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화엄불교)의 같은 점 다른 점]
普賢추천 0조회 10611.03.21 14:36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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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화엄불교)의 같은 점 다른 점]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 특히 화엄불교의 같은 점, 다른 점을 한번 살펴봅니다. 먼저 같은 점을 살펴보고, 다음에 다른 점을 말씀드립니다. 1.같은 점-과의 자리에서 이론을 전개 기독교와 화엄불교는 인(因)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과(果)의 자리에서 세상을 설명합니다. 가령 기독교는 창조주의 은혜로 <이 세상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창조주의 은혜로 이미 이루어진 세계를 왈가불가(?)할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무한한 은혜 속에서 창조주의 뜻대로 번성하는 것입니다. 이미 완성된 세계를 믿지 않고 창조주의 선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 분의 뜻대로 그 분의 역사를 성취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번성, 순응, 역사하는 방법이 감사, 찬미, 회개 등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화엄불교 역시 그러합니다. 초기불교는 그렇지 않은 느낌도 주지만, 대승불교, 특히 화엄불교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을 <모든 것이 완성된 세계>로 봅니다. 불완전하고 모자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이미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모두가 완전하고 모두가 완성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한 세계에서 모든 생명이 그 모습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장엄하게 드러내는 것이 화엄(華嚴, 꽃으로 장엄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늘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 역시 처음과 끝이 없는 <무한공간>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완전한 자리에서 완전한 세계를 드러내고 장엄해갑니다. 그리고 그런 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생명을 드러내는 방법이 공경, 찬탄, 섬김, 참회 등등의 보현의 열 가지 행원(行願)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세상이 완전함>, <이미 이 세상엔 부처님으로 꽉 차 있다!>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온갖 세상은 부조리와 더러움으로 꽉 찬 것 같아도, 실상은 그게 아니라 이미 완전한 세계, 모든 것이 완성된 세계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그렇게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게 불교, 특히 중국의 남종선이나 화엄불교입니다(실지로 화엄은 신만성불이라 하여, 믿음이 최고조로 달할 때 성불이 온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믿음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제한된 감각, 이해력으로는 <이 세상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100% 알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장 일부 기독인들은 <세상이 이미 창조주의 뜻대로인데 왜 온갖 모순이 존재하는가? 과연 창조주는 계시기나 한 것일까?>하고 창조주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내가 모자란 건 모르고, 완전한 창조주를 오히려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수행을 한 수사나 성직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오지 않는 창조주를 기다리다 지친 분들이 적지 않으십니다. 이런 현상은 불교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은 완전하여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데, 일부 불자들은 공연히 무얼 더하거나 덜려고 애쓰십니다. 이미 완성된 이 세계를 꺼내 쓰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이 세상을 이미 이루어진 원리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면 되는데, 그런 장엄은 뒤로 미루고 한사코 깨달으려 하고 한사코 수행하고 정토에왕생하기만을 바라십니다. 불완전한 이 세계가 사실은 완성된 세계의 또다른 모습임을 모르는 까닭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안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불교나 기독교나 이론, 앎의 한계를 넘는 <믿음>이 궁극에는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와 화엄은 교리 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불교를 모르는 불교인들이 처음 화엄, 보현행원의 가르침을 들으면 <이건 불교가 아니다, 기독교 냄새(?)가 난다>며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봅니다. <본래성불>이 불교의 정통 가르침이긴 하지만, 화엄불교처럼 본래성불을 설명하는 불교는 좀처럼 드물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독교는 <인간>만이 소중한 반면, 그래서 자연만물이 모두 인간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화엄불교에서는 모두가 등가(等價)의 가치를 갖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천하만물이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불교는 우월심, 배타심 같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심지어 흙이나 물같은 무생물도 생명체만큼이나 소중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 화엄불교입니다. 온 세상이 <대긍정>, <대환희>로 차 있는 것이 화엄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끝으로, 이런 과의 자리에서 펼쳐지는 가르침은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비록 기독교 가르침이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기독인들의 놀라운 실천력은 이런 데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불교 역시 화엄불교는 <실천불교><행동불교>입니다. 기독교에서 큰 장점으로 생각하는 실천행이, 화엄불교에도 똑같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2.다른 점 1)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기독교는 모든 것이 <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창조주가 있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죄가 있고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선과 악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있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갈라집니다. 또 있다고 보기에 <있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가령 창조주가 있다는 믿음 아래 모든 가르침이 전개되는데, 만약 창조주가 없으면 있다는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이후 전개된 모든 세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 유무에 아주 민감합니다. 죄의 유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가 있는 죄인이란 전제 아래 구원이 있게 되는데, 인간의 애시당초 죄가 없다면(?)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죄와 벌, 구원, 선과 악 같은 것이 기독교적 시각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펼쳐지는 것이 기독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천국도 지옥도 죄도 구원도 모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없고(空),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네 마음이 지어낸 착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없기에 집착할 것도, 배격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해탈도 열반도 지옥도 극락도 설사 없다 한들 아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본래 없는 것>이니까요! 이것을 극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불교의 반야사상입니다. 