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조사(開雲祖師)는 1790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양씨였다. 개운조사는 외동 아들이었다.
개운조사의 아버지는 개운조사가 세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자 외삼촌 부부가 개운조사를 데려다 아들처럼 길렀다.
외삼촌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한데 외삼촌도 개운조사가 일곱살 때 죽었다.
이에 개운조사가 상주가 되어 3년상을 치렀다. 외숙모도 2년 뒤에 죽었다.
개운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3년상을 치뤘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심에 큰 감동을 받아 개운조사를 양효동(楊孝童)이라 불렀다.
아홉살에 외숙모마저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개운조사는 인생의 무상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또 피붙이들을 모두 앗아간 '죽음'이 너무도 두렵고 싫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질문을 던졌다.
하루는 어느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대답하기를,
불법을 닦으면 죽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스님의 대답은 개운조사한테 크나 큰 광명이였다.
개운조사는 너무나 기뻐 외숙모의 첫번째 제사를 지낸 다음 곧바로 출가했다.
이때 그의 나이 열세살이었다.
개운조사가 출가하여 찾아간 절은 문경의 봉암사였다.
당시 봉암사에는 혜암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혜암선사가 개운조사의 머리를 깎아줬다.
개운조사는 혜암선사의 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데 혜암선사도 1년 후에 입적했다.
개운조사는 혈욱 뿐 아니라 스승까지도 너무 어린 나이에 잃었다.
죽음은 이제 개운조사가 풀어야할 일생의 화두가 되었다.
개운조사는 혜암선사가 입적한 뒤에도 6년 동안 봉암사에 머물러 불법을 닦았다.
그리고 19세때 큰스승을 찾아 봉암사를 떠났다.
개운조사가 만나고자 하는 '큰스승'은 도를 완성한 이였다.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대도인을 찾아서 십여년 동안 방방곡곡을 두루 헤맸다.
발이 닳도록 명산대찰 이곳저곳 떠돌아나녔다.
하지만 간절히 고대하는 스승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개운조사는 '쓸데없이 쇠신만 닳게 하며 분주히 돌아다닌다'는 고승의 시를 읽었다.
꼭 자기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개운조사는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봉암사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나이 삼십이었다.
본사로 돌아와서는 산내 암자인 환적암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했다.
침식도 자주 거르며 열심히 기도하고 참선했다.
한데, 기도나 참선 중에 온갖 환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어여쁜 여인, 황금, 비단, 아름다운 음악 등이 개운조사를 유혹했다.
개운조사는 그 유혹에 동요하지 않았다.
호랑이, 엄청나게 큰 구렁이, 강도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개운조사는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온갖 환상과 싸우며 어느덧 일년을 보냈다.
하루는 웬 미치광이 거지스님이 환적암을 찾아왔다.
그가 입은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였고, 그의 몸은 부스럼으로 뒤덮여 있었다.
부스럼에서는 진물이 줄줄 흘렀다. 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개운조사는 이 스님을 공경히 맞아 함께 살며 잘 봉양했다.
거지 스님은 행패도 아주 심했다. 툭하면 욕설을 퍼붓고 개운조사를 마구 때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개운조사를 칭찬하기도 했다.
개운조사의 마음은 어떤 일을 당해도 고요했다.
맞아도 속상하지 않았고, 칭찬을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마음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거지스님과 함께 지낸 지 한달쯤이 지나서였다.
하루는 밤중에 거지스님이 개운조사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마음을 참 잘 다스렸구나. 틀림없이 크게 득도하겠다.
그동안 부처님께 어떤 기도를 바쳤느냐?"
개운조사는 이 스님이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생각하며
공손히 큰절을 올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참 스승을 만나 불법을 바르게 닦는 것입니다."
그러자 거지스님이, 내가 너의 스승이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개운조사는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해주십사 간청했다.
거지스님은 개운조사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희양산 중턱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널다란 너럭바위가 있었다.
두 사람이 바위로 올라서자 매우 기이한 이적이 일어났다.
바위 위에 암자 하나가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개운조사는 그 암자에서 스승과 함께 이렛동안 머물렀다.
거지스님은 이렛동안 가르침을 준 후에 희양산을 떠났다.
개운조사한테 작별을 고하고는 하늘높이 날아서 갔다.
그 순간, 바위 위에 세워졌던 암자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개운조사는 백련암으로 내려와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용맹정진했다.
백련암에서 수행한 지 백일만에 '수다원과'를 얻었다.
개운조사는 수다원과를 얻은 뒤에 속리산 동쪽에 자리잡은 도장산 심원사로 들어갔다.
그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심원사가 오롯이 자릴 잡고 앉아 있다.
개운조사는 도장산에서 쉰 한살 되던 해까지 머물렀다.
정진을 계속하여 여기서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를 얻었다.
아나함과를 얻자 개운조사의 용모는 완연한 선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개운조사의 주변에서는 신비로운 이적이 자주 일어났다.
이 소문이 도장산 밖으로 조금씩 펴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개운조사를 만나기 위해 도장산을 찾아왔다.
