.

나. 숙종실록 35권, 1702년 10월 2일

흰 머리의 늙은 궁인이 또 장 대장의 첩과 같이 와서 무녀의 집에 앉아 무녀와 더불어 같이 축원하기를, ‘우리 말루하주(抹樓下主-우리 마노라 주인님)는 태평하시고 태평하시며, 중전 말루하주(중전 마노라 주인님)는 마땅히 승하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해석 출처 : 국역 조선왕조실록)

→ 앞에 나온 '우리 말루하주'는 중전에서 빈으로 강등된 '장희빈'을 칭하는 말이다. 빈으로 강등되었어도 중전이었기에, 정1품 빈이 '자가' 경칭을 받는 것과 달리, 중전급으로 예우하여 '마누라' 호칭을 바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마누라 주인님'이 줄어든 호칭이 '마님'이다. (민간에서 널리 쓰임)


다. 뎡미뎡됴빈마누라의듸발긔

정미년 정월 초하루 빈 마누라 의대 발기

→ 디지털장서각에 1787년 정미년이라 제목이 붙어있으나, 1907년 정미정조 영친왕의복발기와 종이 글씨체 문서상태 등 모든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907년 문서로 추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빈 마누라'는 그해 여름 사망한 무품빈 순화궁 경빈 김씨로 추정된다.

5) 동궁과 빈궁

동궁은 마노라 경칭 사용시 '동궁 마노라', '세자 마노라'라고 불렸으며, 왕세제를 '세제 마노라'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빈궁 역시 '빈궁 마노라', '세자빈 마노라' 등으로 불렸다.​

가. 1732년 승정원일기

영조가 자신이 왕세제이던 시절 이야기를 하는 부분

予在東宮時, 素不信陳根, 且甚厭服藥, 故雖劑藥以入, 而未嘗進服, 遂爲棄置者, 多矣。李判府事, 爲提調時, 常曰, 諸醫以爲, 藥雖劑入, 世弟秣樓下, 必不進服, 實爲無用云。

해석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평소 진근(陳根)을 믿지 않고 또 심하게 약을 먹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약을 지어 들여도 든 적이 없어 결국 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판부사(李判府事)가 제조로 있을 때에 항상 말하기를, "모든 의관이 약을 지어 들이더라도 세제 마노라께서 반드시 먹지 않는다면 실로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 왕세제를 '세제 마노라'라고 하였다.

나. 1775년 존현각일기

抹樓下之言果然。而吾兒則以此不安云矣。

“말루하의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만, 우리 아이는 이 때문에 불안하다고 합니다.”

人皆以抹樓下。以吾與義州定婚事藏怒。一欲害之云。

“사람들이 모두 말루하께서 내가 의주 부윤과 혼인을 정한 일로 해서 노여움을 품고 한번 해치고자 하신다고 합니다.”

抹樓下與宮官。有何怪怪說話云。此何說也。

"말루하께서 궁관과 무슨 괴괴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등등.. (해석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 세손 정조를 마노라(말루하)라고 부르고 있다.

나. 영조실록 125권 11월 30일

정후겸의 어미가 일찍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말루하(抹樓下) 께서 만일 우리집과 외가(外家)가 아니라면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의(言議)를 취사(取捨)할 때에는 반드시 양가(兩家)를 위주로 한 연후에야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국역 조선왕조실록)

→ 여기서 정후겸의 어미는 화완옹주로,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말루하'로 칭하고 있다.

다. 1882년 동궁마누라 관녜시늬인상격발긔

동궁마누라관례시내인상격발기

→ 여기서 동궁마누라는 당시 세자인 순종이다.

​라. 동궁마마 가례시 빈궁마누라의대발긔

1882년 빈궁마누라의대발기

→ 여기서 빈궁마누라는 당시 세자빈 순명효황후이다.

​그 외에도 조선 말기-대한제국 초기 다양한 동궁마누라, 빈궁마누라 기록들이 있다.

3. 사용 예 - 마마

1) 왕

가. 연대미상 상감마마 의대발기

→ 연대미상이나 조선 말기로 추정된다.

​나. 1907 정미가례시일기


→ 대한제국 시기이나 내부적으로는 조선시대 궁중 풍속을 그대로 따랐다.

​2) 왕비

​동궁마마가례시 차비관나인양전마마상격발기

양전마마(兩殿媽媽-임금과 중전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

​3) 대비와 왕대비

1882년 동궁마마가례시어상기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양전마마(임금과 중전) - 자전마마(慈殿媽媽)-대비) - 왕대비마마(王大妃媽媽) - 순화자가(경빈 김씨) - 대감(흥선대원군) - 본궁마마(여흥부대부인 민씨) 이다.

​*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을 '본궁 마마'라 칭하고 있다.

4) 동궁과 빈궁

가. 연대미상 동궁마마금말의발기


나. 연대미상 빈궁마마 금침

외에도 디지털장서각에 검색하면 조선말기-대한제국 시기 동궁마마, 빈궁마마 자료가 많이 나온다.

4. 정리

마마와 마노라 용례를 종합하면

마노라 : 왕, 중전, 대비, 동궁, 빈궁, 무품빈 및 강등빈 (특수케이스)

-왕 : 상감 마노라, 대전 마노라, 묘호를 따서 OO마노라

-중전 : 중전 마노라, 중궁 마노라, 성을 따와서 O중전 마노라, O씨 마노라

-대비와 왕대비 : 대비 마노라, 자전 마노라, 왕대비 마노라

-무품빈 : O빈 마노라

-세자(제,손) : 동궁 마노라, 세자 마노라, 세제 마노라, 세손 마노라

-세자빈(제,손) : 빈궁 마노라, 세자빈 마노라, 세제빈 마노라, 세손빈 마노라

-강등빈 장희빈 : 중전과 같은 대우였기 때문에 당시 중전의 경칭과 같은 마노라를 썼다.

마마 : 왕, 중전, 대비, 세자, 세자빈

기본적으로 마노라를 마마로만 바꾸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품빈이 빠진다.

-왕 : 상감 마마, 대전 마마

-중전 : 중전 마마

-대비와 왕대비 : 자전 마마(대비), 왕대비 마마

-세자(제,손) : 동궁 마마

-세자빈(제,손) : 빈궁 마마

마노라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보통 섬돌/집+아래 라는 경칭 구조를 따라 '마루(抹樓) +하(下)' (마루 아래에서 고합니다) 로 만들어졌다는 설

-삼국시대 마립간 칭호에서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

-고려 후기 원간섭기때 들어온 몽골풍 경칭이라는 설

-다만 문헌상 확인되는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이다.

'마마'는 중국어 '媽媽'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지금 궁중(宮中)에서 어머니를 마마(媽媽)라고 하는 것도 역시 중국어(華語)이다. (승정원일기)

대한제국 시기에도 계속해서 조선 궁중 풍속을 따라 '상감 마마', '자전 마마', '동궁 마마' 등 경칭을 사용했다.

마마는 영조가 '지금 궁에서 어머니를 마마라 부르는데, 이거 중국어임.' 라고 하는 기록을 제외하면, '마마'를 궁중 경칭으로 사용한 기록은 조선 말기 고종조에 가서야 나타난다.

마노라는 조선 중후기부터 기록이 확인되며 조선 말기까지 꾸준히 사용된다.

사실 사극에선 '마노라'라는 경칭을 더 자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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