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강의 04 워싱턴체제 군벌들 쑨원 국공합작
**2-2 워싱턴 체제와 군벌들의 혼전
한편 5·4운동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파리강화회의가 끝났지만, 회의를 주도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우드로 윌슨의 ‘14개조의 평화원칙’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단지 세계대전이후 제국주의열강들의 영토분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만이던 미국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제반문제와 전후의 군비제한을 목적으로 워싱턴회의를 소집했다. 1921년 12월10일에는 영국과 일본의 결합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따라 태평양에서의 상호불가침을 보장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의 상호불가침조약이 체결돼 기존의 영, 일 동맹은 폐기됐다. 이어 다음해인 1922년 2월6일에는 중국의 주권과 독립, 그리고 영토보존의 존중, 행정적 보전의 존중, 문호개방의 4개 원칙을 기초로 하는 9개국 조약이 체결됐다. 이로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획득한 중국 대륙에서의 독점적, 배타적 지위와 권익이 부정되고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은 주권을 찾게 됐다. 허나 그런 약간의 성과가 있기는 했으나 워싱턴회의 역시 제국주의세력들이 오랫동안 자행해온 영토분할정책을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이제 서구열강들은 중국 대륙진출의 정책을 바꿔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수행하기보다는 군벌들을 지지, 육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대리전쟁을 치르게 했기에, 이후 벌어지는 중국 내 군벌들 간의 이합집산과 상호투쟁은 이런 국제정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쑨원은 1918년에 서남파의 광둥정부와 결별한 뒤로 상하이에 머물며 호화로운 프랑스 조계 안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쑨원은 민주주의와 그 문제점 등에 대해 정력적으로 글을 쓰는 한편, 1919년 베르사유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자 중국의 권리를 강력하게 대변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5·4운동이 일어나자 그 사실에 자극을 받아 <건설建設>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새롭게 전개되는 정치상황에 개입하려 애썼다. 5·4운동은 아무 준비도 돼있지 않았던 쑨원에게 민중의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정치운동에 대중성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기회를 줬으며, 이에 1920년에는 폐쇄적 비밀결사형태로 운영돼온 중국 혁명당을 없애고 국민당을 재건했다. 이 시기에 앞서 리다자오와 천두슈를 방문한바 있는 보이틴스키가 쑨원을 방문했다. 쑨원과 소비에트러시아 측의 첫 번째 실질적 조우가 이뤄진 것이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에서 진행 중인 투쟁과 멀리 떨어져있는 러시아에서의 투쟁을 어떻게든 결합시키고 싶었다. 일찍이 여러 곳을 전전하며 망명생활 하는 동안 유럽의 혁명 사상에 접한 적이 있었기에, 사회주의사상에도 일부 공감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즉각 레닌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쑨원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락을 유지하기위해 블라디보스토크나 만저우滿洲지역에 전신국을 설치할 수 있는지를 보이틴스키에게 물었다. 이미 1920년 3월에 전 중국에 알려진 ‘카라한선언’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일말의 호감을 가졌던 쑨원은 이 만남을 통해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쑨원이 떠난 뒤 광둥정부를 지킨 건 광시성군벌 루룽팅陸榮廷이었다. 이에 광둥성의 자산계급은 “광둥 사람이 광둥성을 다스려야한다(粤人治粤)”는 구호아래 광둥성의 향신인 우팅팡伍廷芳을 독군으로 선출하려했으나 루룽팅이 거절했다. 쑨원이 떠난 뒤 광둥정부는 이렇듯 형해화 돼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됐다. 결국 광둥성에서는 광시성의 군국주의자들을 철저히 배격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1920년 7월 루룽팅의 군대가 광둥을 침공했다. 쑨원은 광둥성 출신으로 수년간 푸졘福建과 광둥일대에서 전쟁을 벌여왔던 천즁밍陳炯明 (1875~1933)에게 광둥으로 군사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려 광저우를 공격해 루룽팅을 패퇴 시켰다. 루룽팅이 하야 후 상하이로 도망을 친 뒤에는 광시성의 성도 구이린桂林 출신인 리쭝런李宗仁(1890~1969)이 바이충시白崇禧(1893~1966)와 연합해 광시성을 장악했다. 해서 1910년대에 광시를 장악했던 루룽팅은 ‘구계계舊桂系’라하고 리쭝런 등은 ‘신계계’라 부른다. 천즁밍은 쑨원과 그의 동료들을 광저우로 초빙해 새롭게 광둥정부를 수립했고, 1921년 4월 쑨원이 비상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제2차 광둥정부수립). 당시 쑨원을 따라 광저우에 왔던 국민당측 인사들가운데 후한민胡漢民(1879~1936)은 본래 광둥성 출신으로, 신해혁명직후인 1913년에 광둥도독이 됐는데, 이듬해에 제2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했다가 다시 돌아와 쑨원을 보필하고 있었다. 