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것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나이다. 즉 이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 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 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잘 열반에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相應部經典] 55:1 王. 漢譯同本, [雜阿含經] 30:7 王)
상응부경전 왕 한역동본 잡아함경 왕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제자나 신자들이 그 귀의(歸依 ; 돌아 가 의지함. 붓다, 법, 승가에 자기를 맡기는 것.)를 고백하는 말이다.
이 또한 여러 아함부 경전에 나오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유행화 되었던 문구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붓다 재세시부터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 오는 '삼귀의'의 원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삼귀의라고 하면, 이 앞과 뒤에 붓다와 교단(僧)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 삼귀 의, 즉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한 귀의는 불교에서 볼 때 가장 중 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것 없이는 불교가 성립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이런 삼귀의 중의 '법'에 대한 부분이거 니와, 여기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지니는 기본적이 성격이 아주 단적으 로 표현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것을 실마리로 하여 우리는 붓다가 설하신 사상의 성격을 구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좀 머뭇거리게 된다.
그것은 여기에 나타나 있는 붓다의 가르침의 성격이 세상의 그 많은 종교의 상식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교란 내세(來世)에 관한 것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 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다.
특히 후세의 불교 중에는 얼 른 보기에 사후의 일이나 내세의 운명 같은 것에만 관심을 쏟는 듯한 종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붓다가 설한 법이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성질의것"이 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 일반의 종교적인 상식 을 떠나 새로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앞서 명심해 두어야 할 일은 붓다의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 르침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다음에 귀의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 이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출가하여 사문이 되거나,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귀의의 심정은 이를테면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하자 곧 예수 를 따라 나섰던 열 두 제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고 해야겠다.
또 후세의 정토종(淨土宗 ;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 하는 종파. 혜원(慧遠)이 창시자.)신자들처럼 그 도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대로 불지(佛智)와 본원(本願 ; 붓다가 보살 적에 중생 구제를 위해 세운 서원.)의 불가사의함을 믿으려 들었던 태도와도 다르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를 따르게된 동기는 결코 단순히 붓다의 인격적인 권위 앞에 머리를 숙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물며 보지 않고 믿는다든지, 불합리한 까닭에 믿는 다든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 전이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것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법을 보고, 법 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깨닫고, 의혹을 풀어서" 이것 아니고는 내가 갈 길이 없다고 확신함에 이르러 비로소 붓다를 따른 것이다. 즉 그들 의 귀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납득, 확신 위에 입각한 귀의였 다.
그러면 그 가르침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던가? 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열거하였다.
1)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
2)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4) 잘 열반에 인도할 수 있는 것.
5) 지혜 있는 사람이면 각기 스스로 알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