그들로 부터 양봉래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람들이 '신선들께서 머무시는 봉래산에서 왔다'는 뜻으로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세속인들의 왕래가 더욱 잦아졌다.
개운조사는 조용히 정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쉰 한 살이 되던 해(1840)에 지리산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개운조사는 지리산으로 가기 전에 <능엄경>의 주석을 달았다.
간략하게 자신의 자서전도 썼다.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 책으로 만들었다.
책의 말미에다가 이런 얘기도 덧붙여 두었다.
'이 책을 심원사 천장에 숨겨둔다.
도장산 계곡물에 사는 용들에게 이 책을 잘 보호하라 일렀다.
앞으로 1백년 후에 인연이 닿는 사람이 이 책을 발견하여 세상에 전할 것이다.
그때에 가면 바른 도가 널리 퍼지리다.
큰 도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의심하지 말고 정진해라.
나는 바위에다 맨손으로 글씨를 새겨 놓았다.
이것이 정법(正法)을 따라 정진하여 내가 도를 이룬 증거이다.'
개운조사는 지리산 반야봉에 자리잡은 묘향대로 갔다고 한다.
개운조사가 도장산을 떠나며 바위에다 새겨둔 글씨는 지금도 남아있다.
속리산 동편, 경북 상주군 화북면 용유동에서 심원사로 가는 길가에 있다.
이 일대에는, 옛날에 어떤 선인이 도장산에서 살았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1950년 대의 일이다. 양성이란 스님이 심원사에 들러 잠시 머물게 되었다.
심원사에 온지 며칠 안 지나 양성스님은 아주 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이상한 환상이 보이는 것이었다.
환상은 점차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다음에 두툼한 책이 나타났다.
나중엔 노인이 양성스님을 향해 받으라는 듯이 책을 내밀었다.
양성스님은 왜 헛것이 보일까 의아해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한데, 이튿날에도 똑같은 환상이 나타났다.
양성스님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천장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어 천장을 열어 보았다.
천장 속엔 개운조사가 주석을 단<능엄경>이 있었다.
'내가 떠난 뒤 백년 후에 인연 닿는 사람이 이 책을 발견하리라'한,
개운조사의 예언이 어뤄진 것이다. 양성스님은 책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베꼈다.
그런다음 원본은 천장에 도로 넣어두고 필사본만 가지고서 심원사를 떠났다.
양성스님이 심원사를 다녀간지 사흘만에 심원사에는 큰 불이 났다.
모든 건물이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 개운조사가 쓴 책도 건물과 함께 재로 변했다.
양성스님은 개운조사가 당부한 대로 이 책을 출판하여 널리 전했다 .
# 개운당 유서(開運堂 遺書) 후학중에서 천견박식한 사람이,
나의 근유(根由)를 오해하며 경(經)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서
비방하는 마음이 생겨 보리의 인연을 놓치고 악도에 타락될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을 지어 자주(自註)를 붙여 유시(遺示)하는 바이다.
나는 세속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의탁하였다가,
봉암사(鳳岩寺)에서 동년(童年)에 머리를 깎고,
그 후 10년 동안 스승을 구하여 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본사(本寺)로 돌아와 환적암(幻寂庵)에서 스승을 만나 법문을 들었고,
백련암(白蓮庵)에서 연금(煉金)하여 구슬을 얻고,
심원사(尋源寺)에서 보임출태(保姙出胎)하고,
유즙임경(乳汁林竟)한 다음 여가를 활용하여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의 원고를 초하였으나
연기(緣期)가 아직 일찍하고 면벽(面壁)이 가장 급하였으므로,
아직 보류하여 간행치 않고 여러 용자(龍子)로 하여금
교대하여 수호하게 하고 지리산 묘향대로 향한다.
백년 이후에 큰 인연을 가진 자가 이를 인쇄하여 널리 배포할 것이니,
그 공덕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필경에는 모두 보리(菩提)의 인과(因果)를 이룰 것이다.
후세(後世)에 이 경을 봉독하는 자는 경(經)과 송(頌),
그리고 주(註)와 토(吐)에 있어서 한 자(字)와 한 구(句)라도 신중히 하고 고치지 말아라.
또 비방하는 요망한 무리는 반드시 신사(神司)가 벌을 내릴 것이다.
희양산(曦陽山) 환적암은 보환화상(普幻和尙)이 입적한 곳이다.
오늘 도중(途中)에서 이 몸을 회고(回顧)하니 강개(慷慨)함이 무량하다.
후세의 제현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산중에 무엇이 있던가. 고개 위에 백운이 많아라.
다만 스스로 기뻐는 할지언정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니,
각기 스스로 깨달아서 각기 스스로 기뻐하라.
내가 스승을 만나 법문을 듣고서
수능엄삼매(首능嚴三昧)의 실천공적(實踐功蹟)을 수련한 것을 대강 보여주어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수행하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죄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기(玄機)를 누설하는 것인데,
믿지 않고 수행치 않음은 그대들의 허물이다.
십여 년 동안 풍우에 젖어 있다가
홀연히 고덕(古德)의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동 서로 분주하게 다니네."
라는 글귀에 감동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환적암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나이 삼십이었다.