또 재정을 담당했던 랴오중카이廖仲愷(1877~ 1925)는 샌프란시스코 출생으로 1903년부터 쑨원의 정치공작에 참여했는데, 역시 제2혁명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주로 재정문제를 담당했다. 또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1895 ~1973)는 광저우시장으로 대대적인 도시개조에 참여했고, 천두슈도 광둥성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초청됐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회의가 열리자 쑨원은 광둥정부를 대표해 회의 참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거부당했고, 이에 크게 실망한 쑨원은 서구열강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야 했다. 쑨원은 신해혁명이후 중국혁명을 대표하는 인사로 중국인들에게 폭넓은 신망을 받고 있었지만,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현실권력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래서 항상 서구열강들의 지지와 지원에 목말라했던 것이고, 워싱턴회의에 참가하고자했던 것 역시 중국 내의 합법정부로 자신을 승인해달라는 것 이외에도 미국의 실질적인 원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대가 물거품이 되자 쑨원은 점차 태도를 바꿔 신생 소비에트러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1921년 12월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은 광시로 출격해 구이린에 머물 때 코민테른 대표 마링과 회담했다. 마링은 쑨원에게 중국혁명을 완수하기위해서는 제대로 된 정당이 필요한데, 이 정당은 여러 계층, 그중에서도 노동자 농민대중과 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는 한편 혁명적 무력육성을 위해 군관학교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쑨원은 마링에게서 소련의 신경제정책(NEP)의 상황에 대해 전해듣고 자신이 집필한 ‘실업實業’ 계획과 거의 같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1921~1923년에는 중국경제가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서구열강들이 중국에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일시 성장했던 중국의 민족자본은 전쟁이 끝난 뒤 속속 복귀한 열강들의 자본에 의해 크게 위협받았다. 문제는 그로 인한 압박이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로 이어졌다는데 있었다. 이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제1차 전국대표회의 이후 장궈타오의 지도 아래 전국노동조합 서기부를 설립하고 노동자조직에 적극 나섰다. 공산당은 여러 지역에서 파업을 주도했는데, 그 가운데 1922년 1월 홍콩의 부두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은 대규모로 일어난 중국최초의 파업이었다. 그 뒤 여기저기서 다양한 파업이 일어났고, 이런 가운데 1922년 5월에는 27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162명의 대표가 광저우에 모여 제1차 전국 노동대회를 열었다. 그 뒤로는 공산당에 의한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해 노동운동이 고양 되는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2·7참안慘案이라 부르는 대규모 노동자탄압이었다.
1923년 2월1일 징한철로京漢鐵路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원들의 지도하에 정저우鄭州에 모여 ‘징한철로총공회京漢鐵路總工會’라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려했는데, 즈리파군벌인 우페이푸 吳佩孚가 군대를 동원해 탄압했다. 탄압에 불구하고 결성식을 마친 ‘총공회’는 2월4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고, 본부를 한커우 쟝안江岸으로 옮겼다. 2월4일이 되자 오전 9시부터 시작돼 3시간동안 진행된 파업으로 징한철로가 일시 마비됐다. 이후 각 지역단위 별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던 중 2월7일 우페이푸의 지시를 받은 후베이독군 샤오야오난 肖耀南은 협상을 갖자며 쟝안공회 대표들을 만났다. 공회사무실에서 협상이 진행되는데 군벌이 동원한 군경이 노동자대표들을 보호하기위해 대기하던 규찰대에 총격을 가해 3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그럼에도 파업은 2월9일까지 지속됐지만,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조직역량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총공회 지도부는 결국 파업철회 선언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 지역의 군벌들은 노동운동을 강력히 탄압해 노동운동은 한동안 쇠퇴기에 접어들고, 중국공산당 지도자 천두슈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민당과의 합작필요성을 통감하게 됐다. 농민들의 상황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군벌들 간의 대립과 전쟁이 이어지면서 군벌들의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농민들에 대한 착취 또한 격심해진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군대와 그걸 유지하기위한 재정적 부담이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전가되는 동시에 전쟁자체로 인한 일상생활 파괴 또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군벌들의 정상적인 재정기반은 토지세와 염세, 리금세釐金稅가 있었는데, 토지세의 경우 군벌들의 재원이 고갈되면 심하면 10년 이상 몫을 앞당겨 징수할 정도였고, 염세 또한 중앙정부로 납부해야할 몫까지 지방군벌들이 수탈했다. 