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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김주환교수, 참 대단합니다. 내공이 느껴져요. 얼굴도 밝고 자비롭습니다. 그리고 힘이 있어요.
그러니 갑자기 조회수 폭발 유튜버가 되셨겠지요.
그런데 오늘 쭉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불교 가르침과 매우 상통하는 곳이 많습니다.
조금 솔직히 말하면, 불교가 이미 말해 놓은 것을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증명(?)하는 셈이지요.
그래서 평소에 불교 가르침을 공부하신 분이라면 아, 김주환교수의 이 부분이 불교의 어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거구나, 하는 걸 금방 느끼실 겁니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의도의 방향이 달아야 한다!
->이거, 제가 '역행의 원리'라는 말로 오래 전에 설명드린 바 있을 겁니다.
원하는 게 참으로 있으면 오히려 그걸 원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원하지 않을수록 딸려오고, 원할 수록 멀어진다는 게 역행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건 오히려 원하지 말라, 는 것이지요.
원하지 않으면 성취되고, 원할수록 멀어지는 것이지요.
왜냐? 범부의 차원에서는 원한다는 건 집착하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집착하면 뭐든 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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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마음에 드는 나, 안 드는 나가 있다... 이걸 불교 용어로 말하면 '우리 몸에는 여러가지 識이 있다'입니다.
안식 이식 등등이 있는 거지요(六識). 지금 말하는 마음에 드는 나, 안 드는 나는 身識에 해당되겠고...
그렇게 우리 몸은 몸 자체가 여러 의식 덩어리, 집합체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나가 있고 못 알아차리는 나도 있어요.
그래서 흔히 말하는, 또 흔히 내가 알고 있는 '나'가 사실은 '나'가 아닌 거에요.
그냥 나라고 생각하는 나지요.
그래서 참나(眞我)를 찾아라! 하는 말씀이 나오고요. -
답댓글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진짜 나에 관한 이야기는 김교수께서 다음 동영상(2부)에서 설명합니다.
정말 불교적이지요?
또 '진짜 명상은 움직이는 거다!'라고 말씀하는 부분도 나와요.
이것도 기가 막히지요? 제가 늘 그러쟎아요, 보현행원은 명상이라고!
명상을 하는데 행으로 하는 거라고!(물론 마음도 당근 들어갑니다, 원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앉아서 가만히 머릿속으로 하는게 명상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걷기 명상도 있고, 심지어 식사명사도 있는데 감사를 생각하고 공경, 찬탄을 생각하는 게 명상이 아니라고? -
답댓글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2부에서는 운동화 갈아신고 달리기 하라.. 이런 건 사실 일상에서 어려우니 지하철 두어 정거장 미리 내려 빨리 걷기하라.. 이걸 한달만 해봐라... 이렇게 가르치시는데,
--->이런 게 보.현.행.원.입니다!
이런 걸 불교 화엄에서는 보현행원이라 불러요!
그런데 보현행원이라 그러면 피이... 하고 비웃고,
명상이니 심리 상담이니 하면 대단한 줄 알고....
보현행원은 다 아니까 배울 필요도 없다 하고,
명상 같은 건 기를 쓰고 돈도 비싸게 내고 배우려 하고...
이미 행원 안에 명상도 수행도 다 있는데,
그건 필요없다 하고,
돈 들고 시간 비용 드는 건 기를 쓰고 선생님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배우려 들고...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이런 말씀 드리기는 내키지가 않지만, 같이 공부하는 입장에서 혹시나 오해 있으실까봐 내키기 않지만 말씀드려봅니다.
제가 많이는 못 봤지만(이번까지 3개 정도?) 김주환교수 강의를 보면(오늘 강의도 그렇고) 훌륭한 말씀들이지만,
다 맞지는 않은 거 같아요(특히 감사에 관한 말씀)
마음 공부하는 사람과 지식을 쌓는 사람의 차이랄까, 그런 게 좀 있어요.
물론 김주환교수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 기운을 보면, 마음공부도 함께 하는 분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 좀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예를 하나 들면, 김교수의 강의에서는, 제가 다 보질 못해서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인과의 관계 문제는 아직 안 나오는 듯 합니다.
사실 스트레스 대부분은 어찌보면 인간 관계, 대인 관계에서 오거든요?
가령 가족 중 누가 아프다... 이런 건 마음공부 마음 근육 키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럴 때 강한 마음근육은 우리로 하여금 무자비(?)해지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정말 뛰어났던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소승이란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일리가 있지요. 초기불교의 주류가 ‘내 문제 해결’에 집중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감사 강의에서도 보듯, 또 이번 강의 2부에서 술 먹는 거, 창의성 같은 곳에서도 보듯, 전적으로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
지식의 한계지요.