스승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침식까지 잊었다가
경배(敬拜)하는 기원이 잠시도 해이한 적이 없었는데,
미색이 앞에 나타나거나 천악(天樂)이 귀에 들리기도 하며,
맹호가 뒤따라 오거나, 큰 뱀이 몸을 휘감기도 하며,
황금과 비단이 방에 가득하거나 도적이 문을 부수기도 하며,
그밖에 기쁘고, 두렵고, 믿음이 가고, 의심이 가는 등의 마사(魔事)들도 있으나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도 동심(動心)하지 않고 정직(正直)만을 고수(固守)하면서
계(戒). 정(定)을 성실하게 수련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남짓이 하였을 적에
어떤 미친 듯한 중이 비틀 걸음으로 들어오는데,
신체는 수척하고 의복이 남루한데다 온 몸에 진무른 부스럼이 나서
그 냄새가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경히 맞이하여 성심껏 시봉하였는데,
꾸짓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였으며, 희롱도 하고 자비롭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남짓이 하면서 역시 동심하지 않고 정직만을 고수하며,
배나 더 공경할 뿐이고 한번도 의심하지 아니하였더니,
어느날 밤에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무심한 사람이구나.
꾸짖어도 괴로워하지 않으며 때려도 성내지 않고 희롱해도 싫어하지 않으며
자비를 배풀어도 기뻐하지 아니하니,
마음을 항복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반드시 득도(得道)할 것이다.
여러해 동안 불타 앞에서 기원한 것이 무엇인가?" 하므로,
눈물을 흘리며 공경히 절하고 말하기를,
"지극한 소원은 참다운 스승을 만나 불법을 듣는 것이고,
그밖에는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말하기를,
"내가 너의 스승이 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나는 곧 슬픔과 기쁨의 감회가 함께 일어나 백배하며 애걸하였더니, 말하기를,
"인걸(人傑)도 지령(地靈)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도(修道)도 그러한 것이다." 하고,
나를 데리고 희양산에 올라갔는데, 달이 낮처럼 밝고 안계(眼界)가 쾌활하게 전개되었다.
큰 반석 위에 정사(精舍)가 저절로 세워지고 음식이 제때에 마련되었다.
나는 이러함을 보고서 신심(信心)이 백배나 솟구쳤다.
사자(師資..스님과 상자)가 삼보 앞을 향하여 공경히 예배하고서
큰 참회와 깊은 맹서를 한 다음에 말하기를,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도(修道)를 함은 마음을 항복 받는 것으로 시작과 끝마무리의 절요(切要)함을 삼는다.
학자(學者)가 만에 하나도 성도(成道)하지 못함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我慢)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설법한 다음에 토굴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7일만에 첫 건혜지누진통(乾慧地漏盡通)의 인(因)을 증득하니,
우리 선사가 [정본수능엄경]과 [유가심인록]을 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보현존사(普賢尊師)에게 구결(口訣)로 받은
신(信). 해(解). 수(修). 증(證)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진중(珍重)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하므로, 공경하게 배수하였는데,
또 다시 대승(大乘)의 묘결(妙訣)을 구두로 전해주므로 이를 하나하나 터득하고 깨달았다.
수수(授受)하기를 마친 다음에 공경히 백배하고 삼보(三寶) 앞에 사은(謝恩)하니,
우리 선사가 손을 잡고 고별한 다음 허공으로 날아가므로
공경히 백배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전송하고 돌아보니, 정사(精舍)가 없어졌다.
미증유의 일임을 감탄하고 백련암으로 내려와서
백일만에 십신(十信)의 수다원 누진통의 과(果)를 증득하고,
그리고 7일만에 초주분정도태(初住分定道胎)의 인을 증득하고서 도장산(道藏山)에 들어갔다.
어째서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 수도의 절요함이 되는가 하면,
성품이 움직이면 마음인데, 그 이름이 [魔音心]이고,
마음이 안정하면 성품인데, 그 이름이 [聖品性]이다.
그래서 성품을 따르는 자는 성인(聖人)이 되고
마음을 따르는 자는 마(魔)가 되는데,
마(魔)와 성(聖)은 두 종류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것을 자신이 도로 받는 것이다.
후학은 이를 알아야 한다. 마음을 항복받은 다음에라야 수도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을 항복받으면 도기(道器)가 되고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면 도기가 못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불타가 마음 항복받는 것을 먼저 제시한 것이다.
인연이 있는 제현이 이 경을 읽고 불법을 깨달아서
전일하게 정진하면 보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내가 고심하여 스승을 구하고 도를 깨달은 본원(本願)이다.
오십 일세가 되는 경자년(庚子年 1840년) 8월 삼경일(三庚日)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여 뒤에다 덧붙인다.
(불공삼장이 한역하고 개운조사가 주해를 단
유가심인정본 수능엄경에 수록되어 있는 "개운조사 유서"에서 인용한 글이며,
이 능엄경이 불공삼장이 번역하고 개운조사가 주해한 것으로
불공삼장이 우리나라의 개운스님에게 유가심인 증험록과 함께 전해준 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