청대에 만들어진 일종의 국내관세인 리금세는 본래의 취지와 상관없이 군벌들이 수익 올리는 주요수단이 돼버렸다. 군벌들의 착취에 토지를 잃고 직업을 갖지 못한 농민은 어쩔 수 없이 군벌군대에 입대하는 악순환이 벌어졌으니, 이런 군대에서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라든가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意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군벌들끼리의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세력을 넓힐 수 있지만, 그렇게 확대된 세력을 지탱하고 유지하기위해 농민들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으니 여기에 군벌들의 딜레마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벌들 간의 암투와 전쟁은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그들만의 이권 다툼 수준을 넘어서게 됐다. 위안스카이 사후 정국을 주도했던 건 돤치루이를 수반으로 하는 안후이파, 곧 완계晥系(환계)군벌이었다. 이들은 쑨원이 1918년 당시 루룽팅 등 서남파군벌의 지지 하에 ‘호법’운동을 벌였을 때, 무력으로 진압하려했지만 즈리파의 반대로 좌절된바 있었다. 곧이어 5·4운동이 일어나자 양자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안후이파는 그때까지 일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에 대항해 펑궈장 사후 즈리계直隷系군벌을 이끌던 차오쿤曹錕과 우페이푸는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즈리파의 활동영역인 양쯔강 유역에서 허베이의 탕산唐山 탄광에 이르는 지역은 당시 영국의 지배범위와 일치했다. 여기에 본래 마적두목이었다가 위안스카이에 의해 펑톈奉天의 장군으로 임명된 후 정치적 음모와 군사력으로 동북3성을 손에 넣은 장쭤린張作霖(1873~1928)의 ‘펑톈파’가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안후이파의 동맹관계에 있었지만, 일본과도 직접 관계를 맺으며 1918년 7월에는 지린성吉林省 지역의 풍부한 산림을 담보로 3,000만 원의 차관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천하는 ‘안후이파’와 ‘즈리파’, ‘펑톈파’의 세 군벌이 마치 삼국시대처럼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뤘다. 정국을 주도하던 안후이파는 탐욕과 폭정으로 점차 민심을 잃었다. 이에 즈리파와 펑톈파는 1920년 봄에 안후이파를 공격하기로 공모했다. 당시 안후이파 군벌가운데 가장 활동적이던 쉬수정徐樹錚은 북서부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몽골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 길목에 있는 펑톈파는 그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즈리파와 펑톈파의 위협에 당시 대총통 쉬스창은 7월에 쉬수정을 해임하는데 동의했으나, 안후이파의 영수인 돤치루이는 이에 반발해 전쟁을 벌였다. 7월14~18일 이어진 전투 끝에 안후이파가 전쟁에 패한 뒤 후퇴해서 주력이던 서북변방군은 해체됐는데, 사실상 이런 일련의 과정은 모두 미국과 영국의 극동지역복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제 실질권력은 펑톈파의 영수 장쭤린과 즈리파를 이끄는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차오쿤은 즈리파의 명목상 영수였을 뿐 군대동원은 우페이푸에 의존했다. 여기에 안후이파에 속했지만 나중에 즈리파로 전향한 펑위샹馮玉祥(1882~1948)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 안후이파를 지원했던 일본은 발빠르게 입장을 바꿔 자신들이 안후이파와 아무관계가 없다고 공표하고 당시 일본이 경제권을 장악한 중국동북부를 대표하는 펑톈파와 민간파벌인 량스이梁士詒가 이끄는 친일교통계관료들을 통해 신정부와의 접촉을 유지했다.
시간이 가면서 영, 미 지원을 받는 즈리파는 안후이파를 몰아낸 뒤 베이징정부를 장악해 각 방면에 걸쳐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본래 즈리파는 베이징과 중부 및 양쯔강 하류지역을, 펑톈파는 북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야심은 자기지역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권력과 실제적 이익의 원천인 중앙정부를 장악하는데 있었다. 여기에 민간파벌인 교통계가 얽혀들어 베이징의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혼미해갔다. 1921년 12월 교통계의 영수인 량스이가 총리에 임명되자 내내 밀리던 일본의 입지가 일신됐다. 하지만 1922년 워싱턴회의 결과 일본은 중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국은 많은 이권을 획득했다. 따라서 영국의 지원을 받던 즈리파 역시 많은 이익을 얻게 됐다. 이에 불만인 펑톈파의 장쭤린은 1922년 4월 일본의 지원 하에 구 안후이파 군벌 및 쑨원 등과 연합해 즈리파 군벌을 공격했다. 이를 제1차 펑즈전쟁奉直戰爭이라 한다. 이때 장쭤린은 펑위샹의 군대에 패해 만리장성 이북으로 밀려났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친일계 량스이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전쟁에 이긴 우페이푸가 남북을 대표하는 두 총통인 쑨원과 쉬스창의 동시사임을 요구했고, 1913년 당시의 구 국회의원과 전 대총통 리위안훙을 베이징으로 다시 부르니, 대총통인 쉬스창은 리위안훙에게 직위를 넘겨줬다.
