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강의 07 일본 만주사변, 대장정 노먼 베쑨
**3-4 일본 대륙침략의 서막을 알리는 ‘만저우사변’
이즈음 일본 내 사정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27년 금융공황사태를 이용해 집권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중국 내 일본인거류민 보호와 자국의 이익관철을 위해 중국문제에 적극 개입했다(‘다나카 외교’). 1927~1928년 사이에는 3차에 걸친 산둥 출병을 단행했으니, 1928년의 ‘지난사건濟南事件’은 일본군이 중국에 직접 무력진출 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줬다. 그해 6월 일어난 장쭤린 폭사사건은 만저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의 일부참모가 주동이 되어 벌인 것이었다. 일찍이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뤼순과 다롄의 러시아조차지와 남만저우 철도의 권익을 얻어낸 뒤 철도의 수비를 위해 1km당 15명 정도의 일본군을 배치할 수 있다는 청 왕조의 승인을 얻어냈다. 1906년에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설치해 군사와 행정, 사법 권한을 통괄하다가 1919년 민정으로 이관하면서 관동청을 설치하고 그 휘하에 군사담당기관으로 관동군사령부를 두게 됐다. 관동군은 원래 관동주와 남만저우 철도수비가 주목적이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관동군 내에서는 만저우와 몽골에 대해 무력침공을 비롯한 강경책이 팽배해있었다. 그러나 장쭤린 폭사사건을 제대로 해명 못해 다나카 내각은 당시 히로히토 천왕의 불신을 받아 총사직했고, 뒤이어 등장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에선 협조외교노선이 부활했다. 그러나 하마구치 내각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1929년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 내 경제는 큰 어려움에 처했고, 1930년 런던군축회의에선 군부의 해군강경파가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던 영국과 미국대비 7할에 해당하는 순양함을 보유하는 것보다 낮은 수준의 협정이 조인되자 해군과 우익세력 및 야당이 일제히 반발했다. 이에 분노한 ‘애국청년’이 11월에 하마구치 수상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고, 하마구치 수상은 다음해 8월에 죽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장기불황은 일본사회를 큰 어려움에 빠뜨려 인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품었고, 군부 내 강경파는 조급증에 빠져 급진적 수단을 동원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다.
이런 와중에 1931년 6월 변장하고 중국동북의 싱안링興安嶺 지방에서 스파이 여행 중이던 참모본부의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郞) 대위가 중국군에게 붙잡혀서 동행하던 이스기 노부타로(井杉延太郞) 예비역상사 등과 함께 사살됐다. 이 사건진상은 8월이 돼서야 발표 됐는데,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반중감정이 일었다. 그리고 7월에는 지린성 창춘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의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족농민과 중국인농민 사이에 수로水路문제로 충돌해 유혈사태가 일어났다(완바오산 사건). 이건 사실상 만저우 지역의 중국인 민족운동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세력 간의 반일공동전선투쟁을 분열시키려는 일본 측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급기야 1931년 여름부터 일본 내에서는 만저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졌고, 급기야 8월20일 남만저우철도 주식회사의 주가가 갑자기 폭락했다. 이에 도쿄의 육군성과 외무성의 관리들은 관동군의 과격한 행동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31년 9월초 일본정부는 고위 장군을 뤼순에 파견해 관동군지휘관에게 군사행동 시 ‘신중과 인내’를 발휘할 것을 지시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사전에 도쿄에 있는 젊은 장교들에게 탐지돼 비밀전문을 통해 관동군장교들에 전달됐다. 이들은 그런 명령이 전달되기 전에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1931년 9월 쟝졔스의 국민당군은 ‘중원대전’을 승리하고는 곧바로 공산당을 ‘포위공격’하는데 온힘을 기울였고, 장쉐량의 동북군 역시 주력이 만리장성 이남에 집결해있었다. 이틈을 타 일본군은 행동을 개시했다. 1931년 9월18일 펑톈시 북쪽 류탸오거우柳條溝(柳條湖) 부근의 남만저우철도 일부가 폭파됐다[9·18사건]. 이 사건의 주모자는 관동군 작전주임참모인 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와 관동군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였고, 관동군사령관인 혼조 시게루(本庄繁) 등이 이들의 계획에 찬동했다. 일본군이 여길 거사지로 선택한 건 인근에 흔히 북대영北大營이라 불리는 장쉐량 군의 병영이 있기 때문이었다. 피해는 경미해 약 20분 뒤에 펑톈행 열차가 폭파지점을 그대로 지나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걸 중국군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즉시 공격을 개시했다. 북대영에는 포탄이 날아들었고, 19일 새벽에는 펑톈시 전역이 일본군에 함락됐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일단 사태가 확대되지 않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자마자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사령관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이 천왕의 명령 없이 행동에 돌입해 21일에는 1개 여단이 독단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저우로 향했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돼 전면전이라는 ‘루비콘 강을 건너 가버렸다.’
당시 장쉐량은 자신의 군대 절반에 해당하는 10만 병력을 이끌고 베이핑에 머물고 있었다. 장쉐량 역시 그전부터 일본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했다. 일본군과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확신이 없는 가운데, 공산당군에 대한 ‘포위공격’에 열중하던 쟝졔스 역시 동북지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9월6일 장쉐량은 부하 사령관들에게 전보를 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인내심을 발휘하고 무력에 호소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건이 터진 후에도 장쉐량은 확전을 우려해 동북군에게 무저항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군대와 행정부를 랴오닝성遼寧省 서남부 진저우錦州로 옮기게 해 관동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했으나, 일본군은 진저우마저 전략 폭격했다. 이후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격을 계속해 그해 말에는 만저우 전역이 일본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실로 ‘만저우사변’은 러일전쟁 이래 제국주의의 반열에 접어든 일본 내 여러 세력가운데 만저우와 몽골지역 내의 특수권익을 주장해왔던 관동군이 만저우를 향후 본격화될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위해 벌인 독자적인 군사행동이었다. 이제 일본 내에서도 점차 커지는 군국주의세력의 침략야욕을 견제할 이성적인 목소리가 점차 약해져가고 있었고, 나라전체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는 미구에 닥칠 ‘태평양전쟁’의 전조였다.
