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글)톨스토이는 오십 대에 참회록을 집필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평생 살아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작성자普賢.작성시간24.02.03조회수27 목록 댓글 2톨스토이는 오십 대에 참회록을 집필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평생 살아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내 삶의 결과는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마저도 깨뜨리지 못할 의미가 삶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70대라는 노년의 세대가 되었습니다. 노년이란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음을 준비하며 절대자를 찾아보는 시간이 되어야겠지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학이나 철학에서는 이성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영역의 질문이기 때문에 결국 하이데거는 피투(被投)된 존재(내던져진 존재, Geworfenheit)이기 때문에 살아내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그러한 인간은 선택과 결단을 하는 자유를 가진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에 거기에 피할 수 없이 따라오는 외로움과 무력감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유로부터의 도피>하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나치 아래 있던 독일 국민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평하면서 끊임없이 이집트의 종살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모습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두 진영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은 자유의 두려움과 자유의 기쁨을 잘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그에 비해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1945년을 맞이할 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기대하면서 품었던 막연한 희망이 무산되면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자들은 가스실에 가기도 전에 침상에서 그저 죽어갔다고 합니다. 호스피스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때때로 목격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사건인 죽음을 무시하고 살다가 갑자기 눈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 스스로를 착란시키면서 안절부절하며 눕지를 못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과연 없을까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나 세상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인간이 사유하기 때문에 목적을 찾을 수 있어서 본질(本質)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실존(實存)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투된 존재는 누구에 의해 던져졌을까요? 인간이 피조(被造)된 존재라면 당연히 스스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목적은 창조자가 만들어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창조주를 부인하는 실제적인 주요 원인은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고 자신이 고통받는 존재임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능하지 못한 창조주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악한 존재가 자기의 수하에 있는 부하들에게 자기 편에서 저지르는 악을 상대편인 선한 창조주에게 전가하고 투사하면서 그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속이는 것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전가하고 투사하는 것은 인간의 뛰어난 본성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기 때문에 도리어 전능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고 왜곡된 세상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기를 마음대로 못하고 또한 사랑을 마음대로 포기할 줄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사랑받기는 상대방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를 마음대로 하면서 상대방을 노예나 로봇으로 조종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일까요 아니면 사랑받기를 소원하면서 마음 졸이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일까요?
피조된 인간이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본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창공으로 날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더 높이 날고 싶어서 스스로 연줄을 끊어버린 연(鳶)의 모습처럼 추락하는 실존이 되었습니다. 삶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질병의 잠복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악과 고통은 죽음이라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세상에 침투한 악에 맞서기 위하여 거짓 자아의 벽을 만들며 자신이 만든 선의 기준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배제시킴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대적하는 악의 노예가 되며 세상의 고통은 악순환적으로 가중됩니다. 베커는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 활동의 주된 동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목적은 죽음을 외면하고 극복하려는데 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류의 문명이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어왔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셔서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시는 연약함으로,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적대감을 극복시킬 뿐 아니라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를 생각함으로써 불의를 자행하는 우리를 포함하여 가해자들까지도 품어 안으심으로 세상의 폭력에 의한 악의 쇠사슬과 불순종의 저주를 깨뜨려버리시고,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갈 자격을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새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이 짧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셔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결코 인생은 짧지 않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인생은 창조주의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혹시 나는 배은망덕한 존재는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 우리와 영원히 사랑하며 살고 싶은 당신의 소원이 성취되기 때문에 –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으십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화, 그리고 참 자유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 주어집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우리의 참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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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2.03 이 글을 쓴 사람은 제 중고등학교, 그리고 의과대학 동기입니다.
학교 다닐 때 이과에서 전교 1등이었죠.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인품이 너무도 훌륭.
애창곡 1번이 한상일의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 타고... 입니다.
나이 40 넘어 재산 모두 정리하고 아프리카에 의료(?) 선교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저와는 종교는 다르지만 그리고 동창 이상의 친구는 아니지만 뭔가 우리 둘은 통하는 게 있어요.
그 친구도 저를 존중해주고, 저도 그 친구를 존중합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구도자라 그런 모양입니다.
오늘 이 글을 보면 그 친구의 성품이 많이 드러납니다.
아쉬운 것은, 크리스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
작성자연무심 작성시간 24.02.06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 어떻게 보면 참 편할 듯합니다.
교회 부흥회 따라 갔다가
저것을 믿는다고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고요~
삶이 만만하지 않고 죽음은 더 더욱~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