이 전쟁직후 광둥에선 천즁밍이 쑨원을 몰아내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본래 쑨원을 광둥으로 불러왔던 천즁밍이 내건 명분은 ‘각 성들의 자치를 허용하고 연합하자(聯省自治)’는 것으로, 그의 의도는 광둥성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광둥성을 기반으로 북벌을 행해 중국 통일을 이룬다는 쑨원의 생각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고, 결국 양자 간 생각의 차이로 둘은 갈라지게 됐다. 그래서 천즁밍이 쑨원의 비상대총통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쑨원은 그를 육군부총장陸軍部總長 겸 내무부총장內務部總長에 임명하고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천즁밍의 생각은 확고했다. 1922년 3월 쑨원은 북벌을 결정하고, 천즁밍에게 군대동원을 명했으나 천즁밍은 거부했다. 이에 쑨원은 4월21일 그를 광동성장과 광동군 총사령관, 내무부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육군부총장의 직만을 남겨두는 조치를 단행했다. 바로 제1차 펑즈전쟁이 진행되던 때였다. 할 수 없이 천즁밍은 광저우를 떠나 후이저우惠州로 갔고, 쑨원은 광저우로 왔다. 6월13일 천즁밍은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16일 아침 쑨원의 총통부總統府와 관저인 웨슈러우粤秀樓를 포격했다. 이에 앞서 소식을 들은 쑨원은 융펑함永豊艦에 올라 해군을 인솔해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급히 전보를 쳐서 북벌군을 돌려 반란을 토벌케 했다. 허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됐고 쑨원은 곧장 상하이로 도피했다. 쑨원으로서는 1918년 서남파군벌에게 쫓겨난 뒤 또다시 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이로써 쑨원의 북벌계획은 어그러져 잠시 숨을 고른다. 상하이로 도피한 쑨원은 소련 측의 제안에 대해 이전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광저우에 있을 때는 아쉬울 게 없었지만, 상하이에서 고립무원상태에 놓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군을 찾게 된 것이다. 1922년 8월 마링과 다시 만난 쑨원은 소련 측에서 지원가능한 군사적, 정치적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1922년 가을 상하이에서 국민당은 소련과의 동맹 및 공산주의자들의 국민당입당 허용문제 등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1923년 1월에는 국민당의 완전한 개조를 선언하고 ‘개진改進’ 작업을 시작했다. 이건 그때까지 쑨원 한사람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정치기구를 확장해 당의 집단노선을 천명해, 공산당원들의 개인자격 입당을 허용하는 등 당원참여를 촉진한 것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이로써 국민당은 기왕의 군사적, 정치적 조직에서 대중적 정당으로의 전환을 꾀하게 됐다. 이런 국민당개조는 중국공산당창당 같이 러시아혁명의 성공이란 “거대한 현실에 떠밀려 생긴 사건”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의미로 양당은 쌍생아 같은 관계에 있었다.”
소련 측도 이에 화답해 특명전권대사 요페A. A. Yoffe(1883~1927)를 파견해 상하이에서 쑨원과 만나게 했다. 그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1월26일 쑨원, 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제1항으로, 중국에선 공산조직과 소비에트제도를 적용하는 게 불가능하며 중국의 긴급한 과제는 국민적 통일과 국가적 독립이기에 소련국민은 중국을 원조해야한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 이후 사태는 급박하게 흘러갔다. 그만큼 쑨원은 다급했던 걸까? 쑨원은 1923년 광둥을 방문한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여러 나라가 대對중국정책을 변경한다면, 우린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 중국의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 게다.······중국국민은 통일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기 바란다. 다만 외국에 의해 키워지는 정부가 우리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베이징정부를 타도하기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잡겠다. 우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 그 외 모든 나라의 원조에 대해 희망을 잃었다. 남방에 있는 우리들(광둥정부)을 원조하려는 나라는 오직 소비에트 정부뿐이다.” - [사에키 유이치(佐伯有一), 노무라 고이치(野村浩一) 외, <중국 현대사>, 310쪽에서 재인용]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게 되었다.
**2-3 쑨원과 제1차 국공합작
베이징에 수립된 신정부는 즈리파군벌들의 내분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뤄양洛陽에 머물던 우페이푸는 점차 영향력을 잃어갔고, 그의 군사지원을 받던 차오쿤은 베이징수비를 맡은 펑위샹의 지지로 베이징을 장악했다. 차오쿤은 우페이푸의 지원으로 대총통에 오른 리위안훙 대신 자기가 대총통이 되고자하는 야심이 있었다. 마침 1923년 국가의 재원이 고갈돼 거의 모든 공무원들의 봉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배후가 의심스런 민중시위가 일어나 대총통의 사임을 요구했다. 우페이푸도 어찌할 수 없어 결국 6월에 리위안훙이 총통의 자리에서 또다시 물러나자 차오쿤은 국회의원들에게 1인당 5,000위안씩 뇌물을 주고 선거를 통해 대총통이 됐다.