‘9·18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내에서는 각지에서 파업과 청원데모, 반일집회, 일본상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국제적으로도 일본에 의한 만저우의 독점적, 배타적 지배를 우려하는 열강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쟝졔스는 국민당 내 반反쟝졔스 세력이 온존하고 잔여군벌들이 지역에서 할거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9·18사태가 확대되는 걸 원치 않았다. 9·18사건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인 5월에 쟝졔스의 통치방식에 반대하는 왕자오밍과 천유런 陳友仁, 쑨커 등 국민당요인들은 광시파 군벌들과 손잡고 또다시 광둥정부의 수립을 선언 했다. 그러던 중 9·18사건이 일어나자 양측은 타협과 조정을 시도했으나 합작은 쉽사리 진전되지 않았다. 이런 골치 아픈 상황에서 쟝졔스는 외교적으로 사태가 수습되길 원했다. 국제연맹은 국민정부의 제소로 10월13일 이내에 일본군이 만철부속지로 철병할 것을 결의 하고, 11월에는 영국의 리튼 경이 지휘하는 조사단Lytton Commission에게 상황파악을 하도록 했다. 그러는 중에도 일본의 군부는 사실상 만저우사변을 좀 더 큰 ‘사업’으로 확대하려는 기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태가 진전될수록 중국 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인들의 일본상품 불매운동뿐 아니라 중국은행가협회가 일본인들과의 모든 거래를 정지 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장 일본상인들은 중국인과의 거래결제나 중국의 수표 및 현지통화의 환어음에 의한 지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급기야 1931년 말에는 상하이의 일본인실업가협회가 자국정부에 거액의 대부금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상하이는 또 다른 분쟁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1932년 1월18일 일본인 승려와 그 일행이 중국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양측이 격하게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 측은 이를 빌미로 급히 군대를 파견해 1월27일 상하이 시장에게 사태해결을 요구했다. 다음날인 28일 오후 2시 상하이 시장은 일본 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답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같은 날 한밤중에 일본육군은 상하이 내 쟈베이閘北지역을 공격했다(1·28사건 또는 상하이사변). 순식간에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분노한 중국인들의 격한 저항이 이어졌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쟝졔스와 왕자오밍 일파의 합작이 이뤄져 쟝졔스가 잠시 하야하고 왕자오밍이 난징정부 행정원장에 취임한 날이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차이팅졔蔡廷鍇가 지휘하는 국민당 제19로군이 주둔해있었는데, 일본군에 비해 무기나 보급에서 열세였지만 일본군의 무차별 민간인공격에 분노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2월초에 1개 사단을 증파하고 하순에 다시 2개 사단을 보내 참담한 고전 끝에 겨우 중국군을 물리쳤다. 19로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쟝졔스는 이들에게 아무 지원도 하지 않았다. 3월3일 일본군은 정전停戰성명을 발표하고 중국과 협상을 벌였다. 쟝졔스는 일본 측의 요구대로 5월5일 ‘상하이정전협정’을 맺었다. 협정내용은 중국정부가 항일운동을 단속하고, 용맹하게 싸웠던 19로군을 사령관의 충성심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상하이 밖으로 이동시킨 뒤 푸졘으로 보내는 등 굴욕적인 것이었다. 협정체결 다음날 일본군은 철병을 개시하고 사변은 ‘해결’됐다. 이런 쟝졔스의 태도는 이미 6월에 루산廬山에서 열린 ‘다섯 개 성의 공비토벌회의(五省剿匪會議)’에서 “밖의 적을 물리치기 전에 안을 안정시켜야한다”는 예의 ‘안내양외安內攘外’로 분명해졌다. 이는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토벌이 선결문제고, 그로 인해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전면저항은 할 수 없다는 무저항주의를 천명한 것이었다. 이는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화소비에트정권이 정부주석 마오와 군사위원회주석 주더 명의로 ‘대일전쟁 선언’을 하고 항일을 위한 정책을 공표한 것과 비교된다.
애당초 만저우지역을 영유領有하려고 계획했던 일본관동군은 만저우지역의 지배를 강화하고 외국으로부터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저우를 ‘독립국’으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1931년 10월 관동군은 ‘만몽공화국滿蒙共和國 통치대강안統治大綱案’을 세워 통치방침, 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과 군인에게 지역적인 독립정권을 세우게 했다. 이에 앞서 7월에는 만저우군 사령부의 대표가 톈진에서 살던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은밀히 만났다. 10월까지 이어진 회담을 통해 만저우 인민들이 독립국을 건설하게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당시 25세의 푸이는 결단을 내렸다. 11월에 톈진시내 일단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건 푸이의 탈출을 돕고자 일본 측이 짐짓 꾸며낸 것이었다. 혼란을 틈타 푸이는 몰래 자동차로 톈진을 빠져나와 화물차로 갈아타고 탕구塘沽까지 가서 배편으로 뤼순旅順에 닿았다. 이후 일련의 준비공작을 거쳐 1932년 3월1일, 이번에는 재빨리 국민당정부를 배신하고 새로운 ‘직장’으로 갈아탄 왕자오밍이 주도한 동북행정위원회가 만저우국의 성립을 선포했으며, 3월9일에는 푸이가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일본 내에서도 사태는 급하게 돌아갔다. 만저우 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국내에서는 군부의 열혈청년장교들과 우익들에 의한 급진적 국가 개조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군부혁신파는 이미 1931년 3월과 10월에 미수에 그친 쿠데타계획을 세운바 있었다. ‘상하이사변’이 완료된 직후인 1932년 5월15일 이른바 ‘혈맹단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2월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이누카이(犬養) 내각은 만저우 사변을 묵인해 당시육군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허나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는 호헌파의 중진으로 군대축소를 지지했는데, 그래서 해군청년장교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등 11명은 극우단체인 혈맹단을 창단해 정당, 재벌타도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5월15일 오전11시 막 총리관저로 나서던 수상 이누카이 쓰요시와 그의 고관들을 총으로 쏴서 암살했다(‘5·15 사건’). 사건이후 조선총독 출신인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총리에 추대돼 군사내각이 들어섰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정치는 사실상 끝나고(군국주의시대의 개시), 1922년 워싱턴체제 하에 이뤄졌던 협조외교 역시 종언을 고했다. 군부세력이 정계에 진출했고,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상징적인 의미로만 존재했던 일본천왕이 절대 권력의 중심에 서고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등 군국주의사상이 강화돼 독일 같은 국가사회주의운동의 막이 올랐다. 그해 9월15일 일본은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를 체결하고 만저우국을 승인했다.