반야사상에서는 초기불교가 그렇게 제거하려 했던 무명(無明, 어리석음)도 없고 또 그렇게 지향했던 열반조차 없다고 합니다. 모든 게 없는데 뭘 그렇게 요란스럽게 없애려 하고 얻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없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무(有無), 있음과 없음의 <대립 개념>은 아닙니다. 이 부분이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그래서 서양에서 불교의 공사상이 이해되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이후 양자역학이 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반야, 공은 진공이 아니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말합니다. 즉, 유(有)와 대립되는 없음(無)이 아닌 것입니다. 겉보기엔 없는 것 같지만 묘하게 있는 것, 그것이 불교의 없음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없는 것(色卽是空)이고, 그렇지만 그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자리(空卽是色), 그것이 <불교의 없음>인 것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 진공묘유입니다. 이는 현대의 진공 개념과도 매우 닮았는데, 과거 물리학의 진공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했지만, 현대 물리학의 진공은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진공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공에서 구멍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공의 개념은 서양과학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으니, 과거 과학을 비롯한 서양사상은 없는 것을 철저히 무시하고 오직 있는 것만 소중히 여겼으나 이제는 없음의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무(無)야말로 모든 것의 원천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2)이분법과 일원론 서양사상 대부분이 그렇듯, 기독교는 철저히 이원론,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에서도 언급했듯, 모든 것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나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창조주와 피조물은 결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의 은총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신, 창조주는 절대 일자(一者), 절대 타자(他者)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절대 일자, 절대 타자의 은총 속에 물과 기름처럼 존재합니다. 우유와 물처럼 존재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나눌래야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undivided wholeness)>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은 모두 우리의 착각이고, 사실은 모두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하나는 찐빵 덩어리 같은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개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더불어 존재하는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중도(中道)연기>,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말하는데, 모든 것이 <더불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더불어 있고 지옥과 천국이 더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세계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으며, 다가올 내일도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영광은 오욕과 더불어 있고 기쁨은 슬픔과, 행복은 불행과 더불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볼 땐 오욕도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행복할 땐 행복하지 않은 자리가 행복과 더불어 이미 있는 것을 봐야 세상에 속지 않고 진짜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와도 대단히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이 <따로><분리되어>있지 않고, 나타난 현상은 낱낱의 개성을 유지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고 시공간의 무수한 차별도 하나(一心)의 현실상의 차별적 나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의 세계(世界一華)엔 대립과 갈등이 없습니다. 물은 언제나 하나의 바다로, 구름은 언제나 하나의 구름으로 차별 속에 모두가 <더불어> 오갈 뿐입니다. 3)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두 <밖>에서 온다! 기독교와 불교의 또 다른 차잇점은,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두 <밖>에서 오는데 반해, 불교는 우리 안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이를 <불성>를 밝혀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도 구원도 기독교는 모두 <내(我)>가 아닌 바깥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음으로 해서 나의 뜻과 다르게 우리는 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 되었고, 구원도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의 뜻에 따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연구하는 신의 말씀도, 모두 신이라고 하는 바깥 세계에서 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신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나의 밝음이 아니라 신의 신성이 나를 통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밖에서 오는 가르침은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결정적 문제는 모든 가치의 판단을 우리가 아니라 남이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교도를 죽이는 문제도, 나의 본성이 아무리 그런 일을 거부해도 기독교 경전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죽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녀 사냥을 거부하고 싶어도, 남들이 마녀라 주장하면 할 수 없는 것이 이런 밖에서 오는 가르침의 문제점입니다. 반면 불교는 바깥을 향하는 마음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경에 아무리 뭐라고 쓰여 있어도 나의 불성(佛性)이 용납할 수 없으면 팔만대장경도 소용없는 것이 불교입니다. 심지어 부처도 거부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같은 점, 다른 점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네 가지 점에서 같은 점, 다른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註:여기서 말하는 일원론은 <배타적인 일자의 일원론>은 아닙니다. 가령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성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설명한 정신분석학 같은 것은 다른 이론을 배척하는 일원론이지요. 그러나 불교의 일원론은 일체를 포섭하는, 타자와 결코 분리가 되지 않는 <통합, 통섭의 일원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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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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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하호호 작성시간 24.01.04 다시 한번 복습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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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보문 작성시간 24.01.06 복습 잘 합니다. 머리속에 넣고 다녀 다른 분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하는데~~~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1.08 얼마전에 문득 이 주제에 대해 생각이 떠올랐었는데 마침 이렇게 복습을 시켜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청정수1 작성시간 24.01.14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