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들끓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答 江給事 少明
人生一世에 百年光陰이 能有幾許오 公이 白屋起家하고 歷盡清要하니 此是世間에 第一等受福底人이라. 能知慚愧하여 回心向道하여 學出世間脫生死法하니 又 是世間에 第一等討便宜底人이라. 須是急著手脚하되 冷却面皮니라. 不得受人差排하고 自家理會本命元辰하여 教去處分明하면 便是世間出世間에 一箇了事底大丈夫也니라.
한세상 백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대가 가난한 선비였으나 집안을 일으키고 좋은 벼슬을 다 해 보았습니다. 이는 세간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살림살이가 부끄러운 줄 알고 마음을 도에 돌이켜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는 출세간의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대는 세간에서 가장 마음 편한 일을 찾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바삐 서두르되 냉정하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신의 본명원진을 알아 갈 곳이 분명해지면, 바로 세간과 출세간에서 일대사를 마친 대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承에 連日去하여 與參政으로 道話라하니 甚善甚善이로다. 此公이 歇得馳求心하여 得言語道斷 心行處滅이라 差別異路에 覰(엿볼처)見古人脚手하여 不被古人方便文字에 所羅籠(대그릇롱)니라. 山僧이 見渠如此하고 所以로 更不曾與之說一字하니 恐鈍置他이니라. 直候渠將來하여 自要與山僧說話해야 方始共渠로 眉毛廝結하여 理會在일뿐 不只恁麼면 便休라. 學道人이 若馳求心이 不歇하면 縱與之眉毛廝結하여 理會인들 何益之有리오. 正是癡狂外邊走耳니라.
편지에서 그대가 “날마다 참정을 찾아가 도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한다”니 참으로 좋고도 좋은 일입니다.
참정은 들끓는 마음을 쉬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분별이 사라진 곳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방편에서 옛 어른의 손길을 알아 그들의 방편과 글자에 얽매이지를 않습니다.
그에게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제가 보았기에 일찍이 그에게 한 글자도 설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는 잘못하여 그를 무디게 할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찾아와서 바로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때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와 머리를 맞대고 이치를 아는 데 마음을 쓸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둘 뿐입니다.
도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들끓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설사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치를 안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미치광이가 밖으로만 내달리는 격입니다.
古人이 云 親近善者는 如霧露中行이라 雖不濕衣나 時時有潤이라하니 但頻與參政으로 說話 至禱至禱하노라. 不可將古人의 垂示言教을 胡亂穿鑿이니 如馬大師가 遇讓和尚하여 說法 云하되 譬牛駕車에 車若不行이면 打車即是아 打牛即是아하니 馬師聞之하고 言下에 知歸니라. 這幾句兒言 語를 諸方에서 多少說法하여 如雷如霆 如雲如雨底인데도 理會不得하고 錯下名言하여 隨語生解니라.
공자는 “착한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금방 옷이 적셔지지 않더라도 조금씩 쉬지 않고 옷이 젖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참정과 이야기만 자주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옛 어른의 가르침을 어지러이 지나치게 파고들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마조 대사가 회양 화상을 만나 “소가 끄는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채찍으로 수레를 때려야 옳으냐 아니면 소를 후려쳐야 옳으냐”고 하는 말을 듣고서는, 마조 대사가 바로 그 말에 돌아가야 할 곳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몇 마디 말들을 곳곳에서 많이 설법하기에 그 말이 천둥치며 쏟아지는 비처럼 많은데도,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말을 잘못 놀려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見與舟峯書尾에 杜撰解注하고 山僧이 讀之하고는 不覺에 絕倒라. 可與說如來禪祖師禪底 一狀領過하여 一道行遣也이니라. 來頌을 子細看過아니 却勝得前日兩頌이나 自此로 可已之어다. 頌來頌去에 有甚了期리오. 如參政相似인데 渠豈是不會做頌이리오만은 何故로 都無一字오 乃識法者가 懼耳니라. 間或 露一毛頭하면 自然 抓著山僧痒處니라.
그대가 주봉(舟峯)에게 보낸 편지글의 뒤쪽에 달아놓은 이런 식의 억지풀이가 눈에 뜨이기에 제가 읽고서는 순간 자지러지게 놀랬습니다. 이는 여래선이나 조사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허물로서 한 길로 잘못되었다고 내팽개쳐야 할 것입니다.
보내오신 게송을 꼼꼼히 읽어보았더니 전날 보내주신 두 게송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게송을 짓기만 해서 공부를 마칠 무슨 기약이 있겠습니까. 참정과 서로 공부가 비슷한데 어찌 그가 게송 지을 줄을 모르겠습니까만, 무슨 까닭에 전혀 한 글자도 써 놓은 게 없습니까. 법을 아는 자, 법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한 터럭 끝이라도 이따금 바른 법이 드러나면 자연스레 저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입니다.
如出山相頌에 云 到處逢人驀面欺之語는 可與叢林으로 作點眼藥이라. 公이 異日自見矣일새 不必山僧註破也라. 某가 近래 見公이 頓然改變하여 為此事 甚力일새 故로 作此書하여 不覺縷縷하노라.
이참정의 출산상송에서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 금새 속이네”라고 했던 말은 총림에 주어서 눈먼 사람의 눈뜨는 약으로 쓸 만합니다. 그대가 다른 날 저절로 볼 것이기에, 제가 이리저리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즈음 그대가 갑자기 달라져서 이 일을 위하여 많은 힘을 쏟고 있기에, 편지에 이런 글들을 구구절절 저도 모르게 쓰게 된 것입니다.
☞ 진실은 행으로 나타난다. 말이 아무리 좋아도 행이 따르지 못하면 거짓이다. 진실한 행은 들끓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주
江給事: 성은 江씨 이름은 常으로서 진사에 급제했다. 복주의 師長으로 있을 때 도적들의 공격이 있었는데 인과법으로 설득하여 그들이 물러나게 하였다. 송나라 흠종 靖康元年(1126)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만든 책으로는 『外制 』와 『文集』이 있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