‘상하이사변’의 해결로 한숨 돌린 쟝졔스는 1932년 5월부터 다시 공산당에 대한 제4차 포위공격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40만 대군을 동원해 천청陳誠이 지휘하는 쟝졔스 적계嫡系 부대 12개 사단 16만 명이 중로군中路軍으로서 주공격을 맡았고, 차이팅졔蔡廷鍇가 이끄는 제19로군이 좌로군左路軍을 맡고, 위한머우余漢謀가 이끄는 광둥부대가 우로군右路軍을 맡았다. 이즈음 중앙 소비에트공화국 내부에서는 마오에 대한 비판이 시작됐다. 공산당 중앙은 ‘적을 근거지로 깊숙이 끌어들여 격퇴한다.’는 마오의 유격전술을 ‘패배주의’, ‘도주 주의’로 규정하고, “성문 밖에서 적을 저지”하는 정규전을 채택했다. 당시 홍군은 20만의 병사와 16만 정의 총을 지닌 당당한 군대로 성장했고, 소비에트공화국까지 수립한 터였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미 1932년 4월15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 명의로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바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 중앙의 입장은 향후 벌어지는 전투는 정부와 정부, 국가와 국가사이의 당당한 싸움이 돼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적을 자신의 진지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자기영토를 포기하는 것이고, 모든 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했다. 결국 마오는 병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나 소비에트 정부의 일에 몰두했고 저우가 제1방면군 총 정치위원을 대행해 군권을 장악했다. 초기에 국민당군은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장궈타오의 ‘어위완鄂豫皖근거지’를 제압하는데 성공해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은 쓰촨 북부로 도망가 거기서 ‘촨산川陝근거지’를 건설했다. 허룽이 이끌던 제2 방면군 역시 ‘샹어시湘鄂西근거지’를 포기하고 후베이와 후난, 쓰촨의 경계로 옮겨갔다. 이는 곧 공산당군의 주력가운데 일부가 양쯔강 중류의 비옥하고 인구도 조밀한 지역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후퇴한 것을 뜻한다. 그 뒤 1933년 2월에 ‘제4차 포위공격’을 결정짓는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1방면군 총사령관 주더와 총 정치위원 저우는 이황宜黃의 황피黃陂지구에서 국민당군 제1종대縱隊의 제 52, 59사단을 야습,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 달 뒤에 감행된 국민당군의 공격도 짧은 시간 안에 분쇄돼 쟝졔스의 최고정예부대였던 제11사가 무장 해제된 채 궤멸되고 사장師長은 중상을 입었다. 이 전투가 결정적 분기점이 돼 국민당군의 ‘제4차 포위공격’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만저우 지역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이미 1932년 7월에 러허熱河지역 침공을 개시한 뒤 1933년에는 동북지역과 중원을 연결하는 요충 산하이관을 공격했다. 이렇게 러허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1933년 1월 ‘리튼 보고서’가 국제연맹에 제출됐다. 이를 놓고 각국대표들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결국 표결에 의해 만저우에서의 중국주권은 지켜져야 하고 따라서 만저우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리튼 보고서’가 국제연맹에서 받아들여졌다. 표결이 발표된 직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다시는 복귀하지 않았다. 3월3일 러허의 중심도시 청더承德가 일본군에 함락되고, 4월경에는 일본군이 러허 전 지역을 장악해 산하이관 이북에서 소련 국경까지 만저우의 전 지역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남하해 허베이지역을 공격했다. 국민당군은 베이핑 인근의 만리장성인 시펑커우喜峰口에서 결사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5월에 정전을 요청했다. 중국과 일본대표는 해안도시 탕구塘沽에서 정전협정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허베이 동북지방을 바이강白江 동북쪽 선에서부터 비무장 구역으로 설정하고, 일본군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쟝졔스는 다시 공산당군에 대한 ‘제5차 포위공격’을 준비했다. 이즈음 공산당군과 국민당 군에는 두 명의 독일출신 군사고문이 영입됐다. 마오가 물러나서 소비에트 정부의 일에만 몰두하는 동안 당의 실권을 장악한 친방셴은 오토 브라운Otto Braun(리더李德)과 함께 군권을 장악했다. 오토 브라운은 마오가 고안한 유격전술을 ‘비적들이 하는 짓’으로 깔봤고 진지전을 주장했다. 쟝졔스가 영입한 이는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장군이었다. 그는 쟝졔스를 위한 연구논문을 한편 집필해줬다. 그 주장은 너무 많은 병력은 외려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일종의 기동타격대로서 능력을 발휘할 정예요원으로 구성된 여단을 개발해야하며, 독일의 군사고문들을 영입해 표준화된 군수산업을 건설함으로써 병참개혁을 완수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쟝졔스는 독일인 군사고문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의 조언에 따라 수십만 개의 토치카를 중앙 소비에트구의 주위에 설치하고 군용도로를 건설한 뒤 양자를 결합시켜 철의 포위망을 구축함으로써 소비에트지역을 봉쇄했다. 아울러 이러한 봉쇄를 깨뜨리거나 소비에트 측을 돕는 사람이 생기면 그 마을전체가 연대책임을 지는 보갑제를 실행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군자금과 병력이 투입됐는데, 당장 눈에 띄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소비에트지역은 경제적으로 이미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쟝졔스의 봉쇄로 심각한 보급난을 겪게 된 소비에트구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춘 것은 1933년 11월 푸졘에서 일어난 국민당 제19로군의 반란이었다[푸졘사변福建事變]. 