한편 상하이로 물러났던 쑨원 등은 1923년 1월14일 천즁밍을 타도하고자 동군과 서군 두 진영으로 군대를 재편하고 16일에 광저우로 향했다. 이에 천즁밍은 하야를 발표하고 나서 홍콩으로 옮겨갔다(제3차 광둥정부수립). 쑨원의 목적은 단순히 지방군벌들과의 흥정을 통해 한 지역에서 할거하는 게 아니었다. 요페와의 회담 후 쑨원은 요페의 일본방문에 맞춰 랴오중카이廖仲愷를 일본에 보내 그와 동행케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랴오중카이는 거기서 토의된 국공합작의 문제와 중국혁명, 러시아혁명의 전망, 군관학교설립 등에 대해 보고했다. 8월에는 심복인 쟝졔스를 소련에 보내 군사와 정치 등을 시찰토록 했다. 쟝졔스는 쑨원의 뜻에 따라 트로츠키와 치체린(외무인민위원)을 회견하고, 적군赤軍의 조직 및 공산당의 규율을 배우고 귀국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경계심만큼은 거두지 않았다.
“요페는 중국에서 돌아가자 곧 실각했다. 레닌의 병세가 위급하던 그때 마침, 소련공산당의 내부에선 트로츠키를 지도자로 하는 ‘국제파’와 스탈린이 지도하는 ‘일국사회주의파’가 서로 격심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처럼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미뤄 본다면, 레닌이 죽은 뒤의 중, 소 합작관계는 반드시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련방문 3개월간에 받은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소련공산정권이 한번 강고한 존재가 되는 날에는 짜르 시대의 정치적 야심이 부활할 가능성이 크며, 그런 야심이 장래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혁명에 미칠 화가 측량하기 어렵겠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당시 우리 당에 행사한 붕괴, 이간, 도발 등의 수단도 이번 여행에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 방소사절단의 편성을 봐도 알만하다. 멤버 4명 중 3명은 국민당원이며 장타이레이張太雷만이 공산분자였다. 그러나 일행이 소련에 도착하자 장타이레이는 곧 붕괴 공작에 착수해 먼저 선딩이沈定一를 자기편에 끌어들이고 우리들 두 사람과 대립했다. 그 때문에 사절단의 각종계획과 시찰행동, 대소교섭 등 모든 일마다 양자의 의견이 충돌했다. - [이희춘 역, <장개석> 한국출판공사 1984. 33~34쪽]
10월에는 코민테른 대표 보로딘이 국민당 고문에 취임하고 국민당임시중앙집행위원회가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준비했다. 그럴수록 쑨원과 서구열강들의 사이도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해 7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쑨원은 자신이 서구열강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소련 외의 그 어떤 국가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중국공산당 역시 국공합작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진전을 이뤄냈다. 1922년 ‘2·7참안’ 이후 거듭된 실패로 잠시 좌절에 빠진 공산당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중국혁명을 지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국민당과의 합작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1922년 7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에서는 코민테른에의 정식가입을 결정하는 한편, 국민당과의 ‘통일전선’ 확립을 위한 이론적 준비를 갖췄다. 이어 공산당지도자 리다자오와 천두슈가 개인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했고, 천두슈는 쑨원의 지명으로 국민당 개진위원회 改進委員會의 위원으로 선발됐다. 결국 1923년 1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국공 합작을 결정했고, 그해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회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한 투쟁과 그들의 정치적 임무를 우선시하는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국민당의 지지와 민족해방투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동시에, 중국혁명에서 국민당의 중심적 역할을 재확인하고 공산당도 이에 참여할 것을 결의했다. 그 과정에서 찬반양론으로 격렬한 논전이 벌어졌는데, 일찍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이와 비슷한 공작에 참여한 적이 있던 마링의 조언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당시 마링은 사회주의자들을 회교도 민족주의자 조직에 가입시켜 운동의 확대를 꾀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당 내에서 국공합작을 추진한 주요 동력은 마링에게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코민테른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확신이 있어 일을 추진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논란 끝에 마링의 제안이 과반수를 겨우 넘겨 채택됐다. 그리하여 1924년 1월20일부터 30일까지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렸고, 제1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이 대회에서 당의 주의와 정강을 밝히는 <대회선언>과 당의 구성을 규정한 총장總章이 공표됐고, <대회선언>에서는 ‘삼민주의’를 국민당의 이념으로 채택했다. 잘 알려진 대로 삼민주의는 쑨원의 대표적인 정치사상으로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을 가리킨다.
쑨원이 처음 삼민주의를 구상한 건 1895년 광저우에서 봉기가 실패한 뒤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때로 알려졌으나, 쑨원 개인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역정과 더불어 삼민주의의 내용 또한 많은 굴곡을 겪으며 다듬어지고 보완됐다. 초기의 삼민주의는 유럽의 근대국가들을 모델로 중국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민주제도, 경제적 평등 요구를 실현하려 한 것으로, 아직은 소박하고 추상적인 형태였다. 이후 신해혁명과 5·4운동 등을 거치면서 삼민주의도 점차 내용을 보완하고 발전해갔는데, 1924년 1월에 즈음해서는 중요한 전환을 이뤄내며 좀 더 원숙한 단계로 들어섰다. 쑨원은 그 내용을 그해 1월부터 8월 사이에 행한 강연에서 펼쳐냈고, 그 다음해인 1925년에 <삼민주의>라는 책자로 출간했다. 이 시기의 ‘삼민주의’는 초기 ‘삼민주의’와 구분하기위해 ‘신新삼민주의’로 부르기도 하는데, 요컨대 ‘민족주의’는 반제투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민권주의’는 서구의 의회주의에서 탈피해 국민의 권력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민생주의’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정립된 세 원칙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와 군벌의 타도,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으로 해석됐고, 이로써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받아들여 노동자, 농민을 돕는다(聯蘇, 容共, 扶助農工)’는 3대 정책이 수립됐다. 이로써 ‘국민혁명’은 ‘반제, 반봉건(군벌)’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자본가계급과 소자본가 계급 및 노동자, 농민을 포괄하는 전국적 차원의 운동으로 고양됐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혁명의 시대란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그의 사후 벌어진 군벌들의 혼란 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혁명의 담당자가 나타나 중국의 국가적 통일을 일단 달성하기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대개 시기적으로는 “1919년 5·4운동에서 시작해 1928년 국민당의 북벌로 완성된 때”를 가리킨다.
