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자비로 수순
끝으로 행원의 수순은 자비의 수순이다. 수순 이후의 행원품은 모두 자비 실천 이야기로 끝난다. 자비 실천이 그만큼 중요하며 자비의 완성이 바로 화엄의 완성이요 깨달음의 끝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반드시 자비심이 나와야 하고 반드시 자비행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은 사리불은 아라한이 수행의 끝인 줄 알았던 자신의 착각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라한이 끝이 아니라 중생 공양이 끝이며, 깨달음이 끝이 아니라 자비의 완성이 끝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열반경』에는 ‘아라한은 부처가 아니며 타인에 대한 자비가 있을 때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자비란 무엇인가?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일체 만물이 생명 자리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깨달음은 자비 행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혜의 완성은 자비 행으로 끝난다고 모든 부처님이 설하시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보리심을 낸 이가 어디에 마음을 머물러야 하느냐는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라는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반야바라밀은 바로 보현행이다. 관자재보살은 일체 중생을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을 통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허망하고 공함을 알아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게 된다. 생명의 본래 자리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증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지품 제6 현전지에는 “공하고 모양 없는 데 들어가면 원하는 것이 없고 오직 대비만 남는다(如是入空無相已 無有願求 唯除大悲爲首)…그리하여 대비를 일으키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이 나온다(而恒起大悲不捨衆生 卽得般若波羅蜜現前)”고 말한다. 자비에서 반야가 나오고 자비가 바로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보리는 속어중생이라, 진정한 공부는 중생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생을 떠난 공부, 깨달음은 향기도 없고 힘도 없다. 중생을 떠난 공부는 신기루 같은 것이라, 평소에 도인 행세하기는 좋아도 중생의 고난을 물리치고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힘이 없다. 어려울 때 남을 도와 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헤쳐나갈 힘이 없다. 따라서 중생의 물결 속에 사바의 물결 속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 이루어진 공부가 진짜 공부다.
학교 선생님이 참된 선생님으로 태어나는 것도 교육현장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면서이고, 고통 받는 환자, 죽어가는 환자 옆에서 밤을 지새우며 같이 아파하면서 풋내기 의대 졸업생은 진정한 한 명의 의사로 비로소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학생이 없으면 참된 스승도 없고 환자가 없으면 진정한 명의가 탄생할 수 없듯, 중생이 없으면 그 어떤 보살도 보리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중생에게 속한 것(菩提屬於衆生)’이다.
화엄경과 보현행원은 불교의 진수가 어디 있는지 또 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불교는 잡다한 이론이나 깊은 수행이 반드시 필요한 가르침은 아니다. 대신 ‘중생공양’이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중생공양은 조건이 없다. 현란한 이론(覺)으로 할 수도 있고 나의 수행(證)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런 것 없는 사람은 단지 나의 뜨거운 가슴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중생공양이다. 뜨거운 가슴-그것은 곧 ‘사랑’이다. 무연자비(無緣慈悲), 무조건적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연민이지 무슨 호흡법이나 깊은 선정, 또는 공(空), 중도연기, 유식 이런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 것은 사랑이 기반이 될 때 의미가 있지 사랑 없이 홀로 있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모든 밝은 가르침은 사랑을 말씀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엄과 보현행원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의 노래가 화엄 그리고 보현행원이다. 화엄과 보현행원을 공부한다면서 사랑이 없고 연민이 없다면 그건 화엄도 아니고 보현행원도 아니다.
화엄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보현행원을 실천하면 무엇보다 사랑이 찾아오고 내 마음에 슬픔이 솟구친다. 이 두 가지가 찾아오지 않으면 화엄과 보현행원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불교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자비가 없으면 단연코 불교가 아니다. 불교 공부의 그 엄청난 공덕과 성과도 오직 자비가 뒷받침 될 때 의미를 가진다. 자비가 있어야 보리수 즉 지혜와 깨달음의 나무에 꽃이 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화엄’이다.
자비의 눈물이 흘러야 메마른 지혜(乾慧)가 비로소 꽃을 피우는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니, 그래서 수순중생은 대비수로 보리의 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나온다(若諸菩薩 以大悲水 饒益衆生 則能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깨달음보다, 하늘을 덮는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비다. 자비가 없으면 또 자비를 잃으면 불교가 아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저절로 밝아지고, 밝아지고 나면 자비가 아니 나올래야 아니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자비의 실천에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을 ‘불쌍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상대방의 존엄성, 불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중생 부처님들을 모시는 마음이요 모시는 일이다.
**우리에게서 필요 없는 것을 하나씩 덜어낸다면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은 사랑과 연민, 즉 자비라 생각한다. 자비가 우리들의 덜어낼 수 없는 본래의 모습이요 최초, 최후의 모습이다.
*** “반야대행은 보현행원이다. 서로 존경하고 찬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공양하는 것이 바로 반야행이다” (광덕, 『메아리 없는 골짜기』, 불광출판사, 1994,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