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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역사방

백범 김구선생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또 공개되었어요

작성자智月常現|작성시간19.02.25|조회수93 목록 댓글 0
백범 김구선생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또 공개되었어요


독립군 후손들이
밀정 한도원 딸에게 써준 "소름이 돋는구나" 메모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하였습니다

내용은[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편!
김구선생의 지령으로
일본경찰들에게 접근하여 비밀을 빼오라는 지령을 받고 밀정의
역할을 해오던 독립군 한도원의 후손들이 공개한 내용입니다
한도원 독립군 지사는 전차회사에서 일하며 병인의용대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추후 김구의 지령을 받들어 일제 경찰 측에 접근해 밀정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상하이 시절 한도원 집에서 권총 만지다가 오발 사고
16년 만에 상봉 “네가 복중 그 아이라니…” 감격


[내용은 단독 취재를 하였던 한국일보]
때는 1930년 일제의 감시와함께 군자금 부족으로 궁핍함이 숨통을 조여오던 그 시절~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백범 김구선생은 식사한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포의 집들을 전전해야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여느때처럼 동포의 집을 방문했으니
1930년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 허름한 집.
슬그머니 입장한 백범(白凡) 김구 선생은 평소 친분이 있던 동포
한도원(1906~1984년ㆍ애국장) 지사에게 한 끼 식사를 청했슥니다.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 집에서 걸식하니 거지는 상등 거지다”(백범일지)라 할 만큼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해서 상하이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직후로 민족주의와 무력 항쟁을 독립운동의 노선으로 정했던 김구는 늘 품속에 권총 한 자루를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식사를 기다리며 총기를 손질하던 중 장전되었던
탄알이 발사되었으니

갑자기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자신의 총에서 오발탄이 터진 것. 사색이 된 김구는 식사를 내팽개치고 급히 집 밖으로 몸을 피했다.
이윽고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찰들이 “무슨 일이냐”고 쏘아붙이자 한도원은 “청소할 때 무언가 건드려 소리가 난 것”이라며 둘러댔다
다행이 의심스러워 하는 경찰들도 돌아갔기 때문에
오발사고는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다


그 오발사고는
16년간 그의 가슴 한 구석을 찌르던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임신 중이던 한도원의 젊은 아내가 놀라서 유산을 했을까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당시 식사를 준비하던 한도원의 아내(홍성실ㆍ1908~1958)가 임신 상태로 총소리에 놀라 유산하지 않았을까 걱정됐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김구선생은 경찰의 의심을 피하고자 한도원의 집을 좀처럼 찾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해방이 되고서 1946년 8월 7일(음력 7월 11일)
그 오발사고로부터 16년 뒤가 되는 해였죠
김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다.
1946년 8월 7일(음력 7월 11일) 음력 71번째 생일에 그가 머물던 서울 종로구 경교장(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의 일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지 불과 한 달여가 지난 이 날 김구는 엄마(한도원의 아내 홍성실) 손을 잡고 자신을 찾아온 17세 한순옥을 마주하고 얼어붙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넨 소녀가 다름 아닌 16년 전 상하이에서 오발탄에 생사를 걱정했던 복중 아이였던 것.

소녀가 당시 아버지(한도원 독립지사)가 들려준
오발탄 에피소드를 줄줄이 읊자 그제야 김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너로구나!” 상기한 표정의 김구는 갑작스레 선물을 준비했다. 특유의 동그란 안경과 두루마기 차림의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사진을 찍은 사진의 여백에 소녀와의 만남에 대한 감정을 거침없이 내려 적었다.

김구는
“한순옥 세손(世孫)에게 주노라”라고 시작되는 이 글에서, “너희 집이 상해에 있을 때, 총기를 가지고 놀다가 오발이 됐을 때 너는 아직 뱃속에 있었다”라며 “하지만 하늘이 준 큰 행운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적었다. 이어 “이제 네가 17세가 됐고, 예전 일을 세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몸에 소름이 돋는다”라고 했다.

한순옥씨 제공
“이제 네가 17세가 됐고, 옛 일을 자세히 생각해 보니 몸에 소름이 돋는구나(今汝十七歲 细想舊日事不覺身生粟).”


올해 아흔을 맞은 한순옥 할머니(한도원 독힙지사의 딸)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날(1946년 8월 7일) 만나 뵈니 너무 반갑다며 글귀를 써주시고 공부하라 학비도 대주셨어요.
내가 노래를 잘하니까 나중에는 정훈모 서울대 음대 교수님을 소개해줘 공짜로 음악을 배우게 해주셨지.”
한 할머니는 김구의 친필과 사진이 담긴 A4크기의 인화지를 다듬어 70여 년을 보물처럼 보관해오고 있었다.
해방을 맞은 한도원은 가족과 전국을 떠돌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전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취업한 회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함께 6ㆍ25를 맞기도 했다. 

한순옥 할머니는
“아버지는 독립운동했던 내용에 대해 거의 말씀이 없었다”라며 “해방 후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할 때는 ‘내가 왜 독립운동을 했을까’라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고 말했다. 한도원은 금전적인 문제로 친누나와 틀어져 왕래가 끊어질 정도로 광복 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구 연구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한순옥 세손이라고 적었는데 1대손, 2대손처럼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표현으로 (한도원 가족과)아주 각별한 사이였던 게 분명하다”라며 “특히 글귀 마지막에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을 ‘신생속(身生粟ㆍ몸에 좁쌀이 돋는다)’라는 글귀로 나타냈는데 김구가 이런 비유를 쓴 건 거의 처음 볼 정도로 아주 희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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