대회에서는 새로운 집행부인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됐다. 모두 24명인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리다자오와 탄핑산譚平山, 위수더于樹德 등 3인과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17명 중 린쭈한 林祖涵, 마오쩌둥, 취츄바이瞿秋白, 장궈타오 등 7명이 공산당이었다. 새로 조직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서 중 대중의 조직과 가장 관련 있던 건 조직부와 공인부工人部, 농민부였다. 가장 핵심적인 부서는 당 조직과 당원의 질을 좌우할 수 있는 조직부였는데, 공산당원인 탄핑산이 부장에 취임했다. 노동자조직을 관리하는 공인부는 원래 랴오중카이가 부장을 맡았지만, 랴오중카이는 그밖에도 겸직을 많이 하고 있어 실권은 공산당원인 펑쥐포 馮菊坡가 쥐고 있었다. 농민부장은 당초 공산당원인 린쭈한에서 국민당원으로 바뀌었지만 공산당원인 펑파이彭湃가 계속 비서직에 있어 여전히 발언권이 있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선전부 대표부장을 맡았다. 이렇듯 공산당은 비록 그 숫자는 적지만 당의 요직을 점하고 있으면서 당의 운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이에 당무에서 소외된 국민당 측 인사들이 공산당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쑨원이 나서서 이런 움직임 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당내의 파벌과 그로 인한 분규는 가라앉았으나, 이것은 결국 몇 년 뒤 국공합작이 결렬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또 대회기간 중에 국민혁명군의 간부를 육성하기위한 군관학교설립 안이 통과돼 5월에 광저우교외의 작은 섬 황푸에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설립되고, 쑨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쟝졔스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쑨원의 개인사와 국민당의 역사에서 황푸군관학교의 창설은 큰 의미를 갖는다. 신해혁명 이래 쑨원과 국민당은 자신의 군사력을 갖지 못해 주로 서남지역의 군벌들에 의지해야했는데, 이제 자신들만의 군대를 갖게 된 것이다. 학교는 소련 자금으로 설립됐다. 이에 소련제무기가 속속 광저우에 도착했고, 군사고문으로 갈렌 Galen(본명은 Vasilii K. Blücher)이 부임했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것은 4년여에 걸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저우언라이가 교장인 쟝졔스 밑에 정치부 부주임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이다. 황푸군관학교에서는 군사훈련과 함께 정치교육도 중시됐는데, 그래서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기왕의 군벌휘하 장교들과는 전혀 다른 기질과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들은 이후 국민혁명군의 핵심으로 성장해 군벌들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아울러 군 조직은 소련의 적군을 모방한 당 대표제를 도입해 군을 당의 지도하에 뒀는데, 초대대표로는 랴오중카이가 추대됐다. 또 당시 국민당을 지지하는 군대는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학생군과 함께 군벌들 군대에 불만을 품고 국민당정권에 호의적이던 지방군벌 군대인 객군客軍이 주력을 이뤘다.
