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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역사방

설날은 중국이 기원인가?

작성자智月常現|작성시간21.02.24|조회수1,181 목록 댓글 0

설날은 중국이 기원인가?

모 중앙일간지 논설위원이 우리나라 설날이 마치 중화문명권의 축제날인 것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

중국은 음력 1월1일을 춘절(春節)라고 하여 최대의 명절로 여긴다.

대만 싱가폴, 말레이, 베트남, 인도네시아등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 몽골도 음력 설을 지낸다.

일본은 명치유신때 1873년에 음력을 폐기했고 태양력을 도입했다.

북한도 양력 1월1일을 설날로 여긴다. 남한만 음력설날을 지내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우리나라는 고종때 을미개혁에 맞춰 1896년부터 공식적으로 음력을 폐지했다.

광복후에 이승만, 박정희 정권때는 양력 1월1일을 신정(新正), 음력 설날은 구정(舊正)이라고 부르고 이중과세라고 하여 음력설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뿌리깊은 음력설을 지내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태음력 기준으로 새해 설날을 맞이하는 것인가?

농경사회에서 새해는 긴 겨울이 끝나고 씨를 뿌릴 수 있는 봄이어야 한다.

1년을 15일 단위로 24절후로 나누고 동지, 입춘과 같은 계절의 변화를 알려 주는 것은 태음력이 우수하다.

양력 1월1일은 아직도 한겨울이지만 음력 초하루가 지나면 봄기운이 완연해 진다.

정월 보름이 지나면 농촌에서는 들에 일하러 나가기 시작한다.

움추렸던 겨울을 지나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음력 설날이 새해 초하루가 될수 밖에 없다.

설날의 의미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새로 온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어근인 설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새롭게 시작하는 선날(立日, 立春)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삼가고 조심한다는 우리말 '섦'에서 기원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설을 쇈다. 날이 새다. 밤을 (지)새우다라는 표현을 쓴다.

날이 새다는 날이 밝아옴을 뜻하고 밤을 지새우다는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낸다는 뜻이다.

힌 머리카락을 새치라고 한다. 즉 '새다'에는 희다, 밝음의 의미가 닮겨 있다.

밥이 설 익다 할 때의 설은 완전하게 익지 않은 상태, 익기 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설날은 새해의 첫 밝은 날이 완전하게 밝아오기 직전의 상태, 즉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새는 밝음(明), 아침(朝), 동쪽(東), 처음(初), 힌색(白)을 나타내는 우리말 '아사'에서 왔다.

새날(아시날)은 어둠이 지난 밝은 날, 첫날이고 샛바람은 동풍이다.

어찌됐건 설날은 새날이라는 의미에 방점이 있다.

우리말 새로 날, 서라날에서 줄임말이 설날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서라+벌을 동경(東京), 신라(新羅)라고 한역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세(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는 처음, 새날, 시작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새해 설날이 언제인가를 알기위해서는 역법이 있어야 한다.

고대 역법을 누가 먼저 만들고 사용했는지 알면 설날의 기원이 어느 나라에서 기원한 것인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양문명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제사관습도 중국에서 기원했고 역법도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믿는다.

조선조의 지독했던 사대모화의 영향이 남아있는 탓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중국 고대사학자 서량지(徐亮之)가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1943>에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회화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상나라의 동이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中國易法 始於東夷 造曆者 羲和子也, 系出殷商東夷先公也, 東夷造曆之事實無疑問也)." 라고 했다.

서량지가 의미하는 동이가 곧 오늘날 한국은 아니다.

동이는 고대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일대에 거주했던 동방인을 뜻한다.

그 원류는 배달민족이다. 회화자는 요, 순때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분명 환빠라고 무시당했을 것이다.

서량지는 대륙의 국민당 정권때 총통대리 비서까지 역임한 고위 관료이자 역사학자이다.

