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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03 월호스님은 佛行을 하라고 설하시지만 무엇이 부처님 행인 줄 모르시는 듯.
보현행원을 말씀해도 보현행원 자체가 부처님 행인 줄 또 모르시는 듯.
그저 윤리 도덕 생활 규범으로 보현행원을 아시는 건 아닌지.
그렇지 않으면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권하고 부처님 행을 하라고 하시고 당신의 도량도 행불선원이라 이름짓고도 보현행원 강의가 없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반야와 화엄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화엄을 공부하고 반야를 공부하고 보현행원을 공부한 분들은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 큰스님은 화엄을 제대로 공부하신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반야만 깊이 들어가신 것 같은데,
어떻게 보현행원을 그렇게 구구절절 반야와 연관을 지으셨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03 공부가 정말 깊어지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집니다.
삶의 실상을 정말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고 공부가 그저 그럴 때는 만면에 미소가 넘쳐납니다.
이렇게 기쁜 가르침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런 걸 알면 세상 모두를 구제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자꾸 공부하다 보면 그런 게 아닙니다.
성철스님도 보세요. 세월이 갈수록 얼굴이 굳어져 가십니다.
원래 호랑이같은 스승님이시지만 공부가 익어질 때 자비의 빛으로 환하게 변해 가셨는데 말입니다. -
작성자 법혜 작성시간23.11.03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갸웃거려지는것이 연화장세계나 극락정토나 아미타부처님이나 비로자나 부처님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것 아닌지요?
보현행원을 조금이라도 해 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보현행원은 홧병(?)나거나 자괴감 느끼기 딱 좋은 수행법입니다. ㅎㅎ
화두참선을 하다가 상기병 오른다고 하지만 보현행원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현선생님께선 늘 이보다 쉽고 간단한 건 없다고 하시지만...보현행원, 참 쉽지 않습니다.
가족에게나 일상의 작은 행동에선 쉬울지 몰라도 강적(?)을 만나면 정말 힘들고 어려워요. 이럴바엔 차라리 염불, 절, 참선 수행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쉽지 않기때문에 보현행원품에선 아이보현행원력고...라는 표현까지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보현선생님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미타불의 위신력까지 빌려야 하는 거라면 말 다한거지요, 뭐. -
답댓글 작성자 법혜 작성시간23.11.0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현행원을 해야하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깨닫고 말고, 쉽고 어렵고, 지금 하고 나중에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일겁니다.
콩 심은데 콩나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는 것 처럼요.
제게 보현행원이 힘들다는 것은 아직 번뇌도 많고, 나에 대한 집착이 커서일겁니다. 나 없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보현행원인데 그게 잘 안되니 어려울 수밖에요.
그럴땐 또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그 수행조차도 사실 지난한 수행을 닦아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고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짓고 지어서 또 방망이 한대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잘 닦아서 다시 보현행원의 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생명의 숙명같은 것 아닐까..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보현 선생님 연세도 드시고, 눈도 침침해져서 글 쓰기 힘드실텐데 이렇게 장문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저도 요즘 글 쓰기가 힘든데 이 정도 글을 쓰시려면 얼마나 힘드실까요?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답댓글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03 당시 시대 상황은 각 종파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라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또 지엄의 공부 경지가 아직 원숙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아는 화엄종은 지엄이나 현수 법장 시대에 완성되어 고정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징관과 종밀 시대까지는 수정 보완이 이루어진 것이 지금 보는 화엄종이지요.
화엄은 둘이 아님과 무념 무분별을 지극히 강조하는 가르침이지만 화엄종 사람들이 이 부분에 눈을 뜬 건 같지 않아요. 저의 착각인지 오만인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마지막 귀절은 우리가 과거 큰스님들을 볼 때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우상화라 할까, 그런 걸 경계하는 말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실지로 요즘 제가 다시 옛스님들 사상을 리뷰를 하고 있는데, 생각 외로 공부 경계가 문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우리는 스승님들은 지금 시대와 달리 공부가 완벽했을거다, 라는 착각을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지 몰라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11.04 극락정토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합니다.
중국 정통 정토종의 입장에서 정토는 최후처입니다. 즉, 성불하는 자리지요.
정토에 왕생하면 거기서 성불하는 개념이죠.
반면 정토종 아닌 분들 입장에서 정토는 성불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입니다.
즉 정토에 가더라도 바로 성불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닦고 용기를 내고 좋은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거지요.
보현행원품의 제 중생의 극락왕생은 후자의 의미가 짙습니다.
고해 중생을 일단 고해에서 건져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거지요.
따라서 이런 화엄의 극락왕생 입장을 극락정토가 더 낫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인용한다면 그건 아전인수 견강부회 꼴일 겁니다.