1924년 9월 베이징에서는 차오쿤이 국회의원을 돈으로 매수해 대총통에 오른 탓에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를 기화로 1차 펑즈전쟁 패배로 동북지방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던 장쭤린의 펑톈파군벌이 잔존한 안후이파군벌, 국민당과 삼각동맹을 맺고 2차 펑즈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벌어지자 쑨원도 사오관韶關으로 출정했다. 이때 광저우에서 천롄보陳廉伯가 이끄는 상단군商團軍이 10월10일 쌍십절을 맞아 소란을 벌였다. ‘상단’이란 자본가계층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결성된 자위조직이었는데, 이들은 쑨원이 광저우시내에서 점포세를 징수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등의 구실을 내세워 상점주들을 선동해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본래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영국은 쑨원이 소련과 제휴하는 것을 경계해 이에 대항할 목적으로 이들 상단을 지원했다. ‘제2차 펑즈전쟁’에 앞서 상단군은 그해 8월부터 무기를 밀수하는 등 자체 무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왔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쑨원은 쟝졔스에게 지시해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 쟝졔스는 상단 측의 밀수선을 발견하고 황푸군관학교로 예인해 9,000정의 무기를 압수했다. 이에 쑨원은 상단에 서한을 보내 천롄보의 음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반역행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상단은 오히려 8월20일 압수한 무기의 무조건반환과 상단의 군사조직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쑨원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상단은 총파업에 들어갔고 쑨원은 무력진압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영국도 중국정부가 무력을 쓰면 자신들도 상단을 지원해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사태는 쑨원이 9월1일에 대외선언을 발표해 제국주의세력의 반혁명지원 행위를 비난하고, 영국 수상에게 직접 항의전문을 보냄으로써 가까스로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제2차 펑즈전쟁으로 쑨원이 광저우를 떠나자 쌍십절을 기해 상단군이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국민당정권은 상단의 배후에 영국이 있다는 사실을 비난하는 동시에 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즉각 상단군의 저항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13일에는 우톄청吳鐵成이 3,000명의 경위군을 이끌고 광저우로 왔고, 후난군 3,000명도 광저우로 집결했다. 14일에는 쑨원이 전군의 지휘를 쟝졔스에게 맡긴다는 명령을 내리니, 15일 오전 4시 쟝졔스가 지휘하는 정부군이 반격을 개시해 상단군과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정부군의 포위작전으로 상단군의 전열이 무너지고 그들 대부분이 투항함으로써 사태는 손쉽게 진압됐다. 이것은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진 이래 첫 번째로 수행한 군사작전으로, 처음 민중들 앞에 나선 군관학교 학생군들은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울러 이 사건을 통해 쑨원과 국민당정부의 반제국주의 노선이 분명하게 표출됐다.
북방의 전선에서 초기엔 우페이푸 군대가 승리하는 듯 했으나, 돌연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동맹자인 펑위샹이 배후에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하고 차오쿤을 축출하자 우페이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양쯔강 지역으로 후퇴했다. 전쟁에 이긴 장쭤린과 펑위샹은 ‘안즈전쟁’의 패배이후 권좌에서 물러났던 안후이파 수령 돤치루이와 연합세력을 형성했다. 이후 돤치루이와 펑위샹이 쑨원에게 베이징방문을 요청하니, 1924년 11월10일 쑨원은 이른바 ‘북상北上’을 선언하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쑨원은 선언문에서 “국민을 결합시키고 무력을 국민의 무력으로 해야 국민혁명은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국에 대한 토론을 위해 ‘국민회의’를 소집하되, 그 구체적 준비단계로 우선 국민회의의 예비회의를 소집할 것이며, 여기에는 근대적 실업단체, 상회, 교육회, 대학, 각 성 연합회, 노동조합, 농민조합 그리고 차오쿤과 우페이푸에 반대하는 각 군과 정당대표가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또 베이징으로 가기에 앞서 쑨원은 11월말에서 12월초에 걸쳐 일본을 방문해 관세권의 회수와 치외법권의 철폐 등, 일본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폐지할 것을 요청했으며, 고베(神戶)에서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여기서 그는 국제관계를 인의도덕에 기초한 왕도와, 강권에 기초한 패도로 분류하고 패도로 나가고 있는 일본을 은연중에 비판하며 왕도로 나가는 소련과의 제휴를 천명했다. 이 모든 것은 쑨원이 지도하는 국민당의 반제국주의적, 반군벌적 계급의 통일전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는 이미 돤치루이가 11월22일에 임시집정臨時執政에 취임했다. 12월31일 쑨원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역 앞에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그를 환영했지만 쑨원의 몸은 이미 병마에 극심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1월24일과 25일 이틀간 쑨원은 전혀 식사도 못한 채 체온이 상승하고 맥박도 빨라졌다. 26일 쑨원은 미국 록펠러재단 지원으로 건립돼 당시 최고의 의료진을 확보하고 있던 베이징의 셰허의원協和醫院에서 개복수술을 받았으나, 병세는 이미 말기간암으로 진행돼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한편 쑨원이 제안한 ‘국민회의’를 두고 베이징의 정국은 둘로 나뉘었는데, 펑위샹은 이를 지지했지만, 임시집정 돤치루이와 장쭤린은 대표들의 참여폭을 좀 더 제한하는 ‘선후회의 善後會議’를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에 대항해 국민회의를 좀 더 민주적으로 추진하기위해 집회와 시위를 열었으나, 선후회의는 돤치루이와 장쭤린의 뜻대로 1925년 2월13일에 개막해 4월21일까지 진행됐다. 