이런 부분도 좀 보충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정말 아주 뛰어난 이 시대의 젊은 스승님이 되실 듯... -
답댓글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4 그렇지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듣다 보면 그게 전부인 줄 알기 쉽습니다. 유명한 분들이고 또 현대 과학을 공부한 분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같이 마음 공부한 사람들이 보면 여기저기 조금 미흡한 부분이 눈에 보이지요. 그런 게 마음 공부한 분들과 지식 공부한 분들의 미묘한 차이라 할까요.
마음 공부하신 분들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개 아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는 게 없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알게(?) 된 그런 이야기들을 하시지요. 그래서 배척하는 마음이 없어요.
반면 지식 공부하신 분들은 아는 게 무척 많습니다. 아는 자리에서 아는 걸 얘기하세요. 그런데 안다는 건 모른다는 걸 배척하는 겁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배척 에너지가 나와요. 아는 분들 얘기를 오래 듣다보면 일반인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유를 알수없는 거부감을 조금씩 느끼게 되는 일이 꽤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지요.
김주한교수의 강의도 들어보면 아는 마음이 많아요. 관상을 보면 눈에 힘이 들어가 있지요?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아는 큰스님들 눈을 보세요. 눈에 힘이 전혀~ 없어요. 아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신 자비만 가득하지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4 동영상 중 '얼룩말은 위궤양이 걸리지 않는다'는 사회자의 질문이 나와요. 김교수의 대답은 얼룩말이 사자에게 쫓길 땐 사력을 다하지만 위험을 벗어나면 그 뿐 거기 매이지 않고 다 잊어버리고 풀을 뜯기 때문이라는 거죠. 우리는 대신 원시인 때는 단 몇 분이면 끝날 상황을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어진다는 거고요.
이걸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 지적하셨죠. 어디서? '두번째 화살 법문'에서요!
이렇게 부처님은 이미 오래 전에 현대 과학이 신비롭게 발견한 일들을 모두(?) 밝혀 놓으셨답니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4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번잡한 이론이 사실 거의 필요없습니다.
예컨데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려면 물이나 소화기를 부으면 됩니다. 물론 요즘 전기 화재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 건 예외고, 인류 역사 상 화재 진압은 그게 상식이었어요. 불의 종류를 알고 소화기 종류를 알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물 부으면 되고 요즘은 배치된 소화기 뽑아 뿌리면 돼요. 그래서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드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번뇌를 없애려면 사실 번잡한 이론이 어쩌면 필요없어요. 그냥 단순한 몇 가지만 알고 그걸 주의하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이 세상 이치가 모두 그래요. 전문가만 아니라 전문가 아니라도 뭐든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본래 그런 게 다 갖춰져 있는데, 그걸 불교 용어로는 여래장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런 자리로 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평등지, 근본지만 아니라 차별지를 꼭 알아야 하고 이 세상은 차별지가 꼭 필요한 것이지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4 제가 전반적으로 명상이나 수행 같은 거 강의하고 가르치는 분들에게 회의감(?)을 갖는 이유는, 그 방향이 개인으로만(?) 향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개인 문제 해결에만 집중돼 있어요.
물론 세상이 화평하기 위해서는 개인 각자의 覺悟가 필수입니다. 개인이 먼저 행복해야 해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개인 문제의 해결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래서 개인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겠지만 동시에 나 아닌 이에 대한 고려도 함께 강의 되어져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이지요.
화엄경을 보면 전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여기 한 중생이 성불하면 시방 일체 중생이 함께 성불해요.
여기 한 중생이 가르침을 들으면 여기 아닌 다른 곳의 중생들도 모두 가르침을 들어요. 그리고 함께 환희해요.
저는 이런 내용이 다른 경전에도 실려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많은 경전들을 제가 다 볼 수 없기에 그래요.
물론 ' 이 말씀을 들은 일체 중생이 행복 환희했다' 이런 대목은 많이 나옵니다. 대개 유통분에 딱 한 줄이지만요.
화엄경만큼 곳곳에 나오지는 않지요.
그러나 유통분이 대개 그렇게 끝나는 걸 보면, 동시성불이 불교의 근본 사상인 걸 알수 있어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4 초기불교가 시간이 흐르며 소승이란 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가르침이 너무 개인 문제 위주로 향했기 때문이라 저는 봅니다.
그래서 대승이 나온건데, 현대 수행법이나 가르침을 보면 과거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의 전부 내 문제 해결에만 집중되어 있지요.
저는 이게 참 답답해요.
세상은 연긴데, 더불어 있는데, 왜 내 문제만 집중할까요?
이웃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면 내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데?
내 문제 해결뿐 아니라 내 공부가 바로 남의 공부, 타인 開悟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없을까?
또 그런 가르침을 말씀하는 분은 없을까?
이게 저의 평생 의문이었는데...
그게 바로 보현행원. 이었던 겁니다!
나와 남이 동시에 밝아지는 수행!
내 공부가 바로 이웃에 바로 도움이 되는 수행!
불교만 아니라 세간 일도 원만히 이루어지는 수행!
불교의 緣起가 현실에서 펼쳐지는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