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공부하다 노장 공부하면
유교 시시해진다
노장 공부하다 불교 공부하면
노장이 시시해지고
불교 공부하다 화엄경 보게 되면 이게 진짜 경전이구나!
또 교학만 하다가 참선하며 조사 어록을 보게 되면 교학도 시시하다 참선해야 한다 탄허스님 말씀
교와 선의 딱 중앙에 있는 경전이 화엄
현담의 현은 탄허스님은 미리 본다는 뜻의 미리 현
그런데 사전엔 그런 말 없다
화엄경의 핵심은 불광이다
화엄경은 팔종삼매 십종방광
화엄경은 선정에 들어 빛을 발한것 그 빛을 말로 옮기니 얼마나 많겠나
화엄경 핵심은 선정에 들어 방광을 하신것
그래서 화엄경 본 다음 禪으로 넘어가는 것
선 하고 화엄이 붙어있다
그런데 방광 내용을 중생이 못알아 들으니 보현보살이 나와 문수가 나와 설주가 되어 지금 말하신 내용은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불설아미타경 같이 부처님이 설하는게 아니라 說佛經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신 내용을 설해주는 경
화엄경은 광명 설법이기에
큰스님이 불광사라 이름 지은것은 선정에 들어 여래가 출현해서 설법으로 방광을 하는것
여래출현품은 나 밖의 부처님이 출현한다는 게 아님 내안의 자성불 청정법신불이 바깥으로 출현하는 것
그래서 화엄경의 핵심은 일체중생이 모두 대심범부 큰 마음을 품고 있는 범부
화엄경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상 왜냐 불평등이 하나도 없다
화엄의 중생은 모두 불보살 부처인데 示現身衆 보살의 몸 신장님 동물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
마야부인은 등각보살
부처님을 낳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오신 분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은 성인을 낳기 위해 어머니로 와 준 것 모두 어머니로 와주신 불보살
거기엔 차별이 없다
화엄경은 범부가 범부가 아니다 화현한 것
화엄경 공부하면 이 세상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음
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이냐
화엄경 독송하면 명심하실게 끊임없이 리바이벌 된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데 그걸 지루하다는 분은 화엄경 끝까지 안 읽어 보신 분
독송하다 보면 열번 반복 안하면 나중엔 심심해서 못 읽는다
절도 일배만 하면 되지 왜 백배 천배 하냐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갑자기 그 세계에 쑥 들어가게 되기 때문
십은 완벽한 숫자 이걸 圓數 라 함 그래서 일승원교 화엄경
화엄경의 圓은 모양이 둥글다가 아니라 모양이 끊어진 것을 말함
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가 아니라
하늘은 모양이 끊어졌고 땅은 모양을 갖췄다는 뜻
언어 문자 생각과 모양이 끊어진 세계 광명의 빛만 있는 세계 선정의 세계 그래서 선정과 광명을 붙여서 적광전이라 함
선정과 광명이 여러분 근본 자리에 다 있다
여러분은 늘 선정에 들어 있다 그리고 광명이 나오고 있다
아이고 나는 번뇌 많다 그 많은 번뇌가 어디서 왔나 바로 여러분이 갖고 있는 광명의 지혜
보광명지
한생각 일어나는게 모두 광명
원각경 무변허공이 각수현관 ? 각이 드러난것
이런 보광명지를 누구나 갖고 있다는 걸 믿는게 화엄의 믿음
마하반야는 선정에서 나온다 마하반야바라밀의 지혜가 화엄경을 통해 나온다
이걸 안 다음에는 자비행 보살행 함께 하는것
화엄경을 해야 같이 간다
하나만 하면
화엄경을 제외하면 동양의 최고 가르침은 주역이라 탄허스님 말씀
지금까지 세계는 구수의 세계 십수가 없다 그런데 화엄경은 십수가 있다
그래서 앞으론 십수가 펼쳐지는 세계가 오고 화엄의 세계가 온다 그리고 십이라는 원만수가 오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이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그것이 사사무애법계 즉 너와나라는 장애가 없게 된다 모두가 부처니까.
빛은 장애가 없다 모든걸 뚫고 지나간다 선정에 들면 시공간의 장애가 없어진다 그래서 화엄 세계가 오면 무애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데 핸드폰이 화엄의 세계 아니냐 이 속에 모든게 있지 않나
이제 중생은 없다 하나만 버리면 된다 아집.