이들은 ‘상하이사변’ 때 일본군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영용한 군대로 군장인 차이팅졔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이들은 쟝졔스의 대일굴욕협정에 반대해 ‘항일구국’을 기치로 내걸고 ‘푸졘인민정부’를 수립했다. 여기에는 광둥군벌 천밍수陳銘樞, 리지선李濟深과 국민당좌파 정치가 천유런 陳友仁 등이 합세했다.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19로군은 중화소비에트 정권과 비밀리에 반反쟝졔스 항일초보협정을 맺었는데, 이는 일찍이 ‘상하이사변’ 직후 소비에트 정부가 항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장 세력과도 협정을 체결하겠다고 공표한데 근거한 것이었다. 쟝졔스는 즉각 진압에 나섰다. 이때 마오는 홍군의 주력부대를 쟝쑤와 저쟝, 안후이, 쟝시 지구에 투입해 토치카 없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싸움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마오는 이를 통해 쟝졔스의 군대를 분산시켜 푸졘정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지전을 고수하는 오토 브라운과 친방셴은 마오의 이러한 작전을 부정했다. 아울러 일찍이 제19로군이 쟝졔스의 제4차 포위공격 때 주력부대로서 홍군을 공격했던 구원舊怨도 있고, 무엇보다 제19로군의 실체가 자본가계급과 소자본가 세력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공산당군으로 하여금 개입을 주저하게 했다. 1934년 1월 푸졘정부는 국민당군의 공격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제 국민당군은 공산당군을 섬멸할 최후의 결전태세를 갖추게 됐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두 가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실수는 1933년에 푸졘성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차이팅졔의 군대와 연합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둘째 실수는 종전의 용병술을 포기하고 그릇된 단순방어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실수로 인해 쟝졔스의 새로운 초공전술과 전략은 월등한 수적, 기술적 우세에 힘입어 홍군에게 1934년 쟝시에서의 상황을 부득이 변경시키도록 만들었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82쪽]
**3-5 대장정, 당신들에게 인류와 중국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탕구협정’이후 만저우지역의 처리를 놓고 도쿄의 내각과 관동군, 푸이와 그의 고문들 사이에 여러 논의가 오갔다. 결국 푸이의 기대대로 푸이가 황제의 신분을 회복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1934년 3월1일 만저우국의 새로운 수도라는 뜻에서 ‘신징新京’으로 개명한 창춘長春의 동쪽외곽에 위치한 천단天壇에서 푸이는 황제자리에 올랐다(‘만저우국 수립’). 새로운 연호로 ‘강덕康德’이 선포돼 형식상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이 모두 이뤄졌다. 그러나 명목상 황제였을 뿐 푸이는 아무런 실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고 모든 건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장관대리회의에 의해 결정됐다.
1934년 4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廣昌이 함락됐다. 공산당군이 마오의 유격전술을 포기하고 오토 브라운의 진지전으로 전환한 대가는 참혹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국민당군의 공세 앞에 공산당군이 사투를 벌였으나 루이진의 함락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미 초여름부터 공산당중앙에서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철수에 앞서 선발대가 몇 차례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1934년 7월 팡즈민方志敏이 이끄는 ‘북상항일선견대北上抗日先遣隊’가 푸졘 북부 봉쇄를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부대가 북상하던 중 국민당군에 포위돼 궤멸됐다. 8월에는 징강산 지구의 샤오커蕭克, 왕전王震, 런비스任弼時의 부대가 탈출에 성공, 허룽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제2방면군을 결성했다. 한편 쉬하이둥徐海東과 우환셴吳煥先이 이끄는 제25군이 후난과 안후이 경계에 있는 근거지를 떠나 산시陝西로 이동해 새로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국민당군은 포위망을 더욱 조여 왔다. 공산당군의 조사결과 포위망가운데 광시와 광둥 지역 군대들이 맡고 있는 쟝시성 간저우贛州와 후이창會昌사이 지역이 그나마 취약한 편이었다. 이곳은 포위망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여길 돌파하면 북쪽에 진치고 있는 국민당 주력부대보다 한발 앞서 진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 이후에 대한 계획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출발날짜가 갑작스레 결정돼 출발준비는 1주일 만에 이뤄져야했다. 이건 새로운 투쟁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맹목적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이때 마오는 실권이 없는데다 말라리아를 앓고 있어 저우가 철수전략을 지휘했다. 부대는 크게 10만의 장정군과 3만의 잔류부대로 나뉘었다. 장정에 나서는 부대는 당시 27세의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1군단과 36세의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제3군단이 최전선돌파를 맡았고, 그 뒤를 중앙상무위원회 위원들과 정보원, 사관생도, 지휘종대 등 소비에트 요원들이 따랐다. 2만8,000명의 잔류 병력들은 대부분 걸을 수 없는 부상병들이었다. 여기엔 마오의 동생 마오쩌탄毛澤覃과 폐결핵에 걸려 걸을 수 없던 취츄바이 등도 포함됐다. 홍군이 떠난 직후 마오쩌탄은 국민당군과의 교전 중에 죽고, 취츄바이는 국민당군에 체포돼 처형됐다. 잔류한 병력뿐 아니라 장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부녀자들 역시 크게 고초를 겪거나 처형당했다.