회의가 한참 진행되던 1925년 3월12일 쑨원이 간암으로 5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평생을 중국혁명에 바친 위대한 민족주의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운구는 베이징 시산西山의 비윈쓰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됐다가 4년 뒤인 1929년 난징의 쯔진산 紫金山에 안장됐다. 눈감기 전에 쑨원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革命嘗未完)”는 것이었다. 쑨원 사후 사태는 끈 떨어진 연처럼 갈피를 못 잡고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고, 펑위샹은 실망한 채 자신의 ‘국민군’을 이끌고 서북지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공허해진 중앙권력을 장악하려고 안후이파와 즈리파, 펑톈파 간에 복잡한 경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5년 봄에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친親즈리파인 쟝쑤 성과 친親안후이파인 저쟝성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결국 저쟝성이 패해 쑨취안팡孫傳芳이 양쯔강 유역의 5개성을 장악하는 새로운 대大군벌로 등장했다. 군벌들의 싸움은 무한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정치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상징적이나마 공화정의 표상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쑨원마저 세상을 뜨니 중국 내에서는 한동안 힘의 공백과 함께 심리적 공황상태가 이어졌다.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군벌들은 세력다툼을 그칠 줄 몰랐고, 그로 인해 일반민중들의 부담만 증가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민중들의 불만은 폭발직전이었고, 이는 반제국주의, 반反군벌투쟁으로 표출됐다. 1921년 당시 군벌들을 지탱하는 무장병력 숫자는 무려 150만에 달했다한다. 각 성에서는 다양한 성분의 군벌들이 실질적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군림하며 일종의 지역제국을 건설했는데, 1911년 이후 1949년 신新중국 수립까지 일관되게 산시성을 장악했던 옌시산閻錫山이나 ‘위대한 윈난’건설을 내걸었던 탕지야오唐繼堯 등은 일종의 고립주의정책을 펴며 자신의 야심을 자기들이 장악한 지역에만 한정했다. 이런 생각은 일찍이 쑨원을 옹립해 ‘광둥정부’를 수립했던 천즁밍이 내걸었던 ‘각각의 성들의 자치를 허용하고 연합하자(聯省自治)’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1920년대 초반에서 1921년에 이르는 시기에 수많은 잡지들을 통해 전국에 확산됐다. 좌익계 지식인들의 경우 자신들이 열망하는 급진적 이데올로기가 아직은 전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정세 판단 하에 이러한 ‘연방주의’가 실현되면 점차 지역 내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이는 일종의 전략적 후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반면에 량치차오 등의 온건주의자들은 서구에서 연방주의적 모델을 모색했다. 이들은 연방제를 기초로 한 미국의 경우를 심도 있게 연구했고, 역시 연방제를 채택한 스위스, 브라질 등의 경우를 분석했다. 연방주의가 특히 정국 주도권을 잡은 안후이파, 즈리파, 펑톈파 3대 군벌들 이외 지역의 군벌들에게 환영받은 게 당연하기도 했던 것이다. 천즁밍이 지지했던 “광둥인이 광둥성을 다스려야한다(粤人治粤)”는 구호는 이내 “후난인이 후난을 다스려야한다”, “쓰촨인이 쓰촨을 다스려야한다”, “후베이인이 후베이를 다스려야한다” 등으로 확산됐다. 이는 당시 전 중국의 권력자가 되기에 앞서 각 성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쑨원의 생각과도 일정부분 부합하는 바 있어 국민당은 각 성의 자치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이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연방주의를 택하려했던 각 성의 군벌들에 의해 무화됐다. 연방주의를 제창한 민간인들이 기존군벌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했기에, 본래 군벌세력의 만행을 견제, 제지하려고 시도됐던 연방주의운동이 오히려 각 지역에서 할거하는 군벌들의 세력을 강화해주는 역효과를 끌어내 것이다. 군벌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았는데, 이를 통해 각자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각종세금이나 화폐의 조작, 그리고 여러 종목의 불법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챙겼다. 반면 자연재해 등으로 기근 등에 시달리는 민중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고 사실상 해결 의지도 없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자신들의 철저한 권력 강화를 통한 사익의 추구였을 뿐이다. 5·4운동 등을 통해 민중들의 의식이 성숙해지자 이들 군벌들 가운데 노회한 이들은 좀 더 진보된 형태의 민중선동으로 여론을 형성해 자신들을 비호했다. 이를테면, 산시성의 옌시산은 산시성을 모범적인 성으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청년 단체를 조직하고 민중들이 유교적 도덕을 실행하도록 했다. 후난성의 자오헝티趙恒惕는 한동안 학생과 노동자들과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는 등 이른바 ‘민중’을 지지하는 입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독특하게도 기독교신자였던 펑위샹의 경우에는 기독교적 진보주의와 유교적 도덕을 가미한 일종의 민족주의를 역설하기도 했다. 군벌들의 할거로 인한 정국의 혼란과 민중의 수탈 등으로 전 중국이 혼란에 빠져있는 가운데 민중들은 점차 그 배후에 제국주의 열강의 그림자가 어른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찍이 쑨원은 제2차 펑즈전쟁 직후 제국주의의 원조를 받는 군벌의 무력통일에 명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 같은 생각은 점차 일반민중에도 확산돼 ‘반제, 반봉건’이라는 ‘국민혁명’의 테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잠복해있던 국민당, 공산당의 대립이 드러나면서 사태는 또다시 일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