보현행원의 함께 가는 생각 그것만 있으면 모든것이 해결이 된다
발심이 얼마나 위대한가 알려주는게 화엄 발심만 하면 부처
그래서 발심만 하면 된다는게 화엄경 핵심
화엄경 구조를 청량은 7처 9회 36품 이라 함
그런데 이통현은 십처 십회 40품 굳이 십에 맞춰 놨더라구요
제가 보기엔 통현장자가 잘하신듯
탄허스님도 통현론이 더 좋다라는 이유가 있는것 같아요
왜그러냐
7처 9회는 구체적 but 십처십회는 상주설법 즉 항상 설법을 의미
그래서 이통현은 보살영락경에 화엄경문은 없고 품 이름만 있는데 불화삼매품
이걸 기어이 집어넣고 40품 그리고 여기서 설했으니 열번 그리고 장소도 십처로 맞춤
알고보면 화엄경 공부하면 다른 경전 이해가 다 잘된다 법화경과 똑같다
부채를 펼치면 화엄경
요걸 접어 요약하면 법화경
법화경은 2처3회 설법
영산회상 즉 영축산에서 일체 사람이 불성 갖고 있다
못알아 들으니 모든 사람을 허공에 붕 띄워 허공에서 설법 그게 견보탑품
화엄경은 부처님이 처음엔 보광전에서 설법 후 하늘 높은 곳까지 가셔서 설법 후 다시 땅에 내려오셔서 입법계품 설법
우리가 사는 게 부처 아님이 없다 이러면서 설해지는 게 보현행원품
가장 높고 높은 선정과 지혜를 다 갖추고 끝까지 높은 세계에 올라갔는데 결국 어디로 왔느냐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함께 사는 이땅에서 모든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 그게 보현행원품이다.
이땅에 발 붙여사는 불보살님을 공경하고 잘 모셔라 그게 보현행원품
마하반야바라밀 하며 보현행원품 기도하고 화엄경으로 확장해 나가라
그러다보면 이런걸 느껴진다
다른 경전 읽으면 이론이 복잡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읽기만 하면 된다
화엄경은 나쁜 단어가 없다 아름다운 말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열數에 맞춰놨다 그게 반복되다보니 내 속에 쑥 들어온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원만수에 맞춰 놔 가지고 계속 하다보면 갑자기 막 신심이 일어나고 갑자기 천상에 갔다가 모든 불보살님을 만났다가 막 이런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수없이 공부했던게 점검이 된다
나의 경우는 이런게 있었다. 선문염송에 천년된 땅에 주인이 팔백명이다...
다른 경전은 읽으면 막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화엄경은 편안하게 그냥 읽으면 된다
화엄경은 펼쳐 놓으니 넓죠? 내용이 많죠? 그러나 읽다보면 나중엔 넓어진다
화엄경 많이 읽은 분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것도 좋다 그것도 됐다 그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 모든 일이 다 일어날수 있는게 세상이지.
다 나의 부처님이요 다 나의 선지식이다 이렇게 된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많이 이해해도 소리 내어 읽고 외우고 독송하는 것만큼 좋은게 없다
그래서 많이 읽으십시오
알거나 모르거나 늘 화엄경을 독송하다 보니 원만수가 딱 되어서 화엄경이 빵 터지게 된다. 그다음엔 두려울게 하나도 없다. 그런 공부가 여기 있다 . 우리 화엄경 보현행원품 팬데믹을 만들어 보자.
https://youtu.be/Gzog4fPU390?si=D_WIZn_vwOl3jqvV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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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1.01 문광스님은 탄허큰스님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화엄은 선정에서 나온 말씀으로 그래서 참선으로 연결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화엄과 참선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또 다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선은 體의 문제요 화엄은 用의 문제라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박성배교수님이 젊을 때 보현행원에 빠져 방황할 때, 성철큰스님은 '너희들의 용에 빠져 있구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참선은 체의 문제일지 모르나, 화엄과 보현행원은 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화엄은 체와 용이 같이 있어요! 이걸 보셔야 합니다.