이제 우리 기록을 살펴보자
"을축4년(B.C. 2096),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단군세기 5세 구을단군조)

"신시의 세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대저 책력을 만듦은 이에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六癸)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를 처음 시작으로 한다.

계(癸)는 계(啓,열계)요 해(亥)는 핵(核,씨)인, 일출의 뿌리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p 174)

60갑자는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를 조합하여 갑자, 을축, 병인, 정묘...계해 등 60가지 조합을 만들어서 년, 월, 일을 헤아리는 동양 고유의 책력법(冊曆法)이다.

즉 하늘을 줄기로 하고 땅을 가지로 하여 굴레를 엮은 것이다.

오늘날 60갑자는 갑자(甲子)로 시작하여 60번째는 계해(癸亥)로 끝난다.

그러나 신시시대에는 계해를 첫머리로 하였으나 단군 구을이 갑자로 부터 시작하여 10월을 한해의 첫해, 즉 상달이라고 했다고 한다.

조금더 거슬러 올라 가보도록 하자

<대변경大辨經>에서 말한다.
"복희(伏犧)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雨師)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를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복희의 능은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p 176,177에서 인용)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북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겨 수인(燧人, 부싯돌을 발명한 사람), 유소(有巢, 사람이 나무위에 살도록 나무집 짓는 법을 알려준 사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상동)

복희는 누구나 인정하는 중국문명의 시조이다. 신시 배달국 출신으로 역법과 문자를 최초로 중원 땅에 전한 인물이다.

지금도 음양가에서는 복희팔괘라고 하여 중시한다,

복희 다음으로 중국의 고대 성인은 요, 순임금이다. 고대의 제왕들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은 새해의 시작점을 판단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요임금이 만들었다고 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은 천체의 운행을 본뜬 모형이다.

맹자는 순임금을 동이인이라고 했다. 공자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책력법을 배워서 서방에 전했다고 <서경>에 기록했다.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 뵙다(東巡望祭肆覲東后)"

"때는 2월에 동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때와 달을 협의하고 날짜를 바로 잡고 도량형(길이와 무게)을 같게하고 오례를 닦았다(歲二月 東巡守 至于垈宗 協時月 正日 同律度量衡 修五禮)."

동후(東后)는 동방의 제후가 아니라 동방의 상왕을 뜻하고 대종(垈宗)은 오늘날 산동성 태산을 지칭하는 것이니 순임금은 고대 산동지역으로 진출한 동방의 임금, 즉 동황태일(東皇太一)을 찾아 뵙고(조견肆覲) 동방의 선진 역법과 도량형을 전수받았다.

한, 중 고대사서에 나타난 기록은 신시(神市, 배달국), 동이가 역법의 원조임을 말해준다.

동이 소호계인 제곡 고신씨의 부인인 희화가 열개의 태양을 낳았다는 신화는 동이계에 의해서 서방에 전해진 역법이 3황5제 시대에 시행되었을 암시한다.

열개의 태양은 10개의 천간(天干)을 의미한다.

제곡 고신씨와 순임금을 이어서 약 600년간 중원을 지배한 은나라(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 때에는 왕의 이름을 10간 12지에서 차용했다.

지나 역사에서 태갑(太甲),소갑(小甲), 중정(中丁), 무정(武丁), 무을(武乙) 과 같은 간지를 왕명을 사용한 나라는 은나라가 유일하다.

은나라는 동이 소호계가 중원으로 진출하여 세운 나라이다.

3세기 경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에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썼다.

부여는 은나라 정월을 새해 첫달로 삼았다.

은나라 정월은 음력 12월(섯달)이다. <춘추>에 이르기를 "하나라는 인월을, 은나라는 축월을, 주나라는 자월을 정월로 본다(夏以建寅之月, 殷以建丑之月, 周以建子之月爲正)고 썼다.

동짓달을 기준으로 자월, 축월, 인월이라고 하니 은나라 정월은 동짓달 다음달인 섯달 12월이 새해가 되는 셈이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고유의 책력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중고 이래 문명의 주도권이 중원으로 넘어간 탓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는 가을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다.