1934년 10월16일 장정이 시작됐다. 쟝졔스의 군대가 마지막 ‘포위공격’을 시작한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꼬박 1년 뒤인 1935년 10월20일까지 370여 일 동안 이들은 1만2천km의 고난에 찬 행군을 지속해야했다. 이는 인류역사상 일찍이 없던 위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그때껏 갖가지 시행착오와 오류를 거듭했던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거치며 처절한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그 시련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그걸 실현할 구체적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년의 시간 속에 많은 사람이 스러졌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마오는 겨우 몸을 추슬러 10월18일 장정에 합류했다.
갑작스레 떠난 길이었기에 초기에는 구체적인 목표나 매일의 행군계획도 없이 밤이면 걷고 새벽에 쉬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 목적은 서쪽을 향해 거의 직선으로 후난을 가로질러 토치카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후베이와 후난의 서부에 있는 허룽과 샤오커의 제2방면군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당군 역시 이러한 사실을 탐지하고 홍군의 행렬을 비행기로 공격했다. 홍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초기 한 달 동안에만 2만5,000명이 사망했다. 마치 피난민 같은 홍군의 대열은 지나치게 많은 장비와 짐들로 행군이 지지부진했다. 결국 불필요한 짐들이 버려졌고 운반병력의 탈영도 이어졌다.
11월말 국민당군의 최후의 봉쇄망인 광시성의 샹강湘江 도하작전은 1주일간 계속됐는데, 여기서만 3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부대는 국민당군에 거의 잡힐 뻔했다. 겨우 샹강을 건너 12월10일 후난과 구이저우貴州, 광시성의 경계인 퉁다오通道에 이르렀을 때는 병력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곳은 행진의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북쪽으로 내달리면 허룽의 제2방면군 근거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이미 국민당군에 간파당한 이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건 홍군의 전멸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에서도 불만과 동요가 일었다. 오토 브라운과 친방셴은 또 북상을 주장했으나, 마오는 오히려 쟝졔스의 의표를 찔러 허약한 지방군벌이 있는 구이저우로 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모스크바 유학생인 친방셴과는 통역 없이 러시아어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했던 오토 브라운은 마오와 주더 등을 경멸했고 평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인해 대세는 이미 마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당 중앙은 제2방면군과의 합류를 포기하고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이저우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마오의 예상대로 12월14일 홍군은 손쉽게 구이저우의 동쪽 끝 마을 리핑黎平을 접수했다. 장정 이래 최초의 승리였다. 거기서 홍군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이틀정도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사이 임시정치국회의를 열어 일직선으로 후퇴하는 전술을 포기하고, 그 대신 심지어 그들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도 하는 지그재그 식의 행군전술이 채택됐다. 또 부대를 좀 더 기동력 있게 강행군을 견딜 수 있게 재편하는 한편, 행군에 지장 있는 무거운 휴대품 등을 다 버리게 했다.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들은 리핑을 떠나 구이저우 제2의 도시인 쭌이遵義로 향했다. 그 남쪽에는 우강烏江이 흘렀는데, 강폭은 270m에 강변은 양쪽모두 가파른 절벽을 낀 천연의 요새였다. 우강의 도하작전은 1월1일부터 4일간 계속됐다. 홍군은 적의 강력한 포격 속에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험준한 암벽을 올라 국민당군의 거점을 기습했다. 1월7일 홍군은 탈취한 국민당군의 군복과 군기를 이용해 적을 속인 뒤 쭌이에 무혈 입성했다. 장정을 떠난 지 2개월 반 만에 홍군은 2,200km를 걸어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병력은 이미 출발당시의 절반으로 줄었다.
쭌이에서 홍군은 12일간의 휴식을 취하며 재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1935년 1월16일부터 18일 사이에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쭌이회의遵義會議에는 16명 혹은 18명의 당 정치국원과 후보위원, 그리고 7명의 군 지도자와 코민테른대표 오토 브라운이 참석했다. 회의는 격렬하게 진행됐다. 회의결과 채택된 ‘결의안’에는 그간의 실패원인을 짚어보고 당면한 과제를 조망하는 내용이 담겼다. 결국 홍군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건 현 지도부가 유격전을 포기하고 소극적인 진지전을 벌인 탓에 그 과정에서 홍군의 힘이 소진된 때문이었다. 게다가 쟝시를 떠나는 과정도 문제가 됐다. 소비에트에서의 철수는 ‘전략적 후퇴’가 아니라 공포에 질린 ‘맹목적 도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현 지도부는 당연히 이런 비판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으나 그때까지 군 작전을 주도했던 군사부장 저우언라이가 그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자신의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마오쩌둥이 지도권을 장악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다. 결국 친방셴은 당 중앙에 책임 있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오토 브라운도 군사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막후협상을 통해 마오와 저우는 전략상 장원톈張聞天을 새 당서기로 추대했고, 마오는 정치국 상임위원회의 주석에 지명됐다. 실상 마오는 1931년 이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주석직위에 있었으나 당 중앙은 장악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쭌이회의’를 통해 명실상부하게 중국공산당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랐고, 장정의 군사권을 손에 넣었다. 마오는 회의직후 쭌이 가톨릭성당의 큰 방에 당과 군 간부들을 모아놓고 ‘결의안’ 내용을 설명했다. 