성철큰스님은 간화선으로 체를 먼저 깨쳐야 한다고 용보다 체를 강조하셨지요.
우리큰스님은 그런 말씀 안 하시고, 일반인들에게 마하반야염송을 권하셨고요.
박성배교수님은 이 두 스승님의 노선이 왜 이리 다른지 지금까지도 의문 중이심.
그 대답을 제가 드린다면,
성철큰스님은 모든 가치를 체, 즉 깨달음에 두신 분이고,
그리고 그 후에 보현행원이든 자비행이든 그렇게 나가라고 가르치신 분이고(그니까 깨침과 자비행을 선후 관계 & 둘로 보신 것),
우리 큰스님은 깨치고 말고 간에 내 생명을 부처님 자리에 두고 마하반야행, 즉 반야행원으로 나가라 하심 -
답댓글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1.01 요런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이런 얘기하면 백련사 쪽에서 아마 난리 날 겁니다.
저를 죽이려(?) 달려올지도 몰라요.
제 뜻은 그런 게 아닌데 말입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1.01 체와 용은 하납니다. 설명하자니 체상용이지, 체상용이 본래 하나에요.
그렇게 하나로 보는 게 화엄이고, 체를 먼저 알고 용을 보라, 고 하는 게 禪일 수 있어요.
물론 달마나 육조선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한 생각도 일지 않는 선인데 그게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되기도.
의상은 화엄종이지만 실천을 무척 고민하셨던 스승님입니다.
그래서 화엄을 어떻게 실천할지, 이것저것 많이 찾으셨죠.
그 중 하나가 정토법문이고, 또 하나는 동산법문, 즉 禪입니다.
지금 의상은 실천을 정토신앙에서 찾았다고 하지만, 도신, 홍인의 동산법문에도 솔깃했다고 해요.
여하튼 화엄은 둘로 보는 걸 굉장히 거부합니다. 무조건 하나!에요.
당연히 체와 용도 하납니다.
화엄경이 용에 대해 설명은 많이 하지만,
근본은 체에요.
그게 보리좌인데,
화엄은 보리좌를 떠나지 않고 시방에 두루 하시는 부처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미륵도 누각을 떠나지 않고 중생제도를 한다고 하고요.
보리좌를 떠나지 않고 시방법계에 두루 하는 게,
그게 체용이 하나임을 말하는 겁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1.01 그리고 또 하나. 화엄의 삼매는 일상이 삼매입니다. 문광스님은 법문에서 참선으로 선정을 닦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던데(화엄이 선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므로 그 선정은 참선으로 닦는다는), 물론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는 있어도 그런 말씀하신 것 같은데, 화엄의 이야기들은 닦아서 이루어진 삼매가 아니라 삼매 자체가 현실로 開現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니까 우리가 하는 생각, 일상 하나하나가 전부 삼매 그 자체인 겁니다. 선정을 닦아서 십행 십회향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십행 자체가 삼매의 나툼이에요!
이것을, 제가 알고있는 바가 맞다면, 화엄 2대 조사 지엄은 性起라고 말씀했어요. 여래성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 그게 성기입니다. 연기는 이것 저것이 연하여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성기는 여래장, 여래성이 그대로 현실로 출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기는 연기보다 상위 개념임
닦아서 삼매, 선정이 아니라 이대로가 삼매요 선정. 이게 화엄의 삼매와 선정입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삼매와 삼매 아님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마치 유위법과 무위법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한 생각 밝으면 바로 유위법이 무위법인 것처럼
한생각 밝은 현실이 바로 해인삼매 그 자체 -
답댓글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1.01 이걸 바로 일깨워주는 게 육조선이지요
그래서 화엄과 선이 서로 통하는 겁니다
언하지오 내지 언하변오!
임제선도 마찬가지.
그래서 육조선이나 임제선은 활발지지, 선 자체가 살아움직이는 겁니다.
활발하게 살아있어요.
대혜선사가 묵조선을 비난한 것도 어찌보면 이런 데 있는지 모릅니다.
묵조선도 사실 그르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바로 고뇌 이는 이 자리, 번뇌 가득한 이 몸뚱이 그 자체가 부처님 몸인 줄 모르고,
부처 자리를 따로 정해 놓고 그걸 바라보는 게 묵조선인 바,
대혜의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