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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21 화엄경 끝에 이르면 문수와 보현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문수가 보현이 되고 보현이 문수가 되지요.
그래서 입법계품 미륵보살을 만날 때 미륵은 문수를 만나라고 하면서 문수가 바로 보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보현은 다시 보현慧行이라, 보현이 지혜행을 하는 것으로 나오지요.
문수가 따로 있고 보현이 따로 있는 줄 알았던 선재에게,
사실은 문수 보현이 따로 있지 않음을 미륵은 알려주는 것이지요.
보현행원품에도 막바지에 가면 보현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마음을 따라 주는 것으로 나옵니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21 문수가 바로 보현임은 깨달음이 자비행과 따로 있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수가 지혜가 뛰어난 건 지혜를 따로 구하거나 지혜를 따로 이루는 방법이 있어 그걸로 지혜를 이룬 것이 아니라, 문수가 보현이 되어 자비행을 끝까지 했기에 문수는 비로소 지혜를 이룬 것이지요. 다만 문수는 그렇게 이룬 지혜가 너무 눈부셔 지혜의 상징이 되었고, 보현은 지혜 또한 문수와 똑같지만 자비행이 너무 눈부시니 또한 자비의 상징이 되어버렸이고요. 따라서 문수와 보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수가 때로는 보현으로, 보현이 또 문수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본문은 그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화엄은 이처럼 나누는 걸 무척 경계합니다. 그냥 거짓으로, 중생이 알아듣기 쉽게 나눌 뿐인데 마치 그 나눈 것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중생들은 거기에 빠집니다.
원효가 기신론에서 일심을 둘로(진여문 생멸문) 나누니 사람들이 마치 마음에 두 가지 마음이 있는 줄로만 안다고 비판한 것도 그런 이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