그건 홍군의 임무가 단순한 전투를 수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대중 활동과 대중의 조직화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항일을 위해 북상한다(北上抗日)’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홍군은 이제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마친 뒤 대오를 재정비하고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애초에 홍군은 허룽의 제2방면군과 합류하려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쓰촨 인근에 다다른 뒤, 목표가 쓰촨성 북쪽에 있는 장궈타오의 군대와 연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목표 역시 쟝졔스에게 간파 당했다. 쟝졔스는 여전히 이 지역을 통제하는 군벌들 탓에 맘껏 활동할 수 없었지만 영리하게도 지역 군벌들을 희생시켜가며 효과적으로 홍군의 진군을 막고 있었다. 쟝졔스는 구이저우에서 쓰촨으로 통하는 접경지역에 신속히 병력을 집결시켰다. 홍군을 남서쪽이나 멀리 티베트의 불모지역으로 쫓아내기 위해 휘하의 각급사령관들과 군벌들에게 타전했다. “이 나라와 국민당의 운명은 양쯔강 이남에서 홍군을 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마오는 국민당군의 저지선을 뚫고 쓰촨으로 직접 나가는 대신 쭌이에서 윈난과 시캉西康을 지나 서부 쓰촨에 이르는 긴 우회로를 택했다. 이때 쟝졔스는 구이저우성의 수도인 구이양貴陽에 머물며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홍군은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대오를 세분해 특유의 전략을 썼다. 그건 화살처럼 전진만하는 모험대신 두 개의 종대 때로는 네 개의 종대가 중심대열 좌우에서 일련의 교란작전을 벌이고, 전위대는 협공전선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홍군은 북상해서 쓰촨으로 갈듯하다가 급히 서쪽으로 진군하고 다시 뒤돌아서 뱀처럼 구불구불 길을 돌아 쭌이로 돌아오는 등 역행군도 마다않았다. 홍군이 구이양으로 향하자 쟝졔스는 윈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건 윈난의 국민당병력을 구이저우로 돌리기 위한 홍군의 양동작전이었다. 홍군은 돌연 서쪽으로 돌아 윈난을 가로질러나갔다. 윈난에서도 수도인 쿤밍昆明에서 또 한 번의 양동작전으로 국민당군은 혼란에 빠졌다. 윈난 군벌 룽윈龍雲은 모든 부대를 방어군으로 총동원했고, 쟝졔스도 지원군 끌고 구이저우에서 급히 달려왔다. 쿤밍을 향하던 홍군은 국민당군의 공세에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홍군의 주력부대는 양쯔강 상류의 룽졔龍街에서 강을 건너려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홍군은 엄청난 강행군으로 한나절동안 130여km를 내달려 쟈오핑두皎平渡에 다다랐다. 거기서 적함 한척을 습격해 탈취하고는 시가지로 들어가 그곳의 경비병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8일 동안 무사히 진사강金沙江을 건넜다. 홍군은 계속 진군해 시캉과 쓰촨의 고원지대를 지나며 한족들에 극도로 적대적인 로로족倮倮族이 사는 지역을 통과하기도 했다. 거기서 참모장인 류보청劉伯承은 로로족의 부족장과 잘린 닭의 목에서 떨어지는 피를 나눠 마시는 형제의 의식을 행한 뒤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로로족 안내로 홍군은 안순창安順場으로 내려갔다. 안순창은 본래 태평천국의 난 때 익왕翼王 스다카이石達開의 군대가 전멸했던 곳이었다. 쓰촨은 전 지역이 험준한 골짜기와 그 사이를 격렬히 흐르는 하천으로 이뤄진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스다카이 군대는 여기서 지체하다 추격의 빌미를 제공하고는 다두허大渡河로 가는 길이 막힌 상태에서 공격받아 전멸당했다. 이제는 홍군이 그런 상황에 빠질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홍군은 천우신조로 배 한척을 마련해서 도강해 대안의 국민당군을 제압하고 몇 척의 배를 더 구했으나, 그 작은 배 몇 척으로는 전군이 도강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그 사이 국민당군의 증원군이 도착할 것이고 무엇보다 도강하는 군대가 적의 공중폭격에 그대로 노출될 위험도 있었다. 결국 홍군은 안순창에서 다시 140km상류에 위치한 루딩교瀘定橋로 향했다. 이미 대안으로 건너간 부대와 나란히 가파른 절벽위에 위태롭게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악천고투의 연속이었다. 홍군의 행군을 막는 다두허의 작은 지류들에는 가교를 세우고, 간간이 만나는 국민당군과 교전을 치르며 전진했다. 시간이 없었다. 1935년 5월27일 선두부대인 홍군 4연대에 군단장 린뱌오의 긴급 전령이 도착했다. 남은 240리(120km)를 24시간내에 주파해 루딩교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홍군은 놀라운 속도로 행군해 루딩교에 도착했고 손쉽게 적의 진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13개의 쇠사슬로 이어진 현색교인 루딩교는 이미 널빤지상판이 모두 제거돼있었고, 다리 건너편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은 사격진지가 설치돼있었다. 5월29일 오후4시 돌격대 22명이 굵은 쇠사슬에 매달렸다. 배후의 홍군이 엄호사격을 하자 건너편 국민당군 역시 기관총을 쏴댔다. 첫째 병사가 총에 맞아 강물로 떨어졌다. 둘째, 셋째 병사가 계속 떨어졌다. 그새 다른 병사들이 전진해 대안에 좀더 접근하자 다리바닥이 그들을 보호해줬고, 적진의 총알은 빗나가거나 반대편 둑위로 향했다. 마침내 홍군병사 하나가 다리의 나무바닥을 포복해 기어 올라가 적의 보루에 수류탄을 던져넣었다. 국민당 장교들은 나머지부분의 판자들을 부수라 명령했으나 이미 더 많은 홍군들이 시야속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다두허의 도강은 장정기간 도중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패했다면 홍군은 아마도 스다카이의 군대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테고, 이후 전개될 중국역사 역시 달라졌을 게다. 허나 고난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들 앞에는 해발고도 4천m가 넘는 다쉐산大雪山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6월이었지만 높은 산위의 온도는 평지보다 낮았다. 남쪽지방출신인 병사들은 추위와 피로에 몸이 쇠약해졌다. 6월13일 홍군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 쓰촨 북서부의 마오궁懋功에 도착했다. 거기서 제4방면군과 합류했는데, 사령관은 쉬샹쳰徐向前이고, 정치위원은 장궈타오였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너무도 달랐다. 한쪽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군복마저 너덜너덜해진 1만 명의 패잔병무리였고, 다른 쪽은 부상병 하나 없이 충분한 휴식과 보급으로 사기충천한 5만 명의 정예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군대가 온갖 역경을 치르며 정신적으로 강인해졌다면, 장궈타오의 군대는 홍군으로서의 자각은 하지만 정치적인 세례는 거의 받지 못한 상태였다. 어찌됐든 장궈타오가 마오를 맞이하는 게 마치 ‘부자가 가난뱅이 친척을 대하듯’했다고 한다. 장궈타오는 마오가 젊은 시절 베이징대학에 잠깐 머무를 때 만났던 사이로 1921년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도 같이 참석했던 오랜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기도 전에 너무도 다른 서로의 생각을 확인해야했다.
