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일대사인연은 배울 수 없다 答 李參政
蒙山道明禪師가 趁盧行者하여 至大庾嶺에 奪衣鉢하니 盧公이 擲 於石上하며 曰하되 此衣는 表信인데 可力爭耶아 任公將去하라. 明이 舉之하나 不動이라 乃曰하되 我는 求法이요 非為衣鉢也라 願컨대 行者는 開示하소서. 盧公은 曰에 不思善不思惡하라 正當恁麼時에 那箇是上座 本來面目인고 明이 當時 大悟하여 通身汗流하고 泣淚作禮하며 曰하되 上來密語密意外에 還更有意旨否아.
몽산도명 선사가 노(盧, 육조 혜능)행자를 뒤좇아와 대유령(大庾嶺)에서 옷과 발우를 빼앗으려고 하자, 노공은 돌 위에 옷과 발우를 던지면서 “이 옷과 발우는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인데, 힘으로 다투어 빼앗을 수 있겠느냐. 너의 법력에 맡길 터이니 가져가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도명 선사가 옷과 발우를 들었으나 옷과 발우는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이에 도명 선사는 놀래서 “저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옷과 발우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께서는 가르침을 주옵소서”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공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상좌의 본래면목인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도명 선사는 그 말에 크게 깨달아 자기의 잘못을 알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예를 갖추어 말하기를 “위에서부터 전해 온 이 비밀한 뜻과 말씀 밖에 다시 다른 뜻이 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盧公은 曰에 我今 為汝說者는 卽非密意니라. 汝若返照 自己面目하면 密意 却在汝邊이라 我若說得이면 卽不密也니라. 以三尊宿의 三段因緣으로 較公 於一笑中의 釋然이면 優劣이 何如오. 請自斷看하라. 還更別有奇特道理麼아. 若更別有則 却似不曾釋然也이니라. 但知作佛이지 莫愁佛不解語어다. 古來 得道之士는 自己를 既充足하고 推己之餘로 應機接物이라.
노공은 “내가 지금 너를 위해 설한 것은 비밀한 뜻이 아니다. 네가 만일 너의 면목을 돌이킨다면 비밀한 뜻이 도리어 너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말 할 수 없다면 곧 이는 비밀한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분 스님의 세 가지 인연을 가지고서 그대가 한 웃음에 확 깨달아버린 내용과 견주어 본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보셔야 합니다. 여기에 다시 달리 기특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다시 달리 기특한 도리가 있다면 확 깨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이 될 것을 알 뿐이지, 부처님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득도한 선비는 공부로 먼저 자기를 꽉 채우고서 그 나머지 힘으로 중생의 마음보에 수준을 맞추어 그들을 가르칩니다.
如明鏡當臺하고 明珠在掌이며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니 非着意也라. 若着意則有實法與人矣이니라. 公이 欲大法明하여 應機無滯하려면 但且仍舊일뿐 不必問人이라. 久久하면 自點頭矣이리라. 臨行面稟之語를 請書於座右하라. 此外에 別無說이니 縱有說이라도 於公分上에 盡成剩語矣라. 葛藤이 太多일새 姑置是事하노라.
이는 마치 밝은 거울이 경대에 있고 밝은 구슬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골 사람이 오면 시골 사람이 나타나고 서울 사람이 오면 서울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별한 마음을 내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마음을 내었다면 어떤 실체가 있는 법을 다른 사람에게 준 꼴이 됩니다.
그대가 큰 법을 밝혀서 중생의 마음보에 수준을 맞추어 가르치는 방편이 막힘이 없으려면, 다만 옛 그대로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공부하다 보면 스스로 머리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그대가 떠날 때 직접 만나 이야기했던 내용을 부디 좌우명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이 밖에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설사 할 말이 있더라도 그대 형편에서는 모두 군더더기가 될 뿐입니다. 말이 너무 많았기에 우선 이쯤으로 저의 의견을 정리합니다.
☞ 번뇌가 보리이고 중생이 부처이다. 똑같은 행과 똑같은 말속에서 쓰는 마음에 따라서 중생과 부처님이 된다. 마음을 열고 사니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삶의 질은 달랐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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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보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9.10 앞 주의 마조 선사와 설봉 선사의 이야기와 연결된 세 분 스님의 이야기 입니다.
선사들의 도에 관한 이야기들은 알듯말듯한 이야기들입니다만 중생과 부처님이 따로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듯합니다.
마지막 줄 원순스님 말씀도 중생의 마음으로 행하면 중생이 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행하면 부처님이 된다로 이해합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9.20 보문님,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