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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신영복

작성자상현 덕비|작성시간26.06.18|조회수29 목록 댓글 0

석과불식碩果不食/신영복

 

“동서고금의 수많은 언어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이다.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있는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일구어 내는 보석 같은 금언이다.

 

석과불식의 뜻은 ‘석과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과는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씨 과실’이다.

초겨울 삭풍 속의 씨과실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희망의 언어가 바로 석과불식이다.

씨과실을 먹지 않고(不食) 땅에 심는 것이다.

땅에 심어 새싹으로 키워내고 다시 나무로,

숲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것은 절망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길어 올린 옛사람들의 오래된 지혜이고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석과불식은 단지 한 알의 씨앗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키워야 할 희망에 관한 철학이다.”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여객선이 항해를 하다

큰 폭풍을 만나 난파되어 항로를 잃고

바람 따라 헤매다 어느 무인도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승객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으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배에 몇달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곡식의 씨앗이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야 구조를 받을지 알 수 없어

승객들은 논의 끝에 미래를 위하여 땅에 씨앗을 심기로 하였다.

 

그래서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파자

땅에 황금덩이가 여기저기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땅을 파 뒤지기만 하면 황금덩어리가 나타나자

승객들은 씨앗을 심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황금덩어리가 나오는 판에 구태여 귀찮게

씨앗을 심는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씨앗을 심는 일에 관심이 없어진 것과 비례하여

황금은 점점 많아져 더미를 이루게 되었다.
 
몇 달이 흘렀다. 그런데 식량이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이들은 씨앗을 심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먹을 식량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씨앗을 심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또 몇달을 기다려야만 하는데 그때까지

먹을 식량이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이미 때는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나

무인도를 방문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황금덩이와

죽은 사람들의 백골 무더기들 뿐이었다.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혼魂의 함양涵養)을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황금(이익과 허세)만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맨 어리석은 일은 없었는지 나 자신을 뒤돌아 본다.

 

우리의 소중한 삶의 시간에 황금 덩이만을 찾아 헤맬 것인지,

아니면 우선 먼저 해야 할 씨앗을 심을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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