6월24일 두 진영과 당 중앙 지도자들은 량허커우兩河口에서 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본래의 ‘항일을 위해 북상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 산시陝西나 닝샤寧夏로 이동해 그곳에서 ‘항일국민연합정부’를 결성해 모든 중국인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데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장궈타오는 혁명이 이미 퇴조기에 접어들었고 국민당의 세력은 강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쓰촨 북쪽에 머물면서 고립적이고 방어적인 소비에트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일단 당 중앙의 지도자들은 마오의 노선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회의이후 양 군은 다시 북상해서 7월10일경 마오얼가이毛兒蓋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양 군은 한 달간 휴식하며 다시 회의를 재개했다. 1935년 8월1일 중국 공산당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정부 연명으로 ‘항일구국을 위해 중국공산당이 전체 동포에게 알리는 글’이라는 선언문을 공표했다(8·1선언). 8·1선언의 주요내용은 국민당군이 홍군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면 함께 구국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것으로, 그때까지의 ‘소비에트 확대’ 방침에서 ‘항일 제일주의’로 돌아선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모스크바에서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열려서 8월7일 천사오위(王明)가 중국공산당 대표로서 항일통일전선에 관해 보고했다. 양자사이에는 어떤 교감이 있었던듯한데, 공식적으론 이 선언이 마오얼가이에서 채택된 것으로 돼있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의 중국공산당대표단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홍군의 방침은 ‘북상항일’로 확고해졌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12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나 당을 구성할 때는 장궈타오가 마오의 상급자였다. 장궈타오는 이제 새삼 마오의 부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국민당군의 추격이 임박해있었기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결국 당 중앙의 설득으로 양측이 타협해 군대를 동방종대와 서방종대로 나눴다. 동방종대를 이루는 3만 명에는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도 일부 포함됐다. 이때 1928년 이래 마오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던 주더가 장궈타오가 지휘하는 서방종대로 갔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쓰촨 출신의 주더가 쓰촨의 잔류를 주장한 장궈타오에게 갔다는 설명도 있다. 결국 두 부대는 다시 북상을 개시했다.
그들 앞에 놓인 건 대초원지대였다. 남북으로 약 300km에 달하는 이 지역은 8~9월의 우기에는 엄청난 늪지대로 변했고, 그 주위를 수십km의 대大삼림이 에워싸고 있었다. 장정을 떠나온 이래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이곳에 이른 홍군들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앞서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소수민족들이더라도 만나서 설득하고 회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홍군이 나타나자 아예 양식과 가축을 몰고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보급의 가능성을 잃은 뒤 홍군이 휴대했던 양식마저 떨어지자 가장 먼저 몰고 가던 말을 잡아먹고 그 다음엔 가죽신이나 허리띠를 비롯해 자양분이 될 만한 모든 것을 끓이거나 구워먹었다. 나중에는 땔감마저 구할 수 없어 어쩌다 구한 곡식과 채소들을 날것으로 먹어야했다. 때로 그들이 어설픈 지식으로 캐거나 채집한 야생식물은 독성이 있어 그걸 먹은 병사들이 구토와 설사를 하거나 죽어나갔다. 심지어 마실 물도 없었다. 사방에는 초지에 물이 괴어있었으나 대부분 녹이라도 슨 것처럼 붉은 빛을 띠었으며 사람이나 말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이질에 걸렸다.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그래서 변변히 쉴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밤에는 뼈를 에는 추위가 몰려왔다. 병사들은 관목아래에 몰려들어 서로를 껴안았지만 아침이면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국민당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가혹한 자연의 힘 앞에 홍군들은 힘없이 스러져갔다. 겨우 습지를 빠져나온 뒤인 9월3일 마오는 장궈타오가 보낸 전보 한 장을 받았다. “강 상류로 70리까지 올라가 살펴봤지만 건널만한 곳이나 다리 놓을만한 곳이 없다. 또 부대마다 양식이 사흘 치밖에 없고 전신국은 이미 양식이 바닥났다. 망망한 초지는 지나갈 형편이 안 되고 이대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결국 내일아침 세 갈래로 나눠 모두 아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모두 핑계였다. 대부대가 작은 시내 하나 탓에 지체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마오는 그들과 헤어져 다시 북상을 시작했다. 장궈타오 진영에서 빠져나온 제1군 출신 장병들이 다시 돌아왔고 9월16일 홍군은 초원의 출구인 라쯔커우臘子口에서 그들을 기다린 국민당군을 격퇴했다. 이제 비로소 위험지대를 빠져나왔고 가을걷이가 시작된 마을에서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마오는 그제야 긴 한숨을 토해내며 시 한수를 읊었다.