이것은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보다 농경사회에서 추수가 끝난것을 기념하는 행사이었다.

삼국시대에 신라는 한가위, 수릿날(단오 음력 5월5일), 부여계인 백제는 정월에 천지신명과 동명왕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시 배달국과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세시유풍을 지켜왔다는 이야기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로 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한식과 단오를 즐기는 풍습을 볼수 있었으나 지금은 설날과 추석만 남았다.

설날은 중국에서 온 관습이 아니고 우리 민족 고유의 관습이다.

설날을 중국 한족 문화의 유산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무지한 탓으로 중원문화에 압도되어 사대모화의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망원경이 발명되고 17세기 근대 천문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중고시대 이후에 역법과 천문학의 최고 선진국은 단연 중국이었다.

그런데 한족 왕조가 아니라 원나라와 청나라이었다.

원나라는 원 세조의 명에 의하여 곽수경(郭守敬) 등이 아라비아역과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천체 관측에 의해서 5년 만에 수시력(授時曆)을 만들고 1280년에 천하에 반포했다.

원나라는 색목인(色目人)이라하여 이슬람계 위구르 서역인을 한족보다 우대했다,

일년의 길이는 오늘날 그레고리력과 동일하다고 한다.

고려말에는 수시력을 사용했다. 명나라는 수시력의 이름을 바꿔 대통력(大統歷)이라고 불렀다.

원 세조 이래 수백년간 누적된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명나라 말에 숭정력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시행도 못해보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청나라는 천문학에 밝은 서양 선교사 아담 샬로부터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여 명나라때 만든 대통력(大統曆)의 오차를 보정하여 1644년 시헌력(時憲曆)을 반포했다.

조선은 시헌력을 입수하고 관상감 제조(提調)로 있던 김육이 아담샬에게 배우고 시헌력 관련 서적을 입수했다.

10여년동안 연구를 진행하여 1653년(효종 4년)에 시헌력을 시행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은 이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명,청이 수도로 삼았던 북경과 한양은 한시간의 시차가 있다.

사주를 보거나 길일을 택일하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정확한 시간은 북경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세종때에 독자적인 역법을 발전시켰다. 명나라의 책력을 참고하여 칠정산 내편을 만들었다.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은 회회력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어 냈다.

이것을 기준으로 일식을 정확하게 관측하여 세종을 놀라게 했다.


이순지는 1,447년(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다.

세종은 칠정력(七政曆)이라고 이름했다.

세종이 신시시대에 칠회제신력이 있었음을 알았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칠정은 천체 운행의 중심이 되는 일월과 수화금목토를 의미한다.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현대 물리학의 46초와 단 1초 차이가 난다. 이순지는 세종때의 천문학 수준을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 놓았다.

일식과 월식의 원리와 계산법을 설명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은 과거시험 음양과의 시험교재로 쓰여 졌다고 한다.

조선은 청나라에서 수입한 시헌력을 관례상 사용했을 뿐 이순지가 만든 달력을 기준으로 매년 역서를 간행했다.

18세기말 정조대에는 무려 30만부를 발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부 수요계층 외에는 책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6,70년대만 해도 유학 식자층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전통적인 세시풍속을 지키고 관혼상제에 길일을 택하기 위해서는 음력과 간지를 사용하는 뿌리깊은 관행때문이었다.

세종 때에 만든 칠정력과 천체의 모형을 본뜬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장영실이 만든 측우기 등은 조선왕조가 과학성을 물론 자주성이 뛰어난 왕조임을 증명한다.

상고시대 이래 감추어졌던 배달 한민족의 유전자가 발현된 것이다. 조선 중기이래 성리학의 광풍이 불어 사대모화의 나라로 낙인되었다.

새해 첫달을 맞아 설날과 관련한 풍속과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 문화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김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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