“칠률七律 - <장정長征> 毛澤東
홍군은 고단한 원정遠征 길 두려워하지 않거니 紅軍不怕遠征難,
깊은 강물, 험한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네 萬水千山只等閑。
다섯 고개 구비 구비 잔물결 이는듯하고 五嶺逶迤騰細浪,
웅대한 우멍산烏蒙山 굴러가는 진흙덩이런가 烏蒙磅礴走泥丸。
진사강金沙江 물 철썩이는 구름 벼랑 따스하고 金沙水拍雲崖暖,
다두허大渡河에 가로걸린 쇠밧줄 차갑기만 한데 大渡橋橫鐵索寒。
민산岷山의 천리 눈은 더더욱 반가울 손 更喜岷山千里雪,
삼군은 무사히 당도해 얼굴에는 웃음꽃 활짝 三軍過后盡開顔。
10월에는 험준한 류판산六盤山을 넘었다. 여긴 그 옛날 칭기즈칸이 서쪽에 정벌을 나갔다가 도중에 객사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10월20일 홍군은 종내 산시성陝西省 우치진吳起鎭에 도착했다. 이제 병사는 겨우 8천여 명으로 줄어있었다. 그곳에는 산베이陝北 소비에트의 제15군단 사령관 쉬하이둥徐海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초면인 두 사람이 마주섰다. 마오가 말했다. “당신이 쉬하이둥 동지입니까? 나오느라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곤 두 사람 다 말을 잊었다. 이제 장정이 끝난 것이다. 11월7일 옌안延安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샹비쯔완象鼻子灣이란 작은 마을에서 마오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정식으로 장정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대장정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건 하나의 선언이며 선전력이고 파종기播種機다. 판구盤古가 하늘을 연 뒤로 삼황오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이 같은 장정이 있었던가? 열두 달 동안 하늘에선 날마다 적기 수십 대가 정찰, 폭격하고 땅에서는 적군 수십만이 포위하고 추격하고 길을 막고 대오를 끊는 통에 우리홍군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위험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두 발로 열한 개의 성을 거침없이 오가면서 24,000리에 이르는 멀고 험한 길을 돌파했다. 묻나니, 역사에 언제 우리의 대장정과 같은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 [웨이웨이 <대장정- 세상을 뒤흔든 368일> 보리 2006. 507쪽]
장정이 끝난 뒤 마오는 미국기자 에드거 스노를 만나 그간의 사정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 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홍군이 승리의 행진을 할 수 있었던 점과 잔여부대를 이끌고 간쑤, 산시陝西까지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공산당이 올바른 영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둘째, 우리 소비에트인민의 훌륭한 기술, 용기 그리고 초인적인 인내심과 혁명에 대한 열망 덕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성할 것이며, 어떠한 기회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불패의 신념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이러한 결심에 대한 유일한 대답인 것이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84쪽]
장궈타오의 홍군 제4방면군은 1935년 9월 마오의 제1방면군과 헤어져 남하한 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36년 6~7월 사이에 간쯔甘孜지역에서 허룽의 홍군 2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제4방면군에 잔류한 주더와 류보청 등의 노력과 당 중앙의 포용으로 장궈타오는 어쩔 수 없이 제2방면군과 제4방면군이 북상하는데 동의해 그해 12월 산시 북부의 홍군근거지에 도달하고 그 사이 장궈타오가 별도로 수립했던 ‘임시중앙정부’ 역시 정리됐다. 이곳에서 장궈타오는 정부부주석과 주석대리 직무 등을 맡아봤으나 제4방면군의 남하에 대한 책임추궁 등으로 입지가 좁아지자 결국 1938년 4월 홍군근거지를 탈출해 시안西安을 거쳐 우한으로 가서 국민당으로 전향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그를 당적에서 제명했다. 홍군이 대장정을 마치고 산베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중국전역에 알려지자 루쉰은 친히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드림’이라는 원고를 써서 미국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통해 홍군 측에 보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대장정, 당신들에게 인류와 중국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당 중앙은 1936년 초봄에 이 전보문을 접수했다.
**3-6 닥터 노먼 베쑨 Henry Norman Bethune
외세의 침탈과 내부모순으로 신음하던 식민지사회의 젊은이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의학공부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의술로 고통 받는 인민의 육신을 고쳐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그리한 것일 텐데,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은 사업적으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의사출신이었고, 중국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루쉰 역시 의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어찌 그뿐이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종군의사이자 알제리혁명의 이론가였던 프란츠 파농(1925~1961)이 있는가하면, 죽을 때까지 혁명의 길을 걸었던 아르헨티나의 의사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도 있고,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정권을 수립했다가 미 제국주의세력의 지원을 받은 군부쿠데타에 희생된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역시 의사였다. 중국혁명과정에도 그 같은 인물이 있으니, 중국인들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마오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때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해방구의 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린 미국기자 에드거 스노와 함께 ‘네 명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는 캐나다출신 의사 헨리 노먼 베쑨Henry Norman Bethune(1890~1939)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중국식이름은 바이츄언白求恩이었으며, 스페인내전에도 참전한바 있는 활동가였다. 젊은 시절 비교적 평탄한 의사생활을 하던 그는 폐결핵을 앓고,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 흉부외과 전문의가 됐는데, 이때 폐결핵의 근본원인이 빈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그래서 사회주의적인 의료보건활동을 지지했고, 가난한 노동자와 빈곤층의 치료에 앞장섰는데, 1935년 소련을 방문했을 때 거기 의료보장제도에 감명을 받고 캐나다에 돌아와 비밀리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뒤 캐나다 의료체계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아동의 보건상태개선활동 및 미술치료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6년엔 스페인내전에 참전 이동수혈부대를 운영해 많은 부상병들을 구해냈다. 1937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돌아온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페인내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했다. 1938년 1월 베쑨은 홍콩에 도착했고, 곧바로 옌안으로 들어가 의무대를 꾸린 뒤 전선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고립돼 식량뿐 아니라 의약품마저 부족한 진차지晋察冀 지구였다. 거기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 1939년 가을 수술 중 실수로 손을 베었는데, 이로 인한 감염으로 패혈증에 걸려 1939년 11월13일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노먼 베쑨 동지는 중국의 항일전쟁을 원조하기위해···· 불원천리하고 중국에 왔습니다. 작년 봄에 옌안에 도착해 뒤에 우타이산伍台山에서 일했는데, 불행히도 순직했습니다. ·· 베쑨 동지가 추호도 이기심 없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하는 정신은 일에 대한 그의 극단적 책임감에, 또 동지와 인민에 대한 지극한 열정에 드러나 있습니다.” - [1939년 12월21일 ‘베쑨을 기념하며’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